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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저녁에는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알맞은 밝기의 오렌지빛 조명과 긴 식탁에 차려진 화려한 음식의 향연은 익숙한 장면이다. 지난 이십 년간 황족으로 살아왔으니까. 그러나 이 식사가 오늘은 참 색다르게 다가왔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던 정원 구석에 핀 꽃이 샤카르에게 받은 꽃과 같은 종류임을 알게 되고서는 꼭 한 번 눈길을 주게 된 것처럼. 날짜 탓인지 새삼스럽게 의미를 가지는 것들이 있었다.
조용한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셀리아가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말을 혼자 타 봤는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음, 조금 덜그럭거리긴 했지만요."
"무섭지는 않던?"
일레인이 부드럽게 질문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셀리아였다. 나는 샐러드 접시에 담긴 토마토를 콕 찍어먹으며 대화를 경청했다.
"아참, 그리고 아버지께서 사주신 차도 마셨어요. 언니가 타 줬는데 안 쓰고 좋았어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찻잎이 적당히 말라서 우려내기 좋더라고요."
"그렇더냐. 물건이 값어치를 했구나."
나와 대공은 적당히 거들었다. 언제나처럼 단란한 가족의 저녁 식사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평범함이다. 이렇게나 쉬운 것을 전생의 나는 끝까지 경험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생이 여러모로 벅차긴 하지만 사실 지난 생에 비해 물질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풍요롭고, 정신 쪽도 배운 것이 많다. 그래서 더 놓질 못하는 거겠지.
"내일은 나와 부인이 로엔세르 가에 방문해 세부 계획을 논의할 것이다. 라니아는 그동안 반란군 측과 최종 상의를 하고 오너라."
"네, 그럴게요."
식사의 말미에 대공이 수행해야 할 일정을 고지했다. 나는 가문을 대표해 비밀리에 시안만 대면하고 올 예정이다. 현 시점까지 마땅한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아 실시간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는 않아도 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다들 피곤할 테니 어서 쉬자는 일레인의 말에 따라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우선 욕조에 들어가서 씻고 나왔다. 로즈마리 향초가 은은하게 공기에 스며든 내 방에는 전담 하녀 마리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리는 내 머리카락을 말려주었고, 새로 들어온 하인들이 일을 잘 한다고 보고했다.
"아무래도 경험직이어서 그런지 따로 가르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 네가 편하겠네."
"덕분에 저와 하녀장님이 수고를 덜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곧 머리카락이 다 말랐다며 빗질을 해 주었다.
난방을 미리 해두었는지 방은 따뜻했다. 오늘에야말로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겠노라 다짐하며 딱 자정까지만 책을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불이 푹신해서 잠이 솔솔 왔으나 역시나 실제로 수면에 들지는 못했다. 생각이 자꾸 많아지는 탓이다. 미칠 노릇이다.
결국 정상적으로 잔 날이 최근 이 주일 사이 다섯 번밖에 없게 되었다.
***
오전 시간은 모두 어영부영 때웠다. 오후가 되어 로엔세르 공작가로 떠난 대공 부부를 배웅하고, 셀리아와 나는 정원을 산책했다. 그리고선 나도 외출했다. 시안과 나는 우연을 가장해 만나야 하기에 장소는 엘피샤의 가게다. 나는 엘피샤가 제작해 준 옷에서 사소한 결함을 발견하고 급히 가게를 방문했다는 설정이다.
물론 가게 안쪽 방에는 시안이 있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나는 그와 한 발 늦게 인사를 나눴다.
"잘 지내셨습니까."
"이 상황에 잘 지내기가 더 힘들지 않나요. 피곤하네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시안은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엷게 미소했다. 그리고 몇 마디 쓸데없는 겉돌리기 식 말을 건네는 동시에 주변의 바람에 섞여든 소리 정보를 읽어내 보안을 확인했다. 이러는 걸 그동안 몇 번 봐서 더 이상 놀랍지는 않았다. 그는 그러고 나서 내게 설명했다.
"오늘 밤에 저와 엘피샤는 옛 프리제 구역으로 이동합니다. 수단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를 대비해 바다를 건너 리우네아 국경을 넘는 대안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만일 저희가 대안을 택하게 된다면 반란 시작 시각이 약간 뒤로 미뤄질 수 있음을 숙지해주세요."
"그것에 대한 공지는 정보상이 맡나요?"
"네. 새로운 변수는 정보상이 수집해 모든 일원에게 전달할 겁니다. 요청하신 대로 정보상이 전면전에 나서는 일은 없게 해 두었습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그 날 적어도 자정 쯤에는 병력이 있는 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되니 조심하세요."
"위험이라면 매 순간마다 느끼고 있어요. 그래도 조언해주신 시각에는 특히 유념하죠."
