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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65화 (65/102)

00065 9. 마법 같은 비밀 =========================

카리스티아 대연회는 지방 귀족까지 전부 모이는 행사다. 이게 진행되는 중에는 귀족이고 황족이고 죄다 한데 모여있어야 해서, 황제 승하를 발표했을 때 생기는 혼란의 제어가 편하다.

바꿔 말하면, 요인들이 수도에 응집하기 때문에 반대로 국경 쪽은 지휘탑이 비게 된다. 시안 측은 그걸 노렸다.

"올해 안에 결판을 내야 하는 거군요."

카리스티아는 11월 초에 시작해 12월에 끝난다. 정치적인 행사가 11월 말까지 진행되고, 이후로는 사교 행사로 이루어진다. 나는 작년 카리스티아 대연회를 떠올렸다. 온갖 일들이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아이린과 관련된 최초의 사건이 터지고, 줄거리로써 정해진 운명은 현실화되었다. 지금이 8월 말이니, 내가 참석해야 하는 사교 행사 시작까지는 이제 세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했다.

시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 멘데로프 영식께서도 기한을 묻길래 그리 대답해드렸습니다."

"뭐라고요?"

갑자기 샤카르의 호칭이 튀어나와서, 나도 모르게 재빨리 반문했다. 저 말은 꼭 그가 나보다 먼저 시안의 제안을 받았다는 소리로 들리잖아.

시안은 당장 답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온 사용인의 귀엣말을 먼저 들었다. 그리고는 난처하게 미소하며 무어라 지시를 내렸다. 사용인은 소리 없이 밖으로 물러나갔다가, 이미 문 앞에 서 있었던 눈치인 손님을 안으로 들였다.

둔탁한 구두 소리가 적막을 찢었다. 상당히 엄한 눈을 하고 제 허리춤에 찬 칼에 손을 올린, 샤카르였다. 그 치고는 드물게 눈매가 차분하고 날카로웠다.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내가 몇 번 마주해보지 못한 냉혹한 모습이다.

"이름이 거론되자마자 오셨군요, 멘데로프 영식."

의자에서 일어난 시안이 가만히 미소하며 손짓해 자리를 권했다. 샤카르는 얼음을 깨듯 입가만 당겨 웃고는 내 옆의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참다 못해 날 데리러 왔나. 그의 때아닌 등장은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눈길이 오지 않았다. 진짜 화났군. 나한테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시안에게 화가 난 건지는 아직 미지수다. 일단 가만히 찌그러져 있어야겠다.

"뭐하는 짓입니까?"

첫마디부터 장난 아니었다. 대충 알겠다. 샤카르는 나보다 먼저 시안에게 이 제의를 받았던 거다. 내 최대의 조력자가 샤카르니까, 시안은 날 떠볼 기회와 설득할 권한을 그에게 함께 주었겠지. 그런데 오늘 시안에게 직접 모든 걸 듣기 전까지 나는 샤카르에게서 관련 사항을 전달받지 못했다. 샤카르 역시도 망설이는 중이었나 보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눈에 밟힌 사람이라면 에단이 있겠고, 상황상으로 봐도 내가 위험한 길로 들어가게 될 테니 섣불리 내세우기는 힘들었겠다.

"제 실수입니다. 대공녀께 뒤를 밟히는 바람에."

뒤이어 자리에 앉으며 변명하는 시안에게, 샤카르는 대뜸 비속어부터 날렸다.

"개소리 집어치우지? 의도적으로 쫓아오게 한 거잖아."

"어투가 자유분방해지셨군요."

"더한 말도 할 수 있는데. 벌써 그런 지적 듣기엔 내가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라서."

"멘데로프 영식, 우선은 진정하시고......"

"실컷 기만해놓고 진정하라는 건 너무한 처사 아닙니까?"

이 집단에서 중재자 포지션에 가까운 엘피샤가 시안의 대꾸에 앞서 전형적인 말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잔뜩 날이 선 샤카르는 내가 알기로 웬만해선 구제불능이거든.

