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9 10. 노을과 의미의 세레나데 =========================
결국 나와 오늘 만나서 뭘 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탈탈 털리고 나서야 샤카르는 풀려났다. 나는 그를 향해 얄밉게 샐쭉 웃어주었다. 샤카르가 조용히 울분을 터뜨렸다.
피아노곡이 몇 개쯤 바뀌었다. 저 밖으로는 해가 슬슬 지고 있다. 일곱 시쯤 됐으려나. 에단은 맥주잔의 반을 원샷하고 내려놓았다. 샤카르가 그를 불길하게 쳐다보았다.
"쟤 저러다가 조금 있으면 맛 가서 막 마셔댈 텐데. 적당히 어울려주다가 얼른 튀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당인 에단이 저거 가지고 멈출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에단, 요즘 일은 어때요?"
"네? 어떤 일 말입니까?"
"아무거나요. 기사단 일이든, 가문 일이든, 연애든."
연애라는 단어에서 우물거리던 음식을 뿜을 뻔한 에단이 꽉 막힌 기침을 하며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샤카르가 팔을 내 등 뒤로 쭉 뻗어서 에단의 등을 퍽퍽 때렸다. 그리고 나를 장난처럼 힐난했다.
"라니아, 이 녀석한테 직구를 던지면 어떡하냐."
"너무 직설적이었나요?"
"어. 너 방금 엄청나게 직설적이었어."
"그런가요. 미안해요, 에단. 사과할게요. 에단이 에네아스 영애와 사귄다는 소문이 요즘 사교계에 파다하길래, 궁금해서 그만."
맥주를 마저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서야 진정한 에단이 난처하게 하하 웃었다. 얼마나 거하게 사레가 들렸던지,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언제 소문까지 난 건지 모르겠습니다."
부정보다는 긍정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꽃물 든 하늘'과 틀어져도 너무 틀어진 전개로군.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여러 사건에 얽히며 황태손과 열렬히 사랑하고 있어야 할 아이린이 최근까지 금족령에 묶여 있는 바람에 줄거리가 많이 달라졌다. 그 때문에 아이린은 나에 대한 복수고 뭐고 제대로 하는 활동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포기한 지 오래인 주인공 지위를 아이린 역시 알아서 박탈당했다. 주인공 자리가 대체 누구 것이길래 자꾸 공석이 되는 걸까.
아무튼 주인공에서 단역으로 배역이 바뀐 아이린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건 오로지 에단 뿐인 듯하다. 세계가 뒤집어져도 바뀌지 않는 건 분명히 존재하긴 하나보다.
"사교계 소문은 빠르니까요. 특히나 연애사처럼 가십거리가 될 만한 소식이라면 금세 퍼지기 마련이죠."
에단은 가만히 수긍했다. 그리고는 안주 한 접시와 맥주를 새로 주문했다. 낌새가 아예 진을 칠 작정이었다. 샤카르는 조금 남은 맥주를 마저 다 마셨다. 드러난 바닥을 응시하곤 뭔가 아쉬운지 갈등하는 기색이더니 결국 단념하더라. 그 사이 직원에게 돈을 선불한 에단이 잊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아, 맞다. 대공녀와 멘데로프 영식 사이의 소문도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 두 분께서 교제하신 지 벌써 몇 달째라고 하던데, 거짓이 아니었던 겁니까? 하긴 오늘도 이렇게 함께 계시니 진짜겠지요?"
이번에 사레가 들린 사람은 나였다. 하필이면 소세지를 삼키고 있을 때 그런 말을 해서는. 몇 번 캑캑거리자 왜인지 지나치게 멀쩡한 샤카르가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아까 에단을 패듯 하던 것과는 달리 꽤나 상냥하게.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물었다.
"대체 어디까지 퍼졌길래 소문에 교제 기간까지 상세히 실린 거죠? 아,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가 진짜 사귄다는 게 아니고."
사족을 막 덧붙이며 더 말하려는데 입 앞에 웬 검지가 나타나서 멈추었다. 짙게 웃으며, 샤카르가 내게 눈을 찡긋하고 능청맞게 말했다.
"왜 안 사귄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래, 라니아. 나 상처받았다?"
이건 또 무슨 전개지. 일단 샤카르가 뭔가 나와 작당하고 싶어하는 걸 알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얌전히 있어줬더니 갑자기 손을 덥석 잡는 게 아닌가. 뭐 하냐는 식으로 쳐다봤지만 소득은 없었다. 샤카르는 보란 듯이 손을 흔들며 입가를 끌어당겼다.
"한 몇 달 됐지? 우리 연애한지."
"당신 미쳤어요......가 아니라. 네, 그렇죠. 아마?"
