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6 9. 마법 같은 비밀 =========================
"왜 날 그런 눈으로 보지, 옛 제자님?"
세월이 흘러 8년 만에 다시 만난 옛 스승이 말문을 열었다. 내가 스무 살이듯 로제, 아니 하일도 이제 서른두 살이다. 그러나 치기어려 보일 정도로 액면가는 젊었다. 마법사라서 안 늙는 건가. 부럽네.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딱 그만큼 이성적인 어조로 말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옛 제자라는 호칭을 들이밀지 마요, 하일 리네토 엘비올리스."
"내 진짜 이름을 알았다고 이제 로제 취급도 안 해주는군,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
"다른 인격인 셈 치기로 했는데요. 8년 전의 그 사람은 로제고, 현재 내 앞에 있는 사람은 하일인 걸로 할래요. 깔끔하게."
"그 깔끔한 일처리 마음에 들었어."
하일이 감탄했다는 듯이 박수를 두어 번 쳤다. 이 인간 정말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걸까. 성격을 종잡을 수가 없다. 로제의 얼굴을 하고 저딴 윙크는 하지 말란 말이다. 목이 타서 아까 엘피샤가 준 음료수를 홀짝이고, 그를 날선 시선으로 관찰하다가 다시 대화를 이었다.
"2년 전에 죽었다면서요. 그건 무슨 뜻으로 한 말이죠?"
불량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앉은 로제가 비식 웃음지었다.
"말 그대론데. 난 1060년에 죽은 사람이거든. 엄연히 말하자면."
와인색 장발 한 줌이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저 색은 아마 프리제 왕국의 것이겠고. 얼음 호수 같은 은청색 눈이 또르륵 굴러 내 눈을 직시했다. 그럼 저 색은 엘비올리스의 것이겠군. 두 국가의 색이 섞이니 8년 전에는 외양만으로 어느 나라 왕족인지 알 수 없었던 거다.
"듣기론 그 때 마법진 발동 오류로 관통상을 입었다더라고. 심장에. 한 방에 훅 갈 뻔했는데 그 찰나에 이 똑똑한 머리가 큰일을 해냈다지. 이상해, 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이것도 조작된 기억일까?"
그는 장난스럽게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선택을 무지하게 후회하고 있다는 얼굴이다. 왜인지 알 것 같다.
"당신의 마법은 목숨까지 되돌릴 수 있는 건가요?"
"목숨이라는 가치에 상응하는 기억을 버릴 준비가 되었다면, 얼마든지."
한숨이 다 나온다. 풀이하자면 엘피샤를 목숨 바쳐 사랑했다는 뜻 아닌가.
"이렇게 열정적인 고백은 웬만하면 당사자 앞에서 하시죠? 엉뚱한 사람한테 하지 말고."
"고백이라기엔 너무 구차하다는 생각 안 하나, 루 할레시온 대공녀?"
"글쎄요. 그냥 적응이 안 되네요. 과거의 로제는 구차하다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었어서."
"무가치한 소리입니다. 제가 모르는 그 자에 대해 서술해봤자 제 화만 돋울 뿐이니, 자제하시길 부탁드려도 될런지."
"오. 방금 말하는 꼴은 좀 로제 같았어요."
침착하게 도발했다. 마땅하게 내세울 만한 이유는 없이. 뒤늦게 제 말투의 일시적인 변화를 깨달은 하일이 입술을 무성의하게 물어뜯었다. 그리고는 흐트러진 표정을 정돈하고 차분히 비난했다.
"......아하. 넌 이미 내가 가장 비참해지는 지점이 어디인지 아는 거군. 그래서, 나랑 싸우려고?"
"그럴 리가요. 내가 미쳤다고 마법사에게 함부로 칼을 들이밀겠어요? 난 그저 당신이 어떻게 바뀌었나 궁금했을 뿐이에요."
"내가 말하지 않았나? 찔러보기는 그만 두라고."
"알았어요, 여기까지만 하죠."
슬쩍 한 발 물러섰다. 아직은 그의 기저에 로제 시절의 어투가 남아있다. 중간에 예고 없이 툭 튀어나오는 게, 꼭 이중인격 같다. 잘 대처해야겠어.
