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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78화 (78/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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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날 수십 개가 가시를 세운다. 그러나 대항할 무기도, 마법도, 호위도 없다.

지금의 내게는 선택지가 하나 뿐이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반역, 불길, 배반, 첩자, 죽음, 비겁, 도망, 살인. 아득히 먼 옛날의 이야기마냥 현실감 없는 것들. 흔들리던 피 묻은 손끝이 비로소 정지했다. 소매로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았다. 손은 그대로 두었다. 거칠게 엇박이 나던 숨이 차츰 정돈됐다.

이쯤이면 국외 반란군은 오늘 밤에 출발할 예정인 시안과 엘피샤를 제외하고 모두 국경 밖에 당도했을 시각이다.

국내가 무너지면 국외 역시 불안정해진다. 하지만 아직 국내보다는 상황이 좋다. 시안 쪽 사람들은 어차피 진격이 아니면 죽음이라 국내 조력 세력이 전멸하든 말든 전쟁을 강행할 것이다. 애초에 원래는 그들 단독으로 국외에서 쳐들어갈 셈이었으니까. 로엔세르 공작가가 시안의 존재를 누설했을 텐데도 그가 잡혀가지 않은 걸 보면, 황태자는 시안을 미끼로 반대파를 파악하고 정리하는 동시에 아직 멸망시키지 못한 세 왕국을 싸잡아 공격할 거리를 마련할 요량이다.

그리고 나는 사실상 이 모든 것의 방아쇠였다.

"라니아 대공녀."

짐짓 유쾌한 음성이 차분함의 껍데기를 쓰고 나를 휘어잡았다.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전에 부르지 말라고 했던 이름을 농락하듯 입에 올리며,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걸어나온 자는.

프리드리히 스카일러 후작.

"황실의 방계에 불과한 대공과 그 가족이 감히 황좌를 차지하려 들었으니 참살하라. 새로 즉위하신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명입니다."

헤일렌 공작의 당부가 불현듯 떠올랐다.

'스카일러를 조심하시길. 그는 당신을 노리고 있답니다.'

일전에 프리드리히가 했던 말도.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저는 '사냥개'를 키울지언정 도둑쥐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 이런 식이구나. 숨을 길게 뱉어냈다. 더 이상의 동요는 없다.

나의 조부 오벨 3세는 방금 사망했다. 공식적으로는. 그리고 황태자가 곧바로 즉위해 루 할레시온 가문의 일원에게 즉결 처분을 내렸다. 이에 따라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은 이 순간부로 반역자로 규정되어 사형 대상이다. 사형 집행인은, 프리드리히가 키워온 것으로 추정되는 내 눈앞의 자객 수십 명.

밤이 짙다. 망연히 속으로 읇조렸다.

"하늘은 맑기만 하고, 불은 계속 번지는군요. 이러다간 황궁까지 불타겠어요."

무감정한 프리드리히의 통보를 싹 무시하고 산뜻하게 말을 건넸다. 그는 질린다는 눈빛을 하며 냉랭하게 웃었다.

"여기서 황궁까지 불이 옮겨붙기 전에 비가 한 번 이상 내릴 것입니다. 그만큼 거리가 멀지요."

거리가 멀다, 그러니 나는 무슨 짓을 해서든 가지 못한다. 그가 내게 건넨 비아냥거림이었다.

"......세 개만 묻죠."

명령조로 말했다. 내 몫의 두려움까지 가져간 마리 앞으로 팔을 뻗어 프리드리히에게서 조금이나마 멀리 떨어뜨리며. 그는 인심 쓰듯 고개를 기울였다.

"하나. 나인하트 공작은 어느 편이었나요?"

"나인하트 공작께서는 시기에 맞추어 파벌을 변경하는 데 도가 튼 분이십니다. 그 분은 황태자파였다가, 2황자파로 전향했다가, 아레스티제 공작을 제물로 바치고 그 권력을 고스란히 손에 넣으며 원래 자리로 돌아오셨습니다. 아레스티제 공작이 반란군에게 부지와 자금을 지원한 사실을 발고하고 그 대가로 지위를 보전한다. 실로 완벽한 전략이었지요."

일이 틀어질 기미를 감지하자마자 소속을 바꿔치기했군. 손을 잡을 때부터 느꼈지만 그녀는 내가 다루기 힘든 정치 수완을 가졌다. 빠른 판단 하에 이쪽을 버리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일 테지.

"둘. 라인하르트 엔리케 할레시온은 어떻게 됐죠?"

