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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75화 (7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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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빠르다. 나는 계속 잠을 설쳤다. 그건 샤카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밤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면 신기하게 잠이 잘 왔다.

-오늘은 집에 새 하인 여럿을 들였어요. 러셀 후작가 저택이 사용인을 고용하는 김에 우리도 덩달아 돈을 좀 썼죠. 겉으로는 평범한 일상인 척 하려고요. 하지만 위화감이 커요.

일부러 이니셜은 찍지 않았다. 혹시 중간에 누가 탈취할 것을 염려한 탓이다. 그의 답장에도 역시 이름이 없었다.

-연기하느라 아주 곤욕이지? 나도 그래. 가만히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그냥 다 부숴버려야 하는데, 그치?

-당신 역할은 때려부수는 게 아니라 정보 수집이니까 얌전히 있어요. 부탁이니까.

-알았어. 너야말로 괜히 나서지 말고, 최대한 뒤로 빠져 있어라. 아무래도 내 수면장애의 가장 큰 원인이 네 걱정인 것 같다고.

-누가 할 소리예요. 아무튼, 우린 서로를 걱정할 시간에 자기 걱정을 하는 편이 더 생산적이겠군요.

-그건 그렇지. 네가 우리 동선을 안 겹치게 했으니까. 아주 철저하더라, 너.

내가 책상에 엎드려 잠드는 바람에 그 날의 편지는 거기서 끊겼다.

속절없이 하루가 흐르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이틀이 지나간다. 반란군의 준비 소식은 시시각각 전해졌고, 셀리아는 마음이 뒤숭숭한 나를 위해 함께 연탄곡을 쳐주었다.

숨 가쁘게 내달리는 낮과 달리 밤은 끝이 없었다. 그렇게나 길고 긴 밤에,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시간에. 일간 시 한 편처럼 익숙하게 날아드는 연하늘색 편지지가 기꺼워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고민하고. 어느 날에는 내 방 구석의 서랍장 세 번째 칸을 열어보았다.

샤카르와 주고받은 편지가 물론 가장 위에, 또 가장 많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르쉬네가 죽은 후 발견한 편지 세 장. 그리고 카리스티아 당시 시안의 편지. 케케묵은 먼지를 넘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 태우지 않은 라인하르트의 옛 편지와 어린 에단의 안부 편지. 르쉬네와의 잡담 쪽지. 셀리아의 낙서. 어머니가 준 나의 아홉 번째 생일 축하 카드.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다과회 초대장.

지키고 싶었던 사람과 그에 얽힌 전부를 합해봤자 아주 거창한 묶음이 되지는 않았다. 이 세계는 고작 이것도 그냥 내어주질 않아서, 내가 이렇게까지.

"......"

나는 허탈한 미소만 남겨두고 종이를 마저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그와 이야기하고 싶다.

-자요?

요즘 참 바빠진 전서구가 금세 돌아왔다. 한밤중이라 답장이 안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꽃 구경하고 있었어. 이거 향기 되게 좋다. 너 가져.

한 번 접힌 편지지 사이에 엄지손톱만한 흰 꽃이 두어 송이 끼어있었다. 집어들어서 향을 맡았다. 여리지만 달큰하고 여운이 길다. 꽃 이름을 물었다. 방금 길가에서 꺾어온 거라 잘 모르겠다는 답이 왔다.

-혹시 우리가 무술 연습하던 장소에 많이 핀 꽃 아니에요? 색이 비슷한데.

-글쎄. 연습 그거 궁술에만 재능이 출중한 누구 때문에 몇 번 하다 말아서 연무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 안 나.

-지금 놀리는 거예요?

입을 막고 웃으며 답장을 휘갈겼다. 문만 잘 닫아놓으면 웬만해선 소리가 안 새어나가지만, 만일에 대비해서.

-어떻게 알았냐.

-한 대 때리고 싶게 얄밉네요. 애초에 당신이 수련을 빙자한 연애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않았다면 내 실력이 지금쯤 꽤 괜찮았을 걸요?

-억울하구만. 신나서 호응한 사람이 누군지 잊었어? 연습하다 말고 엘로솔라냐에 나를 끌고 가서 초콜릿 케이크를 나눠먹은 사람이 누구더라?

-모르겠는데요.

-뻔뻔하기는.

시원시원한 필체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은빛 펄이 들어간 잉크를 매만졌다. 손에 묻어나온다. 채 마르지 않은 잉크라니, 전서구가 그렇게 빠른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당신 지금 어디에요?

-어디긴,

"네 집 앞이지......?"

얼이 빠져서 그의 편지를 소리내어 읽었다. 오밤중에 왜 필기도구까지 지참한 채로 이 외딴 집에 왔담.

-잠깐 기다려요.

급히 써서 보내고 일어나 옆 방문을 두드렸다. 대공과 일레인 역시 아직 자지 않았는지 말짱한 어조로 무슨 일이냐 물었다. 나는 잠시 마당을 산책하고 와도 되겠냐고 했고, 거기에 샤카르가 있음을 확인하고 허락을 받았다.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앞마당으로 나왔다. 그는 굳게 닫힌 정문에 기댄 자세로 하늘을 응시하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철창이 덩굴 문양으로 얽힌 문은 그를 보기에 충분했다.

