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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59화 (59/102)

00059 Bridge 3. Shachar Menderope : 푸른 새벽 =========================

라니아가 새벽녘 꽃처럼 웃었다. 어슴푸레한 하늘을 배경으로 수줍게 소리내어서. 그는 별안간 절벽 끝에 선 것처럼 아찔해졌다.

처음 목도한 종류의 말간 웃음이었다.

"진짜, 와. 어떻게 이렇게까지 너무할 수가 있지......"

건네는 말에 멍청하게 대꾸하다가 겉돌고.

"아니, 미안하다고 몇 번 말해야 해요? 나도 나름 좋은 의도로 시도한 거......"

생전 처음 짓는 생소한 표정으로, 생전 처음 발견한 별빛 하나를 하늘에 띄우고.

"뭐야. 그렇게 분해요?"

"하여간 못 말린다. 화 안 났으니까 긴장 풀어, 동업자."

행여나 들켰을까 마음 졸였다가. "기뻐서." 살짝 내비친, 검증을 거치지 않은 감정과.

"나 집 없어. 가출했다고."

핑계를 양산 삼아, 겁도 없이 태양 앞에서 입에 담은.

"그냥 잠깐만, 저 해 다 질 때까지만. 같이 있어주라."

진심.

그리하여 노을 지는 정원의 풀내음 속에서, 르쉬네의 초상화를 받아든 라니아는 마침내 울었다. 샤카르는 라니아의 울음을 그 날 처음 보았다. 그냥 곁만 지키기에는 너무 안쓰러워서, 살며시 안아 위로했다. 그 예전 라니아가 그랬던 것처럼. 품 안이 봄날 오후의 볕처럼 따스했다. 소중한 나머지 놓쳐 버릴까 두려웠다.

"어쩜 오 년 가까이 만나도 볼 때마다 새로워, 너는. 어쩌려고 이래."

대체 어쩌려고. 원망하듯 투정부렸다.

샤카르는 문득 함께 울고 싶어졌다. 심장이 저릿했다. 청각이 무뎌졌고, 이어서 시야가 흐려졌고, 숨이 멈추었다. 여름의 폭설처럼 고요하게 매몰된 공간에는 그와 라니아만이 있었다.

그 때 알았다. 아주 확실하게 알아버렸다.

"우는 데도 자격 운운하다가는 세상 모든 인간들이 무감정해질 거다."

그의 비밀 정원에 최초로 장미 한 송이가 피었다. 온화한 계절에 견디지 못해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울어."

너도, 나도. 편하게 울자.

노을이 태양을 삼키고 느릿하게 저물어간다.

샤카르는 뻐근한 통증을 삼키듯 사근히 미소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 어떤 말로도 감히 설명하지 못해, 여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그 벅찬 감정이란.

새벽녘 안개처럼 모호하고, 손가락에 얽혀드는 바람처럼 다정하고, 완연한 밤의 천공처럼 아득하다. 칼날처럼 무자비하고, 비극처럼 아릿하고, 소망처럼 상냥하다.

꽃잎에 파묻힌 양 상큼한 향기가 공기 중을 맴돌았다. 그래서 샤카르는 라니아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것 같다, 향기. 그 공작 말고, 너한테서."

계단 아래에서 밝은 빛을 정면으로 받고 선 라니아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샤카르는 새어나오려는 미소를 숨기려 애썼다.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 마주앉아, 아이스크림과 과일 푸딩을 시키고 대화를 나누었다. 낮 시간의 나른한 분위기가 이불마냥 푸근했다. 라니아도 살짝 긴장이 풀린 눈치였다. 샤카르는 심각한 이야기와 시답잖은 일상 이야기를 적절히 섞어가며 시간을 이끌었다.

도중에, 그는 어느 순간 돌연 현실감 없는 표정이 된 라니아를 발견했다. 이런 모습을 처음 목격한 척했지만, 사실 익숙했다. 1057년에는 줄곧 저 얼굴이었으니까.

