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0 11. 전야 =========================
나는 감정 없는 눈으로 앞에 앉은 사람을 응시했다. 하인이 찻물 따르는 소리가 났다. 달각, 찻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손잡이를 들어 예법에 철저히 맞춘 동작으로 한 모금 마셨다. 녹차다.
"이제 무어라 불러드리면 될까요? 반란군주? 아니면 에온의 왕세손?"
우아한 어조로 시비걸듯 질문했다. 시안 리델라 에온은 속모를 얼굴로 미려하게 웃었다. 언뜻 흐린 시선은, 아마도 로제처럼 마법의 반동 현상 때문에 저렇게 망가진 거겠지.
"어느 쪽이든 개의치 않으니 편하신 호칭을 불러주세요."
외려 속이 뒤집힌 건 나였다. 어쩌면 저렇게 평온할까.
"......이제 보니 리데르흐라는 이름도 진짜 미들네임을 제국식 억양으로 변형한 거군요. 정말 뭐라 부를지 애매하네요. 하나같이 의미심장해서."
"곤란하시다면 그저 시안이라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시안, 당신은 언제부터 반란을 준비했던 건가요?"
연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은은한 차향에, 짙은 고동색의 엔틱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응접실은 변함없이 훌륭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바람이 부는지 붉게 변색된 잎이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완연한 가을이다. 한때 르쉬네의 저택이었고, 지금은 반란군 지휘자의 실거주지가 된 이곳은 조금 쌀쌀했다. 나와 시안 사이에 흐르는 기류의 온도에는 못 미치지만.
"할레시온으로 숨어들어 기반을 잡던 기간을 제외하면 대략 십 년쯤 되었겠군요. 아니, 그보다 적던가."
"기록상으로 히엘로 공작가의 전 공작을 제외하고 마지막 일원이 죽은 게 3년 전이던데요."
"'리데르흐 공자'의 이모님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 분은 수 년간 병석에 계셨습니다. 전 히엘로 공작의 정부 이후 처음으로 제거하려 했던 야심가인데, 계획이 어긋나 거동만 불가하게 만드는 데 그쳤었지요."
"실질적인 공작가 장악 시점은 그보다 전이었겠네요."
"네. 6년 전 전대 공작의 사망 후부터라고 보시면 됩니다."
멀찍이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뻐꾸기는 대표적인 탁란조다. 다른 새의 둥지에서 태어난 뻐꾸기 새끼는 다른 알과 새끼를 모조리 밖으로 밀어 던진다. 그리고 먹이를 독차지해 빠르게 성장한다. 시안은 그 새와 닮았다. 비난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해서 차지한 공작가의 권력으로 무엇을 했느냐가 궁금했다. 최근 몇 년간의 겉으로 드러나는 히엘로 공작가의 행로는 너무 미미해서, 없는 취급을 당하기까지 했다. 시안의 사정상 지나치게 튀면 안 좋다지만, 힘들게 잡은 기반으로 뭔가 반란에 도움이 되는 짓을 분명 했을 텐데. 나는 그것에 관련한 질문을 했다. 시안은 옅게 미소하고 차를 마셨다.
"행동 반경이 넓어졌고 국내외 상류 사회로의 은밀한 진입 또한 용이해졌으니 히엘로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큰 이익이지요. 하여 위험부담을 감수하며 할레시온 내부의 혼란한 권력 구도에 끼어들지는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5년 전의 그 숙청처럼, 이 나라의 귀족 사회는 순식간에 변모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대를 필요로 하는 거예요."
"이미 할레시온 상류 사회에 깊숙히 개입하고 있고 배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조력자를 찾으면 당신이 직접 판에 뛰어들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죠? 그 조건에 모두 부합하는 사람이 저였고요."
"네."
내가 귀족 사회에서 활동한 시기가 지금까지 두 번 있다. 하나는 5년 전, 하나는 현재. 나를 타겟으로 삼은 시점이 둘 중 어느 것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점은, 내 곁에 마법사들이 옛날부터 여럿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들은 어디까지 알고 내게 접근했을까.
"허나 예외적으로, 가문의 이름을 내걸고 접촉한 자가 있었습니다."
과거를 헤집던 내게 그 말이 찬물을 확 끼얹었다. 날카롭게 치뜬 눈매를 억지로 무표정하게 되돌리며, 이어질 말을 재촉했다.
"누구죠?"
"세크네트 로엔세르. 곧 후작위를 받는다는 그 분께서 제게 접근했지요."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서 왜 그 이름이 나오는 거지. 로엔세르 공작가가 일레인과 함께 꽤 오랫동안 은밀히 세력을 모았다는 건 얼마 전에 일레인에게서 들었다. 하지만 이건 새로운 정보다.
"그는 시안의 진짜 정체를 아나요?"
"루 할레시온 대공가와 이전부터 협력하여 별개의 세력을 쌓던 로엔세르 공작가이니, 대공가가 저희의 반란에 가담하고 나서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알게 되셨을 겁니다."
