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3 11. 전야 =========================
열렬히 속삭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말이 있다. 피아노 선율처럼 잔잔히 속마음으로 흐르지만,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는. 사랑 말이다.
나는 멍하니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허어어, 대공녀님 정말 멘데로프 영식 좋아하시는구나."
얼이 빠져 있는 와중 누가 말했다. 세크네트였다.
"이 자리에서 왜 그런 얘기가 나오냐? 사람들 집중하기 전에 얼른......"
"닥치라고? 싫은데."
"아, 좀."
레테일의 한숨 섞인 질책에 세크네트가 헤헤거렸다. 다 들린다고, 이 쓸데없이 눈치만 빠른 작자들아. 입술에서 얼른 손을 떼고 슬그머니 눈을 홉뜨자 두 쌍둥이는 내 눈치를 보며 알아서 찌그러졌다.
"오랜만에 두 가문이 모이니 기분이 새로워요. 그렇지 않나요?"
"후후, 그렇네요."
로엔세르 공작 부인이 얼추 식사를 마쳤는지 말을 꺼냈다. 일레인은 거기에 적당히 맞장구치며 오찬을 화사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일레인이 로엔세르의 이름을 미들네임 칸에 냅다 던져놓고 자기 독단으로 황자비가 된 이후 오랫동안 교류를 끊었던 로엔세르 공작가는, 지금 시점에 이르러서는 그러지 않았다. 정치적 견해도 이쪽을 표방했고, 혈연으로 봐도 우리와 가까우니까. 그래서 오늘의 이 사적이고 소박한 초대 오찬이 열린 거다. 로엔세르 공작가에서는 공작 부인과 쌍둥이가 왔다. 루 할레시온 대공가는 애초에 반쯤 일회성으로 만들어진 집안이라 대공 부부와 나 그리고 셀리아가 전부인데, 셀리아는 마침 또래 귀족끼리의 다과회에 놀러가서 여기에는 없다.
"어제의 그 귀족 회의는 참으로 영양가 없었습니다."
"맞습니다, 허울만 좋은 겉치레였지요."
대공과 두 여인은 그들의 주된 관심사인 정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 이모레타 지방의 통솔권이 그 가문에게 넘어갔단 말씀이세요?"
"네, 그렇답니다. 점점 더 일이 복잡해지고 있어요."
"머리가 다 아프네요......정원이나 가꾸고 승마나 하며 세월을 보내려 했는데 세상이 어지러워서 그럴 수가 없어요."
쌍둥이들과 얘기할 좋은 기회였지만, 그들이 갑자기 저 대화에 끼어드는 바람에 내 시도는 무산됐다. 결국 나도 슬쩍 끼어들어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났다. 공작 부인은 돌아갔다. 다만 쌍둥이는 눈치 빠르게 더 놀다 가겠다고 했고, 그 결과 나와 함께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게 되었다.
"10월이네요."
김이 옅게 올라오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화두를 열었다. 둥글게 휘어진 벽면의 반 이상이 통유리로 된 응접실은 낙엽이 후드득 떨어지는 정원을 실시간으로 구경할 수 있는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장소다. 레테일이 사무적인 갈빛 눈에 가을의 전경을 담았다가, 이내 내 모습을 비췄다.
"정치적 목적의 카리스티아 사전 행사는 11월 3일부터 시작될 겁니다. 황족까지 필수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사교용 카리스티아 개막일은 11월 20일이고요."
레테일은 무감하게 일정을 읇었다. 찻잔을 공연히 손가락 끝으로 콕콕 건드리며 세크네트가 설렁설렁 말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대공녀님."
"로엔세르 공작가에서 저 몰래 루 할레시온을 도와주셨더군요. 덕분에 시간이 모자라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것 참 다행입니다. 역시 미리 대비해두는 게 손해일 때는 없죠."
저번에 듣기로 샤카르는 로엔세르 쌍둥이를 거의 경외하는 눈치였다. 시안도 이들을 경계했다. 나 또한 처음에는 웬 나사 잔뜩 풀린 인간이 다가와서 난리인가 싶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허를 찌르는 계책을 내놓는 모습에 그 감상을 약간 철회했었다. 하여튼 이 둘은 다른 편이었다면 정말 곤란했을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더 확실히 해 두어야 한다. 내가 파악하기 힘든 사고 방식을 가진 자는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외람되지만, 제가 얼마 전에 새로운 소식을 하나 들었어요."
"어떤 것 말입니까?"
포크를 들어 후식으로 나온 케이크의 체리 장식을 콕 찍으며, 세크네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잿빛 머리카락이 함께 기울어져 그의 눈가를 찔렀다. 그는 짐짓 인상을 쓰며 머리를 대강 쓸어넘겼다.
"국내외에 걸쳐 존재하는 부흥군과 이미 접촉하셨다는 얘기를 그 수장에게 직접 들었어요."
내 말에 레테일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그늘이 드리운 정원에 한 차례 거센 바람이 불어, 붉은 잎이 회오리쳤다.
