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7 12. L =========================
거대한 공포가 나를 짓눌렀다. 찰나였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싸늘한 바람이 훑고 간 양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시간이 없습니다, 아가씨. 복면을 쓴 괴한들이 저택에 무단으로 침입해, 불을 지르고 하인들을 죽이고 있어요. 제가 나갔을 때는 괴한들이 2층으로 진입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마리가 정신없이 말을 쏟아냈다. 손 끝부터 핏기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나는 대꾸는 커녕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3층에서 무작정 뛰어내리는 건 위험합니다. 커튼이나 이불 같은 천을 길게 찢어 타고 내려갈 줄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완성하기 전에 괴한이 들이닥칠 거예요. 하인들이 죽음으로 막아주는 것 또한 오래 가지는 않을 거고......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저들을 맞이하기보다는 차라리 정면 돌파를 하는 편이 낫습니다. 통로만 잘 선정한다면 들키지 않고 뒷문 같은 곳으로 탈출할 수 있어요."
마리는 맺힌 눈물을 훔치고 방 안의 조명을 모두 껐다. 현실을 직시하고 신속히 대처하는 것이다. 그녀는 반란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나와 자신의 안위에만 초점이 맞춰졌기에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으나, 나는.
우리는.
"3층과 2층의 복도 왼쪽 구석에는 사용하지 않는 옛 다용도실이 있고 그 안에 3층부터 1층의 응접실까지 연결되는 계단이 있습니다. 어릴 적 하녀장님께 교육을 받을 때 분명 봤어요.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는 데다가 눈에 잘 띄지 않으니 괴한들이 발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거예요. 아직 불이 번지지 않은 그쪽으로 가야 합니다."
"......아."
"어서 도망쳐야,"
"잠깐, 잠깐만. 마리."
목소리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열린 문 사이로 이제는 아비규환의 소음이 어렴풋이 새어들어온다. 가장 폐쇄적인 구조의 3층인데도. 다리에 힘이 없어서 그만 주저앉을 것 같다.
천천히 시선을 2층 서재 쪽으로 옮겼다. 아연하게 물었다.
"셀리아는......?"
울먹이면서도 바삐 움직이던 마리가 멈칫했다. 이내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넋이 나가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셀리아는? 그 아인 2층 서재에 있단 말이야. 응? 셀리아는?"
내게 두 어깨가 잡힌 마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입자의 기척이 수면이 상승하듯 엄습해온다.
그 찰나의 낭비를 잘라내며.
"꺄아악!"
별안간 바로 아래층에서 절박한 비명이 크게 울려퍼졌다. 방금 그건.
내가 아는 목소리다.
사고가 모조리 정지했다.
"셀리아 아가씨......!"
마리의 경악어린 외침과 동시에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셀리아. 아닐 거야. 내가 잘못 들었겠지.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셀리아와 함께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어째서.
머리가 어질하고 눈앞이 부분적으로 까맣게 죽었다. 그러나 여기서 기절할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무릎을 짚었다. 어느새 볼가를 타고 뭔가가 소리 없이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 시야가 뿌옇다.
셀리아를 데리러 가는 방법은 정면 돌파 뿐이다. 그마저 도중에 2층에 도달한 자객들과 마주치겠지. 그럼 나는 높은 확률로 죽는다. 하지만 위치상, 그리고 정황상 셀리아는. 내가 구하러 움직이는 것과 상관 없이 살지 못할 것이다.
이 순간에조차 빌어먹을 이성은 셀리아의 생존을 부정하고 있다. 꼭 나 들으라는 듯이, 너무나 정확한 셀리아의 음성이 귀에 꽂혔던 탓이다.
셀리아.
매캐한 냄새가 갈수록 짙어진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가야 했다. 그래. 우선은 내 숨이 붙어있어야 했다, 망할.
망설일 틈조차 당장의 내게는 사치였다. 그게 가장 비참했다.
"......마리, 네가 앞장서야 해. 나는 하인들이 다니는 통로에는 가 보지 않았어."
미안해, 셀리아.
미안해.
나는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이기 시작했다. 그게 면죄부라도 되는 것처럼.
"......네, 아가씨. 이쪽입니다."
나보다 많은 눈물을 떨구며, 마리가 어렵사리 대답하고 방 구석으로 가 작은 바퀴가 달린 장식장 하나를 밀어 치웠다. 오래전에 저택 설계 실수로 폐쇄된 다용도실 입구 중 하나다. 이런 문이 대저택에는 으레 몇 개씩 존재한다.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아예 부수지는 않고 비밀 통로처럼 남겨두는 것이다.
