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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63화 (63/102)

00063 9. 마법 같은 비밀 =========================

도망쳐야 했다. 지금 당장. 그러나 발은 꿈쩍하지 않았고, 몇 초간 망설이다 오히려 앞으로 내딛어졌다.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숨을 죽이고 한 발짝씩 천천히 다가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정면에는 고요한 어둠만이 깔렸다.

시퍼런 바람이 분명 허공을 뚫고 지나갔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번개는 미미한 시간 차이를 두고 뒤늦게 쳤다. 멀리서 봤다면 고개를 갸웃했겠지만, 나는 바로 앞에서 목도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다. 내 지식선에서는 바람 계열의 마법을 쓴 직후 연막용으로 다른 마법을 사용해 번개를 불러왔으리라는 추측이 최대였다.

할레시온 내에는 공식적으로 단 한 명도 없는 마법사가 여기서 등장하다니. 경악스럽다.

입국 허가를 받고 활동하는 마법사라도 국내에서 상류 사회의 사람과 얽히긴 힘들다. 내 옛 스승 로제 카나이클만 해도 여행가로서 입국 심사를 통과한 마법사라 행동이 자유로웠으나, 대공녀인 나의 비공식적 스승 노릇을 하러 저택에 올 때는 감시를 피해다녀야 했다. 당시는 내가 '루'라는 이름조차 달기 전이어서, 마법사에게 조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들키면 황실의 극도로 예민한 반응에 의해 추방되거나 중형을 받을 확률이 높으니까. 때문에 그는 첫 날 하인을 벽에 메다꽂은 사건 이후로 나와는 교류가 없는 척 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정말로 소식이 끊겼다.

그런데 히엘로 공작이 현재 주된 거주지로 사용하는 별장에 마법사가 나타났다. 이건 대사건이다. 암살 목적으로 쳐들어왔다면 시안의 목숨이 지금쯤 경각에 달려있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방금의 그게 최후의 일격이었을 거야.

중요한 것은 내가 그를 도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방금 같은 강력한 마법 앞에서 내 효용가치는 영에 수렴한다. 주변에 있을 호위들도 마찬가지다.

역시 도망쳐야겠군. 멍청한 짓은 그만하고 정신 차리자, 라니아. 스스로에게 되뇌이고 걸음을 딱 멈췄다. 왔던 것처럼 기척 없이 뒷걸음질치려는 그 때.

"이런, 엿보는 눈이 여기 또 있었네."

"헉!"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위에서 뛰어내려 내 앞에 사뿐히 내려선 한 남자가 검을 겨누었다. 헛숨을 들이키며 굳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몸에 닿지는 않았으나 가볍게 찌르기만 해도 충분히 뚫릴 거리였다. 찰나의 간극을 두고 남자에게도 검 다섯 개가 둘러졌다. 그는 약간의 광기까지 서린 눈을 예쁘게 접어 눈웃음지었다.

"얼마나 귀하신 분이길래 사냥개를 이렇게나 많이 데리고 오셨을까?"

잠깐, 이 목소리는.

로제?

나는 호위 다섯 명의 위협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검날을 바짝 세워 내 목 앞에 가져다 대는 그의 얼굴을 응시하며 현실을 의심했다. 물론 검이 너무 무서워서 당장 기절할 것 같긴 하지만, 이 사람과 이런 식으로 재회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더 충격이었다.

간신히 목소리를 정돈하고 말했다.

"로제 카나이클. 당신이지?"

그는 살벌하게 생글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나로 묶어 늘어뜨린 짙은 와인색 장발이 살짝 흔들렸다. 내가 알던 로제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지만, 생김새는 완전히 똑같았다.

"내 가명까지 아는 염탐꾼은 처음인데......"

명도 높은 은청색 눈에 순간 살의가 번들거렸다. 사냥 직전의 늑대 같다. 사근사근 속삭이듯, 그는 나를 협박했다.

"그 적안, 황실의 것이지? 말해, 네 이름. 죽여버리기 전에."

로제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대도 황실의 적안을 가진 이 나이대의 여자를 보면 지당하게 나를 떠올려야 할 텐데. 잊어버렸나?

나는 침착하게 무표정을 유지했다. 대답이 없자 로제는 휘릭 검을 돌려 그를 둘러싼 날붙이들을 한꺼번에 쳐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이다, 라고 한가롭게 감상평을 내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은빛 검신이 부드러운 흐름을 타고 내 심장을 향했기 때문이다. 상황을 미처 판단하기 전, 너무 빠르게 벌어진 일이라 달려드는 검날을 보고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무슨 짓입니까."

