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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71화 (71/102)

00071 11. 전야 =========================

가을은 유독 빠르다. 하늬바람에 떠밀려가는 높새구름처럼.

한동안 샤카르는 세이잔 자작가 방화 사건을 캤다. 내가 제시한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한 결과, 이전과는 다른 심증이 몇 개 나왔다. 맞춰진 퍼즐은 내 추리와 비슷했다. 세이잔은 발견하지 말아야 할 사실을 주웠고, 이를 공론화해 한몫 제대로 챙기려다 황태자에게 제거당했다. 세이잔의 먼 친척 가문인 에네아스 백작가는 주목받는 생존자 아이린을 재차 죽이긴 힘들다는 것을 알았고, 일부러 양녀로 들여 세이잔의 방대한 재산을 흡수할 명분을 마련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아이린조차 모르게 상당수의 재원이 넘어갔을 거다.

이로써 '꽃물 든 하늘'과 결말만 같았지 과정은 완전히 다른 사건임이 판명났다. 이쯤 되니 이제는 뭘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파도가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올지 모르니까. 나는 우선 샤카르에게 이만하면 되었으니 모든 조사에서 손을 떼라고 일렀다. 진상을 밝혀 내게 유리하게 써먹는 것은 반역이 어떻게든 끝난 뒤 정세를 안정시킬 때의 일이다.

한편, 내 약혼 때문에 우선순위가 뒤로 밀렸던 에티에네트 1공주와 이나르 에네아스의 결혼식이 오늘 치뤄진다. 이로써 에네아스 백작가는 이번 세대에서 두 번째로 황족을 가문에 맞아들이게 된다. 황태자의 속 보이는 전략이다.

내가 약혼식을 치뤘던 이델라제온 궁이 결혼식 거행 장소였다. 본래 이델라제온 궁에서 혼인하는 사람은 황제나 그 후계자가 대부분인데, 황태자는 공주의 결혼을 이곳에서 시킨다. 과시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소리지.

하객으로 참석하는 만큼 오늘 내 복장은 고상한 색상에 적당히 화려한 디자인이었다. 드레스가 무거웠다. 가을이니 망정이지 한여름이었다면 죽어나갔을 것이다. 나는 깃털이 달리고 금박 장식이 들어간 부채를 손에 쥐고 마차에 탑승했다.

사람이 많아서 황궁에 도착하려면 꽤 오래 걸린다. 그동안 나는 가족과 대화했다. 물론 화기애애하고 일상적인 이야기와는 동떨어진 주제였다.

"어제 훼산 백작가에서 서신을 보내왔어요. 자기 영지에 오십현이 방문했던 것을 뒤늦게 확인했다면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조사하러 온 것일까봐 불안하다네요."

"훼산 백작가의 영지라면 남서쪽 지방을 말하는 거군. 그 먼 데까지 황실의 개들이 갔다면 필시 보통 목적은 아니었을 터. 어떤 오십현이었다더냐?"

대공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어머니 일레인의 분위기를 흘깃 살피고 대답했다.

"서신에 따르면 이현과 팔현으로 추정됩니다. 둘 다 황태자 소속이에요."

"곤란하게 되었구나. 훼산 백작가는 뜻을 함께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이......"

일레인이 근심어린 기색을 내비치며 말끝을 흐렸다. 이 마차 안에서 오직 셀리아만이 천진난만했다. 셀리아는 공주님의 예쁜 웨딩드레스를 어서 보고 싶다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대강 맞장구쳐주고 대공이 하는 말을 들었다.

"네 호위였던 사현이나 십이현을 통해 정보를 얻어낼 수는 없는 것이냐?"

"그랬으면 좋겠지만 자칫 제 신변이 위험할 가능성이 있어서 시도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황실에 절대 충성해서, 제가 그 기반에 손을 대려 하면 칼을 빼어들 거예요."

"옛 주군이었다고 해도?"

"옛 주군보다 우선시되는 건 역시 현재의 주군이니까요."