마땅히 눈에 띄는 반응은 않고 바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나의 침착은 비정상이었다. 바닥에 던져져 한 순간에 온 관절이 처참하게 꺾인 인형처럼.

살고 싶었다. 하지만 살 수 없고, 살아있는 시간에 비례해 누군가는 결정을 내리고 행로를 정한다.

복잡한 마음이 휘몰아쳤다.

실소가 비집고 나오려 했다. 입술을 깨물어 삼켰다. 통각은 없었으나 대신 피 맛이 났다. 미쳐버렸다고 표현하면 딱 적당하겠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라인하르트는 그새 바뀐 호칭으로 불렸다.

"반란이 진압될 때까지 안전한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실 예정입니다."

구금됐군. 죽임당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마지막, 셋."

이 기분을 어찌할 수가 없다.

"내 부모님은, 어디 계시죠?"

프리드리히가 진득하게 입가를 끌어올렸다. 원하던 대목이 나와 만족스럽다는 듯이. 저열했다.

"로엔세르 공작가 저택에 계십니다."

내가 일말의 기대를 품기도 전에.

"즉결처형이 끝난지는 두어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사후 처리에 관한 황제 폐하의 지시가 내려오지 않은 터라."

그는 나를 마음껏 농락하며 발 밑을 부숴버렸다.

나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 대화는 이쯤 하지요. 대공녀께서 제게 벌인 그간의 수작을 생각하면 이 이상은 배려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차갑게 끊어내며, 프리드리히가 자객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나와 마리에게 겨냥된 칼날이 새파란 달빛을 받아 예리하게 반짝였다. 타는 냄새가 혈향과 더불어 코를 찌르고, 눈앞은 여전히 흐리다.

이윽고 나는 밤기운처럼 새까맣게 비웃었다.

"수작, 이라니요. 전 스카일러 후작을 살해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후작이잖아요."

프리드리히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단어마다 힘을 실어 말한다.

"도발하시는 겁니까."

"그냥, 꼴사나워서."

밑바닥 같은 분노가 전신을 덮었다. 나는 비밀을, 이제껏 나만이 간직했던 세계의 정체를 아무 거리낌 없이 밝히며 프리드리히의 역린을 후벼팠다.

"그거 아나요? 후작은 원작대로라면 얼마 후에 몰락할 거예요. 하지만 내가 줄거리를 많이 바꿔서 그럴 일은 없겠죠. 대신 난 후작이 그토록 바랐던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새도 없이 그를 죽이게 했고, 누이동생 가넷 스카일러를 미치게 만들었고, 형의 전부를 빼앗고 추방하게 했어요."

소설 속에서 그의 치부는 가족이었다. 가족애의 결핍이 끝내는 뒤틀린 권력욕과 엇나간 사랑으로 번져,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었다. 이 세계에서 내가 만들어 준 그의 결말은 원작과 비슷했다.

"무슨 헛된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손은 따로 노네요."

프리드리히는 악랄하게 미소짓는 나를 증오스럽게 쳐다보았다. 그의 손은 검 손잡이를 꽉 쥐었으나 내가 뜬금없이 내뱉은 말에 대해 판단하느라 검을 뽑지는 못했다.

거기다 대고 사근히 비수를 꽂았다.

"어디 한 번 휘둘러 봐. 난 그쪽 가정을 파탄내는 걸로 이미 충분히 복수했거든."

프리드리히가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제대로 건드렸다. 검집에서 빠져나온 칼이 곧장 내 목을 향해 겨누어졌다.

"그러니까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

아랑곳 않고 느릿하게 속삭였다. 내가, 설마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죽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는 죽고 싶지 않지만.

그 순간 사고를 멈춘 머리로는 아무런 유언도 떠올리지 못했고, 칼날이 휘둘러졌는데.

나무 위쪽에서 날아온 무언가에 부딪쳐 산산조각났다.

"시간 잘 끄네, 라니아."

뒤이어 자객들 한가운데로 뛰어내려 눈 깜짝할 새 몇 명을 베어넘기고, 여유롭게 내게 말을 거는.

샤카르.

"잘했어."

샤카르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그의 굳건한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샤카르."

당신이.

"늦게 와서 미안. 힘들었지?"

왜 여기에.

프리드리히와 잠깐 대치하던 그가 이내 움직였다. 프리드리히는 뒤로 빠진 후 나타났던 것처럼 홀연히 자리를 벗어났고, 자객들이 검 끝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어림잡아 열댓 명. 모두 숙련된 정예였다. 우리는 구석 쪽으로 일부러 몰렸다. 그는 나와 마리를 커다란 나무 앞에 두고 방어식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렇게 하면 뒤는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던 자객 하나가 이쪽으로 내려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가씨!"