눈썹을 꿈틀하며 애써 맞장구쳐 주니 에단 몰래 내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이제 알겠다. 샤카르는 예전부터 나와 만나서 전략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걸 데이트로 포장해서 타인의 의심을 피하곤 했다. 에단에게도 '동업자로서의 우리'는 숨기려는 건가. 엄연히 따지자면 에단은 황태자파 가문의 후계자니 이상한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자꾸 얼굴이 화끈하고 창피해지는 걸 어떡해.
그와 내가 사귄다?
심장이 빨리 뛴다. 저녁이라 기온이 그리 높지 않을 텐데 이상하게 덥다. 익숙해진 더위라 나쁠 것은 없다.
나는 샤카르와 에단의 시선 모두를 슬쩍 외면하고 소세지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숨기려던 치부를 들킨 것마냥 이상야릇한 기분이었다.
노을이 가장 아름답기 전에,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먼저 일어났다. 에단 앞에는 맥주잔이 점점 쌓이고 있었다. 샤카르는 내가 입가심으로 할 박하사탕을 찾는 동안 선수를 쳐서 계산을 치뤄버리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밥 살 돈 정도야 내게도 넘치도록 있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박하사탕 두 개를 손에 들고 밖으로 나왔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쓸고 지나갔다. 샤카르는 정보상 직원으로 보이는 자와 잠시 말을 나누었는지 이제 막 돌려보내고 있었다. 나는 박하사탕을 입 안에 넣고, 그에게도 하나를 건넸다.
샤카르는 사탕을 먹으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하긴 싫었는지 조용히 내 손을 그러쥐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마찬가지로 말없이 따라갔다. 행선지를 의심하지 않고 누군가의 리드에 순응해 동행한다는 건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불가한 영역이었다.
큰 도로의 끝물에 작은 마차 하나가 서 있었다. 우리는 마주보고 앉았다. 말굽 소리와 함께 나는 일상의 범주에서 벗어났다.
짧은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수도 외곽으로 간다는 말을 듣자 더욱 그랬다. 얼마만에 집 근처를 벗어나는 걸까. 르쉬네가 죽어 수도 외곽에 묻히고 나서, 나는 스스로 수도에 갇혔었다. 내 의지로 과거에 수몰되기를 택한 것이다.
어리석게도. 또한 현명하게도.
나는 문득 하염없이 웃고 싶어졌다. 그러면서도 기대가 됐다. 어디에 다다르게 될지 알 수 없는 나의 여행이.
마부는 능숙하게 행로를 조정하고, 말의 발굽 소리와 푸레질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소화나 시킬 겸 내 앞에 앉은 샤카르와 시답잖은 일상 이야기를 떠들었다.
나는 그 말미에 미래를 생각했다.
마차를 탄 덕에 얼마 가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문이 열려 드러난 광경과 마주하고, 오랜만에 순수하게 놀랐다.
"여기는."
박하사탕이 다 녹아서 숨이 달콤했다. 바람을 따라 눕는 잔디와, 굳건한 나무가 있는.
"너라면 예전에 와본 적 있을 것 같긴 한데, 여기만큼 석양 예쁜 데가 없대서. 어때?"
이곳은 수도의 남쪽 경계를 두르는 언덕 지대다. 살풋 미소했다. 이 시각에 여기 오는 건 처음이다.
"좋네요."
귓가를 휘감아 부는 바람이 연보라색이었다. 마차가 떠나고 치맛자락이 흔들린다. 내 머리카락이 밀빛 강물처럼 휘어져 나부낀다. 손가락으로 쓸어넘겨 정리했다. 샤카르의 헐렁한 셔츠 자락이 펄럭인다. 짙푸른 머리가 볼께를 쓸고 지나간다. 그는 그저 바람을 즐기며 숨을 길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우리는 여러 개의 언덕 중 가장 전망이 좋고 오르기 쉬운 것을 골라 천천히 꼭대기로 향했다. 발 밑에 핀 자그마하고 함초롬한 야생화를 밟지 않게, 조심히. 시야가 점차 트였다. 구름에게 가까워지게끔.
늙은 나무 한 그루가 당당히 지키고 선 언덕 위에 넓은 천 하나를 깔고 나란히 앉았다. 되도록이면 간편한 옷을 입고 나오라던 게 이 일정 때문이었구나. 이제 알겠다. 덕분에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잎사귀 몇 개가 후두둑 떨어진다.