"이 늦은 시각에 여기서 뭐해요?"

"너랑 대화하지."

아까까지 글자를 통해 상상만 하던 얼굴이 눈앞에서 웃었다. 검푸른 천공이 아주, 아주 느리게 회전하고 있다. 수많은 별을 품고.

"왜 굳이 여기서요?"

"전서구가 너무 느려. 먹이로 유인해서 도중에 멈춰세우는 게 신속한 답장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잖냐."

"왠지 너무 빠르다 싶었어요. 춥지는 않아요? 날이 꽤 찬데."

"새벽 서리는 아직이니까. 습기가 땅 위로 내려앉기 전에 들어가려고 했어."

밤기운을 타고 잔잔하게 흐르는 음색이 고즈넉했다. 나도 덩달아 누그러졌다.

"유난스럽네요. 잠 좀 자라니까 엄청 빠르게 답장이나 하고 앉아있으면 어떡해요."

"뭐 어때. 재밌잖아."

"......할 말이 없군요."

괜시리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결이 보드랍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금발은 은색에 가까웠다. 샤카르의 머리가 그 어느 때보다 새파란 것과 달리.

희미한 웃음이 그의 얼굴 위에 물결처럼 아른거린다.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 입을 연다.

"이 시간에 만나는 건 처음인 것 같지, 아마?"

푸른 달이 뜬 가을의 전경은 기억 속에 각인된다. 영원히 잊지 못할, 그러나 지금 당장은 폭풍 전야 속의 평범함으로 여길 순간. 조용히 속삭이는 우리.

"그러게요. 색다른 경험 고마워요."

대지가 잠들고 새가 둥지 안에서 눈을 감을 때, 세상은 비로소 고요해진다. 싸늘한 월광만이 말없이 일렁였다. 찰나의 만남에 문을 열기에는 가솔들이 괜히 잠에서 깨어나 확인하러 올 것이 염려되었다. 대신 나는 철창의 틈으로 내밀어진 손을 잡아채 가볍게 입맞췄다.

"적에게 우리 사이를 들킬까 두렵네요. 이만 가요."

대꾸는 뒤늦게서야 튀어나왔다.

"그러려고 했는데, 방금 전의 네 행동 때문에 실패했어. 그냥 계속 실패할까?"

"안 어울리는 어리광은 부리지 마시죠."

"와. 단호한 것 좀 보게나."

"이렇게 안 하면 해 뜰 때까지 여기 못박혀 있을 거잖아요."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라니아."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매를 늘어뜨렸다.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요. 아무튼, 어서 돌아가서 눈 좀 붙여요."

손을 놓고 그를 떠밀었다. 샤카르는 나 보라고 일부러 한껏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알겠다고 했다. 나는 웃었다. 그러나 너른 등을 마주하자마자 알 수 없는 감상에 못이겨 변덕을 부렸다.

"샤카르."

기다렸다는 듯 돌아본다. 그 모습에 안도했고, 동시에 불안에 젖었다. 내가 부린 이기심과 그가 부린 안일, 아니 어쩌면 서로 그 반대일 것들이 초래할 끝의 끝은 무엇일까. 정말 마지막은 누구도 모를 테지. 부서진 운명은 변하지 않지만 변하기에.

라니아의 되새겨지는 이야기의 의미는 바로 그 변수에 있을 것이다.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가정은 이것 뿐이다.

"당일에는 내게 오지 말아요. 나도 당신에게 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약속해요, 서로를 걱정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안위를 챙기기로."

"......"

"약속해 줘요."

재촉처럼 반복해 말했다. 샤카르는 싱긋 눈웃음지었다. 그리고는 화두를 싹 바꿔 버렸다.

"예전에, 네가 나에게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했었지. 그거 지금 쓸까."

"......말해 봐요. 이상한 거 아니면 들어주게."

"그 목걸이, 평생 걸고 다녀줘."

"그건 원래 그럴 생각이었어요. 소원, 이게 다예요?"

머릿속이 금세 허무하게 텅 비어 버렸다. 달이 아름다운 탓인가, 그의 미소가 찬란한 탓인가, 말없는 미소가 전부였던 탓인가.

11월 7일, 새벽 세 시였다.

***

11월 7일은 르쉬네 가족의 기일이다. 3황자 가족을 비롯하여 수백 명에 달하는 5년 전 사건 관련자의 기일이기도 하다.

나는 오 년만에 비로소 르쉬네의 무덤을 찾아갔다. 제국 수도의 북쪽 외곽에 있는 야트막한 산 중턱. 그곳에 내 친구는 잠들었다. 만일 에단이 시신을 수습해주지 않았다면 여기에조차 묻히지 못했겠지.

"안녕, 르쉬네. 인사하러 왔어."

산을 오르느라 차오른 숨을 정돈하고 자그마한 비석 앞에 섰다. 여기 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살풋 웃음지으며 농담 삼아 말했다.