상념을 깨우려 내놓은 말을 라니아는 부정했다. 샤카르는 대략 두 갈래로 나누어 추론했다. 에단이라는 이름 때문에 예전 추억을 떠올려 현실에서 잠시 붕 떴거나, 아니면 어느 것이 진정 현실일지 고민하며 이 시대를 인정하지 못했을 거라고.

힌트가 있다면 못 내다볼 미래는 없다. 받아들이느냐, 허상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느냐가 문제일 뿐.

***

때로는 모르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한 정보도 있다. 정보상 일을 오래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샤카르는 작년 초겨울에 그것을 다시금 절실히 깨달았고, 오늘에 이르러 복습했다.

'멘데로프 영식께서는 에온에서 사셨다 했었던가요.'

만나기로 약속한 라니아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시안과 만나 시간을 때웠던 그 때. 샤카르는 썩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습니다만.'

'그 곳 바람은 여전히 시원합니까?'

여전히? 에온을 가본 적이 없는 건 아니군. 그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유심히 곱씹었다. 요새 들어 자꾸 라니아 주변을 맴도는 것이 영 수상쩍었던 탓이다. 아니, 그냥 생겨먹은 것 자체가 묘했다. 존재감이 없는 듯, 거대한 듯 도무지 모르겠는 사람이 공작씩이나 된다니. 게다가 한때 강성했던 가문이 그의 대에서 모조리 끝장나고 본인만이 혼자 남았다.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적어도 제가 있을 때까지는 그랬죠.'

'그렇군요.'

시안은 조금 있다가 또 다른 것도 질문했다.

'애국심이 투철하신 편이십니까?'

'......글쎄요. 다소 갑작스런 질문이라,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아. 제가 너무 성급했나 봅니다. 별 것 아닌 물음이니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괜찮습니다. 뭐, 굳이 답변드리자면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쪽이 더 옳을 겁니다. 아마도.'

'혹 그리 정하게 된 사정이 있으십니까?'

'딱히 거창한 건 아니지만, 이 나라가 혜택보다는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아 불만입니다. 그렇다고 혐오하는 것까진 아니고요.'

'하나 더 묻지요. 영식과 비슷한 사정을 가진 이들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건 확답드리기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신이라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궤뚫어 볼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럼 지인 중에는요?'

'......마찬가지로 제가 알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거짓말이다. 사실 거의 확실한 사람이 곧바로 한 명 떠올랐다.

라니아.

샤카르는 불안했다. 실마리 던지기와 속내 떠보기를 동시에 당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통계적으로 그의 직감은 꽤 정확한 편이었다.

그 와중에 어쩌다 보니 디저트만 유명한 줄 알았던 그 가게에서의 저녁 식사를 시안과 합석하게 되었다. 망국 시힐레의 왕족이고, 할레시온에게 납작 엎드려 귀족 작위를 보장받은 카르텔리 후작가의 엘피샤도 함께였다. 두 사람은 서로 잘 아는 사이로 보였다.

맛은 좀 떨어지겠지만 라니아의 편의를 위해 스테이크를 잘라 주고, 도란도란 오가는 대화에서 한 발 떨어져 관망했다. 유독 귀에 꽂히는 몇몇 단어나 뉘앙스에 집중하면서.

처음 말을 나눈 사월 이후로 시안과 샤카르는 가끔 마주쳤다. 그러므로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은 아니다. 시안이 발언 하나하나에 미끼를 던지는 것도 처음이 아니다. 대체 뭐하는 짓인지 알아내려고 엘피샤와 사귀냐는 질문으로 대화 흐름을 확 끊어보기까지 했으나 또다른 힌트만 얻었다. 리데르흐 히엘로 공작은 꼭 연못 속의 잉어에게 빵가루를 던져주는 사람 같았다.

