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3 Bridge 5. Cyan Rhyddella Eon : 매몰된 기억 =========================
1061년의 겨울이 끝나기까지, 시안 측은 착실히 2황자를 위한 그물을 쳤다. 루 할레시온이 워낙 얌전한 행태를 취하고 있어서 속내가 어떤지는 잘 몰랐다. 그들에게 확신을 품은 것은 로엔세르 공작가의 차남이 찾아온 이후였다. 세크네트 로엔세르는 몇 번 간을 보다가 반역 이야기를 꺼냈다. 시안은 이 자가 어디까지 알고 반란에 동참하기를 제안하는지 도통 아리송했다. 세크네트는 헐렁한 척 하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날이 선 사람이었다. 작은 실수만으로 밑바닥까지 긁어낼 듯한.
시안은 신중해졌다. 우선 자신의 진짜 정체까지는 모른다고 가정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제 만나야 할 사람은 에빌 대공녀였다. 라니아는 지금은 루 할레시온의 후계자고 반란 성공 시에는 차기 황제가 될 요주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얽힌 모종의 과거사까지 있으니 가까워지는 편이 좋았다.
바로 그 과거사가 기억에도 없는 주제에 신경줄을 긁었지만, 시안은 어렸던 자신을 따르기로 다짐했다. 송두리째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무의식에 남은 감정이라면 보통 감정은 아닐 것이다. 그걸 지울 정도의 의지를 배반하고 싶지는 않았다.
진짜 배반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른 채로.
한편, 봄이 도래하고 생명이 피어날 때. 시안은 저택을 싹 정리했다. 시안이 제게 저지른 짓을 전혀 기억치 못하는 하일은 정원에 물을 뿌려달라는 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정원 가꾸기에 소질이 다분한 시안은 가장 먼저 주변 환경부터 파릇하게 되살리고, 인부를 시켜 저택 내부를 리모델링했다. 그리고 이 저택을 반란군의 아지트로 삼았다.
햇살 가득한 오후에 부드러운 잔디가 깔린 앞마당에서 독서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독서를 하지 않을 때는 잔디밭에 가만히 앉아 잃어버린 것과 묻어둔 것, 가진 것과 포기한 것을 헤아렸다. 머리가 복잡한 날에는 아무 뜻 없이 물기어린 푸른색의 하늘을 지켜보았다. 그 안온함. 까마득히 오랜 옛날에 손에 넣었던 고요. 시안은 부서진 만큼 무언가를 부순 사람도 감히 슬퍼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스스로를 경멸했다.
훗날, 어떻게든 목표하던 바를 이룬다면. 어떨까.
"왕국을 재건하고 나서는 뭘 할 거지?"
할 일 없이 마당을 쏘다니던 하일의 기습적인 물음에, 시안은 소담하게 미소지었다.
"......더는 해야 할 것이 없으니, 아마도."
죽지 않을까요.
하일은 별 청승을 다 떤다며 코웃음쳤다.
언제 한 번 만나야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아지트에 라니아가 직접 걸음할 줄은 몰랐다. 정원 한복판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던 시안은 외부인의 기척을 느끼고 손에 푸른 기운을 둘렀다가, 라니아임을 확인하고는 그냥 마당으로 나가 계속 책을 읽었다.
구름이 바람에 한 뼘만큼 서쪽으로 밀려나고 나서야 라니아가 밖으로 나오다 그를 발견했다. 잔뜩 경계하며 살피다 툭 내뱉었다.
"혹시 그 때 그 우산?"
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라니아의 선명한 적안과 정확히 마주쳤다. 대단한 미인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고 내놓은 첫 감상평이었다.
라니아는 마치 여름에서 태어난 사람 같았다. 지인들의 평으로는 따뜻한 사람이 아니라 했지만.
시안은 미미한 미소를 띄웠다.
"언젠가 다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 날이 오늘이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나, 이러한 재회 또한 나쁘지 않네요."
목에 와닿는 은빛 검날 두 개를 말끔히 무시하며.
"반갑습니다, 루 할레시온 대공녀."
잊은 과거를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재회를 입에 담는 시안이었다. 그럼에도 재회가 틀린 단어는 아니었다. 몇 달 전 우산을 준 날이 두 사람이 온전히 기억하는 가장 최근이자 최초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얼어붙은 것마냥 마땅한 움직임이 없자 그는 초점을 애써 그녀에게 맞추고 무언으로 종용했다. 이 칼 좀 치워 달라고.
"헬렌, 루이제. 검 치워."
라니아는 곧 기대에 부응했다. 검 두 자루가 마지못해 거둬졌다. 그녀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두 그림자에게 물러가라 명했다. 그녀는 명목상 황태손의 약혼자였다. 시안은 황실이 기르는 충성스런 개 오십 마리 중 둘이 그녀에게 붙은 게 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평균 이상으로 총명한 사람이라면 머지않아 라니아는 양날의 검인 약혼을 깨려 들 것이다. 그 때 동맹을 자처하며 약혼 파기에 도움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시안은 결정했다.
