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1 Bridge 5. Cyan Rhyddella Eon : 매몰된 기억 =========================
드높은 책장이 여럿 늘어선 도서관 내부로 들어간 두 사람은 먼저 안내 팸플릿을 들고 서로의 관심 분야를 확인했다. 시안은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 분야와 천문학, 마법학, 언어학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저도 마법학이 좋아요. 그동안은 독학했는데, 조만간 전문 학자를 불러서 제대로 배워볼까 하고 있어요. 진짜 마법사를 초빙하면 더 좋겠지만 할레시온에 타국의 왕족이 머물 것 같지가 않아서요."
라니아는 공통의 흥미 분야를 찾고 조금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에온 출신의 '진짜 마법사'는 모호하게 미소를 띄웠다. 친해지는 것은 좋지만 황족 앞에서 신분을 드러냈다가는 그 날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시안은 대신 다른 마법사를 하나 떠올렸다. 하일 리네토 엘비올리스. 나다니기를 좋아하는 그 자는 공식적인 입국 허가를 받고 할레시온에 들어와 방랑 생활 중이었다. 시안과 아는 사이인 하일은 라니아의 희망사항을 들어주고, 2황자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데 써먹기 딱 좋은 사람이었다.
"유력한 황족께서 강대한 힘을 가진 자를 끌어들이시면 황궁의 의심을 살지도 모릅니다."
태연하게 한 발 뺐다.
"그런가요. 아쉽네."
라니아 역시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마법학 서적이 모인 구역을 찾는 척하며 시간을 끌다가, 시안은 슬쩍 여지를 남겼다.
"하지만, 몰래 만나시면 괜찮을 겁니다."
"이제야 동감할 수 있는 말이 나왔네요."
기다렸다는 듯 라니아는 사근하게 눈을 휘었다. 얼핏 위험해 보였다. 흉계를 꾸미는 모략가처럼. 사실 이건 르쉬네와 함께 골치아픈 장난을 칠 궁리를 할 때 으레 나오는 표정이었다.
"혹시 아는 마법사 없나요?"
"......있긴 합니다."
"제게 소개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한 번 말해보겠습니다."
"감사해요."
라니아는 그 말을 하며 16구역 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원하는 서적이 있는 곳이었다.
벚꽃비가 사슬에 엮인 것처럼 연달아 후드득 떨어지는 길을, 시안은 양 손에 서적을 가득 들고 걸었다. 발자국에도 꽃, 책장 사이에도 꽃, 어깨 위에도 꽃, 머리 위에도 꽃. 흐린 눈앞을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분홍색, 꽃잎. 향기.
자기 몫의 책을 들고 그의 옆에서 가뿐하게 걸음을 내딛으며, 라니아가 말했다.
"이 길은 황후 폐하께서 만드셨어요. 물론 직접 나무를 심으셨다는 소리는 아니고, 황후 폐하의 개인 자금이 들어갔죠."
정말이지 어지럽다.
걸음을 잠시 이 길에 묶었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흐리기만 한 시야에 꽃잎이 뒤섞여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하늘이고 땅이고 온통 분홍색이라 길의 윤곽조차 구분이 가질 않았다. 좋지 않은 시력 대신 타고난 마법적 능력을 이용하는 것도 꽃향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시안, 여기에요. 어딜 보는 거예요."
그 때 라니아가 저 앞쪽에서 시안에게 손짓하며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고개를 퍼뜩 든 그는 수천 마리의 꽃나비 속에 선 라니아를 발견했다. 길잡이처럼 앞에 있는 그녀를 따라 다시 걸었다. 거리가 도로 가까워졌다. 라니아가 의아한 투로 묻는다.
"거기 서서 뭐 했어요?"
"제가 시력이 좋지 않아서, 길을 놓쳤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라니아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아하. 그럼 말을 하시지 그랬어요. 제가 도와드리면 되잖아요. 자, 손 주세요."
"네?"
"아, 책 때문에 안 되겠네요. 그럼 이 길 끝날 때까지만 부득이하게 팔짱 좀 낄게요."
라니아는 멀뚱하게 눈만 깜박이는 시안의 팔짱을 끼고 앞으로 나아갔다. 경황없이 이끌려 가는 길이 외려 아까보다 조금은 더 편했다.
"......감사합니다."
"별 거 아니에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1054년의 여름.
"최근 들어 시안과 노는 횟수가 르쉬네까진 아니어도 에단과 노는 횟수에는 맞먹는 것 같아요."
일 년을 더해 열두 살이 된 라니아가 케이크를 포크로 조각내며 여상하게 말했다. 시안은 둘의 음료수 잔에 잔뜩 맺힌 물방울을 몰래 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참, 제가 빌려준 어려운 책은 다 읽었어요?"
"렘사 이시프의 '주황의 파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다 읽었는데 실수로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서두를 필요 없어요. 다음에 만나면 주세요."
라니아는 그렇게 말하고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시안이 추천해준 가게의 디저트였다. 확실히 맛있었다.