샤카르는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은 틈을 타 열심히 스테이크를 씹으며 머리를 굴렸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수사가 장기화되거나 흐지부지 종결된 일련의 사건들. 라니아를 비롯한 지인에게 건너들은 단편적인 정보 조각과, 자신이 접한 수상한 문구들. 이해가지 않았던 줄거리.

그리고, 일전에 황궁에서 우연히-정말 우연인지는 확실치 않다- 만난 시안에게 받은 황실 비사록. 에온의 왕세자에게 황제가 독살당할 뻔했다고 말하는 비사록과, 이를 반박하며 왕세자를 옹호하는 시안. 샤카르는 많은 의문점 중에서도 그것에 가장 주목했다.

'비사록에 따르면 왕세자는 공기중으로 퍼지는 독을 사용해 황제를 독살하려 했다지요.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망국 직후 붙잡혀 그대로 할레시온으로 호송되어 온 왕세자가 그러한 독을 구할 수나 있었을까요. 설사 구했다고 해도, 독을 뿌렸다면 그 자리에서 왕세자까지 중독됐어야 합니다. 하지만 굳이 비사록을 보지 않아도 왕세자가 멀쩡하게 처형장으로 걸어나와 기사의 칼날에 베여 죽었다는 사실은 모두 알지요.'

'제게 다짜고짜 타국의 왕세자를 두둔하는 이유가 뭡니까?'

'저는 영식께 진실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저와 하등 상관 없는 진실 말이죠.'

'진실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경로로 접근이 가능합니다. 진실을 통해 새로운 진실에 당도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요.'

시안은 청초하게 미소했다. 그 순간에 샤카르는 그저 인상을 찌푸렸다.

'답답하게 빙빙 돌려 말씀하시는 거 혹시 취미입니까?'

'거침없는 성격을 지니신 것은 압니다만, 웬만하면 관용을 베풀어 주세요.'

'......본론으로 돌아가죠. 그래서 그 진실이란 건 이 책으로 접근하라는 뜻입니까?'

'경로가 더 필요하시다면, 당시 황제를 치료했던 의사의 제자를 찾아가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 자는 치료 현장에 없었지만,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몇 가지 정보를 들었습니다.'

'굳이 제가 찾아가야 합니까? 어차피 공작께서 들은 것와 같은 말을 듣게 될 텐데. 그냥 지금 공작께서 대신 말씀해주시죠.'

'맹점을 바로 찾으시다니. 정보상을 보유하고 계신다는 게 사실이었군요. 그 의사는, 황제를 노린 독이 기체나 가루가 아닌 액체였을 것이라 추측했다고 합니다. 예상 투입 경로는 황제가 마시던 차.'

그 말을 듣자 따로 캐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당시의 주변인이나 목격자 대부분이 현장에서 즉사한 자를 제외하고 원인 불명의 살해, 자살, 병사로 세상에서 차근히 지워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의사의 제자만 정보를 접한 직후 개인 사정상 따로 떨어져 나와 다른 지역으로 갔기에 운좋게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의 현 소재지를 찾아 헤맸으나 행적이 묘연했다.

샤카르는 여기서부터 시안의 의도를 찾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 시안은 황실 비사록과 에온의 왕세자에게 왜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에둘러 언급한 이면의 진실이란 무엇인가? 어째서 시안은 하필 자신에게 접근해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를 던지는가?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답안의 범위를 대강 좁힐 수 있었다. 더 조사해야 할, 시안조차 예상 밖일 새로운 가정들도 생겼다. 심연을 들여다보듯 선뜩해진 그는 수많은 질문을 삼키며 시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다들 일주일 후에 열리는 사냥 대회에 참석하시나요?"

식사를 마치고 나가며 라니아가 물었다. 제각각 대답을 했다. 시안이 말미에 덧붙였다.

"그렇다면 곧 다시 이 인원이 한 자리에 모이겠군요."