마리가 나를 소리쳐 불렀다. 순간 세게 밀쳐졌다.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밀려나 넘어졌다. 경악하며 홱 고개를 들었다.

마리가 내 앞으로 무너져내렸다.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길게 난 상처에서 피가 솟구쳤다.

"마, 마리."

그녀를 부르며 무릎으로 기어 다가갔다.

"아가씨, 어서. 피하세......"

엎드린 채로 목소리를 쥐어짜는 마리의 등에 칼이 푹 꽂혔다. 핏방울이 나에게까지 날아왔다.

아니지?

죽은 거, 아니잖아. 피가 물처럼 흘러내리는 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리,"

"젠장, 라니아!"

서걱! 목이 베인 자객이 뒤로 털썩 넘어갔다. 내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운 샤카르가 이어서 두 명을 더 처리했다.

"괜찮아? 다친 데는?"

그가 날 뒤에 두고 물었다. 괜찮냐고?

내가 어떻게 괜찮아?

"샤카르, 마리는. 마리는요."

"......라니아. 포기, 해야 돼."

샤카르가 어렵사리 짓씹듯 단정했다. 이어 되묻는다.

"어디 다친 데는?"

"......다친 건 당신이잖아요."

계속해서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목소리가 뭉개지고 갈라졌다. 잠시 서로의 틈을 노리는 대치상태였다. 샤카르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다친 부위를 꾹 눌러 지혈하던 손을 슬그머니 떼어 확인하고, 다시 눌렀다. 손가락 사이로 배어나오는 검붉은 것.

그는 옆허리에 깊은 자상을 입었다. 언제 그랬는지도 모를 부상이었다.

그러니까 대체, 샤카르가 왜.

"왜 왔어요? 내가 분명 그랬잖아, 우리 각자 살아남자고!"

질책처럼 소리쳤다. 대답이 오기도 전에 검 두 자루가 나를 향해 쇄도했다. 하나는 샤카르가 걷어냈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아슬하게 피했다. 팔을 스치고 지나가는 따끔한 감촉으로 보아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한 것 같다.

"너 정말 내가 혼자만 내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냐."

그가 내 허리를 휘감아 끌어당겼다. 덕분에 칼날 하나를 더 피했다. 가쁜 숨결 사이로 작고 낮게 깔리는 음성이 나를 더 울게 했다.

"그래도, 고맙다. 내가 너에게 올 때까지 버텨줘서."

그 말을 들은 직후부터 맹렬하게 퍼부어지는 공격에 우리의 대화는 끊겼다.

곳곳에서 피가 비산했다. 마른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는 비린내가 역겨웠다. 나는 아직 남은 일말의 이성을 자아내 판단을 내리고 샤카르의 허리춤에서 셰룩을 뽑아들었다. 마법을 해제하는 능력이 내재됐다지만 어쨌든 칼은 칼이다. 측면에서 검을 찔러넣는 자객에게 던졌다. 빠르게 날아간 셰룩이 자객의 어깨에 박혔다. 자객은 검을 떨어뜨렸다.

저택에서 시작된 불길은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저택이 거진 다 탄 탓도 있지만, 아무래도 진화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뒤늦게나마 출동한 듯했다. 이로써 프리드리히가 화재의 확산이 없을 것이라 장담한 이유가 확실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걸 계산할 시간적 여유와 심적 여유가 내게는 없다.

공기가 탁한 데다 배가 꽉 조여들어 숨을 쉬기가 너무 힘들었다. 눈앞이 자꾸 흐릿하고 어지러운 것이 비단 눈물 때문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팔 말고도 곳곳에 생겨난 생채기의 아픔과, 몇 번이고 다시 던지고 또 되찾아 손에 쥔 셰룩이 간신히 내 의식을 자극해 깨워주고 있었다. 샤카르 역시 많이 지쳤다. 옆허리의 큰 상처 때문에 더더욱 감당하기 버거울 것이다.

어느샌가 자객의 대부분은 바닥에 누워 검은 바닥과 그 아래 흐르는 붉은 물결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는 마리가 누워 있었다.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다. 나는 생각을 포기했다. 샤카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장검을 크게 휘둘렀다. 뒤이어 날아드는 반격을 빗겨내고 자객의 배에 검을 찔러넣었다가 뺐다. 끔찍한 소리가 났다. 그는 시체를 걷어차 뒤에 있던 자객의 공격을 막았다.