"여기 이름이 뭐랬죠? 너무 맛있어서 다음에 또 와야겠어요."
여리게 미소한 시안이 앞에 놓인 냅킨을 펼쳐 라니아에게 보여주었다. 냅킨에는 가게명이 연하게 찍혀 있었다.
"엘로솔라냐, 입니다."
"거기에 이름이 있었군요. 몰랐어요. 아무튼 고마워요, 이런 가게 추천은 대환영이에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재밌어요. 항상 도서관에서만 만나다 이런 데 오니까 뭔가 색다르기도 하고."
시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하는 바였다.
-
그 틈새의 어느날 라니아가 말했다.
"시안은 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것처럼 살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부유하고, 외동이라 후계다툼 걱정은 없을 거고,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고, 안 친한데 귀찮게 구는 사람도 없고.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초조하고 불안해 보여요."
"......"
"공자씩이나 되면 가끔은 그 정체모를 짐, 내려놓아도 좋을 텐데."
그녀는 아무도 모르던, 시안조차 모르던 것을 끄집어냈다. 그는 놀랐다. 손끝에 잡힌 공기가 새파랗게 변색되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아챌 정도로.
"착각이었다면 사과할게요."
멋쩍었는지 가볍게 마무리짓는 적안의 황족을, 그는 정녕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그리고, 1054년의 겨울. 히엘로 공작과 몇몇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히엘로 성을 단 사람들을 정리한 시안은, 문득 자신이 한 가지를 크게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니아와 진짜 친분을 쌓은 것은 정말이지 치명적인 실수였다. 처음에 의도한 바는 겉치레 뿐이었는데, 대체 언제 휘말렸던지. 어쨌든 유일한 삶의 이유로 설정해둔 것이 흔들릴 정도라면 심각한 일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시안은 반란에 회의적이었다.
공작가를 장악하는 것은 살아남으려면 필요하니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굳이 안온한 생활을 내팽개치고 사지로 뛰어들 필요가 없었다. 그 때의 자신은 부모와 지인을 모두 잃어 냉철한 사고를 하기에 부족한 상태였다고 정의내렸다.
그러나 시안을 좇아 모여든 망국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생각을 비난했다. 나라를 잃고 가족을 잃었으나 시안처럼 새로운 기반을 잡지 못한 그들은 차별과 핍박을 받으며 연명하는 유민을 외면할 셈이냐며 그를 몰아붙였다. 반란군의 구심점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직위를 가진 에온의 왕세손이 흔들려서는 안 되기에.
결국 시안은 그들을 외면하지 못했고, 아버지의 빛바랜 유언을 잊지 못했다. 그렇다고 라니아를 완전히 이용하는 짓은 하기 싫었다.
실수를 만회하고자 시안은 하일을 불러 부탁했다.
"기억을 지워주세요."
하일은 라니아의 비공식적 마법학 교사였고, 시안과 라니아의 친분을 거의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마침 조건이 딱 맞았다.
"......상당히 갑작스러운 요구로군요. 어떤 기억을 지우고 싶으시기에 그러십니까?"
하일이 오묘한 얼굴을 하고 심드렁하니 물었다. 정적의 날개가 대지를 덮은 심야에, 촛불이 흔들리던 방에서.
"저에 대한 에빌 대공녀의 기억, 에빌 대공녀에 대한 저의 기억."
밤에 피는 꽃처럼 고요히 눈을 접는 소년의 뺨은 그 날 유독 창백했다. 푸른 얼음이 깔린 호수에 잠긴 듯이.
"이것만이 제가 대공녀를 이용하려 들지 않게 하면서도 제 소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일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즉시 의뢰에 맞는 마법진을 허공에 그려나가기 시작하며, 설렁설렁 질문을 내던졌다.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니 제게 모든 것을 떠맡겨 버리겠다는 겁니까? 파렴치하시군요. 기억을 지울 때 제가 무슨 대가를 치르는지 뻔히 아실 터인데."
"물론 알고 있습니다."
조용히 악역을 자처했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춘다.
"그 마법진은 일단 거둬주세요. 시행은 내일 하고 싶습니다."
"주문이 까다롭군요. 이왕 까다로운 김에 하나 여쭤봐 드리지요. 제가 어떤 기억을 저울의 반대편에 올렸으면 좋겠습니까?"
"이미 제 대답을 유추하고 하는 질문인 듯한데, 제가 잘못 짚은 걸까요."
하일이 차갑게 실소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은청안이 늑대처럼 빛을 발했다.
"대공녀에게 연줄이 닿았고 2황자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직 반란군 내에서 저와 공자님 뿐이니......결국 지워야 할 것은 대공녀에 대한 저의 기억 또한 포함되겠지요?"
하일의 기억을 제물로 바쳐서, 아예 처음부터 라니아의 존재를 몰랐던 것처럼 말끔하게 기억을 삭제한다. 시안이 바라던 바와 정확히 일치하는 말이었다. 이대로라면 로제에 대한 라니아의 기억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연결 고리를 전부 잃은 과거의 추억, 그 이상은 되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는 그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도 희미해지겠지.