하필이면 자신을 쳐다보면서 말하는 꼴에, 샤카르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

삼 일간의 사냥 축제는 순전히 귀족들의 유희를 위한 행사다. 정치적인 목적이 끼어들지 않으니, 샤카르는 이만하면 즐길 만하다고 생각했다. 재미를 위해 검술 대회 신청을 넣었지만 전날 밤을 새고 늦잠을 자느라 가지 못했기에, 활쏘기 연습만큼은 빠지지 않기로 했다.

일찍 도착했지만 황태손과 라니아가 또 마주친 것 같아 공동 연습장은 그냥 지나치고 개별 연습장을 배정받아 느긋하게 걸어 들어갔다. 산의 초입에 위치한 곳이라 한적하고 시원했다. 샤카르는 한동안 연습을 좀 하나 싶더니 금세 벤치에 누워 자기 시작했다. 여유가 절실했던 탓이다.

잠이 막 깰 즈음 라니아가 도착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서서 활을 쐈다. 라니아의 활 솜씨는 대단했다.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다. 집중력을 쥐고 흔들 어떤 외부적 요인만 치워준다면 빗맞출 이유가 없을 거다.

어느 순간 정석적인 자세가 샤카르의 눈에 익숙한 자세로 바뀌었다. 북부 국가인 블로텔지아, 또는 엘비올리스에서 자주 쓰이는 자세다. 샤카르는 불현듯 벤을 떠올렸다. 그는 할레시온의 궁술과 블로텔지아의 궁술을 모두 가르쳐주었다. 그럼 라니아는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예전에 들었던 그 '로제 카나이클'이라는 마법학자겠지, 아마.

라니아가 막상 자세를 취해놓고는 약간 어색해하길래 제대로 고쳐주었다.

"팔을 조금 더 이렇게 뻗어야 돼. 그렇지, 좋아."

바람이 불었다.

급작스럽게.

라니아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장미처럼 따듯한 향기가 가까웠다. 원한다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을 수 있을 만큼, 지척에 그녀가 있었다.

라니아가 고의로 활을 떨어뜨렸다.

주변이 물에 번진 수채화 물감처럼 온통 흐려졌다. 오직 그 자신과 라니아만이 날선 감각 안에 들어왔다. 시원한 공기가 그들을 휘감고 지나갔다. 꿈 속에 잠긴 것인지 현실감이 말끔히 죽었다.

예고 없이, 황홀한 꿈결에 휩쓸렸다. 샤카르는 더없이 놀랐다.

태양빛을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풍성하게 흘러내렸다. 얇은 손가락이 느릿하고 우아하게 그의 볼가를 감쌌다. 석양 질 무렵의 태양 같은 눈을 멍하니 깜박인다. 무자각중에 벌인 일이리라. 수백 수천의 모호한 감정을 담은 시선이 마주 얽혔다.

한낱 충동 어린 순간이라기엔 너무도 달콤했다. 꼭 솜사탕을 입에 가득 넣은 것 같았다. 혀 끝이 아렸다. 심장이 저몄다.

예정된 무언가를 향해 스스로 발을 내딛고, 한시적인 만족을 예견하기는 했으나 설마 이럴 줄은. 또다시 미래를 내다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 진정한 세계란 모름지기 이래야지. 늪에 잠기며, 샤카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깊은 곳에서 울며 웃었다.

길 잃은 새처럼 불안해서, 해일 앞의 사람처럼 두려워서, 너의 사랑스러움에 견디지 못해서 그만.

허공을 타고 숨결이 섞였다. 눈길도 섞였다. 그는 되돌려주듯 라니아의 볼 한 쪽을 손으로 조심스레 덮었다. 보드라웠다. 미소가 자신의 입가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을 느꼈다. 입술이 붉었으나 대신 복숭아빛 뺨에 입맞추었다. 눈 감은 그녀 뒤에서 나비 한 마리가 팔랑 날아올랐다. 그도 눈길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어쩌면 이렇게 비극은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르지. 샤카르는 최근 들어 자꾸만 울고 싶었다.

