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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68화 (68/102)

00068 10. 노을과 의미의 세레나데 =========================

오늘 볼 오페라 '엘리자베타'는 요즘 할레시온에서 가장 유명한 극이다. 샤카르와 나는 입장에 성공하고 3층 중앙 박스석에 앉았다. 다행히 연극이 극장 사정상 살짝 지연된 두 시 이십 분에 시작해서 민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었다.

고급스런 푸른색과 은색으로 꾸며진 대극장 안은 한껏 꾸민 귀족들로 만석이었다. 간간히 아는 얼굴도 눈에 들어온다. 조명이 꺼지기 직전에는 저 멀리 측면 3층 박스석에서 에단과 아이린을 봤다. 샤카르 또한 그들을 목격하고 내게 소리죽여 속삭였다.

"방금 저 사람들 에단 녀석이랑 에네아스 영애 맞지?"

"네. 저도 봤어요."

"쟤네 진짜 연애하는 건가......"

"에단이 드디어 오랜 솔로에서 탈출했네요. 축하할 일이죠."

"솔로? 그거 어느 나라 말이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다 실수했다. 다시 태어난 지가 언젠데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거야. 속으로 자책하며 재빨리 할레시온에 잔재하는 현대 한국 사회의 파편을 떠올렸다. 한국인 작가가 써낸 세상이기 때문에 회오리감자를 트위스테이토라고 하는 등 여기에는 여러 언어가 고어나 사어 또는 외국어로 뒤섞여 있다. 솔로는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 그 밖에 많은 언어에 존재하는 단어다. 그 중에서 이 시대 기준으로 가장 보편적인 고어라면 역시 카슈테르 고어, 즉 영어다.

"카슈테르 고어요."

"아, 뭔지 알겠다."

샤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위기를 넘겼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짝 보고 안도하며 의자에 편히 앉았다.

잠시 후 몇몇을 제외한 조명이 모두 꺼지고 무대에 불이 들어왔다.

막이 올랐다.

붉은 벨벳 휘장이 천장 쪽으로 말려 올라가고, 오케스트라가 서곡을 연주한다. 잔잔히 깔리는 선율 외에는 그 어떤 소음도 없었다. 어느 틈에 구했는지 샤카르가 망원경을 건넸다. 굳이 입을 떼 캐묻진 않고 무릎 위에 그걸 올려둔 채 우선 음악에만 집중했다. 눈을 살며시 내려떴다.

중후한 음색이 나를 분위기 속으로 끌어당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오스펠 왕가의 공주 엘리자베타가 국왕 탄신일 연회에서 이웃 나라 왕자의 기사 제이드를 만나고 그와 사랑에 빠지며 시작된다. 경쾌한 춤곡이 깔렸다.

곡이 바뀌자 여주인공이 나타났다. 네피아 황후의 후원을 받는 유명 가수가 오늘의 엘리자베타 역이었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최고였다. 표현력이 굉장히 풍부해서 꼭 그녀가 진짜 엘리자베타인 것만 같았다. 나는 망원경을 들고 열심히 무대를 감상했다.

남주인공인 제이드 경은 조금 뒤에 등장했다. 현란한 파티가 벌어지던 날 밤의 정원에서, 두 주인공은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눈다. 산책의 끝에 만난 것은 공주의 괴팍한 약혼자 칼렌 공작. 엘리자베타가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자 머리가 나쁜 공작은 일단 수긍하고 넘어간다.

장면이 다시 여러 번 전환되었다. 느낌상 이 장면이 1막의 클라이맥스 같다. 배경은 파티 마지막 날. 엘리자베타 공주는 제이드 경이 아닌 그가 모시는 이웃 나라의 왕자와 춤을 춘다. 상심한 공주가 외딴 테라스에 올라 홀로 우울해하고 있을 때, 그 앞의 정원에서 제이드 경이 나타난다. 여기서 두 주인공은 1막의 대미를 장식하는 아리아를 부르며 사랑을 고백한다.

이윽고 노래가 멎고 휘장이 내려왔다. 잠시 휴식시간이었다. 샤카르는 아까 달리느라 헐렁해진 꽁지머리를 고쳐 묶고 있었다.