그 때, 바람이 불었다.

냉랭한 얼굴의 시안이었다.

그는 로제를 힐난하며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아까 본 것과 동일한 푸른색을 뒤집어 쓴 공기가 휘돌았다.

마법이다.

제국의 공작이 마법을 썼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허탈하게 숨을 뱉어냈다. 우습게도, 순간 느껴진 건 배신감이었다. 뒤늦게서야 이성을 차리고 눈을 굴렸다.

로제는 강하게 뭉친 바람에 정통으로 가격당한 손을 다른 쪽 손으로 부여잡고 외국어로 뭐라 말했다. 내 기억을 살려 억양을 분석해보건데 저건 프리제산 욕이다. 날 노리던 검은 시안의 마법에 부딪쳐 저 멀리 날아가 박혔다. 호위들은 나와 시안의 눈치를 번갈아가며 보느라 우왕좌왕했다.

정신이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일련의 상황이 전혀 이해되질 않았다.

"이 분은 할레시온의 황족입니다. 무례하게 대하지 마세요."

"그건 아는데, 정확히 무슨 황족이지? 혹시 공주님이야?"

인상을 쓰고 손목을 주무르며, 로제가 내게 기습적으로 물었다.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 속에서 어렵사리 이성을 차리고, 시안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아직 약간 떨렸다.

"나는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 2황자의 딸입니다. 날 기억 못 하나요? 어렸을 때 당신이 내 비공식적 가정 교사였는데."

"로제는 그대에 관한 기억을 전부 잃었습니다."

시안은 나와 눈을 똑바로 맞추며 대신 대답했다. 그는 나의 갑작스런 재등장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나 또한 그가 방금 사용한 마법을 캐묻지 않았다. 의미 없는 대화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에 도사리던 푸른 기운은 어느새 말끔히 갈무리되었다. 그러나 나는 모른 척 넘어갈 생각이 없다.

시안. 리데르흐 히엘로 공작. 바람. 향기. 에온. 마법사. 황실 비사록. 엘피샤와의 친분. 레비욘 가셋수트. 황금빛 브로치. 에온 왕실. 그의 가정사에 대한 소문들. 신기한 책 '세계'.

연이어 스쳐가는 지난 일들에 그만 웃음이 났다. 이렇게까지 힌트를 남발하는데 내가 어떻게 몰라주겠어?

"시안 공."

"말씀하세요."

부드러운 발음이며 표정이 어찌 보면 참 뻔뻔하다. 의도하고 정체를 드러낸 것마냥. 그러나 지금까지 보아온 아스라했던 웃음, 검은 눈의 흐린 초점, 바람에 쓸리던 푸른 얼음 같은 머리칼이 아직 기억 속에 선명해서. 나는 혼란을 겪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로제의 기억이 왜 사라졌는지도 궁금하지만, 무엇보다 공의 정체를 알고 싶어요."

"저의 대답 여하와 관련 없이 이미 알고 계시는 듯한데, 제 착각일까요."

"직접 밝혀주시길 바라며 한 말이었는데, 뜻대로는 안 해주시네요. 그럼 그냥 제가 맞춰 보죠."

내가 추측하고서도 도무지 믿기질 않는군. 입을 다물었다가, 잠깐의 말미를 두고 다시 말했다.

"공은 에온의 왕족인가요?"

밤의 장막을 걷어내자 침묵이 짙게 깔렸다. 어디서 낮게 억눌린 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착각인가. 시안이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는 와중에, 로제가 한 박자 늦게 큭큭대며 웃었다.

"뭐야, 설마 네가 말한 '이 판에 끌어들이려는 사람'이 얘였어? 이미 미끼를 엄청 뿌려둔 모양이네? 호오, 방계 황족이라.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린다곤 말 안 했잖아, '시안 리델라 에온'."

이번에는 시안 대신 로제가 나서서 긍정을 암시했다. 역시나. 어쩐지 섬뜩할만치 잘 들어맞는 퍼즐이다 싶더니 정말로 정답이었다. 저 이름은 시안의 진짜 풀네임인가. 나는 긴장과 충격으로 뒤섞인 머릿속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좋아요, 상황 돌아가는 꼴을 대충 알겠네요. 우선은, 들어 봐야겠죠. 타국의 마법사가 할레시온의 공작으로 살아가는 이유. 저를 다시 초대해 주시겠어요?"

"......따라오세요."