약간 날 선 무표정일 게 분명한 내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며 시안이 미소지었다. 그의 감정 표현 대부분이 웃음으로 귀결됨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굳이 지적하는 수고는 들이지 않았다.
"하일과 베르크는 어젯밤에 출발했나 보죠? 하일이 어제 낮에 몰래 절 찾아와서는 조금 있다 다시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부슬비가 내렸던 어제 오후,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을 떨구며 하일이 내 앞에 나타났었다. 나는 머리나 식힐 겸 우산을 쓰고 빗속의 앞마당을 배회하던 중이었다.
'거기서 뭐해요, 하일?'
내가 그를 발견한 것은 잔디가 젖은 채로 시들고 있는 마당을 몇 바퀴고 돌고 나서였다.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정문 밖에 선 하일은 휙 손사래를 쳤다. 착 달라붙은 짙은 와인색 장발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몸에 스민 물기가 허공으로 빠져나오더니 쩍 얼어붙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금세 보송보송해진 그는 이어서 손을 몇 번 성의없이 쥐었다 폈다. 얼음으로 만든 정교한 우산이 금세 만들어졌다. 차갑지도 않은지 그걸 어깨에 걸치고, 하일이 예쁘게 웃었다. 핀트가 나간 폭군 같은 미소다. 예전의 정중하나 비웃는 기가 가득했던 웃음이 약간 변형된 듯했다.
'엘피샤가 날 떠밀었어, 공주님한테 인사하고 오라고.'
인내심을 뽑아낸 기다림 끝에 나온 대답조차 그닥 정상적이진 않았다. 근처에 있던 하인을 시켜 문을 열어주며 심드렁하게 정정했다.
'나 공주 아닌데요.'
'아 참, 그랬지.'
성큼 걸어 마당에 들어온 하일이 눈을 찡긋했다. 뭐 하는 짓이야, 저게. 어이없다는 투로 쳐다보았다. 신경쓰는 기색 없이 그가 제멋대로 말했다.
'아무튼. 조금 있다가 다시 만나자고, 대공녀님.'
'네, 뭐. 그러죠.'
완연한 작별 인사는 아니었다. 적어도 재회를 약속하는 것에 나는 살짝 안심했던가.
'자, 이건 선물. 남의 집에 방문할 때는 예의를 차려야 한대서.'
하일은 마법사답게 능숙한 손동작으로 얼음꽃을 만들어 내게 건넸다. 차가워서 움찔하자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며 자기 머리를 묶은 끈을 풀어 줄기에 돌돌 감아 다시 주었다.
'마법으로 만들었으니 시전자인 제가 죽지 않는 이상 영원히 녹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재회까지 안녕하시기를.'
돌아서기 전 마지막은 하일이 아닌 로제였다.
시안이 조곤하게 말했다.
"떠날 준비를 하다 말고 무얼 하러 사라졌나 했더니, 그대에게 갔었군요. 작은 거짓말까지 하면서."
"거짓말이요?"
"엘피샤는 하일에게 그런 권고를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말렸겠지요. 이 시국에 하일과 그대가 마주하는 건 적절치 않으니 말입니다."
"그렇긴 하네요. 왜 그랬을까요?"
"기억 한 조각 남지 않은 사람이라도 옛 제자라 하니 그저 무시하기는 힘들겠지요."
묘하군. 정말이지 특이하고 신기한 사람이다. 대강 수긍하고, 궁금한 점을 알아내고자 대수롭지 않은 척 떠봤다.
"그 기억은 누굴 위해 내던졌을지 궁금하네요. 저번에 물었을 때는 대답을 회피하던데."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에 소모되었을 겁니다."
또 소리 삭인 웃음이다. 처연한, 소담한, 기쁜 듯한, 슬픈, 예의 차린, 그리고 뜻모를. 미소들. 모든 게 웃음으로 설명되지만 동시에 전혀 와닿지가 않는다. 평생 한 번은 행복한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 그런가. 물끄러미 관찰하다가 살짝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내가 원하는 대답은 주지 않는군.
"그랬으면 좋겠네요. 아니면 제가 조금 서운할 것 같아서요."
턱을 괴려는 손을 의식적으로 저지했다. 공이 사를 넘어선 관계가 된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다. 지나치게 편한 자세는 적합하지 않다.
그와 별개로 흐르는 생각은 다분히 사적이었지만.
어차피 마법 수식으로 억지로 지우지 않은 기억 또한 점차 빛이 바래다가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럼에도 가치는 여전하다. 기억이란 시간에 쓸린 그대로가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흔히들 추억 보정이라고 부르는 자연스러운 왜곡은 그 시절의 느낌을 최대한 좋게 간직하도록 한다. 지나간 후조차 아플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나 공유할 사람이 없는 과거의 한 부분은 아무래도 썩 기껍지 않은 게 사실이다.