샤카르는 루 할레시온 가문 저택의 정원에서 단 둘이 해 지는 것을 감상했던 내 생일날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딘가 애잔하게. 멀거니 울긋불긋한 언덕과 구름을 들여다보는 눈이 태양처럼 금빛이었다. 언제나 저 눈과 마주하면 잠시 할 말을 잃곤 하지. 모두 아는 것 같고, 뭐든지 알아차려 줄 것 같고, 실제로 그렇고. 다정한데다가, 상냥한데. 이런 사람이 내게는 처음이라서. 실은 아주 오랫동안 어찌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표현하지도 않았다. 숨기지 않으면, 숨기는 것을 조금이라도 들키면 큰일날 것만 같아서. 그가 들을 리 없는 속생각까지 저지하며 모른 척하고 아닐 거라고 단정지었다.
나만의 감정이었다. 나만의 세계였고. 그러나 만약 이 안에 그를 들인다면.
공기의 흐름이 나를 감싸고 붕 띄웠다. 아찔했다. 한동안 나는 불그스름한 뭉게구름에 파묻혔다. 비눗방울이 터지듯 유의미한 시선을 회복한 것은 셈하지 않은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샤카르."
어느 때보다 붉은 하늘을 응시하기란 여간 설레는 일이 아니었다. 분위기에 취한다는 것은 모르는 영역이 아니다. 늘 생소할 뿐.
"응?"
이름 모를 애상 속에 빠져있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한 박자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말했다.
"혹시 피곤하지 않아요?"
"난 멀쩡한데. 왜?"
"나는 졸려서요."
샤카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푸흐 웃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기 어깨에 나를 기대게 했다.
"너 요새 참 열심히 살긴 하지. 힘들면 쉬어. 이왕이면 내 옆에서."
장난스런 끝맺음에 픽 웃었다.
"지금 그러고 있잖아요."
"아이고, 그래. 잘했다."
"영혼 없는 칭찬이죠, 그거?"
"내 영혼을 의심하지 말라고, 라니아. 네 앞에서 대부분의 나는 아주 그냥 절절하기 그지없는 진심이니까."
"대단한 위인 나셨군요. 근데 대부분은 또 뭐예요? 당신이 나한테서 숨길 만한 게 있긴 하던가요."
"아니 잠깐, 나도 알리지 않은 사생활 정도는 있을 거란 생각은 아예 안 하는 거야? 내 사생활한테 왜 그러냐."
"예를 들어 어떤 게 있는데요? 뭐, 당신의 연애 전력 이런 거 말하는 거예요?"
"크흠......잠깐 눈 붙여라. 피곤하다며."
쿡 찌르자 그가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나는 몸을 약간 웅크려 더 가까이 붙었다. 바람결에 섞여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가 어쩐지 사탕에 비견되게 달콤했다. 참 좋다.
"말 돌리는 거 되게 어색해요, 당신."
"사람이 좀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 너무 완벽하면 인간미 없어."
그래. 사람이 늘 옳은 선택만을 내린다면 그건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나는 내심 그의 말에 수긍했지만 괜히 선심쓰듯 얘기했다.
"그럼 인류 차원에서 이해해줄게요."
"이야. 고마워 죽겠다."
"......나보고는 죽는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말라더니 정작 자기는 막 하는군요?"
"이런, 미안. 방금 그건 내 무의식이 저지른 실수다."
동시에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평선 근처로 다가가는 해가 밝은 여명을 짙게 흩뿌린다. 졸리다는 말은 애초에 핑계였다. 자정 가까이나 되어서야 자기 일쑤인 내가 여덟 시가 채 안된 지금 졸릴 리가 없지. 샤카르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거짓말로 그의 단단한 어깨를 빌렸으니 되었다.
다시 대화가 허공에 녹아들자 샤카르가 가만히 내 등 뒤로 팔을 뻗어 어깨를 감싸안았다. 어깨동무하자는 건 아닌 것 같고. 나는 눈만 깜박였다.
하지만 왜일까. 원인도 정체도 안개 속에 있는 어떤 깊숙한 감정에 마음이 간지러웠다. 무언가 못내 아쉬웠다.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미처 전하지 못한 물건이 있었던가.
나로서는 도저히 찾아내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나름대로, 서툴겠지만 정의를 내려 볼까.
"샤카르. 내가 저번에 물어본 것들 말이에요."
"음? 어떤 거? 아. 미로 정원에서 있었던 일 말하는 거구나."
그는 조금쯤 불안하게 대꾸했다.
"맞아요."
내게 의미가 있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 라니아가 된 이래 처음으로 의미를 부여한 것은 다름아닌 내 목숨이었다. 덤으로 받은 생명, 한낱 허상에 불과한 세상이라 치부하던 것은 다섯 살 즈음에 르쉬네를 만나면서 끝냈다. 그녀는 대단한 현실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유난히 덤벙대고 겁없이 굴던 어린 라니아는 그 때부터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소중한 것은 잃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내 생에 지대한 역할을 한 르쉬네는 곧 내 안에서 두 번째로 의미를 가졌다.
