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0 Bridge 5. Cyan Rhyddella Eon : 매몰된 기억 =========================
저택으로 돌아온 시안은 한참 후에야 그 소녀의 신상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이름은 라니아 에빌 할레시온. 황궁 도서관의 황족 외 출입 금지 구역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작년에 르쉬네와 라니아는 가짜 책을 책장에 꽂고 진짜 책을 빼가는 식으로 비사록을 훔쳤다. 반 장난식으로 한 거였다. 시안은 뒤쪽 책장에 숨어서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후 그들의 방법을 더 치밀하게 수정해 실천했다. 나중에 사서들이 속닥이는 것을 흘러듣기로는 없어진 두 권의 책이 어린 황족인 르쉬네와 라니아의 손에 각각 한 권씩 들어간 것으로 알고 딱히 수사하지 않았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것 말고도 뭔가 더 있는 듯한 직감이 들었다. 기억을 되짚다 보니 문득 한 가지가 걸렸다.
골똘히 상념에 잠긴 시안을 로제가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의뭉스러운 투로 빙그레 웃었다. 그는 얼음으로 손장난을 치다가 촛불을 꺼트렸다. 정식 입국 허가 기한이 만료되고, 공식적으로는 엘비올리스로 돌아갔다고 되어 있는 로제는 이제 불법으로 할레시온에 머물렀다. 그래서 줄곧 숨어 살다가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일이 올해 들어 잦아졌다. 시안은 해가 다 진 저녁에 집무실에 쳐들어와서 왜 저러는지 모를 괴짜 마법사에게 냉랭한 축객령을 내렸다.
"돌아가세요, 하일."
"물론 그래야겠죠. 송구합니다, 재밌는 광경을 놓칠 수가 없어서 그만."
"무엇이 재미있습니까?"
"시안 님께선 오늘 만난 에빌 대공녀에 대한 생각을 하는 중이시잖습니까?"
"그것이 흥미를 불러일으킬 소재인가요."
얼어붙은 호수마냥 단조로운 대꾸에 아랑곳않고, 로제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만, 시안 님의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목도하는 바람에."
처형장에 로제가 있었다. 집중할 필요성을 느낀 시안이 펼쳐둔 책을 덮었다.
"엘피샤가 말하길, 예전에 제가 에빌 대공녀의 '어떤 기억'을 지우기 위해 에빌 대공녀에 대한 저의 기억 전부를 대가로 지불해 마법을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요."
"아무래도 그 날의 일은 잊기로 약속한 듯하지만......간단한 추리를 거치면 진실에 가까워져 버리는군요."
로제는 자신있게 말했다. 짐짓 쾌활한 모습에 시안은 반대로 더 차분해졌다.
"저는 만약을 대비해 저조차 모르게 타인의 기억을 지우지는 않습니다. 예외의 경우가 있다면, 어떤 두 명이 서로에 관한 기억을 동시에 지울 때 뿐이지요. 둘 다 잊은 것을 제 3자인 제가 기억할 필요는 없으니 말입니다."
"......에빌 대공녀와 저 사이의 접점을 시사하시는 겁니까."
"말하자면 그렇지요."
"억측입니다. 증거가 지나치게 흩어져 있고, 연관성 또한 적어 보이는군요."
"아무리 저라도 두 사람, 어쩌면 세 사람 모두에게 잊혀진 기억을 추리할 때 이렇다 할 확증을 내기는 힘들지요. 하지만 저는 꽤 확신할 수 있습니다."
로제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기억을 다루는 마법사는 그런 것에 특화되어 있으니까요."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그의 뒤에서 문이 쾅 닫혔다. 시안은 눈살을 약하게 찌푸렸다.
여기까지가, 시안의 온전한 기억이었다.
***
찢겨나간 기억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고.
결국 없던 것이 되고 말아.
수도에 사는 귀족 자제들 대다수가 황궁에 모여 가벼운 교류를 나누던 날. 열다섯 살의 시안은 눈앞의 소녀에게 무슨 말을 할지 고르느라 일단 입을 다물고 난처하게 미소지었다.
품에 꽃 몇 송이를 든 소녀가 인사차 까딱 목례하고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상대의 인사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안은 머릿속에 휘도는 생각 때문에 현실을 놓쳤다. 감히 황태손 소유의 정원에 핀 꽃을 멋대로 꺾다니. 잘못 걸리면 크게 혼쭐이 날 것이다. 눈이 붉은 것으로 보아 황족인데, 아무리 그렇대도 이건 적절치 못한 짓이었다.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건가. 어떻게 하면 점잖게 타이를 수 있을까. 이리저리 고민하는 사이에,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허리를 숙여 새로 한 송이를 더 꺾었다.