"으음......허면 우선은 내 쪽에서 손을 대 보지. 라니아와 부인은 결혼식 종료 후 피로연이 열릴 때 우리의 일에 가담한 자들과 말 몇 마디 정도 나누는 것 잊지 말고. 셀리아는 피곤하다면 일찍 들어가도 좋다. 집사가 밖에서 마차와 함께 대기할 테니."

"네, 아버지!"

나와 일레인은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이델라제온 궁의 장엄한 규모는 한눈에 다 담기 어려웠다. 그 앞에 구름떼처럼 모여든 하객들이 저마다의 주제로 떠들고 있었다. 도착할 무렵 타이밍 좋게 입장이 시작되어서 나는 소란 속에 그리 오래 방치되지는 않았다.

건물 내부에서는 마치 거대한 성당처럼 작은 소리도 크게 증폭되어 들렸다. 보석이 조각된 벽화와 금칠한 기둥,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과 그 위에 깔린 레드카펫 등으로 더없이 호화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황족인 나는 단상과 가까운 곳에 섰다.

내 맞은편에서 조금 오른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로엔세르 공작의 대행으로 온 레테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얼마 후 후작위를 받을 세크네트가 보인다. 뭇 사람들이 세크네트가 곧 후작이 될 거라고 확신처럼 얘기하는 이유는, 로엔세르 공작의 병세 때문이었다. 얼마 전 갑자기 쓰러져 상태가 나쁘다는 그가 사망한다면 그 즉시 가문 승계와 분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그 시점이 머지않았고.

귀족들의 출석 현황을 훑다가 프리드리히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조용히 웃음지으며 고개만 숙였다. 억지로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프리드리히는 결국 '꽃물 든 하늘'의 줄거리와 똑같이 자신의 가정을 스스로 파탄낸 사람이다. 직접 마주하기에 께름칙한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곧 웅장한 음악이 울려퍼지고 결혼식이 시작됐다. 나는 부채를 펼쳐 입가를 비롯한 얼굴 아랫부분을 가리고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예의였다. 다른 귀족들도 자신의 가문 고유색으로 칠해진 부채를 손에 들었다. 순식간에 레드카펫 양 옆이 각양각색의 부채 벽으로 장식됐다.

시동들이 2층에서 보석 가루를 바른 천조각과 꽃을 뿌렸다. 꽃비가 내리는 것 같다. 내가 했던 약혼식이 엄숙하고 고요하게 치뤄졌다면, 공주의 결혼식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보통 다들 그렇다. 약혼은 언제든 깰 수 있지만, 결혼이라는 건 이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니까.

문이 열리고, 에티에네트 1공주와 이나르 에네아스가 입장했다. 과연 눈부시게 치장했다. 셀리아가 공주에게 선망의 시선을 보냈다. 순백의 드레스는 객관적인 시선에서 봐도 굉장히 아름다웠다. 오늘부로 부부가 될 두 사람은 서로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듯이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몇몇 귀족의 눈매가 부러움으로 휘었다. 물론 난 그 반대였다. 저 표정은 가식이거든. 내가 라인하르트와 약혼할 때 지었던 거랑 다를 바 없었다.

식은 길었다. 눈이 뻑뻑하고 다리가 부을 지경이 되어서야 선서가 끝나고 두 사람의 혼인 사실이 공표됐다. 드디어 해방이다. 신랑 신부가 퇴장하고 주변이 정리된 다음 하객들이 밖으로 나갔다. 나는 뻐근한 몸을 간단히 스트레칭하며 잠시 기다렸다. 목을 옆으로 기울이는데 뚜둑 소리가 나더라. 깜짝 놀랐다.

"분명 점심 즈음에 시작했는데 끝나고 보니 해가 지네요."

몇 시간 만에 바깥 공기를 마시며 말했다. 일레인과 대공 모두 동의했다. 아직 피로연 시작 전인데 셀리아는 이미 고개를 끄덕일 힘조차 없이 녹초였다. 결국 그 아이는 먼저 집으로 귀가했다.