"어때, 재밌지?"

"근래 본 어떤 오페라보다도 좋네요."

"그러게 말이다. 요새 수도 전체가 이 오페라 때문에 난리인데, 왜 그런지 알겠더라고."

능숙하게 머리를 다 묶은 그가 찌뿌둥한 몸을 풀겠다며 스트레칭을 했다. 나보고 따라하라는데 솔직히 내겐 좀 어려운 동작인 걸. 나와 달리 그는 유연성이 좋았다. 망할. 내일부터 운동할 테다.

다짐을 굳건히 하던 도중 2막이 시작되었다.

파티가 종료되기 직전, 오스펠 왕이 급작스레 엘리자베타의 결혼을 발표한다. 공주는 칼렌 공작과의 결혼을 피해 제이드 경과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그러자 분노한 공작이 그들을 맹렬히 추적한다. 놀란 왕은 공주를 살려서 데리고 올 것을 명하고, 이웃 나라의 왕자는 타국까지 와서 엉뚱한 짓을 저지른 제이드 경을 죽여도 상관없다고 선언한다.

공작은 두 사람의 명령을 받들어 제이드 경을 살해하고 공주를 포박해 데리고 온다. 밧줄에 묶일 때 엘리자베타가 절규하듯 슬픈 노래를 열창하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여기저기서 숨죽여 눈물을 훔쳤다. 샤카르가 나도 우나 싶어서 잠깐 내게 시선을 주었지만, 멀쩡한 걸 확인하곤 살짝 미소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페라의 결말 부분에서 엘리자베타는 칼렌 공작과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결혼식을 올린다. 아름다운 순백의 드레스를 입었으나 전혀 기쁘지 않은 표정의 엘리자베타가 가녀리게 독백하는 노래를 부르며 극은 끝이 났다.

극장 직원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불을 켜고, 커튼을 닫았다. 반은 울먹이고 반은 환호하며 큰 박수와 함께 앙코르를 외쳤다. 나도 작은 목소리로 가담했다.

커튼콜이 진행됐다. 주인공을 비롯한 연기자 전체가 나와서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고, 하이라이트 부분의 아리아를 불렀다. 막이 끝나면 이야기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걸 보고 있자면 어딘지 모르게 안심이 되고, 동시에 끝까지 행복하지 못한 줄거리 속 인물들을 떠올리며 뭉클해진다.

그리고 내 경우에는 마냥 즐거운 희극보다 아릿하게 저며드는 비극이 기억 속에 더 오래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그게 바로 비극의 매력이 아닐까.

오페라를 다 보고 밖으로 나왔더니 벌써 해가 저만치 끌려가고 있었다. 정말 가감없이 딱 네 시간 걸렸군. 여섯 시. 이제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바람이 약간 서늘했다. 맑은 공기를 쐬니 상쾌해졌다.

"저녁은 어떤 걸로 할래?"

계단을 내려가며, 샤카르가 물었다. 나는 그가 에스코트 삼아 내민 듯한 손바닥 위에 내 손을 살며시 포개고 발을 내딛었다.

"당신이 자주 가는 선술집 어때요? 나도 맥주 마실 수 있는데."

눈앞에 펼쳐진 중세에서 근대 양식의 건축물이 늘어선 중심 시가지의 전경이 새삼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한 번도 해외 여행을 가지 못한 윤이설이 사진으로나마 접한 유럽풍 거리와 비슷했다. 내가 이런 데서 이십 년째 살고 있다는 게 가끔은 더없이 신기하다.

"음, 거긴 좀......대귀족이 오갈 만한 데는 아닌데."

평민이건 귀족이건 제한 없이 아무나 들락거리는 주점에 날 선뜻 데려가기는 망설여지는지 그가 곤란한 투로 얘기했다. 나는 잔뜩 의아한 척했다.

"멘데로프 가의 후계자는 대귀족이 아니었나 봐요?"

"에이, 난 거기 처음 갔을 당시에 완전히 내놓은 자식이었으니까 가능했지."

"내놓은 자식이라기보단 스스로 뛰쳐나간 가출 청소년에 가깝지 않았던가요......"

"아, 아니거든!"

