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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84화 (84/102)

00084 Bridge 5. Cyan Rhyddella Eon : 매몰된 기억 =========================

"향수......?"

약간 얼이 빠져서 말끝을 흐리며 되물었다. 라니아는 눈에 띄게 당황해 어떻게든 자신이 뱉은 말을 수습하려 들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시안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향수를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라니아가 지금 자신의 체향을 맡고 질문하는 것으로밖에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람을 다루는 마법사의 향은.

마법사의 진심을 얻었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

시안과 하일, 라니아까지 모두 잊어버린 과거의 흔적이 시간의 파도에 퇴색되고 침식되다 결국 드러났다.

나흘 후. 황궁에서 열리는 작은 행사에 참석한 시안은 평온한 척 샐러드나 뒤적이며 그 자리의 누구보다도 복잡한 생각을 늘어놓았다. 한 집단의 수장 격 인물이 되다 보니 종종 사고력이 한계를 넘어서길 독촉당하곤 했다.

이 와중에 식사가 끝나고 해산하다가 라니아와 아이린 에네아스의 설전을 발견하고, 끝나길 기다린 뒤 떨어진 장갑을 주워 라니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얼마간 대화하다가 한 문장에 이르러 도발처럼 말끝을 올렸다.

"제가 이 제국을 제 손에 쥐어달라고 부탁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렇게 부탁하시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앞으로 한참이 지나야 이해할 말을 그녀에게 건네고, 시안은 할 수 있는 감정 표현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사람처럼 선하게 웃었다.

헤어지기 전 우연히 찾아낸 르쉬네의 편지를 전달해주며 그는 일말의 동정심도 느꼈다. 망가진 과거라면 그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에.

어느 날의 시안은 엘피샤의 가게로 찾아가 반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도착한 라니아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바깥의 햇살은 따사로웠다. 어느새 여름이다.

시안은 라니아의 다음 약속인듯 보이는 샤카르 멘데로프와 마주쳤다. 저번에 황궁 도서관에서 만났을 때 황궁 비사록을 주며 던진 떡밥 덕에, 살짝 떠봤을 뿐인데 샤카르는 생각이 많아진 기색이었다. 그는 이어진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꾸준히 샤카르를 흔들었다.

누군가를 입맛대로 휘두르려 할 때 주변인을 이용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시안은 라니아의 최측근 격인 샤카르를 타깃으로 삼았다.

사냥 축제를 대비한다는 용건으로 네 명은 얼마 안 가 다시 뭉쳤다. 별다른 의도는 없었고, 목적은 사적인 친분을 쌓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궤뚫을 시에 궁술 대신 마법을 사용하는 시안은 활을 쏘지 않고 '세계'를 펼쳐 오늘의 글귀를 읽었다. 쉬러 온 라니아와 대화를 하며, 레비욘과의 관계성은 과거에 끝난 것처럼 설명하고 대강 넘어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제국어로 된 책을 빌려주겠노라 약속했다. 감사를 표하고 잠시 한눈을 팔던 라니아는 환청을 들었다는 이상한 말을 했으나 곧 철회했다.

삼 일간 이어진 사냥 축제는 둘째 날의 검술 대회에서 정점을 찍었다. 전날 라니아의 눈을 피해 접선한 샤카르에게 위기 의식을 심어주었더니 대회 관람 중에 종종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시안은 그 정도는 기꺼이 감수하며 태연하게 칼날이 오가는 장면을 관람했다. 로엔세르 가의 차남이 한창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시안이 초점 흐린 눈을 살짝 내리떴다.

세크네트 로엔세르는 좋게 말하자면 굉장히 명석한 인물이었다. 나쁘게 말하자면, 교활했다. 그래서 루 할레시온 대공가의 반역에 협조하는 자로서 히엘로 공작의 가담을 제의하러 방문한 그를 시안은 날카롭게 경계했었다. 함께 관중석에 앉아있는 레테일 역시 만만히 볼 자는 아니었다. 시안은 로엔세르 쌍둥이를 경계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후일 끝내 시안의 감시망을 넘어서 황태자의 첩자가 되었다.

제각기 상이한 비밀을 간직한 채 상황은 격동했다. 축제 마지막 날의 행사에 참여한 시안은 착실히 사람을 만나고 미끼를 던졌다. 라니아에게는 아직 알리지 않고 세력을 모으던 대공 부부는 그 날 레테일을 대리로 내세워 시안에게 한 가지 계획을 언질해주었다. 작은 호의 같은 귀띔은 곧 그들이 시안을 끌어들일 생각이 다분함을 내비쳤다. 라니아의 다음 목표는 프리드리히 스카일러라는 말만 전하고 미로의 다른 샛길로 빠져나가는 레테일을, 시안은 감정 빠진 눈으로 오래 응시했다.