마리가 원래 방문은 굳게 걸어 잠그고 비밀의 문을 열었다. 나는 아까 간식을 먹는 데 쓴 나이프를 손에 꼭 그러쥔 채 안으로 들어갔다. 내 주무기인 활은 저 멀리 활터에 보관되어서 사실상 가지러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칠흑처럼 새까만 어둠이었다. 우리에게 불을 가져올 여유 따위가 있었을 리 만무했다. 오래 묵은 먼지 냄새가 났다. 나선형으로 말린 계단은 자비 없이 가팔랐다. 마리를 따라 황급히 내려가다가 발을 살짝 접질렀다. 그렇다고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1층까지 가서 다용도실을 빠져나왔다. 바로 응접실이었다. 통유리로 된 창문 너머로 곳곳에 불이 붙은 저택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거기서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하인 하나와 마주쳤다. 아직 살아남은 이가 있었던가.
"아가씨, 살아 계셨습니까!"
그는 나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화색이 돈다.
아니. 주인의 생존을 확인한 기쁨과는 어딘가 달랐다. 이 위화감은 무엇에서 기인하는가. 직감적으로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로 주춤 물러섰다.
"갑자기 화재가 나서 대피를 하셨나 봅니다."
하인은 눈을 부릅뜨고 입매를 슥 끌어당겼다. 작은 폭탄을 품에서 꺼내 구석에 내동댕이친다. 콰앙! 큰 파열음과 함께 벽과 바닥이 부서졌다.
그는 느릿하게 말을 건네며.
"그런데 설마 여기로 오실 줄이야......저택에 비밀 통로가 있었군요. 만약을 대비해 미리부터 지키고 있길 잘했습니다."
우리에게 한 발짝씩 걸어왔다.
첩자다.
저 폭탄은 일종의 신호탄이다. 폭발음을 들은 자객들은 곧 이리로 모일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도래하기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손에 든 나이프를 고쳐쥐었다. 저택에 하인을 들일 때 기본적으로 하는 검사가 있다. 무예를 수련한 사람은 손에 박힌 굳은살이 일반인과 다르다. 저택의 관리자는 그걸 확인해 신분을 위장하고 숨어들려는 자객을 걸러낸다. 저 자는 그 절차를 통과했을 테니 적어도 무술 숙련자는 아니다. 고로, 육탄전까지만 가지 않으면 승산이 있다는 뜻이다.
'거리가 너무 멀다면 표창을 날리듯이, 이렇게. 회전을 줘서 날리는 방법이 적합해. 하지만 두 걸음 안에 상대와 닿을 수 있는 초단거리라면.'
나이프를 단검인 셈 치고 단숨에 달려들어 쇄골 안쪽이나 옆목에 박아넣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샤카르는 내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
내가 사람을 죽여야 할 때를 대비해서.
"평생 온실 속 화초로 살아온 주제에 의미없는 발악을 하시렵니까?"
"닥쳐라."
말을 씹어뱉으며 틈을 노렸다. 집중해야 한다. 하인이 선뜩하게 웃으며 계속 다가왔다. 거리가 줄어든다. 네 걸음, 세 걸음.
두 걸음.
하인이 품에서 무기를 꺼내려 손을 집어넣었다.
지금이다!
확 달려들었다. 품에 넣은 손을 꾹 눌러 제압하며 하인을 뒤로 넘어뜨렸다. 바로 다음 순간 체중을 실어 나이프로 목을 깊숙히 찔렀다.
"컥!"
피가 튀었다. 저항은 없었다. 하인은 즉사했다. 칼이 들어가는 감촉이 구역질 나게 생생해서. 너무 끔찍했다. 비명을 내질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소스라치듯 일어나 마구 뒷걸음질쳤다. 숨이 넘어갈 것 같다. 목이 졸려 끅끅거리며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눈은 탈출구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충분하다.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내 정신은 몸에 비해 침착했다.
자객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마리가 내 손을 잡고 응접실 뒷문으로 달아났다. 순식간에 저택 밖으로 나왔다.
여기는 정원이다. 곳곳의 마른 나무와 풀에 불이 붙어 활활 타고 있었다. 연기 때문에 호흡 자체가 어려웠다. 마리는 나를 이끌고 정원 안쪽 깊숙한 곳을 향해 달렸다.
어제까지 친숙하기만 했던 정원이 광활한 공포의 장이 되었다. 검푸른 공허에 섬짓하게 뜬 보름달과, 무서울 정도로 맑은 날씨, 시뻘겋게 불타오르는 나무와. 저 멀리서 쫓아오는 흉수.