시안은 속을 알 수 없는 태도를 유지하며 나를 도로 저택 안으로 들였다. 호위 다섯 명은 칼을 거두고 내 뒤를 따랐다.

푸르른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던 앞마당에는 검붉은 자국이 흩어져 있었다. 불쾌한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착각이 아니었군. 끈적한 액체를 눈으로 좇다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살점 조각을 발견하고 즉시 관심을 끊었다. 속이 확 울렁거렸다. 내 앞에서 걷는 시안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설명했다.

"블로텔지아의 길드가 저희와 협력 관계인데, 협약의 조항을 무시하고 별도의 감시자를 저희에게 붙이려 하기에 죽였습니다. 그 직후에 친 번개는 수분을 다룰 수 있는 로제가 공들여 만들어냈고, 살인을 은폐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지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시안의 뒷모습을 조금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지금의 시안은 이제까지 알던 그와 사뭇 다른 자다. 나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시체 처리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베르크와 그 수하들이 마당을 정리해 줄 겁니다."

"그 사람은 누구죠?"

"곧 만나게 될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만 선연해졌다. 로제는 내 호위들의 뒤를 감시하듯 따르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핏자국이 펼쳐진 부분이 어디선가 나타난 얼음 낫으로 뒤엎어졌다.

저택 안에는 언제 왔는지 엘피샤도 있었다. 그녀는 날 발견하고 태연하게 인사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안내받은 곳은 2층의 큰 방이었다. 벽 모서리에 놓인 촛불들이 고요히 일렁였다. 은밀한 분위기에 딱 맞는 소품이다. 긴 탁자에 시안 측과 마주앉은 나는 다짜고짜 시안의 과거사부터 들어야 했다.

"저는 에온의 마지막 왕손입니다. 선대왕 이후 4대 만에 태어난, 상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이기도 하지요."

그냥 왕족도 아니고 무려 왕세손이었구나. 하기사 첫 만남부터 느꼈던 진한 기품이 고위 왕족의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왕실에 하나뿐인 제대로 된 마법사는 철저히 보호받기 위해 탄생조차 민간에 비밀로 부쳐졌습니다. 제 존재를 아는 자는 동맹국의 왕족, 자국의 왕실 우호파 귀족, 그리고 제 뒤에 선 이 사람까지였습니다. 국왕도 강건하고 왕세자도 아직 젊었던 때라 왕세손의 부재 정도는 마땅한 위기 요소가 아니었지요. 해서 감추었을 때 문제되는 점은 없었다고 합니다."

시안은 뒷짐을 지고 선 중년의 남자를 가리켰다. 한 쪽 눈을 세로로 길게 긋고 지나간 흉터가 인상적이다.

"전 근위기사단장이자 제 호위였던 베르크 레긴입니다. 왕궁 깊숙한 곳에 사는 제가 외부인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항시 곁을 지켰던 사람이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녀."

베르크는 고개를 절도있게 숙여보이며 말했다. 나는 인사를 받아주진 않고 그저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인상착의를 눈에 박아놓으려다 그렇게 됐다. 베르크는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시안 리델라 에온이라는 이름은 제가 열세 살이 되어야 세상에 알려질 예정이었습니다. 1044년, 제가 여섯 살 때 에온이 할레시온의 침공으로 멸망해 실행되지 못했지만."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할레시온이 모르는 유일한 직계 왕족인 시안은 수많은 주변인의 희생 덕에 베르크와 함께 탈출했고, 그의 호위를 받아 리우네아로 도망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그는 방향을 완전히 틀어 할레시온의 수도로 향하다 중간에 베르크와 헤어지고, 홀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과정에서 시력이 급격히 악화됐다. 시력 관련해서는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해 정확한 원인이 뭔진 모른다.

시안은 어떻게든 도망쳤다.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던 그 때 만난 사람이 바로 전 히엘로 공작의 정부였다. 그녀는 마침 공작가 생활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아들이 함께 놀러 나갔다 갑자기 죽어 해결책을 고심하던 차였다. 꾀죄죄하지만 분명 생긴 것 자체는 상당히 예쁘장한 꼬마에게, 정부는 선뜻 금괴 한 덩어리를 건네며 제안했다.

'귀여운 아이야. 내 아들 행세를 해 주지 않으련?'

시안은 그녀의 사정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극진히 아끼던 부친이 불타는 궁에서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을 소중히 간직한 채로, 그는 히엘로 공작의 후계가 되었다. 얼마 전 급작스럽게 죽은 정부의 아들의 빈자리를 감쪽같이 채우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의 외양이 진짜 아들과 굉장히 닮은 데다가, 마침 진짜 아들의 당시 언어 구사력이 제국어를 배운 바 있는 외국인과 견주어 별 차이가 없었기에 공작저 입성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리고, 저는 정부를 독살했습니다."