자정이 가까워 온 시각에, 시안은 퇴장하려다 만난 라니아를 언제나처럼 말로써 기만했다. 우연의 탈을 덮어쓴 의도와 호의로 포장한 유도였다. 시안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상식의 범주에서 벗어난 인생을 살아왔고, 스스로가 비열하지 못하면 잔혹한 그의 세계에서 도태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라니아를 상대로 이러고 싶진 않았다. 그녀를 몰아넣는 일이 꺼려졌고, 죄책감이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프리드리히에게 크게 한 방 먹이고 나서 여유를 찾은 라니아는 시안의 별장에 방문했다. 그녀는 빌리려던 책 '세계'를 읽지 못했다. 시안은 레비욘에게 편지를 띄웠고, 답변을 받았다.

- 다른 자에게 함부로 보여주어서 좋을 것이 없는 책이란다. 특히 그 대공녀에게는, 지금으로선 말이지.  죽기 싫다면 절대 마법을 풀려고 하지도, 그녀에게 내용을 알리지도 마. R.G.L. -

레비욘은 여전히 속내 모를 자였다. 다만 한 가지, '세계'가 라니아에게 의미 있는 서적이라는 실마리는 얻었다. 그 때부터 시안은 라니아를 은근히 책 내용에 대입하기 시작했다.

그와는 별개로 목표했던 9월이 도래했으므로, 라니아가 별장에 왔던 그 날로 시안은 쌓았던 둑을 터뜨렸다. 라니아의 심적 상황과 대외적인 정세를 고려해 선정한 날짜였다. 블로텔지아의 길드원이 예전부터 가끔 말썽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다. 사실 시안의 별장을 감시하지 않았던 그 길드원은 시안에게 잘못 걸려 쇼에 희생될 좋은 도구로 이용되었다. 어찌되었든 이로써 마지막으로 루 할레시온까지 섭외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으로 시안은 라니아의 이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몇 년 전에 그녀를 조사한 적이 있다는 세크네트는 시안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그것과 관련해 말을 꺼냈다.

"에빌 대공녀에게 특별한 비밀이 있느냐 물었더니, 제드릭 공녀는 말해줄 수 없다고 했고 황태손은 그걸 궁금해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보통 비밀은 아니라는 뜻이군요."

"당시의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해서 그나마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대답을 내놓은 황태손을 물고 늘어진 끝에 '대공녀가 또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건 당연한 일이다', 라는 문장을 건졌죠."

"그건 다소 불필요한 증언인 듯합니다만."

"아니요. 상당히 중요한 말입니다. 그 때의 대공녀는 아직 숙청을 겪지 않았던 상태라 다른 귀족에 비해 성장 환경에 전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영역은 비상식 쪽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어떤 종류의 비상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 역시 특정한 현상을 언급하지는 못합니다. 겪어 본 것도, 들어본 것도 거의 없으니까요. 다만, 르웰린 영식은 대공녀가 가끔 알 수 있는 한도를 한참 넘어선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에 놀란다고 했습니다. 그 밖에도 멘데로프 영식 같은 사람들에게 나중에 추가로 얻은 결정적인 단서가 몇 개 더 있고요. 지금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아 봤자 어차피 설득력 없어 보일 테니 그냥 건너뛰고, 대공녀가 열쇠에 해당하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치적으로나, 다른 쪽으로나."

직감에 의해 시작한 추리인 탓에 타인에게 쉽게 납득시키기 어려운 점이 많지만 유념해두는 게 좋을 거라고, 세크네트는 덧붙였다.

그는 시안이 라니아에게 국내를 온전히 맡기게 하려는 차원에서 조언했지만, 시안은 그 이상을 해석했다.

그렇기에 최후에 눈치챈 것이 있다.

샤카르는 비교적 대적할 만한 상대였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난 후 샤카르의 손목에 링 팔찌 하나가 더 생긴 것을 내색 않고 주시하며, 시안은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샤카르 멘데로프는 단지 정보 분야를 맡은 조력자였다. 외려 라니아가 처음에 쉽게 봤던 것과 달리 모호한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지워진 몇 년간의 기억 탓도 있겠지만 세크네트의 말을 듣고 난 뒤로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대체 그대는,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두서 없는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라니아는 의아함과 어이 없음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은 한창 반란 계획을 세우던 때 별장의 서재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는군요."