자신의 정체를 묻는 라니아를 몇 마디 말로 빙빙 돌리다가, 당황하는 기색이 보일 무렵 제대로 상대해주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인가요? 차림새만 보면 꼭 마법사 같네요. 평범한 옷 위에 평범하지 않은 망토라."
특이한 옷차림을 폄하할 때 보통의 할레시온 귀족은 마법사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이는 즉 마법계와 그녀의 연관성을 뜻한다. 물론 라니아에게 하일에 대한 기억이 멀쩡히 남아있다는 것을 일전에 알아낸 시안은 딱히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정보 조각을 아직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막 던질 정도로 자신을 경계하지 않는 그녀에게 잠시 의문을 느꼈다. 그가 보기에는 라니아가 원래 그만한 사고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단지 무자각 중에 그런 것 같았다.
"네, 마법사들이 쓴다는 로브는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의중을 미처 따라잡지 못해 미간을 살짝 좁히는 라니아에게, 시안은 긴장감 없이 온화하게 웃어주었다.
"만일 제가 마법사라면 제국 귀족 사회가 발칵 뒤집힐 테니까요."
"굳이 그런 식으로 둘러 말하지 않아도 대강의 신분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어요. 다만 어느 가문 소속인지 모를 뿐이죠."
대꾸를 들으며 시안은 다른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만일 이 발언을 세크네트 로엔세르에게 했다면 단박에 자신의 소속 귀족가뿐만 아니라 마법사라는 사실까지 들키고 이를 빌미로 즉석에서 협박당했을 거라고. 그런 면에서 대공녀는 딱 이만큼 예리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러고 나서 시안은 장난처럼 정체를 밝혔고, 가명이라는 방패 하에 '시안'으로 자신을 부르도록 했다. 의도치 않게 들고 있던 황실 비사록을 들켰지만 어차피 동종의 책을 라니아 또한 가지고 있으니 위기는 아니었다.
선심쓰듯 몇 가지 힌트를 손에 쥐어주고, 시안은 라니아가 퇴장할 수 있도록 더 이상의 말 없이 사근한 미소만 입가에 그려냈다.
4월 10일, 라니아의 생일에 시안이 초대받았다. 그는 라니아에게 가정사를 조금 밝히며 그녀의 편이 되겠노라 선언했다. 이로써 과제 하나는 완수했다.
본래 라니아의 것이었지만 둘의 기억이 매몰되면서 그의 소유가 된 렘사 이시프의 '주황의 파도'의 책장을 넘기며, 시안은 앞으로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본격적으로 정치판에 관여할 생각이었다.
그 때 하인이 그에게 도착한 물건을 들고 왔다. 어릴적에 교류했었고, 이제는 전략적 협력 관계인 레비욘 가셋수트 리우네아 국왕이 그가 현 상황을 대강 적은 편지를 받고 비웃음이 담긴 답장을 보낸 것이다.
- 너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구나. 비록 이름 하나 없긴 하지만 말이야. 가엾기도 하지. 불쌍한 기념으로 선물을 보낼 테니 읽어보렴. 내가 직접 집필했단다. 참고로 내 선물에 걸린 마법은 함부로 풀려다가는 무대에서 영원히 퇴출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고. L.G.R. -
언제나처럼 이해 못할 해괴한 내용이 섞여 있었다. 시안은 익숙하게 해석을 포기하고 동봉된 두꺼운 책 아홉 권을 살펴보았다. 리우네아 어로 된 원서가 네 권, 제국어로 번역된 것이 다섯 권이었다. 제목은 '세계'. 펼치는 것 자체로 응징이 돌아오는 저주는 걸려 있지 않은 듯했다. 안심하고 표지를 넘겼다.
백지였다. 장난인가 싶어 불쾌해진 시안은 성의 없이 몇 페이지를 더 넘겼다.
- 몰랐던 것은 때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알게 되기도 한다.
손이 멈칫했다. 단 한 줄의 글이 1권에서 홀로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시안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건 할레시온 황실 비사록의 서문에 나오는 글이다. 황급히 뒷장을 살폈다. 다시 백지다. 그런데 잠시 후, 원래 있던 글귀가 사라지고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글이 나타났다. 마치 숨바꼭질하듯이.
- 소망은 때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계속 책을 덮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실험을 해 보았다. 그 결과 총 아홉 권의 책에서, 두 가지의 언어가 무작위로 종이 위에 떠올랐다. 페이지는 커녕 권조차 정해지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단순히 마법이라기엔 너무 고차원적인 현상에 시안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시일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는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대략 유추할 수 있었다. 아주 두루뭉술하고 심오하긴 하지만 주제는 분명히 하나만을 가리켰다. 시안은 '세계'가 환상이론 서적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내렸다. 레비욘에게 답장을 띄워 책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놀리는 투의 아리송한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어느새 틈 날 때마다 책을 펼쳐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 시안의 습관이 되었다.