그 대목에서 나는 결국 평정을 깼다. 탁상 아래로 쥔 손에 땀이 쥐였다. 경직된 나를 보고 로제가 조용히 눈웃음지었다. 엘피샤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고, 베르크는 여전히 '열중 쉬어' 자세 그대로다.

호랑이 소굴에 기어들어온 기분이다. 숨을 정돈하고 눈매를 살풋 찡그리며 말했다.

"효용 가치를 잃었고, 말해서는 안 될 비밀을 손에 쥔 자여서요?"

"물론입니다."

"제가 공을 혐오하길 바라며 한 말인가요?"

"아니요, 제가 1차 목표를 무엇으로 두었는지 알려드리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공작 자리군요."

날카롭게 씹어뱉었다. 정부만 죽였을 리가 없다. 십여 년에 걸쳐 전멸했다던 공작가의 일원들은 모두 시안에게 살해당했을 게 뻔하다. 시안은 그렇게 공작가를 장악했겠지.

"정답! 똑똑한 대공녀네. 내가 얘 스승이었다니, 뿌듯해."

로제가 검지를 세우며 경쾌하게 외쳤다. 그리고 엘피샤에게 입이 틀어막혔다. 시안은 끊긴 흐름을 도로 이었다.

"십여 년에 걸쳐 공작가 사람들을 차례로 제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이 모두 죽었다'라는 말이 어느 때에 대입해도 틀린 말이 아니게 되었지요."

나는 내 생일날 조력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시안을 떠올렸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가족이 모두 할레시온에게 죽었다는 대답이 돌아왔었지. 과연 틀린 말은 아니군.

그 뿐만이 아니다. 여태 들은 말을 상기했더니 거짓말이 거의 없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실마리를 주었을까. 가늠할 수조차 없다.

"황실 비사록도 공작가의 멸문이 어떻게 기록됐는지 확인하려 훔쳐낸 거였군요."

"그도 그렇지만, 제 부친인 에온의 왕세자가 황제 독살범으로 억울하게 몰리는 부분을 보고 싶었습니다. 어릴 적 대강 전해들은 것 외에, 더 자세하게."

이쯤 되면 끝날 법한데, 폭탄은 여전히 기세 좋게 터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처형되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에온이 멸망하던 날 그는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을 밟고 도망치기까지 했다. 그 무력감이 얼마나 끔찍한지 나는 잘 안다. 나라와 부모, 왕손으로서의 인생까지 전부 다 잃었으니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들어도 부족할 지경이다. 시안과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군.

세게 뛰는 심장 때문에 주의가 산만했다. 숨을 길게 뱉어내고 물었다.

"억울하게 몰렸다면, 비사록의 내용은 거짓이었나요?"

"제 부친은 기체 독으로 오벨 3세를 죽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오벨 3세는 액체 독에 당했다지요. 당시의 정황과 증언이 이를 입증하지만, 지금 당장 그것까지 전부 알려드리기에는 시간이 모자람을 이해해 주세요."

"정황과 증언 뿐이라면 진범은 누군지 모르시겠네요."

"확실하게 밝혀내진 못했지만, 진범 자체는 알 것 같습니다. 당시 독살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전부 중상을 입거나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추적 결과 생존자와 황제궁 주변에 있던 인물 대다수가 시간차를 두고 석연찮은 이유로 죽었더군요. 제대로 된 증언은 겨우 한 개 건졌습니다. 놀랍도록 깔끔한 뒷처리는 보통 범죄 은닉을 암시하지요. 오벨 3세를 행동 불능으로 만들었을 때 이익을 얻고, 제국 내에 남은 증거를 깡그리 말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시안이 조곤히 물음조의 말을 끝맺었다. 가슴이 서늘했다. 아까 내 목에 칼이 드리워졌을 때의 느낌이 다시금 나를 엄습했다. 아연해져 입을 열었다.

"황태자......"

"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황태자가 효과적인 집권을 위해 오벨 3세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꼭두각시로 만들고 제국에 군림해왔다. 그럴듯하지요."

눈을 가리던 새까만 천이 풀려, 꽃잎처럼 나풀거리며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연참 3/6.

시안의 본명이 나왔네요. 안녕, 시안 리델라 에온? :D

+헋 후원쿠폰 받은 거 지금 알았네요 이거시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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