놀림조로 말꼬리를 흐리자 서투른 반박이 돌아왔다. 나는 빙그레 미소짓고 그에게 의지한 손을 붕붕 흔들었다.

"가서 얼른 한 잔만 먹고 나오면 안 되나요?"

"......"

"싫어요? 난 괜찮은데."

"아니, 그."

"샤카르?"

나는 생글거리는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압박이나 다름없는 재촉이었다. 샤카르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웃음기 섞어 말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대공녀님? 내 단골 술집이라면 세 개쯤 있는데."

"우리 다음 목적지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죠, 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우리는 오페라 극장을 벗어나 어디론가 걸었다. 샤카르가 알아서 길을 잡았기에 난 순순히 따라가기만 했다.

"그러지 뭐. 근데 다음 행선지가 또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

"모를 리가 있겠어요? 당신이 편지에다가 내가 좋아하는 풍경을 적어달라고 했잖아요. 거기로 데려갈 것 아니었어요? 저녁 먹고 나면 마침 해 지는 풍경을 구경하기 딱 좋은 시간대겠네요."

"너 눈치 정말 귀신같다......"

"그게 아니라 당신이 엉성한 거 아닐까요."

"라니아 네 언어 폭력을 누가 말리냐."

"폭력이라뇨. 사실을 알려준 것 뿐이거든요?"

"의도에 상관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폭력이라고 느끼면 그게 바로 폭력인 거지!"

"맞는 말이네요. 알았어요, 미안해요."

"인정 빠르네. 네가 그러니까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지잖냐."

샐쭉 웃었다. 그는 툴툴거렸다. 저게 진심으로 화난 상태는 아니라는 걸 나는 이제 눈 감고도 맞출 수 있다.

"뭘 새삼스럽게 그래요."

"그래도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니까 됐어."

"맞아요."

그렇게나 우리는 오래 알고 지냈다.

그와 나는 어언 오 년째 교류하고 있다. 때로는 멀어지기도 하고, 다시 친해지기도 하고. 돌이켜 생각하면 내 지인 중 가장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곁을 지켜준 것 같고. 각자의 과거에서 잃은 것만큼 많은 추억을 새로이 쌓았고.

아직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들이 한아름이지만, 그래도.

이제서야 한 가지 확신은 든다. 너무 늦었을까.

"맞다, 물어본다 해놓고 잊고 있었네요. 당신,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 혹시 연습용이었어요?"

"어떤 걸 말하는 거야?"

"너 만날 날 기대된다, 라고 한 마디 달랑 적어서 보낸 것 말이에요. 끝에 이니셜이 안 박혀있길래 쓰다 만 건가 했죠."

"......뭐, 뭐라고? 그게 너한테 날아갔다고?"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라서, 어리둥절한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갑자시 샤카르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이 급격히 노을색으로 변했다.

"으아악! 젠장! 진짜로?"

"네. 그 편지는 자느라 아침에야 받았는데, 아무튼 그렇게 적혀있었어요. 그 편지 내용, 무슨 뜻인지 설명해줄래요?"

"그게 말이야, 그러니까. 실수로 보낸 거야. 실수긴 한데......"

"한데요?"

"......거짓말은 아니었어."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안 이해하려 한 거였나. 어쨌든 그와 나 모두 적잖이 당황한 건 사실이었다. 우리는 그대로 멈추었다. 시간의 정지는 터울을 한참 두고서야 풀렸다.

"그냥, 그랬다고. 계속 갈까?"

"네, 뭐. 그러죠."

얼떨결에 대꾸하고 원래 속도로 돌아와 걸었다. 손이 여전히 잡혀 있다는 걸 깨달은 시점은 그로부터 또다시 한참 후였다.

도착한 곳은 의외로 고급진 카페 느낌도 나는 가게였다. 느릿한 리듬의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한 명이 가게 안쪽 중앙에 있었다. 멜로디가 어디선가 얼핏 들어본 듯하다.

우리는 바 같은 곳의 높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 안주와 술을 시켰다. 초저녁부터 취하는 건 별로라서 적당히 시음만 하기로 하고 맥주 한 잔만 주문했다. 맥주부터 먼저 나오고 안주는 그 다음에 우리 앞에 놓였다. 큼지막한 접시에 별 모양으로 칼집이 난 짭조름한 소세지, 향신료를 곁들인 얇게 썬 돼지고기, 칠리로 양념된 감자 등이 담겼다.