"영식께서 세 달이 지나도록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니, 저희로선 당사자와의 직접 대면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어이가 없네. 그쪽 인내심은 딱 거기까진가?"

"샤카르. 적당히 해 둬요."

결국 내가 그의 이름을 단호히 부르며 두 남자의 신경전은 일단락됐다. 사실 시안의 의도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듣고 나자 말리기 싫어졌는데, 그냥 뒀다간 정말 칼부림이 날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적당히 끊었다.

대화는 잠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로제를 비롯한 내 반대편에 자리한 사람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넌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겨우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온 샤카르가 그 틈을 타 내게 물었다. 참 빨리도 물어보네. 그를 옆눈으로 흘겨주었다.

"멀쩡해요. 내 뒤에 선 호위 분들을 뭐로 보는 거예요."

"다 합쳐도 나보다 약한 놈들."

"허세는. 아무튼 난 약간의 위협을 받은 것 말곤 신변에 이상 생긴 적 없어요. 근데 당신은 여기 왜 왔어요?"

"걱정돼서 쫓아왔지."

"그것 참 감사한 말이네요."

확실히 아까보다는 심리적 부담감이 덜했다. 든든한 아군의 지원을 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관심 없는 척 대꾸하며 그가 지닌 새까만 검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물건이라서. 눈치 빠른 샤카르는 냉큼 설명해주었다.

"엘비올리스 왕국에서 건너온 칼. 마법 파훼 효과가 있어."

"여차하면 싸울 생각으로 온 거군요. 역시 당신도 제정신은 아니야."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냐."

샤카르가 속도 없이 씩 웃었다. 뭐라 대꾸할까 했는데 내부 회의를 끝낸 듯한 시안이 빤히 쳐다봐서 단념했다.

***

이후로 나눈 얘기는 별 거 없었다. 나는 대공과 일레인에게도 논의해보고 빠른 시일 안에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 날 알게 된 정보 일체의 비밀을 유지하기로 약속했다. 어차피 나는 제안을 거절하는 게 더 힘든 처지라서, 그들도 딱히 우려는 않는 듯했다.

나는 셀리아의 양산을 챙겨 돌아갔다. 샤카르는 날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안전이 완전히 보장되지 않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서, 내가 동의할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리더라. 난 조금 대답을 끌었다. 그의 걱정하는 마음은 알고, 사실 좀 감동도 받았지만 내 움직임에 제약이 걸리는 건 딱 질색이라서 쉽게 고개를 끄덕이긴 싫었거든. 버티다 못해 저택의 정문에서 알았다고 했더니 겨우 갔다.

귀가 시각이 너무 늦어서 새벽에 잤더니 아니나 다를까 늦잠을 잤다. 나는 오후에서야 엘피샤와의 만남을 청했다. 언제나 다름없이 향수 냄새가 옅게 번진 그녀의 가게에서.

내가 듣고자 한 건 8년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난 로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달빛이 하얗게 부서져 쏟아지는, 한 부분이 황토색으로 뒤엎어진 시안의 별장 앞마당이 아직까지 간간이 떠오르는 가운데, 엘피샤가 입을 열었다.

"로제 카나이클의 본명은 하일 리네토 엘비올리스예요. 프리제의 리네토 공작과 엘비올리스의 1왕녀 샤샤의 막내아들이지요. 하일이 네 살이 되던 해 프리제가 멸망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할레시온의 침공 당일 죽고 하일과 형제들은 어머니 샤샤 왕녀와 함께 엘비올리스로 도망쳤다고 해요. 그 후로 줄곧 엘비올리스에서 살다, 시안 님과 결탁해 그 분과 같은 목적을 갖고 할레시온에 들어왔고요. 대공녀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엘비올리스는 현존하는 모든 국가를 통틀어 마법 유전율이 가장 높아서, 하일 역시 대단한 능력을 타고났답니다. 수분, 그 중에서도 특히 빙결 계열의 마법을 쓰는 엘비올리스 왕실의 능력을 물려받았지요. 게다가 다른 형제들과 달리 프리제의 방계 왕족인 리네토 공작의 기억 삭제 능력까지 승계했어요. 시안 님은 하일의 재능을 높이 사서 중요 참모로 두셨지요."

