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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64화 (64/102)

00064 9. 마법 같은 비밀 =========================

황족으로 태어나 살아왔기에 숨쉬듯 자연스럽게 숙지하고 있다. 필요하면 누구든 제거하고, 누구든 손을 잡는 곳이 바로 황실이라고. 그 단적인 예가 황태자였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1044년에 황태자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비사록에 따르면 그 무렵의 황태자는 잔혹한 살인귀 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가 지나가는 마을은 형태도 남기지 않고 지도에서 사라졌으며, 마땅한 전술도 없이 정면 돌격으로 대부분 승리했다. 적들은 인도적인 처우 따위 없는 황태자를 가장 두려워했다. 그렇게 그의 공적은 쌓여갔고, 그는 자신이 황제가 될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짐작건대 내 조부인 오벨 3세는 그 광기가 황태자에 맞지 않다고 여겼으리라. 에온 정복을 마지막으로 건드려볼 만한 나라는 죄다 할레시온의 영토가 되었으니까. 이제 제국에 필요한 군주상은 공포의 혈군이 아니었다. 질서와 재정비, 그리고 새로운 영토의 국민을 포용하고 복종시킬 통치력을 겸비한 현군이었다.

그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은 내가 보기엔 3황자였다. 내 아버지인 2황자는 너무 우유부단하거든. 오벨 3세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오벨 3세가 간혹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 그의 말동무가 되어드리곤 했다. 초대는 네피아 황후가 했고, 그녀와 한참 수다를 떨다가 함께 황제궁으로 향했지. 그러면 황제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며, 내 손녀가 왔군, 이라고 말했다. 황태자와 마찬가지로 전장의 사신이라 불리던 자답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내민 손에는 흉터가 한가득이었다.

그는 가끔 3황자 이야기를 했다. 정신이 불안정할 때는 나를 3황자로 치부하고 읇조리기도 했다.

'루스, 네가 져야 할 짐이 막중하도다. 감내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나는 모른 척 3황자 행세를 하며 정보 조각을 주웠다.

'감내할 수 있다 대답하면 폐하께서는 제게 무엇을 지워 주시렵니까?'

'내가 가진 것을 주겠노라.'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당시에는 황제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그저 미래를 대비해 사소한 것이라도 수집해둘 뿐. 오벨 3세는 그새 멍해진 눈으로 네피아 황후에게 안아달라 손을 뻗었다. 칭얼거리는 황제를 토닥이며, 네피아 황후는 내게 말했다.

'똑똑하구나. 잘 처신하였어. 오늘은 이만 돌아가려무나. 나는 폐하를 돌봐드려야 한단다.'

'칭찬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안녕히 계세요.'

나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하는 네피아 황후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는 아마 황제의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어린 나라서 안도했을지도.

아무튼 그 대화를 잘 끼워맞추면, 5년 전 3황자가 반란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한 일까지의 인과 관계가 명확해진다. 3황자는 황제가 후계자로 점찍은 아들이었고, 황제의 의사를 받들기 위해 황태자를 몰아내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간 황제의 건강이 온전치 않은 걸 당연하게 생각해서 간과한 게 있다. 만약 황제가 그 때 정신이 온전했다면 그런 번거로운 일 없이 일방적으로 황태자를 갈아치우지 않았을까? 여기서 방금 전의 대화 덕에 하나 더 알아냈다. 황제가 언젠가 나를 3황자로 착각하고 한 그 말은, 사실 18년 전 에온 정복이 한창일 때 진짜 3황자에게 한 말이라는 것. 그리고 그게 모종의 경로로 황태자의 귀에 흘러들어갔다는 것.

그 때 황태자는 자리를 빼앗기는 대신 불완전한 집권을 선택했다. 오벨 3세의 정신을 파괴하고 그 죄를 에온의 왕세자에게 덮어씌워서.

황제가 완전히 죽지 않은 건 의도였을 확률이 높다. 18년 전 당시 황제파 귀족들-현재는 중립파나 2황자파가 된 그들 말이다-의 세력이 강했으므로, 오히려 오벨 3세가 껍데기나마 제위에 남아있는 게 반발을 잠재우기엔 효과적이었겠지. 황제가 죽은 것도 아니고, 황태자가 황위에 올라간 것도 아니니까. 여전히 할레시온은 오벨 3세의 치하였다.

