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0 Bridge 4. Irene Aneas : 새장을 잃은 새는 =========================
새는 새장의 주인이었다. 누가 그 새장을 완성해 주었는지는 상관 않고.
하여 새장을 잃은 새는 이제 새장의 주인도, 그 자신의 주인도 될 수가 없었다.
《Bridge 4. Irene Aneas : 새장을 잃은 새는》
소설 '꽃물 든 하늘'의 등장인물은 크게 주인공 진영과 악역 진영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뉜다. 주인공 진영은 여주인공 아이린 세이잔, 남주인공 라인하르트 엔리케 할레시온이 대표한다. 그리고 두 서브 남주인공 프리드리히 스카일러, 에단 르웰린이 이야기 진행 공백을 채우고 로맨스적 긴장감을 형성한다. 악역 진영은 최종 악역인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이 주축을 맡고, 조력자로 샤카르 멘데로프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이 등장한다. 악역은 이야기 전체를 휘어잡으며 주인공들을 시시각각 위협한다. 결국에는 줄거리에 순응해 덧없이 스러져 썩어갈 테지만.
'꽃물 든 하늘' 속의 아이린 세이잔은 여주인공치고는 순탄치 않은 인생을 배정받았다. 악녀 라니아에 의해 가족을 잃고, 에네아스 백작가로 가 수도 사교계에 입성하며 그 시대 최대의 소용돌이에 갇히게 되니 말이다. 그럼에도 아이린은 결말이 된 마지막 문장에서 끝내 악인들을 물리치고 황태손과의 결혼식을 올린다. 여주인공을 위해 설계된 세계가 그녀를 배신할 리 없기 때문이다. 기실 아이린이 얼마나 명석하느냐보다는 세계가 주인공에게 얼마나 관대하냐에 따라 끝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에서 설정된 아이린의 능력치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딱히 문제는 없었다. 운 좋게도 비교적 해결이 쉬운 세계를 만났으니까.
세 명의 남주인공 후보는 물심양면으로 아이린을 지원했고, 몇 명의 악역은 때때로 아이린의 안전에 칼을 들이밀어 남주인공들이 그녀를 지키고 연애감정을 키우도록 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으로써 행복한 결말을 맺고, 숨겨진 문장으로써 전부의 파멸을 예고했던 그 이야기는 깨졌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 떨어져나갔는지는 모른 채로.
파드득 날아오르던 새가 별안간 총에 맞아 곤두박질치듯, 세계가 뒤집어졌다.
"너는 그렇게 행복해야만 했나?"
서로가 서로에게 질문하며.
아이린의 세상에 윤이설이 난입했다. 시간선을 마구 뜯어내고 사건을 제멋대로 바꿨다. 뒤죽박죽으로 섞이고 찢어진 트럼프 카드처럼, '꽃물 든 하늘'은 그 자신의 이름과 가치를 잃었다.
운명이 무너지고 하늘이 새파랗게 뚫려, 새로운 빛이 쏟아내렸다. 첫 번째가 아닌 '라니아'는 이윽고 나타나 아이린의 주인공 자격을 박탈했다.
본래, 분홍빛 꽃잎이 보드랍게 깔린 길 끝에 자리잡은 세이잔 저택에는 온유한 그림자가 항상 은은히 번졌다. 이리저리 오가며 처신하고, 캐내고, 귀를 열되 입을 열지 않으며 몸을 불려온 세이잔 자작가는 달 뒤로 숨은 채 박쥐 울음소리만을 내는 탐색꾼 집안으로 유명했다. 선대 자작의 첫째 딸인 세이잔 자작은 타고난 처세의 명수였고, 남편인 자작 부군은 발이 넓었다. 부부는 수 년만에 가문을 등나무 줄기처럼 어지러이 얽힌 인맥 속으로 밀어넣었고, 여러 웅덩이에 뿌리를 담그며 줄기가 통째로 베어나가지 않도록 했다.
그 가문의 막내로 태어난 아이린 세이잔에게는 두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저 착실하고 화사하게 하루를 보내면 되었다. 봄꽃이 이슬과 더불어 피어나면 꽃놀이를 가고, 여름비가 땅을 식히며 내리면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빗소리를 음악 삼고, 가을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면 두 팔 가득 주워담아 머리 위에 뿌리며 웃고, 겨울이 하얗게 뒤덮이면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다. 같은 지방에 사는 영애들과 자주 티타임이나 파티를 가졌고, 그 지방 사교계의 왕으로 군림했다.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이 피와 눈물로 젖은 처절한 1057년을 보내고 있을 때, 열세 살의 아이린 세이잔은 말이 많고 소식에 밝은 하녀에게서 수도의 파란을 전해들으며 맑은 녹차를 호호 불어 마셨다.