반란 세력 두 개가 합쳐지다 보니 그렇게 된 듯싶다. 빠른 시일 안에 확인차 세크네트를 만나야겠다.
"그건 그렇고, 오늘 절 초대하신 이유가 뭔가요?"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칼을 집어던지면서 반란에 동참하겠다 선언한 이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던 차에, 시안이 나와의 독대를 청한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반란 준비나 기타 실무에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으니 그보다 더 원론적인 주제로 부른 건가. 이를테면 나만의 특수한 행동 방침이라던지. 그런데 내 행동 방침이라면 너무 뻔한데. 나는 시국이 격동하기 전까지 그냥 평소처럼 살면 된다.
"전해드려야 할 소식이 몇 가지 있고, 무엇보다 블로텔지아 길드 출신의 자객에 대한 사죄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왠지 미심쩍다 싶더니만. 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사죄요? 그 때 자객을 보낸 사람이 시안이었나요?"
"아니요, 배후는 할레시온 황실입니다. 하지만 블로텔지아 쪽과 연결되어 있는 제가 암살 의뢰를 거절하지 말고 이를 기회로 삼아 자객들을 할레시온에 첩자로 심어두라고 지시했습니다. 황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안전 장치를 비밀리에 두고 암살은 그대로 진행토록 했지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교류가 끊긴 상황에서 입국 방법이 그것뿐이었군요. 어차피 전 다치지 않았으니 그 건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그랬던 거군. 나는 그물망처럼 서로 엮여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나름대로 질서정연하게 정돈해 보며 눈을 깔았다. 테이블 중앙에 장식으로 놓인 꽃꽂이가 미약하게 살랑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실내에 무슨 바람인가 했는데 문득 향기가 났다. 꽃향기나 차향은 아니다. 시안의 향이었다. 바람을 사용하는 마법사라 평소에도 공기의 흐름을 자기 것으로 바꾸고 다니는 걸까. 하지만 다른 사람은 이 냄새를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참 이상하다. 왜 나만 이 향기를 맡을 수 있는지.
시안은 그 날 밤 모든 것을 밝힌 척 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아직 이 향기가 왜 내게만 감지되는지 모르고, 나를 처음 접한 시기와 조력자 후보로 점찍게 된 과정도 모른다.
"대체 그대는."
그 상태에서 시안이 곤란하다는 투로 고상하게 말했다. 순간 시선을 확 집중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저건 바로 내가 그에게 외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그 질문 그대로 돌려드리고 싶네요."
"저는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무슨 뜻이죠. 지금도 제게서 수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듯 굴고 있으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제가."
시안은 주어만 말하고 뜸을 들였다. 나는 살짝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가 사뿐한 웃음에 가려지는 장면을 침묵하며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김샜다. 한참만에 연 입에서 나온 말이 고작 저거라니. 사람이 뭐 이렇게 비밀이 많은지. 그의 과거를 어느정도 안 이상 아주 약간은 이해가 갔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성가셨다. 뒤통수를 거하게 맞고 나서는 그가 예전처럼 단순히 흥미의 대상이 아니게 됐거든. 나는 이제 수상하기 짝이 없는 반란군주가 감추고 있는 것을 최대한 많이 찾아내야 하는 입장이다.
"궁금하네요. 당신이 언제쯤 스스로 무언가를 털어놓을지."
불만스럽게 다리를 꼬고 남은 차를 죄다 털어넣었다. 시안은 체념하듯 웃었다. 나는 애써 그 표정을 무시했다.
"곧 샤카르가 저를 찾으러 올 거예요. 당신과 만나서 좋은 꼴은 못 보겠죠. 그러니 이만 가 볼게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하고 뒤돌았다. 시안은 그런 내 등에다 대고 차분하게 말했다.
"셰룩은 어디서 구하셨답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고개만 틀었다. 잘 정돈된 푸른 얼음 같은 머리카락 아래에서, 검은 눈이 월식처럼 휘어졌다.
저 표정은 웃음이 아니다.
"멘데로프 영식께서 가지고 계신 그 검의 이름이 셰룩입니다. 마법을 찢어 파훼하지요. 본디 엘비올리스의 소유였습니다."
"그런가요? 로제, 아니 하일에게 도로 빼앗기지 않게 조심하라고 일러둬야겠군요. 언질 감사해요."
애써 평정을 지켰다. 그러나 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레비욘이 답장을 보냈습니다."
내가 가기 전에 재빨리 전달하려는지 그는 주제를 마구 바꾸었다.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빨리 왔군요. 국왕께서 뭐라던가요?"
"그대에게 절대 내용을 보여주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래야만 할 마땅한 이유가 있나요?"
"레비욘 가셋수트 리우네아는 이 시대에 몇 남지 않은 예언신관들 중 하나입니다. 아마 그대에게 부합하는 예언이 있는 모양입니다."