또 5년 전, 황태자는 르쉬네의 저택에 위조 문서를 숨겨두고 황태손이 발견하게 했다. 그는 권좌를 원한다면 친인을 직접 쳐내라는 오벨 3세의 본의 아닌 가르침을 본받아, 라인하르트에게 고스란히 가르쳤다. 이를 발단으로 대대적인 반역자 색출을 벌여 진짜 타겟이었던 3황자를 끌어냈다. 13년이라는 간극은 황태자가 기반을 다지느라 다른 걸 할 겨를이 없던 몇 년, 3황자가 황제의 회복 가능성을 가늠했을 몇 년과, 황제의 회생에 기대를 거는 짓을 포기하고 반역을 준비했을 몇 년을 합치면 대강 설명이 된다. 황태자는 3황자가 거사를 시행하기 직전까지 조용히 기다리며 기반을 다지고 반란군의 명단을 만들었다고, 샤카르의 조사 결과지 한 켠에 쓰인 게 기억난다.

황태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혹시 모를 가능성을 막으려 2황자까지 몰아세웠다. 2황자의 가족, 그러니까 우리 가족은 살아남으려 스스로 대공가의 이름표를 달았다. 숙청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연관된 귀족과 평민 역시 쓸려나갔다. 황태자는 오벨 3세가 염려했던 난폭한 성미대로 공포 정치를 실현했다.

오랜 세월을 거쳐 묻히고 빛바랜 편린이 한꺼번에 맞춰졌다. 나는 이걸로 대체 어디까지 파고들 수 있을지 가늠해보다가 그만 아득해졌다.

황태자는 결코 혼자서 국정을 운영할 수 없다. 황족만이 필요한 정치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따라서 황태자파의 사람들도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카인 공작가, 르웰린 후작가, 스카일러 후작가, 에네아스 백작가는 거의 확실한 관련자다. 이십 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야 시작되는 거대한 사건이니 그들 정도는 되어야 해.

그럼 세이잔은? 두서없이 그 이름이 떠올랐다. 기밀 사항이니 박쥐 가문이라 불리우는 그 가문은 절대 접근 못 했겠지?

접근을, 정말로 못 했을까?

헛웃음을 지었다. 이건 억측이다. 아직까지는. 그런데.

내 생일날, 샤카르는 중간 조사 결과를 가지고 왔었다.

'사실 다시 생각해보니까 귀족 가문 하나가 벌인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황태자가 직접 배후에 서서 휘하 인간들을 움직였을 가능성도 꽤 높고. 무엇보다 세이잔 자작가의 일원들이 여기저기서 원한도 사고 명망도 얻는 등등 하여간 연줄이 엄청나서.'

- 먼저 정치적인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세이잔 자작가의 최근 행보는 황태자파도 2황자파도 아닌 제 3세력에 치우쳐 있었음. 그간 몇 번 파벌을 갈아타다 요즘처럼 정치판이 폭풍전야 같은 때를 틈타 잠시 몸을 사리며 득실을 따지던 것으로 보임. 작년 10월경 본래 관리하던 이모레타 지방 외에 추가로 사비렝 지방의 관리권을 하사받음. 사비렝 지방은 크기는 작지만 비옥한 토지와 질 좋은 광산이 위치한 알짜배기 땅으로, 황태자 쪽에서 세이잔을 포섭하기 위해 던져준 것으로 추정됨.

그러나 세이잔은 그걸 꿀꺽하고 나 몰라라 하며 튀었음. 황태자파가 되지 않고 여전히 중간선에 서서 깔짝대던 정황이 여럿 포착됨. 화재가 일어나기 직전에는 종친회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 황실 종친들과 접촉하려는 준비에 착수했던 듯함. 의도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눈에 거슬리는 행보임에는 분명하니, 만약 황태자가 진범이라면 이게 결정적인 범행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

세이잔은 왜 현재 집권자에게 대놓고 회유받고도 우왕좌왕했는가? 왜 하필 그 시기에 황실 종친과의 접촉을 준비했나? 신중하기 이를 데 없다는 가문이 대체 얼마나 큰 건이었기에 황태자의 눈도 생각 않고 움직였지? 전혀 짐작도 안 가던 것이 급작스레 선명해져서는 한 방향을 가리킨다.