"잠깐만요. 기억 삭제 능력이라니요? 그게 뭐죠?"

어릴 적 나는 그가 빙결 마법을 쓰는 것밖에 보지 못했다. 로제가 중복 능력 보유자일 줄이야.

"지금의 하일을 그렇게 만든 원인이에요. 이른바 '시간의 흔적을 지우는 마법'으로 불리우는."

"그럼......! 그 때 황궁에 침입해 감쪽같이 기밀 문서를 빼간 장본인이 로제라는 소린가요?"

"네. 하일은 그 대가로 자신의 기억 한 부분을 베어내고 말았지만요."

"타인의 기억을 지우는 대신 자신의 기억 일부 또한 날아간다......마법의 반동 현상이군요."

마법 관련 서적에서 본 적이 있다. 대부분의 마법은 어떤 식으로든 시전자에게서 대가를 요구한다는 걸. 그것의 종류나 강도는 제각각이고, 통상적으로 강력한 마법일수록 시전자를 망가뜨린다고 했다. 로제는, 아니 하일은 그 점을 아랑곳않고 대담하게 황실까지 침투했다. 마법까지 써서 정체가 발각되지 않게 했으니 정보국에서 아무리 수사해봤자 진척이 없었던 거다.

과연 시안 일당은 상상 불가의 영역까지 관여되어 있었다. 이 지경이니 그동안 제대로 해결된 사건이 없지. 망할.

"그 지식도 알고 계셨네요. 맞습니다. 하일은 지금껏 수많은 사람의 기억에 개입했고, 그 때문에 먼 과거의 기억과 무용한 기억부터 시작해서 점차 중요한 기억에까지 손을 대야 했어요."

엘피샤는 이런 것까지 숙지하고 있으면서 올해 신년 행사 때 그렇게나 아련하게 전 애인의 과거를 물었군. 과연 연기력 끝판왕인 시안의 동업자답다. 그녀마저 이미 오랫동안 내게 힌트를 뿌리고 있었어. 일부러 로제가 죽었다는 것처럼 말해서 내가 그를 혹여라도 찾아다니지 않게 하고, 은근히 관심을 갖게 한 거야. 어디서부터 놀아난 걸까. 이익 여하를 떠나서 그냥 짜증이 났다.

태양빛이 창문을 타고 넘어와 내 손 위에 황금 가루를 솔솔 뿌렸다. 오늘도 날씨 하나는 참 좋다.

"기억이란 사람 그 자체와도 같아서, 기억 곳곳이 베이고 조각난 자는 온전한 자신으로서 남기 어려워요. 한 마디로, 인격이 왜곡되는 거예요. 하일은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자신을 잃어갔고, 두 해 전쯤에는 저와의 연애를 그만두고 연인으로서 쌓은 추억까지 내다 바쳤어요. 제가 하일과 함께한 시간은 꽤 길어서, 그가 제게서 영향을 받은 많은 것들이 함께 지워져 버렸지요. 그 때를 계기로 사람이 확 바뀐 것 같아요."

"어제 만난 하일은 진정한 의미의 '하일 리네토 엘비올리스'가 아니었군요."

약간 냉담하게 대꾸했다. 그 사람은 엘피샤가 아는 하일도, 내가 아는 로제도 아니었다. 하일과 로제의 파편이 깨지고 섞여 본래의 목적이며 감정까지 잊은 껍데기였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을 발하던 광기어린 은청안이 생각난다. 무식해 보인다며 쓰지 않던 하대는 어느 부서진 무의식에서 튀어나왔을까. 고상하지 않다고 싫어하던 검은 또 언제 배운 걸까. 그는 그렇게나 많이 변했다.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칠 만큼 출신 국가의 부활이 그에게 중요했나? 그가 네 살일 때 무너진 국가 프리제가 정말 충성심을 불러일으켰을까?