여느 때처럼 책을 읽으러 황궁 도서관에 방문한 시안은 운 좋게 황태손을 만났고, 18구역 출입 허가증을 얻어냈다. 두 사람은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쓰잘데기 없는 담소를 나눌 상대 정도는 되는 관계였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종종 허가증을 얻으러 왔었고 그 때마다 문제는 없었기에 황태손은 몇 달 전 황실 비사록 도난 사건을 겪고서도 시안을 의심하지 않았다. 대신 그 시기에 일회성으로 허가증을 얻은 다른 자들을 의심했다. 애초에 시안 역시 반복성이 갖는 신뢰를 잘 알고 그걸 훔쳐낸 거였다.
얼마 전에 레비욘이 한 예언이 기록서에 실렸는지 확인하려 18구역 안쪽의 서고로 간 시안은 두툼한 책 한 권을 뽑아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먼저 맨 뒷 장에서 최근의 예언부터 찾았다.
「마침내 너의 비극이 그들의 비극이 될 때. 모든 명운은 거짓이 되고, 모든 시간은 기억이 되리라.」
- 예언 대신관, 리우네아 국왕 레비욘 11세. 1061년 12월 2일.
그는 턱을 살짝 괴고 흥미롭다는 눈으로 예언을 쳐다보았다. 이십 년만에 내놓은 예언 치고 참 간단했다. 너는 누구고 그들은 누구일까.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으나 역시나 지혜의 신 에웬의 수수께끼를 한 방에 풀기란 불가능했다. 날숨과 함께 짧은 웃음을 흘리고 햇살이 투과되는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창 밖의 대공녀와 눈이 마주쳤다.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그들은 몇 마디 입모양을 주고받은 끝에 안에서 만나기로 했다.
라니아는 시안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고요한 18구역에 들어와 책에게 눈길을 주었다. 시안은 그녀를 도우려 사다리를 들고 왔다.
"어느 책인가요?"
라니아가 몸을 돌리다 순간 화들짝 놀랐다. 얼른 표정을 가다듬는다.
"리우네아 예언 기록서예요."
시안은 손쉽게 그것을 꺼내주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황태손과 그녀의 약혼 이야기가 나오자.
"그 약혼."
시안은 짧은 말로 일상적이던 분위기를 확 전환했다.
"그대로 둘 생각이십니까?"
시안이 시선을 들어 그녀의 눈에 제대로 맞추며 차분하게 물었다. 라니아는 흘러내려 시야를 덮으려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고 살짝 웃음지었다. 시안은 어렵지 않게 그것이 상대를 탐색하려는 기색임을 간파했다.
"제가 약혼을 왜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잡아먹히기 전에 반항이라도 한 번 해보려고?"
머릿속에서 검열을 덜 거치고 내뱉은 말이었다. 라니아의 입가에서 미소가 시들었다.
"잘 아시면서 절 건드려 보신 거군요."
"네."
그리고는 몇 마디가 더 오갔다. 이후에 라니아는 약간 불만스레 질문했다.
"어차피 얼마 후에 공표할 사항인 것까지 추측해 내셨으면서 왜 괜히 말을 꺼내신 거죠?"
약혼을 깨는 것에 관련한 물음이었다.
"저는 그대에게 진정한 의미의 '같은 편'이 되고 싶습니다. 일회성의 인연은 내키지 않아서. 혹여 할 일 없는 자의 참견이라 비난하시더라도 감내하겠습니다."
그는 뭐라 말하지 못하는 라니아를 향해 눈을 곱게 접어 웃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대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그만."
그는 자신의 의도대로 상황을 잘 이끌고 있었다. 거기까지 하고, 일단 열람실로 이동했다.
시안은 예언서를 탐독하는 라니아에게 말을 걸었다.
"꼭 예언서가 아니라 인상적인 구절 모음집 같지 않습니까?"
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오한 말들로 가득해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아무튼 시선을 잡아끄네요. 공은 이런 점 때문에 이 책을 읽으러 오신 건가요?"
"반쯤은 그렇습니다."
나머지 반은 사실 레비욘이 선물한 책 '세계' 때문이었다. 그는 편지를 통해 책에 대한 단서를 두 개 주었다. '세계'를 레비욘 자신이 썼다는 것, 그리고 근자에 자신이 신께 예언을 하나 받았다는 것. 해서 부득이하게 이곳에 출입증까지 받아 온 것이었다.
"이유의 전부는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나머지 반은요?"
"비밀로 해두겠습니다."
"비밀이 많으시네요, 은근히."
"하하. 저는 그대에게 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진실을 말하려 노력하는 중인데, 그대에게는 제 진심이 미처 전해지지 못했나 봅니다."
라니아의 궁금증을 적당히 끊어내며, 시안은 말갛게 웃었다.
그 때.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질문이 날아들었다.
"공께선 어떤 향수를 쓰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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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가 들어와서 작품 소개글에 제 트위터 아이디 써 두었습니다. 사실 예전에 앞 편수 후기에 잠깐 써놓은 적 있었지만 슬그머니 삭제했었던... 혹시 조아라 밖에서 저와 소통하고 싶으시다면 편하게 팔로우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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