인간상 파악은 거기서 끝내고, 궁금한 점을 더 캐물었다. 마법 사용의 대가로 지불해 사라진 기억들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 다시 숙지하는 거냐는 질문에, 하일은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고작 인간의 손으로 기록한 문서만으로 마법의 힘을 거스를 수 있겠냐고 되묻더라. 엘피샤와 한때 연인관계였다는 것도 다른 강한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전달받았다고 덧붙였다.
어제 시안에게 처참히 죽임당한 블로텔지아의 염탐꾼 일도 슬쩍 떠보았다. 그러나 그는 비상식적인 언행으로 내 주의를 돌리며 어물쩍 회피했다. 블로텔지아라고 하면 가장 먼저 걸리는 게 얼마 전에 루 할레시온 저택에 자객이 침입한 사건이어서 대충 넘어가긴 찝찝했다. 강경하게 추궁했더니, 기밀 사항이라 내가 정식으로 반란에 가담하기 전에는 알려줄 수 없다며 선을 그어버리더라. 그래서 우선은 보류하고 주제를 전환했다.
마지막 질문은 나에 관한 거였다.
"저번에 시안 공이 말씀하신 것도 그렇고, 당신의 태도도 그렇고.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예 모르는 모양이네요. 어떤 망각을 위해 나를 내다 버렸죠?"
"그거 왠지 책망으로 들리네."
"대답 안 할 거예요?"
"응, 안 할 건데."
"뻔뻔하군요. 내가 알면 안 되는 사항이라도 끼어있나 보죠?"
"역시 똑똑해. 하지만 이건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 거잖아? 추리는 알아서 하길 바래, 대공녀."
하일은 팔짱을 끼고 으스댔다. 방금 깨달았는데, 그의 말투는 어쩐지 십대 소년의 것 같았다. 기억이 빠져나갔다고 정신까지 어려지나? 그렇다면 정말 별로다, 하일의 능력.
"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옛날 기억 중에 쓸만한 건 죄다 도려내서 이젠 외국인들의 전쟁 한복판에서 열심히 일하게 된 이유도 이해 못하나요, 하일?"
나는 두루뭉술한 답변에 열불이 나서 그를 째려보며 아픈 곳을 후벼팠다. 사람 기분을 거스르고 평정을 깨는 데 이만한 방법이 또 어디 있겠어. 더군다나 지금의 하일은 내가 감정적으로 신경써야 할 친밀한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까 막 나가련다.
"직설적이네. 맞는 말이야. 근데 오히려 이게 편한 걸.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갈망은 너무 어린애 같지 않나? 이미 몇 년 전에 그 마음 깔끔하게 다 청산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원래 하던 대로 흥미만 쫓아가기로 했는데."
"요새는 재미로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네요. 그럼 좀 대충 해도 되는 것 아닌가요? 왜 깐깐하게 굴죠?"
"아무리 그래도 내 목숨이 달렸는데 설렁설렁 해선 안 되지. 예전에 '로제'가 목숨 건 일은 열심히 하라는 조언 해준 적 없어?"
또 새로운 모습이다. 로제는 절대 저런 말을 하는 부류가 아니었거든.
"내 알 바 아니에요. 어차피 그 시절 기억이 그다지 선명한 편도 아니고. 대답하기 싫으면 말아요. 내가 알아서 답을 찾을 테니까."
퉁명스레 말하고 음료수를 들이켰다. 소리 나라고 일부러 얼음을 부득 씹었더니 하일이 날 비웃었다. 난 차게 식은 눈으로 그에게 무언의 욕을 퍼부었다.
***
- 라니아에게.
어제 네가 '내일은 당신이랑 놀 생각이에요'라고 말해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연락이 없냐? 서운한걸. 이 편지 받으면 백 번 반성하면서 답장해라. 흥. S.M. -
엘피샤와 하일을 만나고 집에 돌아와 여유롭게 목욕하고 나왔는데, 좀 뜨끔한 내용의 서신이 내게 도착했다. 급격히 난처해져서 머리도 덜 말랐는데 우선 종이와 펜부터 꺼내들었다.
"아가씨, 머리를 말려드릴까요?"