"수도는 역시 무서운 곳이구나."
딱 한 문장으로 감상을 요약한 아이린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차향을 음미했다.
그 때는 아직 소설의 비호가 건재할 무렵이었다.
4년이 지나서야 어렴풋하게 전해듣기만 했던 불행이란 것에 처음 빠진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울부짖었다. 거대하게 치솟는 불기둥에 휩싸여 까맣게 불타는 고즈넉한 세이잔 저택이 눈앞에 있었다. 빨간 화염이 무섭게 춤을 췄다. 소박하게 예뻤던 지난날이 모조리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언니 이리스 세이잔이 수도에서 열리는 카리스티아 대연회에 참석했다가 한참 신분이 높은 대공녀 라니아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고 상해까지 입혔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대공녀는 주변의 다른 피해자들이 합심해 이리스를 사회에서 매장시킬 재판을 준비하는 동안 한 발 앞서 저택을 방화했다. 아무것도 대비가 되지 않은 채 혼자 남아 우왕좌왕하던 아이린에게 찾아온 먼 친척 이나르 에네아스가 그리 말해주었다. 절벽 끄트머리까지 몰린 사람이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생명줄처럼 절박하게 붙잡고 놓을 수 없듯, 아이린은 얼마 후에 입양 절차를 통해 양오빠가 된 이나르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유리한 고지는 선점했으나 두뇌의 명석함까지 가지지는 못한 아이린 세이잔, 아니 아이린 에네아스는 자신의 행로를 알지 못했다. 애초에 어디서 어떻게 이용당하고, 무엇으로 스스로를 찌르게 될지 예상해 볼 여유도 없었다.
"에빌 대공녀에게 복수를 하고 싶지, 아이린?"
이나르 에네아스가 진득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불타고 난 저택에서 발견한 가짜 증거품을 보여주며.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모른 채 아이린은 멍하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복수를 하고 싶어요. 오라버니, 저는 저를 앗아간 그 자에게 똑같은 지옥을 선물해주고 싶어요."
그녀는 마침내 텅 빈 눈을 하고 해사하게 입가를 당겼다.
그해 겨울이 가기 전, 라니아를 범인으로 몰아넣었다. 황태손이 방해를 하며 라니아를 두둔했고, 아이린은 그가 증거를 인멸한다며 비난했다. 그러나 다른 범인이 지목되어 일은 틀어졌다. 이나르는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 실망치 말라며 아이린을 다독였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062년의 이른 봄. 아이린은 에네아스 저택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있던 때 우연히 만나 친해진 에단 르웰린의 도움을 받으며 수도 사교계에 입성했다. 온순한 말씨와 표정, 비련의 주인공다운 처연함이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귀족들은 그녀를 동정하며 거부감 없이 다가왔다.
프리드리히 스카일러 또한 그 기간에 아이린을 대면했다. 그는 아이린에게 일부러 친절하게 대해 호감과 신뢰를 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훌륭한 패로 이용해먹었다. 한 예로, 프리드리히의 지시를 거쳐 아이린의 입에서 나온 말 한 마디는 뒷말로 도는 악소문을 몰래 생성해 영식 하나를 사교계에서 추방시켰다.
저열하고 치밀한 전략가인 프리드리히에게 조종당하고, 에단에게 에스코트를 받고, 이나르 에네아스와 백작가를 등에 업은 아이린은 선전했다. 거물이 널린 수도에서 아주 눈에 띄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무시받지는 않을 정도였다. 그녀를 배려한 귀족들은 아이린과 라니아가 한 석상에 동시에 참석하는 일이 없게끔 했고, 때문에 벚꽃이 질 무렵까지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대신 아이린은 마지막으로 황태손을 만났다. 에단에 이어 또 우연한 만남이었다. 왠지 억지로 이어 붙이다 만듯 부자연스러웠다. 아이린의 새장은 그 시점부터 이미 상당 부분 깨져나간 상태였던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기본적인 사고는 가능한 아이린은 황태손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둘도 없는 조커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황태손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프리드리히가 그녀를 이용하려 그러했듯이. 얼추 친분을 쌓고 난 후에, 황태손은 대뜸 과거 이야기를 했다. 어찌 반응해야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심경을 동하게 하며 자신에게 호감을 품게 할지 고심하던 아이린은 가식을 섞어 감상평을 내놓았다.