맥주를 옥신각신하면서 정확히 반 잔씩 나눠 갖고, 포크로 열심히 음식을 입에 넣었다. 은근히 입맛 까다로운 샤카르가 단골집으로 찍어둔 가게니 맛이 없진 않을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했지만, 과연 기대 이상이었다. 매일 스테이크만 썰다가 이런 음식과 오랜만에 마주하면 솔직히 반갑거든.

한창 그렇게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는데, 샤카르가 목소리를 낮춰서 나를 불렀다. 뭔가 하고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눈을 돌렸더니 에단이었다.

"쟤 왜 저기서 혼자 저러고 있냐."

"에네아스 영애는 집에 보내고 혼자 저녁 때우러 왔겠죠. 뻔하잖아요."

"불쌍한데 합석시켜줄까?"

내게 묻는 샤카르가 약간 확신 없는 얼굴을 했다. 그는 에단과 내 사이를 잘 아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제 지나간 일인데 더 버텨서 뭐하나 싶어 그냥 알아서 하라고 했다. 샤카르는 바로 가서 에단을 반쯤 질질 끌다시피 해 데리고 왔다. 나는 들고 있던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여상히 인사를 건넸다.

"이런 곳에서의 만남은 생소하네요, 에단."

"아, 안녕하십니까, 라니아 대공녀."

"혼자서 식사중이었나요?"

"오늘이 기사단 근무가 없는 날이라 단원들 데리고 오기가 애매해서 혼자 왔습니다."

"그랬군요. 옆에 앉아도 돼요."

"아. 네."

이미 약간 취했는지 양 볼이 언뜻 발그레한 에단이 주춤거리며 의자에 올라앉았다. 나를 중앙에 두고 양 옆에 앉은 남자 둘은 어색한 눈으로 대화할 거리를 찾아 머릿속을 헤메는 모양이었다. 표정이 영 애매모호했다. 이럴 땐 내가 나서야지. 무심한 척 말을 꺼냈다.

"아까 오페라 극장에서 에네아스 영애와 함께 있는 걸 봤어요. 그 시각에 어떻게 오페라를 보러 왔나 했는데, 비번이었군요."

"대공녀께서도 거기 계셨습니까? 전 몰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곳에서 왜 멘데로프 영식과 함께 계시는지......"

에단의 의심스런 눈초리가 샤카르에게로 꽂혔다. 금방이라도 식은땀을 흘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그는 변명했다.

"난 아무 짓 안 했다? 얘가 가고 싶다고 했어."

"얘......?"

에단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예의 차린 호칭은 샤카르와 나 사이에선 이미 집어던진지 오래라 상관 없는데, 에단에게는 퍽 놀라운 일일 거다. 샤카르는 이제 곤란해 죽겠다는 얼굴이다. 물론 난 구제해줄 생각이 별로 없었다.

나는 샤카르가 에단에게 정중한 어투로 무한 추궁을 당하기 시작하는 걸 턱 괴고 구경했다. 재미있네.

============================ 작품 후기 ============================

방학했습니다!!!(우주최고신남) 기간이 2주밖에 안 되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기분 좋네요:D 3장을 끝내버릴 각오로 열심히 악살다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오랜만의 해시태그. 한 번 맞춰 보세요! 난이도는 중하, 정답은 맨 아래에 있습니다.

#대사만으로_캐릭터를_알아맞혀보자

1) 어이, 에빌!

2) 대공녀님께서는 참으로 어려운 분이십니다.

3) 에빌, 넌 햇살을 닮았어.

4) 나는 널 위해 뭐든 할 생각이다. 자격이 없더라도.

5) 미쳤어요? or 미쳤구나, 너./아. 이런. 망할.

6) 그, 저, 라니아 대공녀!

7) 이것을 부디 기억하세요, 그대.

8) 엥? 그렇습니까?

차례대로 샤카르, 프리드리히, 르쉬네, 라인하르트, 라니아, 에단, 시안, 세크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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