축제 첫 날. 별이 쏟아지고 모닥불이 타오르는 그곳에서, 카리스티아 이후 처음으로 라니아와 춤을 추었다. 깊고 서늘한 밤의, 들뜬 동시에 잔잔한 분위기에 녹아 격식 없이 자유롭게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즐거움은 눈에 침식당한 봄날과 같이 위태로웠다. 샤카르는 라니아에게 가기 직전의 대화를 찬찬히 되짚어 정리했다.

'정답을 구하셨군요.'

어둠 속에서 그 자는 유려하고도 은밀하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 먼저 저를 찾아오기를 원했습니다. 제안을 제 쪽에서 건넸다가 거절당하기라도 한다면 정보가 새어나갈 우려가 있으니까요.'

'왜 나입니까?'

'지켜보기에 아직 그 분은 마땅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 듯 하더군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그 분의 어떤 중요한 결정에 힘을 크게 실어줄 수 있다 판단했습니다. 제가 틀렸나요?'

'......반박은 않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빠를수록 좋습니다. 다만 올해가 지나면 제가 영식의 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샤카르는 길게 시간을 끌지 않고 펼쳐놓은 것을 갈무리했다. 괜히 표정에 다 티날 만큼 심란해질까 봐.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라니아는 춤을 추는 도중에 그의 가출에 대해 질문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시원스레 대답했다.

"아버지는 내 자유를 일정선까지 허락해 주셨지. 몇 년이고 싸워서 내가 이겼거든."

정확히는 허락이 아니라 포기지만, 그게 그거다. 샤카르는 멋대로 단정지었다.

그가 수도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상으로 편지가 도착했다. 가주의 권한을 그에게 일부 일임한다는 공문서가 포함된 백작의 전언이었다. 백작은 이왕 수도로 갔으니 거기서 사교 활동이나 정치를 하라는 뜻을 내비쳤다. 이제껏 멘데로프의 이름 없이 제한적인 활동만 했던 그로서는 호재였다.

"해방 축하해요."

"고맙다, 하하."

은하수가 환상처럼 반짝였다. 머리 위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이루었다. 여름 기운이 찬란했다. 세상이 돌연 어여쁘게 다가왔다. 가쁜 숨과 경쾌한 움직임이 지상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라니아는 춤곡이 마지막으로 치닫을 무렵 감상평을 툭 뱉었다.

"별이 많네요."

그래, 별이 많았다. 별이 많아 네 모습이 밝게 빛나는가 보다.

"그러게."

그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며 잔잔히 대꾸했다. 후일 이 깨끗한 밤하늘이 저리도록 그리워질 것 같았다.

덤불과 흙으로 만든 미로 정원을 거닐며, 샤카르는 귀족들이 검술을 겨루던 어제를 떠올렸다. 흙먼지와 함성, 가끔 가다 핏물까지 등장하는 대회인지라 샤카르는 라니아의 참석을 만류하려 했다. 그녀가 괜찮다고 했으니 그저 옆을 지켰지만.

대회의 우승자는 모략과 연합, 배신과 일격이 뒤엉킨 격전 끝에 결정되었다. 에단 르웰린이었다. 몇 번 검을 맞부딪쳐 본 전적이 있는 샤카르로서는 놀랍지 않은 결과다. 그의 실력은 훌륭했다.

그 날 라니아 곁에 있던 자신과, 로엔세르 쌍둥이, 시안, 엘피샤, 그리고 다른 귀족들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지나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전혀 연관이 없었던 사람들이 어쩌다 보니 안면을 텄다. 라니아 곁에 새로운 인연이 모여들었으니 몇몇을 빼곤 환영할 일이다.

별빛이 바람에 부서졌다. 숨을 크게 내쉬었다. 공기가 퍽 시원하다. 샤카르는 공연히 길에 놓인 등불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미로 속 단 하나의 답을 찾아 헤멨다.