"첫 인사인지, 마지막 인사인지는. 글쎄."

당연히 핀잔 주는 목소리는 없었다. 아직 시들지 않은 붉은토끼풀만이 비석 옆에서 하늘거린다. 얄미운 르쉬네. 저 꽃의 꽃말을 알려주지는 말지. 비석 옆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무릎을 세우고 턱을 괴었다. 한참 가만히 자리를 지키다가, 무의미한 노래를 부르듯 나지막이 읇조렸다.

"행복, 약속, 너와 함께, 나를 기억해주오."

바람 소리가 들린다. 말이 되지 못한 망자의 속삭임 같다. 내가 제정신이 아닌 건가.

"너와 함께 행복하자는 약속을 했던 나를 기억해달라......"

제멋대로 늘어놓고 살을 붙였다. 이게 르쉬네가 정말로 하려던 말일 가능성은 딱 절반 정도지만.

"그 말을 내가 어떻게 해석해줄까? 행복하지 못한 나의 복수를 너에게 부탁한다, 아니면 너라도 행복해라?"

어느 쪽이든 내게는 사슬이다. 르쉬네는 내 인생에서 손꼽히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니까. 그녀가 죽기 직전에 꼭 살아남으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난 반역을 일으키게 생겼다. 그것은 또한 복수와 나의 행복을 동시에 얻을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역시 이해할 수가 없다. 샤카르가 있는 지금은 좀 다를까 했더니만.

"너처럼 대단한 사람이 왜 그런 처형에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는지, 내게 뒷일을 떠넘겼는지 정말 이해가 안 돼. 사랑이 원래 그렇게 미련한 감정이야?"

앙상한 가지와 푹신한 낙엽이 공기의 흐름에 저마다의 방법으로 움직였다. 시간이 가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래. 오늘은 반란 12일 전이다. 마음이 복잡해서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세상에는 미련한 사람이 많더라. 혹시 로제라고 기억나? 내가 몇 번 얘기해줬잖아. 괴짜 마법사 말이야. 그 사람이 어머니에게 인정받겠다고 무리하다가 기억을 많이 잃었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더라. 네 정혼자가 될 뻔했던 히엘로 공작, 알지? 그 사람은 사실 망국 에온의 왕세손인데 자기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잃고 할레시온으로 흘러들어와서 지금은 목숨을 건 반란을 준비해. 네가 사랑했던 라인하르트는, 나를 좋아했어. 내가 그를 친애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는 결국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을 길을 스스로 제의하고 받아들였으며 묵과했지."

그리고, 윤하린을 전적으로 의지했던 윤이설도 그 무엇보다 정의하기 어려운 현상을 겪어야만 했다.

나와 내 근처에 잠복한 샤카르의 지정 호위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공간에서 독백이 이어졌다. 나는 하늘을 멀거니 응시했다. 하얀 구름 조각이 드높은 푸른색 위에 동동 떠다닌다.

"사랑이 긍정적인 감정이기는 한 걸까? 내가 지금껏 지켜봐온 사랑이라고는 죄다 파멸이었는걸. 그래서 그럴 바에는 안 하는 게 낫겠다고도 생각했어. 얼마 전까지는."

약간 서늘한 감이 들어서 몸을 움츠렸다. 다리를 세우고 팔을 둘렀다. 풍경 하나는 좋다. 수도의 한 부분이 멀찍이 내려다보였다.

"근데 운명이 그렇게 쉽게 깨지는 건 아니더라."

한탄하는 거 맞아, 라고 웃으며 덧붙였다.

"오랜만에 만나서는 헛소리만 해서 미안해."

마지막 말은 사과였다. 나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들고 온 흰 국화를 무덤 앞에 올려놓았다.

르쉬네는 흰색 말고 보라색 꽃을 좋아했는데.

***

날짜가 휙휙 넘어갔다. 정치 목적의 카리스티아 식순이 절반을 넘겼을 무렵, 나는 엘피샤의 가게에서 미리 맞춰둔 드레스의 시제품을 받았다. 입지 않을 테지만.

11월은 풍경이 황량해지는 달이다. 기온이 싸늘했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정세와 모순되게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삐걱이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억지로 시간을 이끌었다.

소설 '꽃물 든 하늘'의 줄거리가 적힌 분홍색 표지의 공책은 전혀 새로운 사건이 벌어진 이상 앞으로는 쓸모가 없는데 아직 버리지 못했다. 큰 파란이 일기 전이건만 비밀 유지 때문에 인간관계 정리는 꿈도 못 꾼다. 샤카르를 보고 싶었지만 푸른 달이 떴던 그 날 이후로 안전을 위해 만나지 않았다.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할 일이 없음을 알면서도 자꾸 이것저것 신경썼고, 피로가 이에 비례해 누적됐다. 그게 제일 기분 나빴다.

그렇게 꾸역꾸역 일상 같지 않은 일상을 버텨내고.

============================ 작품 후기 ============================

첫 번째 L, 'Lov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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