남은 하객의 행렬은 연회궁 솔지아로 이어졌다. 폭풍 같은 강행군이군. 이러니 큰 파티가 열릴 때마다 한두 명씩은 꼭 실려나가지. 속으로 투덜거리며 입장을 위해 옆 건물 안에서 대기했다.

피로연 입장은 아까와 달리 신분 확인 후 이뤄진다. 다행히 내 성이 루 할레시온이라서 주요 직계 황족들 바로 다음으로 들어갔다. 한산한 솔지아 궁은 생소했다. 멍하니 황금빛 전망을 응시했다. 여기서 많은 것이 시작되었지. 작년 카리스티아 개막식이 떠오른다. 이제 한 달 후면 올해 카리스티아 대연회의 막이 오를 것이다. 다시 모든 것을 끝내러.

"어머, 대공녀님! 오랜만이에요."

"아, 훼산 백작영애. 저희 아마 검술 대회 이후로 처음이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덕분에요."

내게 다가온 첫 타자는 문제의 훼산 백작가였다. 백작의 후계자인 알로이 영애가 대표로 내게 온 듯했다. 그녀와 나는 대충 안부를 주고받다가 금세 두루뭉술하게 돌려 표현한 정치 얘기를 했다.

"제 집에 사는 개들을 풀어 냄새를 맡게 하고 있어요. 머지않아 뼈다귀 조각이라도 물고 오지 않을까 기대중인데......못내 불안해요."

"대공께서 사냥터로 나가시겠다 하셨어요. 일단 기다려 보는 게 좋겠어요."

"그럴게요."

알로이 영애와의 대화가 끝나자 반란에 몸담은 관계자들이 하나둘 시간차를 두고 다가왔다. 내 옛 친구 알피어스 하시펜도 자작 영식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와인 두 잔을 들고 와 하나는 내게 내밀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마셨다. 입에 대보니 목을 축이기에 적당한 도수 낮은 와인이었다. 은근히 매너있는 건 여전했다.

"아레스티제 공작이 다짜고짜 날 저택에 초대해서는 물어봤어, 나도 거기 참여하냐고."

제국 귀족계에서 최고 서열에 있는 아레스티제는 무슨 일이 터질 시 적어도 방관할 것을 약속한 가문이다. 하지만 적극적인 가담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우리 쪽 사람들을 일일이 소개시켜주지는 않았던 터라, 그런 상황이 발생한 것 같다.

"그래서 뭐라고 답했어?"

알피어스는 와인을 홀짝이더니 다 비지 않은 잔을 수거 담당 시종의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주당인 그의 취향은 아닌가보다.

"맞다고 했지. 그랬더니 밑도 끝도 없이 웬 문서를 주더라."

"문서?"

"동북부 산악 제 3지대 채굴 및 관리권."

"뭐?"

나는 반사적으로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리며 기함했다. 이건 완전히 군사를 숨겨둘 장소와 자금줄을 동시에 제공한 셈이 아닌가. 꼭 아레스티제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런 곳은 여러 개 확보해 두었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건 당연하다.

"대가성은 없었어?"

"딱히. 그냥 최소한의 안전 보장용으로 밑밥 깐 것 같던데."

"밑밥 치고는 좀 과하지 않은가요."

별안간 누가 끼어들었다. 경계심을 품고 고개를 휙 돌렸다. 헤일렌 나인하트 공작이었다.

"카를이 그런 짓을 하는 경우는 딱 두 가지입니다."

헤일렌이 매력적인 웃음을 띄우며 손가락을 두 개 폈다. 카를은 아레스티제 공작의 이름이다. 막 부르는 걸 보아 친한 사이인가보다.

"호의가 이득으로 돌아올 확률이 높다고 판단될 때. 그리고 투자할 때."

역시 공작끼리는 사석에서 친한지 명료하게 짚어낸다. 그러니까, 아레스티제는 지금 우리에게 좀 더 명확하게 동조하고 있다는 뜻이군. 호재다.