대강 고개만 끄덕였다. 마리와 다른 하녀 두엇이 내 의자 뒤나 옆으로 가서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톡톡 털며 말려주었다. 덕분에 나는 곧장 답장을 써내려갈 수 있었다.
- 미안해요,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만. 그 날 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당신도 알잖아요. 한 번만 봐줘요. 대신 이틀 뒤에 정말로 만나요. 하루종일. 내 일정은 다 비워 둘게요. R.E.lH. -
오늘 밤에 대공 부부와 상의를 하고, 내일은 시안에게 답변을 줄 거라서 그와의 만남은 내일모레나 되어야 가능했다.
전서구에 매달아 보낸 편지가 짙은 노을 속으로 멀어져가는 것을 확인하고 창문을 닫았다. 초저녁에 나타나 얇게 하늘을 덮은 뭉게구름 때문에 오늘따라 노을이 진했다. 예뻤다. 제대로 자리를 잡고 하녀들에게 여러가지 목욕 후 케어를 받는 동안 나는 주황색 하늘을 멀거니 응시했다.
무심코 창가로 손을 뻗자 지평선 너머로 막 넘어가려는 마지막 태양이 손틈으로 빛살을 흘려보냈다. 눈이 살짝 부셨다. 여기도 원래는 해질녘처럼 평온한 세상일 텐데. '라니아'의 탑에서 구경하는 석양은 가깝지만 핏빛이다.
밤이 다가온다. 점차 청보라색으로 변하다가 이윽고 검어지는 것을 보면, 밤은 원래 푸른색이겠지. 붉은 노을과 섞여서 제비꽃처럼 물들었다가, 무수한 별을 거느리고 칠흑으로 어두워지는 거겠지.
저 멀리 뽀얀 달이 희끄무레하게 떠 있다.
문득 새 울음소리가 영롱했다. 전서구가 돌아온 것이다. 하녀들을 물리고 혼자 앉아 휴식하던 나는 편지를 받아 펼쳤다.
- 웬일이래, 네가 사과를 다 하고. 아무튼 그럼 이틀 뒤에 온종일 놀기로 한 거다? 나도 일정 다 비워야겠다. 저녁이네. 잘 쉬다 자라. S.M.
ps. 좋아하는 풍경 아무거나 알려줘. 새하얀 설원 말고, 다른 걸로. -
좋아하는 풍경? 맥락 없는 질문에 잠시 고민에 빠지려다, 창문 너머를 보고 바로 답을 내렸다. 작고 네모난 종이에 깃펜으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글자를 썼다.
- 해 지는 풍경이 좋아요. 여덟 시에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당신도 잘 자요. R.E.lH.
그 뒤로 답장이 하나 더 왔다는 건 다음날 아침에야 알았다. 여덟 시에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셀리아를 방으로 올려보낸 다음 시안과 관련한 논의를 하느라 자정 넘어서야 침실로 돌아온 탓이다. 빠른 시일 안에 내려야 할 결정이 많아서 이야기 내내 머리가 복잡했다. 피곤해서, 나는 옷만 갈아입고 바로 침대에 푹 파묻혔다.
아침식사를 하며 뒤늦게 확인한 그의 편지에는 딱 한 줄이 쓰여있었다.
- 너 만날 날 기대된다.
왜인지 글 끝에 이니셜을 박지 않고 보낸 그 편지를 읽고, 나는 먹던 푸딩을 뿜을 뻔했다. 매운 걸 먹은 것도 아닌데 얼굴이 화끈했다. 갑자기 왜 이러지, 이 남자.
나는 루 할레시온 대공가를 대표해 시안의 별장에 당도했다. 하일이 대충 뒤집어 엎었던 핏자국은 아마도 베르크 레긴과 그 수하들에 의해서 다시 정돈된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새로 심긴 잔디가 생생하게 푸르렀다. 녹음이 우거진 옛 추억의 무덤으로, 나는 한 가지 선택을 하러 왔다.
"오셨습니까."
반란군의 수장, 시안 리델라 에온이 고아하게 미소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사무적으로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얼음 결정을 손 위에 띄운 채로 장난을 치던 하일이 눈을 찡긋했다. 엘피샤는 우아하게 눈을 접고, 말없이 인사했다. 베르크 레긴은 근위기사단장 출신이라 그런지 깍듯하게 군인식 경례를 했다. 내가 부기사단장 직에 있는 친구를 둬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당황할 뻔했다.