망상에 휩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예 터무니없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세이잔 저택 방화 사건에서 중요한 의문은 누가 그랬느냐가 아니라 왜 그렇게 됐느냐다. 지금까지는 이게 단순히 원작 '꽃물 든 하늘'의 줄거리에 따라 악역인 날 범인으로 낙인찍고 여주인공 아이린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한, '예정된' 사건이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는 다르다.

세이잔 자작가가 유서깊은 황태자파 가문 외에는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어떤 계기로 알아버렸고, 급해진 황태자가 건넨 뇌물을 덥석 물었지만 이대로 놓치기엔 너무 결정적인 패라 포섭당하지 않았으며, 진실을 고발하려다 과격한 방법으로 제거당했다면?

본능적인 공포가 발 끝을 적셨다. 허공을 딛고 서서 절벽 위의 바람을 맞으면 딱 이 기분일까.

"대공녀."

시안의 차분한 부름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마를 짚고 심각하게 탁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멍하니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죠?"

작은 창 밖으로 보이는 검푸른 별밭에 달이 휘영청 떴다. 달의 빛이 기운 탓인지 방 안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밤의 한복판이었다. 오늘 새벽 전에 귀가하긴 아무래도 그른 것 같다. 조금 있다가 호위 중 하나를 시켜 집에 전갈을 한 번 더 보내야겠다.

"꽤 많이 흘렀군요."

"생각할 것이 많아서 그만 한눈을 팔았네요. 계속하죠."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나는 다시 지금에 집중했다.

"서론은 충분하고, 이제 본론을 꺼낼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시안, 당신은 반역을 준비하고 있나요? 아, '반역'은 당신이 할레시온의 귀족이어야 성립하는 말이었죠. 정정할게요. 시안, 엘피샤, 로제, 그리고 처음 뵌 분들은 모두 옛 왕국을 재건할 계획인가요?"

어두침침한 방 안에 무서운 정적이 감돌았다. 일 대 다수의 대면이라 더 그렇게 느껴졌다. 애써 침착하게 말했지만 내 얼굴에는 이미 열세가 드러났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하면 협력해 줄 거야?"

로제가 떠보듯 말했다. 나는 짧게 코웃음쳤다.

"조력하지 않을 수 없게 해놓고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죠, 로제."

"우린 강요 안 했는데."

"거부하기 힘든 조건과 상황은 종종 사슬이 된다. 당신이 오래전 내게 해준 말이에요."

더 시간을 끌다간 우리 가족까지 3황자 꼴이 날 것 같아 황태자와 맞서기로 마음을 굳히던 차였다. 내가 칼을 잡으면 최대의 적이 되고 최대의 손해를 입을 황태손 라인하르트가 자기희생에 가까운 발언을 통해 그 길을 권유하기도 했고. 다만 일을 벌일 기반이 없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세력이 나타나 주니 당연히 거절할 수가 없지.

"뭐, 그럼 알아서 해."

그 말을 들은 로제가 씨익 웃었다. 대체 8년 동안 뭔 일을 당했기에 사람이 이 지경이 됐을까. 이따가 상황이 정리되면 물어봐야겠다.

"하일, 그만해요."

로제는 결국 엘피샤에게 핀잔을 받았다. 하일은, 아마도 로제의 본명인 것 같다. 시힐레의 왕실은 할레시온에서 귀족 작위를 받았으니 엘피샤는 굳이 가명을 쓸 필요가 없겠고, 시안은 이 저택의 앞마당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게 본명을 알려줬다. 방금 소개받은 베르크도 본명일 테고. 그럼 이제 본명들은 다 안 셈이다.

각설하고, 세부 사항으로 갔다.

"멸망한 왕국들을 되살리려면 국경을 쳐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앙이 흔들릴 필요가 있겠군요. 제가 필요한 건 그 부분이겠죠?"

