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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74화 (7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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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로엔세르 공작이 사망했다. 루 할레시온 가족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레테일은 별다른 마찰 없이 평화롭게 공작위를 승계받았다. 세대가 교체됨에 따라 세크네트는 후작위를 받았고, 다른 친척들도 제각각 작위를 받았다. 상당히 많은 인원이었다. 황태자는 로엔세르에게 적극적인 박해를 가하지는 않을 모양이다. 이미 적의가 드러났음에도. 자세한 내막은 확실하지 않다.

10월 31일. 황족까지 필수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진정한 의미의 '연회' 개막일 20일 전. 시안을 수장으로 한 반란군과 나는 깊은 밤중에 시안의 저택에 모였다. 샤카르와 세크네트, 일레인도 함께였다. 그 외 다른 귀족들은 안전상 부르지 않았다.

"리우네아 측 군대가 준비를 마쳤습니다. 비밀 신관이 리우네아 국왕의 의사를 받들어 단독으로 움직일 예정입니다. 방향은 할레시온 기준 남서쪽 국경, 병력 규모는......"

"북쪽에서는 블로텔지아 길드의 정예 암살자 소수가 선발대로 선정되어 슈타케 산에 잠복했다고......"

"옛 프리제 땅과 할레시온 본토를 잇는 옛 국경선에서 폭이 좁은 지역이 국외에 주둔한 본군의 침투 대상......"

"할레시온 국내의 사병은 동북부 산악 제 3지대 채굴광, 훼산 백작가 관할지방, 그리고 수도 남부 경계의......"

어둑한 지하의 방. 탁자에 질서정연히 앉은 사람들이 차례로 상황을 보고했다. 시안의 의자 모서리를 짚고 비스듬히 선 하일은 손에 띄운 얼음 조각으로 장난을 치면서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시힐레의 대표인 엘피샤는 불꽃처럼 화려한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기고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오고 가는 이야기를 자기 다름대로 요약하고 있는 것 같다. 베르크 레긴은 밖에서 외부 침입자가 없나 감시하는 중이라 여기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샤카르와 일레인은 내 양 옆이다. 나는 사실 지금 굉장히 피곤한데, 샤카르는 쌩쌩했다. 슬쩍 물어보니 원래 수면 패턴이 엉망이라서 익숙하단다. 조금 걱정이 됐다. 샤카르는 내 얼굴을 살피더니 괜찮다는 뜻으로 짧게 씩 웃어주었다.

"국내군의 지휘는 각 관할 구역의 책임 가문, 또는 따로 정해둔 가문이 맡습니다. 수도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군대는 루 할레시온 대공가가 명령권을 가지세요."

"리우네아 군은 저번에 여기 왔던 비밀 신관이 선봉입니다. 블로텔지아 쪽에는 하일이 가고, 본군은 우선 베르크만의 지휘로 남하할 거예요."

시안과 엘피샤가 사무적인 어조로 안내했다. 손목에 걸린 금색 링 팔찌 세 개를 만지작거리며, 샤카르가 질문했다.

"국내에 귀족 신분으로 묶인 두 분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현재 신분상 시안은 제국의 7대 공작이고, 엘피샤는 카르텔리 후작가의 일원이다. 반란을 위해 국외로 나가 국외군을 이끌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지위다. 나간다면 반란 직전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다가 야밤에 기습 도망을 쳐야겠지.

"반란 전날 밤에 탈출 경로를 이용해 프리제 국경까지 갈 예정입니다. 거기서 본군을 만나고 프리제-에온과 할레시온의 이음새 지역을 끊어야지요."

시안의 설명은 내 예상대로였다. 결국 가장 중요한 땅덩어리는 시안과 엘피샤가 본군을 이용해 획득할 셈인 거다. 엘피샤의 고향인 시힐레는 할레시온의 남동쪽에 있는데, 국외에서 쳐들어가기 마땅치 않은 고립 지역이라 우선순위에서 제해진 모양이다.

"그럼 시힐레는 어떻게 되죠? 그쪽 주둔군은 현재 하나도 없잖아요."

"시힐레는, 루 할레시온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좌를 차지하고 나면 영토를 반환해 주십시오."

"조력의 대가라는 거군요."

"황권과 맞바꾸기에 적절한 가치를 지녔다고 판단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나는 어머니 일레인을 쳐다보았다. 일레인은 별로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 선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확신이 든 것이다. 이성을 깨우기 위해 분위기가 시종일관 차가운 나와 달리 그 어떤 온도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연륜이 쌓인 일레인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그녀의 주도로 시간이 흘렀다. 자의로 만든 침묵을 깨며, 일레인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가, 지불하겠네. 만일 이 일이 성공한다면."

이 자리에 대공비보다 높은 신분을 지닌 자는 없기에 나오는 말투였다. 나는 그녀의 분홍색 섞인 잿빛 눈을 흘끔 살폈다. 문득 든 생각인데, 나중에 셀리아가 크면 딱 저럴 것 같다. 지금은 천진하지만 귀족 사회에 제대로 발을 딛고 나면 변하기 마련이니까. 이미 인격이 다 형성된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난 나와 달리, 셀리아는 무시무시하게 똑똑한 로엔세르 가 출신의 어머니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성장하고 있다. 기대가 된다.

