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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79화 (79/102)

00079 Bridge 5. Cyan Rhyddella Eon : 매몰된 기억 =========================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과거에

전부를 바친 이유는

단지 그것만이 삶의 이유가 될 수 있었기에.

《Bridge 5. Cyan Rhyddella Eon : 매몰된 기억》

바람의 왕국 에온의 왕세손 시안 리델라 에온이 이름을 잃어버린 해는 1044년이었다.

채 마르지 않은 이슬이 반짝이는 오전의 정원에서, 예쁘게 핀 장미를 감상하며 여섯 살의 시안은 조용히 웃었다.

"베르크, 나는 꽃밭에서 언제까지나 머무르고 싶어."

갑주를 갖춰 입고 칼을 찬 근위기사단장 베르크 레긴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원하신다면 해가 질 때까지 이곳에 계셔도 됩니다."

"베르크의 '언제까지나'는 고작 하루야?"

시안이 꽃잎을 어루만지며 불퉁하게 물었다. 햇살이, 말갛게 흰 피부 위에 내려앉았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왕손께 그 말은 하루에 국한되어야 하기에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4대 만에 탄생한 강대한 마법사로서, 왕손께서는 장차 세상으로 나가 군림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밖은 싫어. 평화로운 안이 좋아."

그 말이 그에게는 참 잘 어울렸다. 겨울의 혹한 속에서 피어난 파란 꽃처럼, 여리고 외로운 어린 마법사. 에온 역사상 손꼽히는 거대한 마력을 타고난 자답지 않은 외양과 성정이었다. 베르크는 묵묵부답으로 제 충언을 다시 한 번 강조할 따름이었다.

안온한 정적을 사랑했던 숨겨진 왕세손은 왕궁에서 가장 깊숙한 곳, 그 중에서도 외진 정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차양막 아래 흔들의자에 앉아 땅에 닿지 않는 짧은 다리를 까딱거리며 책을 읽기도 하고. 꽃향기를 맡으며 정원을 거닐기도 하고. 수수께끼의 예언신관, 리우네아의 왕세자와의 만남이나 편지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하고.

여름날 밤이면 잔디밭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별을 헤아리기도 했다.

달빛을 받은 뺨이 정말이지, 수면 아래 잠긴 푸른 달 같아서.

소년의 이름은 시안이었다.

눈을 감으면, 바람의 흐름이 온전히 느껴졌다. 시안의 세계는 다른 사람의 삶보다 한층 다채로웠다. 바람을 타고 실려오는 먼 곳의 소리들.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닌 듯한 왕궁 끝자락에서의 유년.

그러나.

어느 날 한밤중에, 시안의 유리병 속 낙원이 부서졌다.

바람에 섞여든 소식은 불지옥 그 자체였다.

왕세자 부부와 함께 있던 시안은 별안간 왕세자에게 두 손이 꼭 붙잡혔다.

"반드시 살아남거라. 어떻게든 살아서, 이 나라를 침략한 자들에게 복수하고 에온이라는 국명을 되찾아야 한다."

이어지는 절박한 당부를, 시안은 족쇄 삼아 도망쳤다. 베르크와 여러 주변인이 그 곁을 지키며 길을 텄다. 도중에 베르크를 제외한 모두가 희생당한 끝에 시안은 불타 무너지는 왕궁을 벗어났다.

기록되지 않은 왕족이었기에 시안은 귀족의 자제 쯤으로 여겨졌지만, 베르크는 근위기사단장이라 금세 정체가 탄로났다. 그들은 수도를 빠져나가기 전에 할레시온의 군사들에게 포위됐다.

궁지에 몰린 시안은 조그마한 손을 뻗어 천천히 허공을 저었다. 불그스름한 잿빛의 밤하늘에 깔린 먹구름이 천둥 소리를 내며 휘돌기 시작했다.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마법을 쓴다는 것을 드러내 보인 이상, 그 자리에서 누구도 살려보내서는 안 됐다. 베르크는 시안의 건강을 걱정해 말리려 했으나 실패했다.