편지로써 미리 고지된 라니아의 퇴장 시각을 아슬아슬하게 남겨두고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찾았다."

금빛 새 브로치가 은은한 조명 아래 반짝였다. 화려한 장식의 가면 뒤로 감춰진 눈이 어둑한 길 탓에 어렴풋이 보였다.

'나도 고맙다고.'

'그러니까 뭐가요?'

'뭐든지.'

그렇게 불친절하게 말해버리곤 놓지 않았던 손의 온기가, 감촉이 아직까지 선명하다.

'너는 처음부터 내 이름을 그냥 막 불렀잖아. 우리 좀 공평해지자. 응?'

답답해 내놓은 투정이 금세 후회되었으나.

'......그래요. 이참에 공평해지죠, 우리. 앞으로는 서로 이름으로 불러요.'

그 말을 듣자 번복하고픈 마음은 싹 사라졌었다.

'그래, 라니아.'

이제는 대공녀도, 동업자도, 에빌도 아닌 라니아로 불러야지. 오직 그녀만의 이름이어야 하니까, 세상이 뒤집혀도 잊지 않게끔.

샤카르는 생각을 접으며 싱긋이 웃었다.

"샤카르예요?"

"어, 맞아."

나지막이 울리는 목소리.

"멀리서 왔네요."

"멀리 왔지."

손 뻗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표정. 속내.

그 끝에 미약한 소망이 있었다.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짙푸른 호수에 잠겨들었고, 가라앉아갔다. 그 깊이를 모른 채.

사랑은 귓가에 비밀스런 마법처럼 소근거렸다.

나의 인과를 알아내려 들지 말라. 나의 의미를 들추려 하지 말라. 나의 행방을 엿보려 들지 말라. 하여 그대가 온전히 나의 바다로 추락하도록.

"샤카르. 당신에게 나는 뭐예요?"

일단 확실하게, 소중한 사람. 사랑스런 사람. 그는 속으로 읇조렸다.

"나에게 당신은 또 뭘까요?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왜 더 많이 내보이지 못했을까. 결국에는 들키고야 말 감정인 것을.

"글쎄. 사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왜 아직도 쉼표만 청할까. 언젠가는 후회하고야 말 거면서.

"하지만 열심히 찾는 중이야. 네가 요즘 그러는 것처럼."

그래도 이게 가장 안전하잖아. 샤카르는 변명처럼 단정지었다.

"먼저 한 가지만 제안할까."

이 비밀이 모조리 매몰되기 전에. 표식처럼 남겨두고 싶었다.

"우린 이제 동업자 아닌 걸로 하자.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으니까."

동업자 아닌 무언가가 친구든, 연인이든, 그도 아닌 무엇이든 상관은 없었다. 그는 언제나 라니아에 관한 것에 초연했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밤기운이 짙었다. 이대로 취하고 싶었다.

"그래요."

6월 22일에서 23일로 넘어가는 여름의 궤적 한복판에서, 그는 이윽고 인정하고야 말았다.

태양 같은 사람이 그에게 손짓했다. 샤카르 멘데로프는 더 이상 불길로 뛰어드는 나방을 비웃을 수 없었다.

***

속절없이 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뱉어내듯 목소리를 짜냈다.

"사랑해."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사랑한다."

============================ 작품 후기 ============================

푸른 새벽, 7편. 예약아이템으로 올립니다. 이것으로 샤카르 외전은 끝입니다. 단어 표현에 신중을 기해봤는데 괜찮나요? :)

+다음 편은 2장 : 여름의 마지막 편인 아이린 외전입니다. 아이린 외전 편의 후기에는 3장 이후의 내용을 예고하는 글귀가 짤막하게 들어갑니다. 3장부터는 스토리상 변수도 많고 약간 취향 탈 수도 있는 분위기와 줄거리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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