"이행하지 않을 시의 보복은 재전쟁인가?"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한눈을 파는 사이 불이행의 패널티 얘기까지 오가고 있었다. 흐름이 매우 빠르다. 피곤하답시고 딴 길로 새면 열심히 뒤쫓아가야 했다.

"이행해도 재전쟁을 벌일 속셈은 없는가?"

시안이 숨을 뱉듯 엷게 웃었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또다른 망국을 탄생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황자비 저하. 수십 년간 수천만 명이 죽고서야 한 쪽만 살아남을 테니까요. 그보다는 평화를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일레인을 대공비가 아닌 황자비라 칭했다. 대공의 황자위 박탈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살짝 띄워주는 거지.

"원하는 것을 다 얻은 후에는 더한 욕심을 부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대공비께서도 같은 입장을 취해 주십시오."

웬일로 정상적인 말투로 하일이 덧붙였다.

"그리 하겠네."

일레인이 동의했다. 세크네트는 손가락으로 의자 손잡이를 딱딱 두드리면서 묘한 웃음을 지었다.

"고모님, 시힐레 지방에는 로엔세르의 거대 사유지가 있습니다만."

"일이 끝나고 너와 내가 살아남는다면 그 사유지의 몇 배에 달하는 관할 구역을 내려주마, 세트."

일레인은 여유롭게 응대했다. 그 와중에 샤카르가 그렇게 치면 자기네 관할 구역도 에온 지방이라며 혼잣말로 작게 툴툴거렸다.

"오, 통도 크셔라. 근데 고모님, 저 이제 후작도 됐는데 계속 애칭으로 부르실 겁니까?"

"그러면 러셀 후작이라 해줄까?"

"막상 듣고 보니 어색하네요. 나대서 죄송합니다. 그냥 세트라고 해 주십쇼."

세크네트는 아무 일 아닌 척 장난스레 대화를 끝맺었다. 러셀 후작. 전대 로엔세르 공작이 죽고 가문을 물려받지 못한 그는 세습 작위를 받았다. 말하자면 분가를 한 거지. 그와 에리카는 별장으로 쓰던 곳을 새 저택으로 삼아 얼마 전 이사를 했다.

아무튼 그 후로는 정확한 반란 날짜를 정했다.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 신중히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갔다. 갈피가 쉽게 잡히지 않자 도중에 하일이 논점을 잡았다.

"황태자 측은 개막 연회 당일을 노릴 텐데요. 루 할레시온 가족이 처음으로 의무 참석해야 하는 날이라서."

비스듬히 턱을 괸 세크네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그 전날을 노리면 되겠네요."

"매형, 설마 하루 전을 말하는 거야?"

샤카르가 눈매를 약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안될 건 없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긴 한데. 이유는?"

"선수를 치는 게 지금 상황에선 가장 유리합니다. 얼마 전에 훼산 백작가가 털릴 뻔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미수였고, 따라서 황태자는 우리의 정확한 정체나 규모를 모릅니다. 이대로 간다면 하루 전까지 숨길 수 있겠죠. 그 때 황태자보다 먼저 움직이면 훌륭한 기습이 되는 겁니다. 또 하나, 황태자는 귀족을 연회로써 한데 모아놓은 상태를 선호하겠지만 반대로 우린 귀족이나 황족의 신분에 엮여 있는 일원들이 자유로운 때를 노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개막 연회 당일도, 이후도 아닌 오직 그 전이어야 한다는 건가......"

정리는 샤카르의 혼잣말로 말끔히 해결됐다. 나는 뻑뻑한 눈을 깜박이며 머리를 굴렸다. 세크네트의 주장은 신선하고 타당했다. 하루 전이라면 시간차 공격을 하겠다는 뜻도 된다. 국내와 국외의 진군 속도의 차이를 고려했을 때 참 절묘한 날짜다.

"개막 연회 하루 전은 특별히 큰 일정이 없는 날이에요. 그러면 거사의 핵심 인원이 대거 황궁에 잡혀있지 않아도 됩니다."

"개막 이전 중 상대가 가장 방심하기 쉬우며 의심을 피하기 좋은 날은 역시 하루 앞입니다. 너무 빨리 행동하는 것은 불안합니다."

다시 몇 사람이 보충의견을 덧붙였다. 그러다 곧 방 안이 각자의 맹렬한 고뇌 때문에 조용해졌다.

이만하면 충분히 심사숙고했다 싶을 때 시안이 부드럽게 정적을 깼다.

"제가 듣기엔 나쁘지 않은 소리 같군요."

주황색 촛불이 어른거리는 공간에 짙은 동의의 기색이 감돌았다. 나 역시 그랬다.

"저는 새 계획에 찬성."

하일이 불쑥 손을 들어올렸다. 그 바람에 손바닥 위에서 뱅글뱅글 돌던 마름모꼴 얼음 조각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췄다.