"맞습니다. 군대가 국외에 있기 때문에 저희가 중앙을 직접 뒤흔드는 건 불가능해요. 대신 저희는 중앙이 알아서 흔들릴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대공녀님께서는 그 때를 맞추어 내부에서 2황자파 귀족들과 자체적으로 모은 병력으로 반정을 일으켜 혼란을 증폭시켜 주시면 됩니다. 그동안 저희는 국경을 쳐서 영토를 되찾을 계획이에요."

내가 할레시온을 흔들고, 그들은 할레시온이 삼켰던 옛 왕국의 영토를 되찾으며, 정신없는 틈을 타 내가 할레시온을 잡아먹는다. 서로 이기는 전략이다. 나 혼자만의 반란이나 그들만의 전쟁은 대제국 할레시온을 전복하기 힘들다. 하지만 안팎으로 칼을 들이밀면 아무리 황태자라도 당해내지 못할 거다.

물론, 정말 저렇게 되면 불안정한 할레시온을 시안이 끝까지 쳐들어와 아예 멸망시켜 버릴 심산이 크다. 말이야 좋지 실상 내게 돌아오는 건 '어제의 아군은 오늘의 적', 즉 시안과의 재전쟁일 수도 있다. 다만 이때 방법이 하나 있다.

내가 황태자에게서 빼앗은 할레시온의 왕관을 포기하는 것. 그럼 '꽃물 든 하늘'의 줄거리든 운명이든 다 떨쳐내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평화로운 항복을 한 국가의 왕족은 보통 평탄한 앞날을 보장받는다. 시힐레의 왕가였고 할레시온에 투항 후 귀족 작위를 하사받은 카르텔리 후작가처럼. 나중에 받을 부당한 차별이야 지금 고려할 게 아니다. 내 친인들 또한 거의 전부 관할 지역이 있는 대귀족이니, 정복 직후의 혼란한 시대까지는 여전히 지방 제후로 살 것이다. 할레시온이 다른 나라를 무너뜨리면 구심점이 될 왕족만 깔끔히 처리하고 나머지 귀족들은 한직에 앉혀 계속 써먹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다들 무사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분명 존재한다.

아직은 먼 일이니 거기까지만 생각해 두고, 짚이는 점을 질문했다.

"알아서 흔들릴 날은 언제를 뜻하죠?"

"그건,"

"단 하루뿐이지요."

엘피샤가 대답하려는데, 시안이 한 박자 빠르게 끼어들었다.

"현 황제 오벨 3세가 죽는 날."

맞는 말이다. 황위 계승은 대대로 조용했던 적이 없거든. 누가 들고 일어나거나, 왕관을 쓰는 자가 자리를 공고히 하려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거나. 매번 둘 중 하나는 꼭 일어난다. 그러면 자연히 혼란이 생긴다. 이번 계승도 예외가 아니다.

황태자는 그 날 나를 죽일 것이다.

"폐하께서는 너무 오랫동안 병석에 계셔서 소식이 바깥으로 잘 새어나오지 않아요. 그 분이 돌아가셔도 황궁 관계자가 발표만 안 하면 다죠. 그건 어떻게 할 건가요?"

"황태자 쪽에서는 공표할 날을 재겠지요. 최대한 유리한 시기를 고른다면, 그들은 어떤 날을 택할까요."

의문을 제기했더니 시안은 되려 질문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돌려주었다. 그가 도움말을 깔아준 덕에 답을 내기는 쉬웠다. 착 깔린 눈빛을 응시하며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카리스티아 대연회."

============================ 작품 후기 ============================

연참 4/6. 나머지 두 편은 아침 또는 저녁에 이어서 올라갑니다. 잡힌 일정이 하나 있어서 저녁일 확률이 더 높을 것 같습니다.

+3장은 아마 2장보다는 짧을 것 같아요. 다만 외전이 크나큰 변수...(외전 플롯을 확인하며 탄식한다)

++아까 뒤늦게 발견하고 63편에 후기 추가하긴 했지만 다시 할게요, 후원쿠폰 주신 이거시 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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