"꽃을."
다급해져 그만 소녀의 손을 붙잡고 말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소녀가 무언가 말하기 전에, 어설프게 덧붙였다.
"꺾지 마세요."
"왜요?"
"황태손 저하께서 불쾌해 하실 겁니다."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한다는 듯 픽 웃으며, 소녀는 소년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수다 떨기 귀찮다고 했더니 라인하르트가 자기 정원에 가서 꽃꽂이용 꽃을 꺾으며 시간을 때우라고 했어요. 허락 받았단 뜻이에요. 근데 누구시죠? 아까 처음 인사할 때 봤던 것 같긴 한데."
시안은 제 실수를 깨닫고 곤란한 낯을 했다. 주제넘게 황족끼리의 일에 시비를 걸고 나선 꼴이 되어 버렸다. 얼른 손을 놓았다.
"죄송합니다, 영애께서 혹여 저하의 미움이라도 받을까 걱정되어서 그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시안 리데르흐......아. 아니. 리데르흐 히엘로라 합니다."
당황한 나머지 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아까보다 얼굴이 한층 창백해진 소년을 멀뚱히 응시하던 소녀는 잠깐의 생각 끝에 말했다.
"아, 괜찮아요. 너무 긴장하진 마요. 난 영식에게 해코지할 생각이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아까 그 '시안'은, 별명인가요?"
좋은 핑곗거리를 알아서 제공해 준 황족 소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름이 별명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누가 지어줬는지 참 잘 어울리네요."
높게 뜬 태양을 등지고 선 시안에게는 그늘이 졌고, 그와 마주한 소녀에게는 햇빛이 고스란히 쏟아졌다. 하늘 위에 구름이 무늬진다. 시안은 늘상 그러하듯 마땅한 반응 대신 설핏 웃음지었다.
"참, 제 소개를 안 했죠? 미안해요. 라니아 에빌 할레시온이에요."
열한 살의 라니아가 선뜻 미소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공녀님."
황족 명부를 재빨리 상기해낸 시안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손녀는 그에게 차라리 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내색해선 안 된다.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나오며, 시안은 분위기가 어딘지 묘하던 그 황족을 내내 생각했다. 라니아 에빌 할레시온. 또래의 귀족 사회에서 꽤 유명한 이름이었다. 당대 최고의 미인 네피아 황후의 어린 시절과 판박이인 출중한 외모에, 범접하기 어려우며 한정된 사람에게만 마음을 연다는 2황자의 딸. 황후와 황태손으로부터 강력한 비호를 받으며 순탄하게 입지를 쌓아나가는 중이라 했다.
할레시온의 귀족들과 되도록이면 친분을 쌓지 않으려 하다 보니 턱없이 좁아진 인간관계가 거슬리던 참이었다. 시안은 방금 전의 우연한 만남을 빌미 삼아 라니아와 친해지고, 그녀를 통해 다시 꼭 필요한 자에게만 접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원에서 벗어나 귀족들이 모인 곳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예고 없이 비가 내렸다. 구름이 그리 많지 않고 그마저 흰구름이었는데.
"여우비......"
시안이 하늘을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혼잣말했다. 시종이 시안에게 다가와 우산 하나를 건네주었다. 얌전히 받아들었다. 우산에 부딪치는 빗방울이 꽤 굵었다. 잘못하다가는 정원에서 꽃꽂이 삼매경에 빠져 있는 대공녀가 쫄딱 젖을지도 모른다. 하는 수 없이 돌아섰다.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아까의 그 자리에 당도했을 때.
"시안?"
갈대 옆에 웅크리고 앉은 라니아가 그를 불렀다. 얼른 일으키고 우산을 드리워 주었다. 이미 머리카락은 젖어버렸고, 낯빛도 그닥 좋지는 않았다. 혼자 있는대로 고뇌하던 시안은 결국 라니아의 머리 뒤로 몰래 손을 뻗어 최대한 자연스러운 바람을 일으켰다. 인간적인 배려였다. 혈색이 좋지 않은 아이를 에온을 멸망시킨 장본인도 아닌데 방치할 이유는 없었다.
시안은 라니아를 데리고 다시 귀족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가 비 맞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당연히......우산을 들고 계시지 않으셨던 것을 기억했으니 알았지요."
"내 말은, 나 때문에 다시 여기로 올 줄은 몰랐다는 소리예요. 고마워요, 도와줘서."
당황한 것인지 대꾸할 말이 머릿속에서 마구 뒤엉켜 결국 입 밖으로는 나오지 못했다. 대신 그는 또 속모를 미소만 띄웠다.