"찬성합니다."

이어서 엘피샤가 펜을 놓고 말했다. 세크네트와 샤카르, 나와 일레인이 뒤따랐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곁가지에 해당하는 아이디어를 내며 쐐기를 박았다.

회의 말미에 시안이 매듭을 지었다.

"11월 19일, 새벽 두 시로 하겠습니다. 각자의 위치를 숙지하고 일찍이 정해둔 최종안에 맞추어 행동하세요."

그렇게 마지막 기밀 사항인 날짜까지 정해졌다.

가을 바람은 서늘했다. 나와 샤카르, 세크네트와 일레인은 나무 터널 같은 오솔길을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아래 마른 낙엽이 바르작거렸다. 쏴아아. 아직 나무에 달린 잎은 공기의 흐름을 따라 빗소리를 흉내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일행은 둘로 갈라졌다. 일레인과 세크네트는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의도적인 행보임에 분명했다. 샤카르가 이 틈을 타 장갑을 끼지 않은 내 손등에 입술을 댔다.

"왜요?"

손을 빼지는 않고 멀뚱히 물었다. 올려다 본 그의 얼굴 뒤로 빛을 받지 못해 검은 나뭇잎과, 그 사이사이에 뿌려진 별조각이 흔들렸다. 샤카르는 초승달처럼 싱긋이 미소를 띄웠다.

"예뻐서."

"흉터 가득한 손인데 예뻐요?"

"내 손에는 흉터 더 많아. 본판이 워낙 투박해서 눈에 잘 안 띌 뿐이지."

"그게 뭐예요."

피식 웃으며 잡힌 손을 얽어, 내가 그의 손을 잡은 형상으로 만들었다. 까슬한 감촉이 손끝에 선명했다. 선심 쓰듯 평가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잘생긴 손이네요."

"손 말고 얼굴은?"

"물어 뭣해요. 이 얼굴 때문에 내가 당신을 오랫동안 안 봐도 잊을 수가 없었는데."

"그래?"

그러자 샤카르가 개구지게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예상에 없던 기습에 숨을 엇박으로 들이쉬며 손깍지를 풀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어 밀어냈다. 그런데 효과가 없었다. 뭔가 했더니만, 그의 팔이 순발력 좋게 내 허리를 휘감은 거였다.

"푸시죠? 이거 안 풀면 발을 밟아버릴 거예요."

당황한 나머지 으름장을 놓았다. 샤카르는 가소롭다는 듯 입가를 끌어당겼다. 짙푸른 웃음이다.

"해 봐."

"내가 못할 줄 알아요?"

발을 휙 들어올렸다가 내리찍었다. 안타깝게도 활동하기 편한 단화라 하이힐만큼의 충격은 주지 못할 테지만, 그렇다고 안 아플 리는 없었다. 그런데 발을 구르는 소리가 이상하다. 물컹한 느낌도 없고.

"내가 못 피할 줄 알았어?"

샤카르가 그대로 날 확 끌어안으며 장난조로 대꾸했다. 이런. 피했구나. 나는 이러는 법이 어디 있냐고 투덜거렸다. 그는 얄밉게 웃었다. 마지못해 져주는 척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마치 내가 그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때였으면 깨질까 두려운 양 차마 힘주어 끌어안지 못하던 사람이 오늘은 달랐다. 박동 소리, 목소리의 울림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그는 졸음에 겨운 어린아이처럼 웅얼였다.

"잠깐만 이러고 있자."

"그러죠. 어차피 어머니랑 세크네트 영식, 아니 러셀 후작은 알아서 자리를 피해준지 오래니까. 상관없어요."

조곤히 대꾸했다. 새벽이 가까워온 시점에서, 우리는 잠깐 심적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빠져나가지 마."

"안 가요. 따뜻해서 졸리단 말이에요. 이러다 잠들면 책임지고 무사히 저택에 데려다 놔요. 알겠죠?"

"알았다, 알았어."

샤카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

그리고, 11월 3일. 황족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귀족 가주와 그 후계자가 수도 할렌센으로 집결했다. 황권을 다지기 위한 감시와 실적 확인, 국가 중대사 논의, 은밀한 권력 암투가 동시에 시작됐다.

샤카르를 비롯한 귀족원 전부가 황궁을 들락거리며 각종 정치적 일정에 참석하고 있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할 나날이었다.

============================ 작품 후기 ============================

12챕터, L. 시작합니다.

+L은 일찍이 61화의 후기에서 'L들의 계절'이라는 구절로 처음 언급됐죠. 이번 챕터명 L은 세 개의 영단어의 이니셜입니다. 세 개 다 맞추신 분께는...음...제 사랑을 드립니다S2 (독자님들 : 필요없어

++L 챕터 추천 bgm : tracy chattaway의 night sky, 그리고 love is here. 이렇게 두 곡을 주로 들으면서 이 챕터를 썼습니다. 챕터 막판에서는 안예은-달그림자 도 듣긴 했는데 사극풍 노래라 분위기가 안 맞을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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