세 번째, 네 번째......자랄수록 의미는 더 많이 생겼다.
잃고 싶지 않다면 지켜내야 한다. 지켜내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했기에, 여덟 살 즈음 또래 집단에 처음 들어가기 전까지 끊임없이 소설 속 내용을 분석했다. 하필이면 훗날 악녀가 되기로 정해진 몸이라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어렵사리 내린 결론은 내게 불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아이린의 자리를 빼앗자, 였다. 그것이 끝내 지키고 싶었던 것을 잃게 했다.
나는 손 안에 가득했던 의미를 거의 다 잃었다. 그리하여 웅크린 내게, 누가 자신을 의미로 바쳤던가. 또 나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얼마나 의지했는가.
얼마나 좋아하는가.
나는 팔을 풀고 고개를 들어 샤카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 질문들 중에 결론낸 거 있어요?"
"하하."
진지하게 묻자 그는 대뜸 소리내어 웃었다. 뭐야. 왜 웃는 거지. 꽁해져서 무어라 타박을 주려던 때였다.
"이번에도 눈치가 빨랐던 거냐, 아니면 내가 티를 지나치게 낸 거냐."
눈 앞에 태양이 떴다. 아니, 아니지. 정확히는 그가 사그러드는 석양에 비춘 태양빛 보석이다. 아까 가게에서 보다 말았던 바로 그 목걸이였다. 나 몰래 그와 모종의 이야기를 나누던 가게 점원, 정보상 직원이 차례로 떠올랐다. 과연 목걸이 때문이었다.
"너한테 되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왔어."
내가 놀라서 멀뚱히 숨만 쉬고 있자, 샤카르가 싱긋 웃고 목걸이를 직접 걸어주었다. 손으로 목걸이를 조심스레 매만져 보았다. 정말이지 태양을 닮았다.
"예쁘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했다. 샤카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럼, 당연하지."
뭔가 말해주고 싶은데, 하다 못해 고맙다고 감사 인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저 홀린 듯 목걸이를 쳐다보다가, 샤카르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목걸이를 쳐다보길 반복했다. 그 순간에 해는 지평선에 닿았다. 목걸이가 찬란하게 반짝였다.
"결론, 그거 사실 낸지 오래됐어."
이윽고 샤카르가 고백했다.
"내게 너는 뭐냐고 물었었지?"
고동이 크게 울려서 귀가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아마도 나는 인생 전체에서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파도에 휩쓸렸다. 벅찼다. 목 끝까지 울컥 차오른 물결이 마음을 간지럽히고, 나는 별안간 울고 싶어졌다.
"뭐긴 뭐겠냐."
얼굴이 어느새 가까이에 있었다. 난연한 꽃물이 스민 미소가 싱그럽게 그의 입가에, 눈매에, 볼에 피어났다. 눈을 뗄 수 없었다. 투박한 두 손이 나를 부드럽게 감싼 탓이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꽃물 든 하늘은 저물어가고 있다. 밤의 장막이 내리고 새로이 막이 올라, 서곡이 잔잔하게 깔린다.
이제 인정해야겠다. 선택은 언제나 후회를 동반한다.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
그래도 나는 좋다.
"사랑스런 사람."
속수무책으로 잠겨들어도 좋다.
"좋아해."
아. 나는 결국 눈을 감았다. 샤카르가 내게 입맞추었다. 두 입술이 닿았다. 보드라운 감촉이 생경했다. 떠밀릴까 두려워 한 손으로는 바닥을 짚고, 한 손으로는 그의 옷자락을 힘주어 그러쥐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아릿한 박하향이 흘러들어왔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숨이 찼다.
아무것도 없는 것 속의 모든 것이 작은 연등을 띄웠다. 거스르지 못할 유일한 것, 감정의 바다에서. 입술이 잠시 거리를 두었다가.
"나도."
절대 잊혀지지 않도록. 각인처럼, 그렇게.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
마지막 노을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길고 길게 키스했다.
============================ 작품 후기 ============================
10챕터 끝입니다. 다음 편부터는 11챕터, 전야가 시작됩니다.
서울 기준 오늘 일몰 시간이 7시 47분으로 되어 있어서 그 즈음에 올립니다. 지금 제가 보는 하늘은 마지막 노을이 지는 중이네요.
《오늘의 악살다》
-10챕 소제목 : 노을sunset과 의미meaning의 세레나데
세레나데 : 저녁음악/밤에 연인의 창가에서 부르는 노래. '맑게 갠'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sereno에서 나왔으며 16세기 이후 '저녁때'를 가리키는 이탈리아어 sera와도 관계가 있다.-출처 : 두산백과
S와 M은 샤카르 멘데로프의 약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