하인을 새로 들일 때 목적을 숨기고 잠입한 첩자가 자객을 저택으로 들여보내는 데 협조하고 불을 질렀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하인들은 러셀 후작, 그러니까 세크네트 로엔세르와 함께 뽑은 사용인이었다.
로엔세르 공작가에 반란 관련 논의를 하고자 방문했던 대공 부부는 아직까지 이 아수라장에 등장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어쩌면 대공과 일레인 또한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 생사를 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몇 년 전 갑자기 루 할레시온과의 교류를 재개하고, 시안에게 먼저 접근하고, 그 전부터 혈연 관계를 내세워 나와 친분을 쌓고, 여러 사건에 조력해 신뢰를 얻고, 황제가 되라고 내게 우스갯소리처럼 꼬드기고, 약혼 파기 투표 때 나의 손을 들어주며 2황자파라고 광고했는데도 황태자파에서 제대로 적대하지 않은 유일한 귀족 가문.
로엔세르 공작가.
배신자는 로엔세르였다.
적으로 두면 가장 벅차겠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사실 처음부터 나의 적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로엔세르 공작가는 황태자파의 첩자 노릇을 하며 반란군의 계획을 누설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반란일을 하루 앞으로 당기자고 처음 제안했던 사람 역시 세크네트였다. 귀족들이 황궁에 집결하기 전날은 황태자에게는 불리하지만 로엔세르에게는 자유도를 보장해 준다. 그렇게 그는 일리있는 말로 신임을 확고히 하고 변경된 사항을 황태자에게 흘려, 새로운 반란일보다 하루를 더 앞서서 국내 반란군의 수장 격인 루 할레시온 저택을 공격하게 한 거다.
"정원 뒤편의 공터를 지나 산을 넘어가세요, 아가씨."
갑자기 마리가 우뚝 멈춰섰다. 내게 당부처럼 말한다.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야지. 너도 같이."
"아니요, 저는 가지 않아요. 시간을 끌 사람이 필요합니다."
"헛소리 하지 마."
"라니아 아가씨."
마리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옛날에나 불러주던 이름을 다정히 꺼내들었다. 돌아버리겠다. 너무 화가 나서, 미친듯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럴 시간에 가자."
"죄송합니다."
"마리!"
나는 희생을 싫어한다.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마리를 두고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손을 꽉 붙잡고 억지로 잡아 끌었다. 버티는 것마저 시간 낭비임을 알기에 마리는 결국 끌려왔다.
저 멀리 공터가 보였다. 뛰면서 뒤를 홱 돌아보았다. 저택이 불에 완전히 휩싸여 한 덩어리의 화염이 되었다. 목재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검은 연기가 마구 솟아오른다.
어쩐지 익숙한 광경이었다.
미친 소리로 들리겠지만 나는 이 광경을 목도한 적이 있다. 지난 겨울부터 나는 환청과 환시를 몇 번 겪었다. 첫 번째는 1062년 1월 1일, 잔뜩 뭉개진 절규.
'아아......악! ......!'
피를 토할 듯 처절하게 소리치던 그 목소리는 아까 내가 살인을 저지르고 반사적으로 몸서리치며 내지른 것과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 1월 13일. 불타는 저택과 기억까지 쓸어갈 기세로 건조하게 부는 바람, 초라하게 울부짖는 사람. 세이잔 저택의 화재 장면을 이 세계 바깥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했다는 특수성 덕에 환시의 형식으로 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린을 제외한 가문 구성원 모두를 살해한 세이잔 저택 방화 사건과 지금 상황은 상당히 유사하다. 세이잔을 몰살하려던 자들 역시 황태자파라는 것을 상기하면, 이번에도 그들은 일부러 이런 수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와 마리는 공터에 다다랐다. 뒤쪽에서는 불기둥이 집어삼킨 저택이 굉음을 내며 구조물을 떨궜다. 저 안에서 셀리아는, 희생당했다. 아이린의 언니 이리스가 그러했듯이. 그렇다면 홀로 도망친 나는 아이린과 동일시된다.
이제 알겠다.
나는 그 때 아이린의 현재와 나의 미래를 보았다.
바뀌지 않은 미래를.
"......아가씨."
울음을 억지로 잠재우며, 마리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우리의 걸음은 공터 한가운데에서 못박혔다.
"어쩌면 좋을까요."
차디찬 바람이 뺨을 스쳐지나간다. 시리도록 냉혹하다. 그러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자객들이 우리를 둥글게 포위했다.
============================ 작품 후기 ============================
두 번째 L, Lament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