"두 분은 제가 히엘로 공작과 친분이 있는 것을 아실 거예요. 심지어 레테일 영식께선 함께 검술 대회도 구경하셨죠."
"네, 뭐. 모르지는 않습니다만."
세크네트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 히엘로 공작이 바로 부흥군의 수장 시안 리델라 에온이라는 사실을 제게 언질하지 않은 이유가 뭐죠?"
나직이 물음을 띄웠다. 전에 시안에게 들은 소리를 확인해보는 거다. 굳게 입을 다물고 무표정을 고수하는 레테일과 달리 세크네트는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가볍게 웃었다.
"체스말로 생각해 보십쇼. 흑인지 백인지 확실하지 않은 말을 누가 판에 올리겠습니까?"
"상황상 제가 어느 쪽인지는 명확하지 않나요? 만일 더 일찍 그의 정체를 알았다면......"
"또다른 적으로 보셨을 거 아닙니까?"
"뭐라고 하셨죠, 방금?"
"'또다른 적' 말입니다. 아마 9월의 초입이었죠, 공작이 대공녀님께 정체를 드러낸 게? 그 자가 왜 하필 9월로 시기를 정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 언제부터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았지? 가슴이 선뜩했다. 세크네트는 천진한 낯으로 쐐기를 박았다.
"9월은 대공녀님의 신상에 직접적인 문제가 생기고 한 달여 후, 마땅한 큰 행사 없이 여유로울 시기였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충분했고, 적아 구분이 명확해질 무렵. 그 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 때 거꾸로 고발당할 가능성이 가장 낮은 날을 고른 겁니다."
6월만 됐어도 나는 망설였을 것이다. 황실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의향은 없었으니, 어쩌면 황태손에게 그 사실을 찌르고 황실의 신임을 얻는 편을 택했을지도 모르겠다. 시안의 방관 하에 일어난 자객 침입 사건 역시 8월이었다. 이렇게 계산하면 최적의 일자는 정말로 9월이 된다.
시안. 대체 그는 어디까지가 의도인가.
"저희는 대공녀님이 그 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길 바랐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의 설계도를 존중하는 게 좋죠."
그리고 이 모든 뒷사정을 궤뚫고 있던 당신들은 누구인가. 손을 테이블 밑으로 숨기고 주먹을 천천히 말아쥐었다.
"제 아버지를 황제 자리에 앉히고 싶으신가요?"
어조만은 둘 다 온화했다.
"그렇죠. 제가 황제가 될 수는 없는 일이라."
"껄렁하게 대답하지 마라, 세트."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며 차나 홀짝이던 레테일이 그제서야 개입했다. 세크네트는 레테일과 흡사한 인상을 아무렇게나 찌푸렸다.
"내 딴엔 진지했는데."
"속내 말고 겉모습도 좀 진지해 봐라."
그는 반박은 않고 몇 마디 꿍얼거렸다. 이럴 때 보면 단순히 나잇값 못하는 귀족 같은데, 가끔씩 사람이 확 달라진단 말이지.
나는 쌍둥이가 실컷 싸우게 놔두었다. 조용해지자 다시 제대로 된 말이 나왔다.
"저희를 제외한 귀족들은 시안의 정체를 모르게 하십시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사항입니다."
"저도 기본은 해요, 레테일 영식. 각 귀족가는 자기 역할 이상의 것을 안내받지 못했죠. 따로 물어보면 보안을 핑계 삼아 대강의 골자만 언급해줬어요."
레테일이 조용히 수긍했다. 그 뒤로는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공작께서는 좀 어떠신가요? 곧 세크네트 영식께서 후작위를 받으신다는 둥 말이 많던데."
"소문대로입니다. 아무래도 연로하셔서......가문 내에서는 단승 작위를 받을 사람을 미리 정하는 중입니다."
공작은 늦게 결혼했고 아이도 늦게 본 케이스다. 지금 나이가 대륙 평균 수명과 얼추 맞으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공작 뿐만 아니라 수도의 대표적인 대귀족 가주들의 세대 교체가 슬슬 시작될 때다. 시대의 혼란은 겹으로 찾아온다.
"제 후작위는 원래 예전부터 약속되어 있었던 거라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나머지가 문제죠. 황실이 저희 가문을 포용하려는 의식이 어느 정도인지는 방계들에게 주어지는 단승 작위의 등위에 따라 판가름날 겁니다."
"일방적으로 하사하는 몇몇 작위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황실은 약혼 파기 투표 때부터 로엔세르 공작가가 2황자 쪽으로 기울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마 머리가 좀 아프겠죠."
세크네트는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걸쳤다. 그리고 짖궂은 웃음으로 스스로를 치장했다.
"앞으로의 일이 기대되는데요.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건 언제나 즐겁지 않습니까."
위화감이 뱀독처럼 서서히 응접실 안에 퍼져나갔다.