"그건 저하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왜 자기 잘못도 아닌 것에 그토록 매달리시는 건가요?"
아이린은 황태손이 자신을 떠보려 협박성의 말을 지껄인 것임은 파악하지 못했다.
"내 잘못이 맞소. 적어도 칼을 쥔 사람은 나였으니."
"나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소."
익숙한 첫 대꾸에 순간 착각할 뻔했다.
그러나 그는, 라인하르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이해한다느니, 어쩔 수 없었다느니, 같이 슬퍼하자니 하는 말들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눈앞의 이 여자가 아니라 오직 라니아 뿐이라는 것을. 해서 흔들리지 않고 이성을 방패 삼고 가짜 감성을 내세웠다.
황태손은 과거를 꺼내며 썩은 속을 열어봐야 했으므로 실제로도 마음이 씁쓸하긴 했다. 그렇기에 연기는 더욱 감쪽같았다. 그는 마치 나를 알아주오, 라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린은 이어서 대꾸해주는 동안 황태손이 자신에게 완전히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단단한 착각이었다.
라인하르트가 등장도 전에 '라니아'에게 지배당했고, 프리드리히는 활자보다 악랄한 기회주의자로 화신해 사랑 따위는 알지 못한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쪽은 에단이라 할 수 있었다. 아이린은 이 정보마저 머릿속에 없지만.
새장이 녹슬다 못해 마디마디 끊어지기 시작했다.
"재치있으십니다."
"제가요?"
"......네."
에단이 볼을 붉혔다. 아이린은 싱그러운 녹빛 잔디 같은 이 남자가 좀 귀여웠다. 자기만 보면 벽 뒤로 쏙 숨어버리던 세이잔 저택의 어린 하인 아이가 떠올랐던 탓이다. 갑자기 가슴 한 켠이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불지옥 같은 분노와 함께.
"의외인 말씀이세요. 전 제가 말주변이 되게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사뿐하게 꽃잎에 내려앉은 나비처럼 미소하며, 아이린은 살포시 고개를 기울였다. 불쾌했다. 에단이 라니아와 자신 사이에서 늘 갈등하고 있음을 적나라한 표정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참, 맞다! 오늘 저녁에 티파티가 열리는 걸 잊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르웰린 영식. 오늘 만남은 여기까지인 걸로 해도 될까요?"
아이린은 에단 자체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라니아의 옛 친구로서의 에단 르웰린을 좋아할 수 없었기에 언제나 적당한 선에서 끊어냈다.
끝내는 쪽빛 새장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황궁에서 야외 오찬을 즐기고 난 후, 라니아에게 갔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범인이 에네아스라고 에둘러 말한 사람이 하필이면 라니아라서 바로 믿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의심은 여지없이 싹을 틔웠다. 한참 고민하던 아이린은 타인의 도움이나 조언 없이 조사에 착수했다. 단독으로 하는 행동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항상 누군가에게 의지해 움직였기에 더욱 그랬다.
해서 아이린은 프리드리히와 에단에게 자신이 품은 의심을 털어놓았다. 프리드리히는 탁월한 전술가였으나 그만큼 악랄했다. 그에게 본론을 꺼냈다가 심상치 않은 기운과 함께 불안을 느낀 아이린은 재빨리 에단에게도 찾아갔다. 에단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자신이 나름대로 파헤쳐보겠다고 했다. 프리드리히 또한 우선은 비슷한 답을 내놓았다.
얼마 후. 난데없이 금족령이 떨어졌다. 할레시온의 귀족 사회에서는 부모가 잘못을 저지른 자식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일이 가끔 있다. 하지만 아이린은 표면적으론 벌받을 짓을 한 적이 없다. 양오빠 이나르도, 백작이나 백작부인도 찾아오지 않는 작은 방 안에 감금된 지 사흘 후에야 감이 잡혔다. 백작가를 캐고 다니는 걸 백작에게 들킨 거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떻게 알았지? 집안 사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아이린은 의문에 휩싸였다. 하녀가 문만 빼꼼 열고 입구에다 놓아준 저녁 식사를 억지로 입에 밀어넣으며 고뇌했고, 프리드리히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협잡꾼이 백작에게 고스란히 일러바친 것이 분명하다. 아이린은 이를 갈았다. 어쩐지 말할 때부터 수상하더니만. 도움 청할 이가 너무 적어 하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는데, 돌아온 것은 얼얼한 뒤통수 뿐이었다.