중간쯤 갔을까, 멀리서 다른 이의 기척이 들렸다. 딱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어쩐지 도망가야 한다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는 뒤늦게 그 직관적인 판단에 여러 이유를 붙여 합리화했다. 라니아에게 접근하려는 계획이 성공하려면 남들의 눈에 띄지는 말아야 한다, 라고.
"대공녀님, 이걸 들고 황태손 저하께서 계신 곳으로 가십시오. 저는 두고 온 물건이 있어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시안도 나처럼 젖을 텐데."
"괜찮습니다."
"음, 알았어요. 잘 가요."
"네.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시안은 라니아의 손에 우산을 꼭 쥐어주고 반대쪽으로 사라졌다. 빗방울 쯤이야 공기의 흐름을 조금만 조작하면 맞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갈대숲을 건너 최대한 멀리 나갔다.
그의 뒷모습이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라니아는 시선을 거두었다. 몇 발짝 내딛지 않아 우산을 두 개 든 라인하르트와 마주쳤다. 급히 뛰어온 모양인지 라인하르트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라니아, 우산이 있었어?"
"어? 응. 어쩌다보니."
"그런데 왜 다 젖은 거야. 제대로 썼어야지."
"조금 기다렸더니 많이 말랐어. 아까는 완전 푹 젖었었다고."
"그나마 다행이다. 어서 가자. 다들 황태손궁 안으로 들어갔어."
"그래."
황태손궁 안에 들어온 귀족들의 수를 세던 시종이 한 명이 비는 것을 확인한 시점은 이미 여우비가 그쳐갈 무렵이었다.
지독한 감기에 걸려 일주일 넘게 끙끙 앓은 라니아는 자신보다 비를 많이 맞았을 시안이 걱정되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조신한 성격이며 하는 짓, 그리고 후일 도움이 될 높은 신분이 마음에 들었다. 저번 일을 빌미 삼아 친구를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다 낫자마자 라니아는 어머니 일레인에게 시안에 관해 슬쩍 떠봤다. 파티에 가서 히엘로 공자를 만났는데, 굉장히 조용하고 유순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이것저것 곁가지를 쳤다. 일레인은 빙그레 웃고는 히엘로 공자가 독서광이라 황궁 도서관에 자주 드나든다는 정보를 흘려주었다.
황궁 도서관 근처의 벚꽃이 흐드러지던 어느날, 라니아는 무작정 황궁 도서관으로 갔다. 엄청나게 넓은 내부를 다 뒤지고 다니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도서관 입구가 한눈에 보이는 벤치에 양산을 쓰고 앉아 유유자적 시간을 보냈다. 그건 꽤 현명한 방법이었다. 어쨌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려면 입구를 지나야 하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두꺼운 책을 세 권이나 든 채로, 시안이 나타났다. 그는 금세 라니아를 발견했지만 정작 라니아는 멍해져 주변을 살피지 않던 차였다.
시안의 발걸음이 느려지다 이내 멈추었다. 라니아를 보았다.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적당하게 푸근한 햇살이 흰 양산 위에 꽃잎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직은 앳된 얼굴은 무표정을 고수했다. 팔랑이는 긴 속눈썹 아래로 권력과 고귀를 그녀 손에 쥐어준 황실의 상징, 선명한 적안이 영롱했다.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금빛 시내 같은 풍성한 백금발은 그림으로 그린 듯했다. 맑고, 어쩌면 아련하기까지 한 봄의 전경에 녹아든 소녀에게선 알 수 없는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곧 부스러져 버릴 것만 같은, 허상에 가까운 무언가가 라니아에게 있었다.
시안은 무의식적으로 비극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 어떤 합당한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 생각이었다.
"대공녀님. 산책을 나오셨습니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라니아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짝 웃었다.
"아니요, 책을 빌리러 왔는데......너무 넓어서 돌아다니기 힘들더라고요. 잠깐 쉬고 있었어요."
"아, 그러셨군요."
"......"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라니아가 선수를 쳤다.
"시안은 책을 반납하러 오셨나요?"
그는 진짜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라니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대답은 또 해야 했다.
"반납을 하고 새로운 책을 빌릴 생각이었습니다."
검수를 거치지 않고, 그가 얼떨결에 먼저 제안을 던졌다.
"책을 고르는 것이 어려우시다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라니아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 작품 후기 ============================
제가 여태껏 쓴 소설 중에 가장 긴 악살다가 80화를 달성했네요. 10개월 동안 함께 달리다보니 이젠 악살다를 안 쓰게 될 미래가 벌써부터 어색할 정도예요. 참, 완결편수는 100화 언저리로 예상하고 있어요. 4장이 제일 짧은 파트라서요.
+60화 후기에 있는 예고편의 글귀 상당수가 이미 나왔죠! 완결까지 그 스포투성이 예고편은 유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