불현듯 저 멀리서 새로운 불빛이 보였다. 지원군인가. 저들이 도착하면 우리는.

그 찰나에,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멎었다.

고개를 돌렸다. 바로 다음 순간, 생존한 네 명의 자객들이 돌연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샤카르는 어렵사리 세 명을 쳐냈다. 그러나 틈을 빠져나온 하나가 이제 몸도 잘 가누지 못하고 있던 내게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선혈이 발치에 후드득 추락한다. 몸을 돌려 나와 마주보고 선 그가 억눌린 신음을 뱉어냈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복부를 관통한 칼날 끝에서 피가 방울져 떨어졌다. 고개를 숙인 그는 내 어깨를 손으로 짚고, 무언가를 억지로 삼켰다.

믿기지가 않았다.

"......샤카르?"

멍하니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이 세게 들어갔다. 자객이 칼을 거두어 갔다. 크게 휘청이며 그는 나를 안듯 안겼다. 내게 그의 뜨거운 피가 번졌다.

"샤카르."

엇박으로 날뛰는 헛숨을 억지로 잠재우며 그는 어렵사리 말했다. 내게 하려던 수많은 말을 단 한 마디로 꾹 눌러담아서.

"......괜찮아."

괜찮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끝내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바르르 떠는 손끝이 내 얼굴을 매만졌다. 나는 그가 이대로 재가 되어 사라질까 두려워 있는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하염없이 그의 이름만을 부르며.

하나 남은 자객은 지원군이 올 때까지 공격하지 않았다. 나를 지키던 사람의 치명상으로 임무 완수가 확실시되었으니까. 우리는 살아나갈 수 없을 테니까.

왜.

당신이 왜.

내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최악으로 나아가는 거야.

발소리가 가까워 온다.

이제는 끝이다.

-

마지막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던 그 어느 밤에.

그 어느, 비극의 장에서.

손등이 아린 바람이 붉은 밤을 뚫고 향기로 찾아와.

마법처럼 나의 죽음을 몰아내지 않았다면.

-

적막이 온 세상을 휩쓸었다. 바람을 제하면 오직 내 울음만이 소리의 전부였다.

샤카르와 나는 비로소 무너졌다.

검은 망토 차림의 시안은 먼 곳에 사신처럼 고요히 자리했다.

샤카르는 검붉은 피를 울컥 토했다.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는 그를 놓칠새라 꼭 끌어안는 것 뿐이었다.

창백한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애틋하게 웃으며 눈물을 닦아 준다. 빌어먹게도 이 순간마저 그는 다정했다.

내가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냥 실감이 나질 않아.

이게 다 거짓 같아.

"......나도 시간 끄는 건, 자신 있어서."

그가 장난처럼 말했다. 나는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대꾸했다.

"시안을 불렀군요, 당신이."

"응, 좀 급하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핏덩어리를 한 차례 더 뱉어냈다.

"그래서, 시간을. 벌어야 했어."

너무 쓰라렸다. 내상을 입은 것도 아닌데 뭔가가 울컥 치고 올라와 목을 막았다. 자꾸 넘치는 눈물 때문에 그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싫다.

싫어.

"다행이야."

"......뭐가 다행인데요. 대체 뭐가,"

"내가 널 만나서."

싱긋 미소짓고,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로 나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길고 깊게. 얽히는 사이로 피 맛이 났다. 눈을 감았다. 광활한 어둠 속에 오직 그의 감촉만이 선명했다.

가을밤의 공기보다 이제는 그의 입술이 차갑게 느껴진다. 심장이 산산히 무너져내렸다. 우리는 딱 한 뼘만큼 멀어졌다. 그 거리가 너무 무서웠다. 다급하게 애원했다.

"샤카르. 가지 마요, 샤카르. 가지 마."

"라니아."

"우리 엄마처럼 나만 두고 가지는 마요, 제발."

그러나 그는 속절없이 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뱉어내듯 목소리를 짜냈다.

"사랑해."

두서없는 말 끝이 잘게 떨렸다. 그에게서는 처음 듣는 단어였다. 허무하게 그의 이름을 소리내었다.

"......샤카르."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토록 사근한 미소 속에서 슬피 울었다. 추위에 하얗게 뭉개지는 마지막 숨결이.

"사랑한다."

나를 완전한 비극으로 이끌었다.

오래도록, 목놓아 울었다.

모든 것은 무의미하고 어떤 것도 간직할 수 없어서. 그리하여 비극의 계절이었다.

============================ 작품 후기 ============================

세번째 L, 'Loss'입니다.

3장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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