"비극입니다."
앞선 주제와 연결되지 않는 말에 눈을 들었다. 시안은 조용히 웃었다.
"어떤 것이요?"
"무엇이든지요."
말뜻이 이해는 안 되지만 공감이 갔다. 이상하게도.
그와 나는 잠시 옆길로 샌 이야기를 다시 전략이나 계획 쪽으로 끌어왔다. 오늘의 만남이 반역 전에 그와 마지막으로 대화할 기회라서, 아주 상세한 논의가 오갔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로엔세르 공작가 저택에서도 내 부모님과 레테일이 이러고 있을 것이다.
시곗바늘이 어느 정도 기울었다 싶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안은 따라나오지 않았다. 나는 엘피샤에게서 아무 드레스 상자나 하나 받아들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
늦가을이라 해가 빨리 진다. 외출이 끝난 시점에 해는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는 저택에 도착해 잠시 쉬다가 셀리아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일레인과 대공이 없는 저택은 뭔가 휑했다. 셀리아 역시 그렇게 느꼈는지 이야깃거리를 짜내 나와 한참 수다를 떨다가 서재로 갔다.
나는 내 방에 틀어박혀 대공 부부가 오기를 기다렸다. 시안에게 들은 것들을 전달해줘야 했고, 로엔세르 쪽 정보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흔들의자에 앉아 며칠 전에 서점에서 사 온 렘사 이시프의 '주황의 파도'를 읽었다. 여전히 딱히 이해되는 것은 없었다. 그냥 시간 때우기 용이다.
- 그대가 사라진 세상이 멈출 것이라는 생각은 오만이다. 단, 그대가 짊어지고 떠나는 일부와 가져가지 않는 일부는 예외다. 저 너른 밤하늘이 보이는가? 차가운 지평선이 그대를 짓밟는가? 새로운 인과가 비수가 되어 박히는가?
불 밝힌 방에서 조용히 독서하는 것은 정서 안정에 도움이 된다. 나는 허브차도 한 잔 마셨다. 중간에 스트레칭을 할 겸 창가로 갔다. 해가 완전히 진 지 오래였고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얇고 앙상한 나뭇가지가 파르르 떤다.
그리고, 오후 9시. 이백 페이지 가량 되는 책을 완독했다. 아직 귀가 소식은 없다. 방 구석에 놓인 회중시계가 잘못된 것인지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마리, 저 시계 혹시 고장난 게 아닌지 봐줘."
의자에 앉아 할 일 없이 꾸벅꾸벅 졸던 하녀 마리가 일어나서 시계 앞으로 갔다. 이리저리 살피더니 고개를 젓는다.
"시곗바늘은 잘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아버지와 어머니의 귀가가 좀 늦어지는 것 같아서. 혹시 시계가 빨라서 내가 조바심을 낸 건가 했어."
"하실 이야기가 많아서 그런 것 아닐까요?"
"하루 전이라 접선은 비교적 짧게 하기로 사전에 협의가 되어 있었는데......"
뭔가 묘하게 어긋난 듯한 기분이다. 인상을 쓰며 입술 위에 손을 올렸다. 혈연 관계인 로엔세르 공작가의 저택에서 설마 무슨 일이 있겠냐만은, 시간이 늦어서인지 계속 신경이 쓰였다. 별 문제가 없더라도 밤에 야외에 오래 있는 것은 좋지 않다.
결국 전령을 보내기로 했다. 편지지를 꺼내서 안에 간단히 몇 글자 휘갈겼다. 대충 언제 집에 돌아올 거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마리, 이걸 다른 하인 통해서 로엔세르 공작가 저택으로 보내."
"네, 알겠습니다."
마리가 편지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1층이나 2층에 대부분의 하인이 있으니 마리는 거기로 내려가서 아무에게나 편지의 전달을 부탁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리가 돌아오질 않았다. 일을 맡길 하인이 다 바쁜가? 그렇다기엔 지금 저택 안에는 시중을 들어야 할 사람이 나와 셀리아 뿐인데. 내가 요즘 과민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슬슬 불안했다. 우선은 일어나서 문 쪽으로 갔다.
"아, 아가씨!"
그 때.
문이 벌컥 열리고 마리가 허겁지겁 뛰어들어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큰일났습니다. 당장, 이 저택에서 탈출하셔야 해요!"
나는 그제서야 열린 문 너머의 공기가 상당히 매캐하다는 것과, 그 안에 진득하고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은 11월 17일, 반란 29시간 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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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편의 작중 시간대도 오후 9시, 76편 업로드 시간도 오후 9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