쾅! 별안간 시린 푸른색 기운을 입은 바람이 수십 가닥의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잔뜩 무장한 병사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검에 궤뚫려 허수아비마냥 힘없이 쓰러졌다. 사방에서 돌이나 부러진 나뭇가지가 날아와서, 베르크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시안의 눈에서 피가 한 줄기 주륵 흘러내렸다. 모든 마법사의 숙명, 마법 시전의 부작용이었다. 눈이 너무 아파서 시안은 이를 악물었다. 잿가루가 묻은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소맷자락으로 대충 닦아냈다.

정제되지 않은 마력이 시안이 발을 딛은 곳 근처에서 푸른 가시처럼 솟아나왔다. 곧바로 한 차례 더, 폭풍 같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적을 전멸시키고 기절했던 시안은 한참 후에야 깨어났다. 태어나 처음 쓴 마법이 지나치게 상위 마법이었던 데다가, 아무런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무작위로 방출한 마력이 거꾸로 시전자에게까지 위해를 가했다.

그 결과 눈에 실명에 가까운 상해를 입었다. 시안은 일주일 넘게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베르크의 등에 업힌 채 리우네아 쪽 국경으로 향했다. 하지만 중간에 할레시온의 황태자가 이끄는 본군 주둔지에 가로막혀 단념해야만 했다. 그들은 전략을 바꾸고 왼쪽으로 꺾어 할레시온 쪽 국경선을 넘었다. 할레시온에 밀입국하고 나서야 흐릿하게나마 시력이 돌아왔다.

전쟁 중이라 더욱 삼엄했던 국경의 감시를 뚫느라 베르크는 시안과 헤어져 미끼를 자처했다. 시안은 이곳 저곳이 까지고 긁혀가며 홀로 산을 넘어 수도 할렌센의 더러운 뒷골목까지 흘러들었다.

천성적으로 동물과 친했던 덕에 산 속에서는 짐승을 쫓아가 열매 따위를 찾아 먹으며 어떻게든 연명했다지만, 오물과 쓰레기 뿐인 뒷골목에서는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배가 고파 쓰러질 무렵, 구세주가 나타났다. 대뜸 나타나 자신의 외모를 꼼꼼히 훑어본 웬 귀부인이 큼지막한 금괴로 시안을 꾀여냈다. 금괴도 물론 중요했지만,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에온어와 동시에 제국어를 공부해 귀부인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시안은 '히엘로 공작가'와 '공자 행세'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고작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전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것 투성이였지만 요점 하나는 확실히 잡아챘다.

바로 이 귀부인을 따라가는 것만이 굶지 않을 방법이라는 사실이었다.

"귀여운 아이야. 내 아들 행세를 해 주지 않으련?"

시안은 기꺼이 귀부인을 위해 웃어주었다.

"네, 그럴게요. '어머니'."

그렇게 시안 리델라 에온은 리데르흐 히엘로라는 이름으로 히엘로 공작가에 입성했다.

그 무렵 에온의 왕세자가 할레시온의 황제를 독살하려다 실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애초에 시안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보나마나 점령국에 대한 민심을 악화시키려고 황실의 누군가가 꾸민 계략일 거라고 여겼다.

왕세자 부부가 처형되던 날에 시안은 그 자리에 있었다. 히엘로 공작이 재미난 구경거리라며 그를 데리고 나온 것이다. 처형장에 올라서는 부모를 눈으로 좇으며 시안은 공작에게 진심어린 살의를 느꼈다. 마력이 응축된 손 끝이 저릿했다. 지금 당장, 손가락만 까딱하면 왕세자 부부를 구해내고 자신의 어깨에 감히 더러운 손을 올린 공작을 죽여버릴 수 있다.