"예언이라......신을 믿지 않는 할레시온의 황족에게 다소 신빙성 없게 들리는 단어네요. 하지만 마법까지 눈앞에서 목도한 이상 안 믿기도 좀 그렇고. 그럼, '세계'는 훗날 다시 빌리러 오죠."
싸늘하게 마무리짓고 이번에야말로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시안은 뒤따라 나오지 않았다. 하기사 그럴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응접실 문앞에서 샤카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는 문 너머의 시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내 어깨를 감싸 이끌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의 시안은 살며시 눈을 감고 있었다.
앞마당에서 하일이 성의없이 낙엽을 치우다 우리에게 손을 휙휙 흔들었다.
"여어, 얘기는 잘 했어?"
"알 바예요?"
톡 쏘아붙였다. 기분이 영 별로여서 괜히 화풀이한 거다. 하일은 얼음으로 만든 긁개를 휙 내던지더니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긁개는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펑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어이구야. 거기 청년, 자네 연인은 원래 저러나?"
"알 바입니까?"
"......성깔 똑같은 것들끼리 연애를 하는군."
샤카르가 마찬가지인 대답을 내놓자 하일이 투덜투덜 혼잣말했다. 정작 우리 둘 다 연애라는 단어에는 태클을 걸지 않았다는 게 아직도 어색하다.
하일이 몇 번 더 말을 걸었지만 이미 백팔십 도 변해버린 그에게 적응한지 오래인 나는 깔끔히 무시하고 내 갈 길 갔다. 오솔길을 걸으면서는 샤카르에게 셰룩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그는 아까 하일 앞에서 그 검을 가지고 있었으면 뺏겼겠다며 개구지게 웃었다.
"근데 너 그 목걸이 매일 걸고 다니냐?"
샤카르가 내 목에 걸린 태양을 가리켰다. 수줍어지긴 싫어서 일부러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잖아요."
"네가 더 예쁜데?"
샤카르는 뿌듯해하다가 돌연 훅 치고 들어왔다. 이건 예나 지금이나 그의 특기다. 당황해서 한 발 늦게 받아쳤다.
"......내가 닭살 돋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몇 번 말했던 것 같은데요. 오랜만에 맞을래요?"
"워, 그건 사양. 네 주먹 진짜 아프다고. 그 힘 썩히기 아깝지 않냐? 내가 에단 녀석 통해서 기사단 입단서 줄까?"
샤카르는 재빨리 손사래치며 아무렇게나 나불거렸다. 나는 헐렁하게 팔짱을 꼈다.
"기사 직업에는 흥미 없어요. 당신이야말로 들어가던가요. 비공식적인 '아홉 개의 검'이잖아요."
"그건 내가 하도 한량처럼 수도에 널브러져 있으니까 수도 귀족들이 흥미롭다고 끼워넣은 거야."
"그래요? 벤 정보상의 실질적인 보스 말덴 에보르가 그러길, 당신은 웬만한 무술을 다 섭렵했다던데요."
"별로, 딱히......"
그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자기 칭찬에는 참 야박한 사람이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는 설렁설렁 말하는 그의 허리춤에 꽂힌 단검, 셰룩을 뽑아보았다.
"!"
그리고 새까만 날이 칼집 밖으로 드러나기도 전에 손이 붙잡혔다. 샤카르가 놀란 어조로 물었다.
"괜찮아?"
"에?"
문맥에 맞지 않는 언사인지라 좀 품격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창피해하려는 찰나 그가 진지하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괜찮냐고."
"당연히 괜찮죠. 왜요?"
"너 칼 싫어하잖아."
참, 그랬지. 지금이야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검 근처에만 가도 공포를 느끼곤 했었다. 6월부터 간간히 루 할레시온 가의 저택에 놀러와 호위 겸 말동무를 하고 가는 두 오십현의 공헌이 컸다. 검을 무서워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나서부턴 그들과 해결 방안을 모색했거든.
"예전보다는 덜해요."
"아, 그래? 다행이다. 진짜 놀랐다고."
나는 웃었다. 이런 걱정이라면 받아도 좋은 것 같다.
"나 아주 멀쩡하니까 걱정 마요."
우리는 계속 걸었다.
============================ 작품 후기 ============================
11챕터, 전야. 시작합니다.
+조아라 자게러분께서 개최하신 일일연재 이벤트 추가접수에 신청해서, 오늘 8월 1일부터 8월 23일까지의 일일연재에 도전합니다.(이벤트상 휴일로 지정된 금요일 제외)...만, 성공 확률은 아주아주 희박하니 며칠 안 돼서 다음편이 뚝 끊기면 제가 실패한 것으로 아시면 됩니다. 어흐흑 그냥 참가에 의의를 뒀어요(주먹울음) 실패할 걸 미리 변명하자면, 일일연재 달성 최소 키바수 조건은 7kb지만 악살다는 보통 한 편당 14kb가 넘으니까요...게다가 앞으로 23편이면 악살다 3장이 끝나고도 남을 편수랍니다...(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2017.8.8. 설정 오류가 발견되어 본문 일부 수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