저택에 갇히는 바람에 황태손과의 대면, 사교계 출입, 에네아스 조사를 비롯한 많은 일을 할 수 없었다. 아이린은 말 그대로 '고립됐다'.
그 상태로 시일이 조금 지나자 쌓아둔 인간관계가 천천히 멀어져갔다. 애초에 진심으로 다가간 것이 아니었으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남자 주인공을 맡은 자들과도 이렇다 할 진척은 없었다. 감정을 모으지 않은 그들은 아이린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 에단만은 시도했으나 성공은 한참 뒤였다.
사랑이 없는 주인공의 생애는 꽤나 척박하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맞춰진 인물이기에, 유리한 고지가 아닌 곳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새는 그렇게 실패에게 새장을 빼앗겼다.
***
하여 새장을 잃은 새는 이제 새장의 주인도, 그 자신의 주인도 될 수가 없었다.
사랑을 놓치고 주인공의 자리에 걸맞지 않게 된 자는 단역이 된다. 설 자리를 잃고 퇴색해가는 이름을 껴안은 채, 조용히 숨죽인다.
어느 날 뚫린 천장으로 탈출한 새는 사냥꾼의 총알에 맞아, 보드라운 깃털을 날리고 따뜻한 피를 흘리며 추락했다.
허무한 결말에게 숨을 내어주며.
============================ 작품 후기 ============================
2장 : 여름 完.
제 생일날 2장이 완결됐네요. (뭔가 뿌듯)
오늘 후기 좀 깁니다.
※3장은 좀 쉬었다가 시작하겠습니다. 비축분도 쌓고, 플롯 재정비도 해서 돌아올게요. 그동안 1~60화까지의 내용이 다소 수정될 수 있으니 정주행 시 참고해주세요.
+썩은칡범 님 : @를 코멘트 앞에 달아주셔서 답글을 답니다 :) 추리해주신 시안 관련 진실은 3장에서 확인하실 수 있답니다. 멋진 분석코멘 감사합니다S2
+라엘린 님 비문수정 감사합니다!
++3장~완결까지의 추천 bgm
밝은 버전
1. 하은지 : 시간을 거꾸로 돌려라(make the time reverse), sound of love, 유미(Yu-mi)
2. 이즈 - 청靑 (이건 샤카르 외전에도 잘 어울려요)
3. 아이유 - 이름에게
4. 다즈비 - 마법魔法
어두운 버전
1. 작곡가 불꽃심장 : 별의 눈물(stardust), 소녀의 기도, 한(grudge), 환각의 춤 등등 대부분의 곡
2. 판도라하츠 ost - every time you kissed me
3. matryoshka - sacred play secret place
4. Yoko Shimomura - song of the stars/dawn
+++아래는 3장 시작 전에 두루뭉술하게나마 써 본 짧은 예고편입니다. 단어 하나하나가 죄다 스포예요. 앞으로의 대략적인 전개, 분위기 파악에 참고해주세요!
*
아무것도 없는 것 속의 모든 것.
"진실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경로로 접근이 가능해. 하지만 우리는 자꾸만 외면하고 주저앉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러니 딱 한 번만 손을 뻗어 봐. 세상이 뒤집힐 거야."
이기를 위한 희생과, 이타를 위한 배반과, 차마 규정하지 못한 어리석음에.
―끔찍한 행복이 찾아왔다.
"사람이 항상 옳은 선택만을 내린다면, 애초에 그는 사람일까?"
우리는 고개를 저었고, 각자의 걸음을 내딛었다.
―바라던 대로.
그리하여 가장 불행한 자는 잃을 게 없었고, 가장 두려운 자는 잃을 게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세계를 사랑했다."
마법이 지배하던 지나간 시대와 매몰된 기억. 드러난 사랑이 끝내 사슬이 될 때. 모든 것은 무의미하고 어떤 것도 간직할 수 없어서.
휘몰아치는 하늘은 먹장구름에 잡아먹히고, 뼛속까지 시린 겨울에.
너는 그렇게 행복해야만 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