하지만 왕세자 부부를 구출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거지? 시안은 놀라울 정도로 합리적인 사고를 했다. 그는 결국 있는 힘을 다해 살기를 내리눌렀다. 그리고 죗값이라도 받는 양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처형을 지켜보았다. 시력이 나빠 자세한 장면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을 대신하는 발달된 다른 감각이 그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함을 선사해 주었다. 시안은 비위가 상한 척 토하며 그 틈에 울었다.

-

그리고, 매몰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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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이 되던 해, 리데르흐 히엘로는 자신을 공작가로 데리고 온 정부의 후식에 독을 탔다. 사 년간 신뢰를 쌓은 수족에게 일을 시켰고, 성공한 뒤에는 직접 그 수족을 범인으로 지목해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열세 살의 시안은 정확한 계획을 세웠다. 채 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살아야 할 이유는 찾았다. 이제 남은 것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에 따라 목적을 달성하는 것 뿐이었다.

당시 히엘로 공작가의 일원 수는 총 서른두 명. 그 중에서 공작 자리에 관심이 있거나 촌수가 가까운 위험인자는 후견자를 포함해서 대략 열 명. 시안은 그들을 제거하고 공작가를 집어삼키기로 했다. 우선 자신의 연기에 의구심을 품은 기색이던 '리데르흐'의 이모를 불구로 만들어 병상에 눕게 했다. 다음 해에는 삼촌이 시안의 부추김에 의해 공작 자리를 넘보다가 이를 밀고한 시안 탓에 히엘로 성을 박탈당했다. 그런 식으로 한 명씩 명부에서 지워나갔다.

열여덟 살의 시안은 이미 공작이었다.

꼭 먼 옛날의 왕세손궁처럼 적막하고 평화로운 공작가 저택에서 시안은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한쪽 눈이 검에 베여 실명된 채 서남부 어딘가에서 떠돌던 베르크를 찾아내 사용인이라는 명목으로 데려오고, 멸망한 나라 시힐레의 왕족 엘피샤 르휀 시힐레를 만났다. 황태손 라인하르트와 황궁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을 기회삼아 약간의 친분을 쌓고 황족만 출입할 수 있는 제한 구역의 출입장을 얻어내는 데 이용했다. 어릴 적 교류했던 레비욘 가셋수트 리우네아 국왕과 다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또다른 망국인 프리제의 왕족 출신 생존자를 물색하다가 허탕을 쳤다. 프리제의 왕족은 엉뚱하게도 엘비올리스 왕국에서 제공해 주었다.

하일 리네토 엘비올리스. 특이한 혈통에 범상찮은 능력을 가진 마법사. 제멋대로 튀는 구제불능의 괴짜. 사실 시안은 그를 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프리제의 왕족이자 엘비올리스의 파견원으로서 반란에 정식으로 가담하기 이전의 하일은, 방랑 마법사 로제 카나이클이었다. 시안은 그를 시종일관 경계했지만 그 대단한 능력만큼은 인정했다. 시안은 그를 수 년간 다양한 방면에 이용했다. 마법을 잘 다루는 법을 배우고, 마법진의 형태로써 공식화된 여러 실용적인 마법 또한 전수받았다.

사실상 단일 최대 전력인 하일의 정식 합류로 구색을 갖춘 반란군은 세력을 불려나갔다. 준비는 순조로웠다. 이따금 회의감이 들 때면 황궁 도서관에서 어느 당돌한 영애를 따라 훔쳐낸 황실 비사록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비밀들'을 읽었다. 그 책에는 에온의 왕세자가 할레시온의 황제를 독살하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따로 조사한 결과, 시안은 기록은 거짓이고, 황태자로 추정되는 권력자가 진실을 덮으려 내세운 방패막이였음을 밝혀냈다. 비사록은 시안에게 분노와 의지를 일으키는 장치 중 하나였다.

그러다 1년이 더 지났다.