사람은 망각을 전제로 살아가니까.
"네."
시안은 하일도 마찬가지로 라니아와 진실된 친분을 가지고 있음을 악용했다. 스스로가 가끔은 참 잔인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편이 최선이라는 것 역시 안다.
복잡하게 뒤엉킨 마음을 내리누르듯, 시안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버거운 일을 마주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는 다음날, 신년 축제가 열리던 새해 첫 날의 밤을 작별의 무대로 삼았다. 라니아는 자신의 다른 친구들과 엮이기 꺼려하는 그를 배려해 잠깐 따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자정이 넘어가는 순간 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홀로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며, 시안은 알 수 없는 감상에 잠겼다.
라니아는 불꽃놀이를 다 본 다음에 친구들과 헤어지고, 광장 쪽으로 올 것이다. 그 전에 미리 거기로 가야 했다.
야시장의 주홍색 불빛이 길 양 옆으로 푸근하게 펼쳐지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번화한 거리의 한복판이었다. 시안은 중앙의 분수대에 걸터앉아 자신의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법은 정말이지 신비해서, 여러 숨겨진 기적과 특별한 장치가 많다. 시안은 몇 개는 에온에 있을 적에 배웠고, 몇 개는 하일에게 얻었다. 그 중 한 가지를 고려해보았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심지어는 불꽃놀이도 끝나기 전에 라니아가 나타난 것은 큰 변수였다.
"에단이랑 르쉬네가 졸려 죽으려 해서 다들 불꽃놀이 시작하기 전에 해산했어요."
라니아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시안에게 간략히 설명했다. 시안은 대강 수긍하고 축제는 잘 즐겼냐고 물었다.
"부모님께선 제가 아직 어리다고 밤늦게 열리는 축제에는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틀이나 졸라서 겨우 허락받은 거였어요. 당연히 본전은 찾았죠."
빛을 받아 주황색이 된 라니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어졌다. 귀 뒤로 쓸어넘기며, 그녀는 살짝 들뜬 낯을 했다. 몇 마디 말을 나누다 시안의 옆에 와 앉았다. 이제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것도 마지막이다.
마지막. 항상 변함없이 호선을 그리던 시안의 눈매가 달무리처럼 이지러졌다. 기간이 아주 길지는 않았지만 친구라는 존재가 곁에 있었던 것이 처음이었기에 마냥 평온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가시밭길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고, 그를 아껴주던 자들의 시체를 밟고 살아난 삶이기에 포기하면 안 된다.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하게 된 사람은 그간 수없이 봐 왔다. 앞으로 더 많이 보게 될 것이고.
시간이 다 되었다. 시안이 망설이다 결국 라니아의 손을 잡았다. 의아한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손등에 입술을 살며시 대었다. 단순한 애정표현이 아니었다.
"시안?"
시안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는 단 하나뿐인 친구를 눈에 담았다. 서글프게 웃었다. 오가는 사람들, 춥지만 따뜻한 야시장의 분위기, 소박한 웃음소리와 아이가 부르는 노랫말. 그 속에서 환영처럼 스쳐가는 말들.
"바람의 마법사가 진심을 담아 타인에게 하는 접촉은, 그 타인으로 하여금 마법사 특유의 체향을 느끼게 합니다."
"그게 무슨......"
"기억은 사라져도, 우리가 친구였다는 사실은 어딘가에 남아 있었으면 해서요."
"시안."
"그럼 안녕히."
그리하여 작별이다.
한낱 꿈과도 같았던 한 순간의 유희여.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던 하일이 마법을 발동시켰다. 아주 찰나에 그들을 감싼 마법진이 허공으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어? 나 집에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집에 갈 시간이 되면 꼬치 가게 앞에서 마리가 기다린댔는데."
라니아는 얼른 일어나 광장을 빠져나갔다.
시안은 무구한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와 한참 찾았다며 어서 집으로 귀가하시라는 하인을 따라갔다.
로제는 그 날 이후 라니아의 저택에 찾아가 수업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 인사 하나 없이 자취를 감춘 가정 교사를 기다리던 라니아는 어느 시점부터는 그를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그저 추억의 한 조각으로 미뤄둔 것이다.
그렇게 라니아는 열세 살이 되었고, 새로 태어난 이래 가장 안온하고 행복한 일 년을 보낸다. 라인하르트, 르쉬네, 에단. 이렇게 세 명의 친구와 함께.
그 중에 시안은 없었다.
***
그로부터 6년 후, 1061년.
일은 시안이 의도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조금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려 해요. 악살다가 완결 후에 출간이 될 것 같습니다! 플랫폼 등 자세한 사항은 확정이 나고 나서 완결 이후에 따로 공지를 띄우겠습니다. 완결 후 대략 1~2주 쯤 지나 본문 삭제를 할 예정이라는 것만 미리 공지해 두겠습니다.
+이제 완결까지 채 20화도 남지 않았네요ㅠㅠ! 여기까지 함께 해주신 독자님들 정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