그 밖에 각국의 사람들이 꽤 많았다. 대략 열 명 정도 되는 것 같다. 엘피샤의 친척 중 한 명, 블로텔지아 왕실의 대변인, 리우네아의 비밀신관도 있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하일을 제지하는 데 제격이라는 그의 충실한 심복 또한 자리에 참석했다. 역시나 엘비올리스 출신이다. 순수 프리제인은 없었다. 황실 비사록에 적혀있듯이 프리제 왕족들은 침공 당시 죄다 음독자살을 했으니까, 이 집단에 도움이 될 만한 마법사가 남아 있을 리가 없지.
그들과 나는 모두 지하실에 마련된 넓은 회의실 같은 곳의 원탁에 둘러앉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없던 공간이니 시안이 이사 오면서 새로 만든 게 분명하다.
"제가 이 계획에 참여하겠다고 확정드리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각국의 관계자를 불러 모으셨군요."
"대공녀와 제가 단 둘이 만나면, 거절의 답을 들었을 때 후속 조치를 하기가 덜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나긋하게 웃으면서 잘도 저런 말을 하는군. 부아가 치밀려 했으나 지그시 내리눌렀다. 여기는 엄연히 공석이다. 건조하게 물었다.
"거절하면 그 즉시 나를 해하겠단 뜻인가요?"
감정이 사그라든 눈을 살며시 휜 채로, 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의뭉스러움이 나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말 안해도 알지 않냐는 대꾸가 담긴 표정은 하일이 대신 지었다.
상호간에 무언의 탐색전이 오고 갔다. 눈도 잘 깜빡이지 않고, 팽팽한 긴장 속에서. 리우네아의 비밀신관이 불편한지 눈썹을 찡긋거렸다. 하일은 그와 대비되게 천하태평이었고, 시안은 그림같이 웃는 얼굴 그대로 나를 직시했다. 나는 내가 어느새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쥐고 있음을 알았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을 대표해 묻겠습니다. 이 전쟁에 가담할 생각이신지요?"
눈치를 살짝 보던 엘피샤가 얼음 같은 침묵을 깨고 내게 확실한 선언을 요구했다. 난 여기 도착한 이래로 계속 재촉당하고 있었다. 자기들의 진실을 지나치게 많이 아는 황족의 존재가 두렵겠지. 우습다. 입가만 끌어당겨 웃는 척하고 내 뒤에 선 호위에게 고갯짓했다. 호위는 검집에 꽂힌 칼을 뽑아 원탁 위에 올려놓았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검으로 몰렸다.
나는 사근히, 그러나 단어 하나마다 힘을 실어 말했다.
"아예 대놓고 협박하시죠. 내가 이 자리에서 거부의 의사를 표시하면, 나를 죽이세요."
사실상 승낙이었다. 술렁이는 기색이 한눈에 들어왔다. 엘피샤는 꽤나 안도하는 눈치다. 어제 내가 호의적인 태도로 그녀를 만나러 왔는데도 마음이 안 놓였나보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겠군요."
시안이 칼을 잡았다. 푸른 번개를 닮은 응축된 바람이 일순 검날을 용처럼 휘감았다. 순식간에 검이 몇 조각으로 나뉘었다. 파괴적인 마법이다.
"환영합니다, 대공녀."
그가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눈동자 안에서 은하수가 반짝였다. 마법을 사용하고 나면 나타나는 시안만의 특징임을 이제는 안다.
============================ 작품 후기 ============================
연참 6/6. 연참 완료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9챕터는 끝났습니다. 다음 챕터는 10. 노을과 의미의 세레나데 입니다. 노을과의미, 그리고 세레나데는 저번에 했던 설문 속의 항목이기도 했죠 :) 그 설문은 어떤 식으로든 작품과 연관이 되어있었다고 제가 말씀드렸다시피...ㅎㅎ
+만약 투베 꼭대기에 가면(그럴 가능성이 좀 낮아보이긴 하지만) 연참은 추가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시다시피 기분파이기 때문에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