차가운 색감의 푸른 머리카락과 어렴풋이 검은 눈을 가진 아름다운 외견의 열아홉 살짜리 제국 7대 공작. 만일 의도적으로 공식 석상을 기피하고 공작가의 세력까지 어느 정도 축소시키지 않았다면 하루에도 몇 번씩 혼담이 들어왔을 법한, 보기 드물게 완벽한 신랑감이었다.

"르쉬네 제드릭 할레시온, 이라면."

"수십 년 전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 일으키신 숙청 당시 살아남은 황자의 손녀라 합니다."

서류 위에 사인을 휘갈기던 것을 멈추고, 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하인이 공손하게 건넨 문서를 받아 읽으며 물었다.

"올해 몇 살이 되었지?"

"열아홉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해의 시안 역시 열아홉이었다.

"동갑의 황족 여인과의 혼인이라. 나쁘지 않군요. 이참에 황실 안쪽 깊숙히 파고들면 되겠습니다."

쇼파에 불량하게 걸터앉아 시간을 죽이던 로제 카나이클이 껄렁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 기억이 산산조각 나기 전의 로제였다. 그를 무시한 시안은 하인을 내보내고 생각에 잠겼다.

분명 전략 면으로는 훌륭한 기회다. 황실의 사위가 된다면 여러 기밀에 접근하기 용이해지고, 반란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문제는 시안의 개인사였다. 그는 원수의 혈족과 결혼한다는 선택지를 고려해본 적이 없다. 감정이야 으레 그랬듯 누르면 될 일이지만, 늘 그에 앞서 고민은 한다. 시안은 잠시 시간을 두기로 했다.

그런데 지나치게 여유를 부렸던지, 그 사이에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져 혼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1057년의 피바람에 휘말려, 르쉬네 제드릭 할레시온과 그 가족은 전부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십 년도 더 전에 자신의 부모가 섰던 처형장에 오르는 르쉬네를 응시하며, 시안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결혼할 뻔했다는 것을 빼면 일면식도 없는 남이지만 어쩐지 외면할 수가 없어 굳이 처형장에 나온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르쉬네, 안 돼! 르쉬네!"

그 때 바로 앞에서 소란이 일었다. 눈부신 백금발의 소녀가 울부짖고 있었다. 시안은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선명한 적안. 황족, 즉 르쉬네의 친척이었다. 상황이 대충 납득이 갔다. 한편으로는 약간의 동질감이 들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픔도 잔잔한 파도처럼 마음 끝을 적셨다.

의아했지만, 시안은 별도의 재고 없이 당장에 그녀에게 향했다. 사형 집행 담당 공무원들이 묵과해줄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려는 그녀를 끌어안아 제지했다. 스스로도 그 행동에 적잖이 놀랐다. 그렇다고 팔을 풀지는 않았다.

"진정하세요. 여기서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을 하시면 그대 또한 의심받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뭔가 합리적인 이유를 덧붙여야 했다. 해서 재빨리 변명하듯 말했다.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마구 버둥거렸다.

"이거 놔! 놓으라고! 르쉬네!"

그 순간 단두대의 칼날이 내려섰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관중들이 함성을 질렀다.

"아아악! 안 돼!"

소녀가 절규했다.

시안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어릴 적의 기억이 되살아나려 했다.

어느 시기엔가 지저에 묻힌 과거를 포함해서.

============================ 작품 후기 ============================

3장 메인 외전, 시안 리델라 에온의 매몰된 기억. 시작합니다. 시간적 배경이 시간순으로 완벽하게

배치되지는 않았고 몇 편에 걸쳐 오락가락하니 유의해주새요. 참고로 시안의 진짜 미들네임 리델라Rhyddella는 제국식으로 변형된 가명 리데르흐Rhydderch로써 이미 25화부터 등장해 왔습니다.

+3장의 부제목을 공개합니다. '가을의 비극'이었습니다. 작품 소개글에는 78화가 올라가던 날에 미리 명시해 뒀었죠.

++밋자루 님께서 라니아 팬아트를 그려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예뻐요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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