나는 이쯤하고 다음 사람에게 가려고 했다. 움직이는 내 귀에 헤일렌이 스치듯 속삭였다.

"스카일러를 조심하시길. 그는 당신을 노리고 있답니다."

발이 떨어지질 않아 잠깐 그 자리에 멈추어 있었다. 소설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간 인물의 행동은 예측하기 쉽다. 프리드리히는 그 대표적인 예시다. 그렇기에 내 입장에서는 헤일렌의 말에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들으니 괜히 소름끼쳤다.

"이거 맛있다. 먹어 봐."

상념에서 나를 깨워준 건 샤카르였다. 에온 지방에 있는 백작의 역할을 겸해 참석한 그는 정계 인물들과 인사하느라 바쁠 텐데도 용케 나에게 왔다. 정복을 차려입은 그가 입에 넣어주는 것을 순순히 받아먹었다. 달달한 초콜릿이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만족을 표시했다. 샤카르가 씩 웃었다.

"단 걸로 체력 회복하고 네 쫄따구들 계속 응대해야지."

초콜릿을 다 삼키고 늦게 대꾸했다.

"쫄따구가 아니라 동업자들이에요, 샤카르."

"내 동업자 칭호가 그리로 간 거냐. 왠지 아깝구만."

"나랑 동업자 하고 싶으면 하던가요."

살짝 입가를 당기며 그의 손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샤카르는 내 손을 감싸쥐었다. 이 의도가 아니었는데. 의아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장난기가 가득하다. 오늘도 말려들었군. 수많은 귀족들이 있는 개방된 장소에서 이러면 어쩌자는 걸까. 대체 얼마나 더 소문을 내려고? 시선을 의식해 슬쩍 손을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힘이 더해지는 바람에 눈만 흘겼다.

"솔직히 털어놔요. 당신 이런 상황 즐기고 있죠?"

"아니거든?"

"누가 봐도 재밌다는 얼굴이잖아요."

"으음, 들켰나.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이따가 같이 춤 추는 거 어때?"

"무슨 댄스 신청을 벌써 해요?"

"그런 말 하면서도 싫은 티는 없구만, 뭐."

"말솜씨가 더 늘었네요, 당신. 그럼 그렇게 해요."

"승낙 감사합니다, 대공녀님."

그는 내가 방심하는 사이 기습적으로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어버버거리는 와중에 그는 유유자적 다른 데로 갔다. 아니, 잠깐만. 근처에서 눈을 빛내는 저 귀족들과 나만 두고 어딜 가는 거야.

"샤카,"

"어머나, 대공녀님께서 멘데로프 영식과 교제하신다는 게 사실이었군요!"

"리올 부인, 방금 보셨어요?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거 봐요, 제가 사실이랬잖아요. 길 가다 구경한 게 한두 개가 아니라니까요."

"저렇게 멋진 분이 웃으시니까 더 잘생겨지네요. 아아, 부러워라."

"첼리카 백작님, 낮에는 에네아스 영식을 보고 그 말씀을 하셨으면서. 그러다간 부군께서 질투하시겠어요."

망할. 사방에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난 이제 피로연이 끝날 때까지 시도때도 없이 이 주제로 인해 시달리겠군. 앞날을 예언한 나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착각에 빠졌다. 샤카르 이 인간은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춤 출 때 발을 신명나게 밟아주겠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속으로 이를 갈며 그들을 응대해주었다.

============================ 작품 후기 ============================

아무 생각 없이 놀다가 그만 최종퇴고 하는 걸 깜빡했습니다...1차퇴고만 한 원고라 내일 아침에 좀 수정될 수 있지만 일단 올립니다! 음 또 후기에 뭘 쓰면 좋을지...모르겠군요...여러분 제가 언제까지 일일연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굉장히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저도 그렇습니다 (아무말

+라니아 : ㅂㄷㅂㄷ

샤카르 :헤헿ㅎ헤헿ㅎ헤 (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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