***
- 노을이 내려앉는 파란의 끝에는 죽음을 닮은 환상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법은 없다. 나는 그저 알면서도 외면할 따름이다. 가장 끔찍한 행복이란 그대다. 단어의 의미를 파고들지 말고 시처럼 음미해보라. 그대가 내게 있기에 끔찍하리만치 행복하다는 뜻이다.
아아. 실은 하나 더 있다. 그대가 내 행복을 끔찍하게 여길 것이란 뜻이다. 지독한 슬픔이 어째서 행복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
뭐라는지 모르겠어서 읽다 말고 덮어버렸다. 이건 렘사 이시프라는 필명을 쓰는 작가가 한 10년 전 쯤 출간한 책이다. 렘사의 글은 해석하기 어렵고 의식의 흐름 기법이 자주 사용되기로 유명하다. 한마디로, 난해하다. 혹시나 해서 펼쳐봤는데 역시나 눈만 아프다. 책을 원래 자리에 꽂는데 시안이 서재에 돌아왔다. 그는 아까 엘피샤가 찾아오는 바람에 잠시 나를 두고 밖으로 나가 얘기했었다.
시안은 이 서재에 올 때마다 책을 하나 둘씩 꺼내 가만히 읽는 나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말은 하지 않지만 이 태연함이 의외라고 생각하겠지. 척을 진 자에게 내가 어떻게 처신하는지 아니까. 그래. 만약 여기가 라인하르트의 서재였다면 나는 잔뜩 날이 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할 만큼 시안을 가깝게 여긴 적은 없다.
싫어하고 불쾌해할지언정 배신당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배신감은 소중한 사람에게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니까. 그래서 더 괴로운 거니까.
그 폭발적인 감정을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도 상대가 웬만큼 의미가 큰 존재여야지.
"렘사 이시프의 '주황의 파도'를 읽으셨습니까."
온건한 음색이 비 온 뒤의 습기처럼 방 안 공기를 채워나갔다. 음악 대신 감상해도 되겠다 싶을 만큼 시안의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나는 감정을 빼고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난해해서 도중에 포기했어요."
"같은 내용을 수백 장 반복하여 기술하니, 그렇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요."
목소리와는 달리 건조하게 웃어보인 그가 낮은 키의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내 반대편 쇼파에 앉았다. 나와 그의 등 뒤로는 각각 드높은 책장이 우뚝 서 있다. 책 냄새가 향초 대신 방을 지켰다.
"그 책에 내용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던가요?"
"열 번쯤 읽으면,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내용이죠?"
"모든 사람의 이야기. 주황의 파도는 수많은 사연을 간단히 함축해 담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누가 읽더라도 공감되는 말을 썼단 얘기인가요."
"네."
"대단한 작가네요."
그런 것치곤 누가 읽어도 못 알아듣게 생겼는걸. 속으로 심드렁하니 감상평을 내놓고는 적막 속에 몇 초간 잠겼다. 나무 향과 시안의 바람 향이 어우러진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자니 몸이 편안했다.
그러나 대화 내용은 편안함과 거리가 멀었다.
"아무것도."
시안은 부드러운 날숨으로 단어와 단어 사이를 짧게 끊었다. 장미 꽃물이 든 양 선홍빛을 띄는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묻지 않으시는군요."
희게 웃는다. 겨울 호수의 수면에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사그라든다. 나는 그만큼 차갑게 물음을 일단락지었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서로가 수단이고 도구인 관계에서 무얼 바라나요?"
"......그도 그렇군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세요."
대제국 할레시온을 상대로 수 년간 거대한 거미줄을 친 사람치고는 참 온유한 인상이다. 가을 끝자락에서 살랑이는 목화솜 같다. 말라붙은 갈색 껍질 안에 소복이 쌓인 눈처럼 보드라운 솜털.
원래의 그는 세계를 뒤집어 엎을 야심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휘몰아치는 전쟁에 쓸려나가 머나먼 타국까지 흘러들어온, 한없이 유약하고 차분한 사람이었겠지.
그것이 그의 운명이라면.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무너지더라도 거슬러 봐야지.
============================ 작품 후기 ============================
11챕, 전야 끝입니다. 다음 편부터는 12챕, L이 시작됩니다.
+일일연재 벌써부터 벅차네요 망했습니다...다음주 월요일에 개학이라서 사실상 그 때부터는 탈락구간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ㅋㅋㅋ
++전 항상 코멘트로 치유받는 사람...독자님들 정말로 사랑합니다S2 저 소통하는 거 되게 좋아하는데 악살다는 연재하는 것도 쪼달려서 리코멘을 항상 못한 게 제일 슬퍼요ㅠㅠ 막 오픈톡방이라도 파볼까+ㅁ+했다가 아니야...참자...이런 것도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ㅠ
+++해리포터 AU 인물설정 편을 뜰에 올려두었어요!
#으아악 뜰이 왜 비공개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풀었습니다! 죄송합니다ㅠㅠ 이제 보실 수 있어요! AU는 계속 천천히 업뎃될 예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