나는 엘피샤에게 그 의문을 슬쩍 돌려서 질문했다. 엘피샤는 진실을 술술 풀어놓았다.

"하일은 프리제보다는 엘비올리스에 소속감을 갖고 있었어요.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았으니 말이에요. 애초에 그가 할레시온에 입국한 것도 자의가 아닌 모친이신 샤샤 왕녀님의 명령 때문이었답니다. 할레시온의 독주를 막기 위해 이 전쟁에 동참하지 않겠냐는 시안 님의 제의를 엘비올리스가 수락해서, 파견원이 필요했지요. 샤샤 왕녀님은 망국 프리제와도 연관이 있고 반동이 너무 큰 능력을 가져서 엘비올리스에 큰 공헌을 할 수 없는 하일을 할레시온으로 보낸 거예요."

내가 읽은 마법 서적이 서술하길, 본디 왕족 뿐만 아니라 왕족의 피가 섞인 고위 귀족가문까지 간간히 마법사를 배출하던 프리제는 망국 즈음에 다다라 그 빈도가 극히 줄었다고 했다. 하일은 그 현상의 일례로 형제들 중 혼자서만 프리제의 능력을 승계받은 모양이다.

"마법 승계율의 손실이 가장 적다는 엘비올리스에는 하일 말고도 강력한 마법사가 많아서 그랬겠군요."

"안타깝지만, 네. 그는 버려도 괜찮은 패에 해당했어요. 그래서 그는 엘비올리스에서의 입지를 승격시키려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했지요. "

"지금의 상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던 두 해 전의 사건도 시안 공을 돕다가 벌어진 건가요?"

엘피샤와 헤어지고 연인 시절의 기억을 전부 지울 정도면 대단한 사건이었을 텐데. 내가 궁금하다는 기색을 내비치자 엘피샤는 뜸을 들였다.

"그렇긴 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다는......"

"내가 죽었다던데. 2년 전에."

그 때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불청객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엘피샤까지 놀랐다. 어디 숨어 있었던 거야.

"하일, 막 들어오면 어떡해요? 손님 계시잖아요."

엘피샤가 꾸지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일은 무심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제멋대로 의자를 끌어다 내 앞에 앉았다.

"내 얘기 하고 있던 것 아니었나? 그럼 껴도 되지."

"하일!"

"괜찮아요, 카르텔리 영애. 하일 말대로 본인 얘기니까요."

"......그럼, 얘기 나누세요. 저는 잠시 가게 일을 처리하고 있을게요."

엘피샤는 눈치 좋게 알아서 퇴장해주었다.

로제와 나만 덩그러니 남은 자리에는 적막이 흘렀다. 나는 차마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재회가 워낙 충격적이어서 그를 보면 아직 위화감이 들었다. 실제로 이제는 거의 다른 사람이랬지. 지금 떠오르는 감상을 안쓰럽다고 정의해야 할지,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곁을 떠난 이들이 다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지만, 그래도 당신만은 보란 듯이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내 기억 속 당신은 자기 멋대로 막 사는 괴짜 마법사였잖아.

그래. 사실 좀 씁쓸했다.

============================ 작품 후기 ============================

연참 5/6. 마지막 6편째는 3~4시간 뒤에 올라갑니다.

+감정선 완급 조절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네요. 그렇다고 스토리 진행과 관련 없는 사건을 더 만들자니 이야기가 늘어질 것 같고...(10챕 퇴고중) ㅠㅠ글 잘 쓰고 싶어요. 지금보다 훨씬 나아져서 악살다가 더 풍성해지고 재미있어지고 깊어졌으면 좋겠어요.(욕심 게이지 맥스) 열심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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