'주황의 파도'를 읽다 포기한 라니아는 그것에 관해 대화하다가 뜬금없이 던져진 시안의 말에 눈썹을 휙 올렸다.

하루 아침에 자신의 측근으로 두었던 사람이 반란군의 수장이라고 밝히며 뒤통수를 쳤는데, 라니아는 왜인지 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저 차갑게 일단락지었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서로가 수단이고 도구인 관계에서 무얼 바라나요?"

시안은 그 말에 아주 살짝 안도하고, 또 그만큼 슬퍼하는 자신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렇군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세요."

그는 겨우 말을 맺었다.

정작 라니아가 궁금해했던 점은 따로 있었다. 11월 18일, 반란 하루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녀는 떠보듯 물었다.

"그 기억은 누굴 위해 내던졌을지 궁금하네요. 저번에 물었을 때는 대답을 회피하던데."

하일에 관한 질문이었다. 시안은 굳이 그녀까지 매몰된 과거를 끄집어내 머릿속을 어지럽힐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에 소모되었을 겁니다."

언제나, 그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웃음이 전부였다.

뭔가 잘못됐다. 국경선을 넘어 해외의 전선으로 향하려던 시안은 정신없는 상태에서 보낸 듯한 샤카르의 전서구를 받았다.

- 국내 반란군 습격. 루 할레시온이 위험함.

시안은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엘피샤가 쪽지를 읽고 놀란 눈을 했다.

소리마저 집어삼킬 듯한 한밤중이었다.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렇기에 빠른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시안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멀리서 뜨겁게 달궈진 공기와 매캐한 냄새가 흐릿하게 감지됐다. 진원지는 루 할레시온 대공가의 저택 쪽이었다.

국내군의 수장 격인 대공가가 당했다. 이는 곧 국내에 멀쩡하게 남아 있는 반란 세력이 없을 거라는 말과 상통했다. 하루 앞으로 당긴 반란 일자를 또 정확히 노리고 반란군을 색출해내는 적군. 그야말로 잘 짜여진 각본 같은 상황이었다. 내부에 첩자가 있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시안은 이내 로엔세르라는 가문명을 떠올렸다. 첩자가 생길 것을 염려해 처음부터 모두에게 전체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나눠진 조각 중에 비교적 핵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 블로텔지아를 비롯한 타국의 협력자들과 세크네트가 마주치지 않게 한 탓인지, 황태자파는 시안이 움직이기만 기다린 형세였다. 그가 행동하기 시작하면 자동으로 다른 국가들도 따를 테고, 할레시온 제국이 그걸로 명분을 세워 공격할 수 있으니까.

시안은 그렇게 자신이 미끼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결국 시안과 황태자 모두 국가 간 전쟁에 목적이 있었다. 이 상태에서는 최대한 신속히 국외로 빠져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국내를 포기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샤카르의 쪽지 때문에 발이 묶였다. 루 할레시온이 위험하다, 즉 라니아가 위험하다. 이대로 두면 그녀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샤카르도 정보상의 꼬리를 밟혀 위기에 빠졌을 것이 분명한데도 굳이 이 사실을 시안에게 강조했다.

도움 요청이었다. 라니아를 구해달라는.

편지를 시안에게 보내는 데 성공했으니 샤카르는 아비규환을 뚫고 탈출했을 수도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그가 가장 먼저 갈 곳은 뻔했다. 그러나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시간을 버는 정도의 역할은 하겠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시간을 끄는 동안 시안이 와주기를 바란다는 뜻이 된다. 시안은 거기까지 추리하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과거의 추억에 못내 얽매이는 자는 하일 뿐만이 아니었다.

맹렬하게 불타는 저택의 모습이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했다.

발목까지 오는 새까만 망토를 두르고, 말에 올랐다. 엘피샤에게 먼저 출국을 도울 자들과의 접선지까지 가라고 말한 시안은 루 할레시온 저택으로 향했다.

시안이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피를 흘리며 라니아에게 기대듯 안긴 샤카르의 뒷모습이었다. 한 사람에게는 늦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에게는 늦지 않았다.

'비극입니다.'

'어떤 것이요?'

'무엇이든지요.'

낮에 했던 대화를 상기하며, 시안은 샤카르를 찌른 자객부터 손짓 한 번으로 처리했다. 창백한 뺨 위로 붉은 피가 점점이 튀었다.

라니아가 넋 나간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멀리서 달려오는 자객의 지원군의 수를 가늠했다. 충분하다.

"라 사우타 파트."

속삭임과 동시에 푸르른 바람이 수많은 창날이 되어 거대하게 내리꽂혔다.

그는 그렇게 이성까지 배신했다.

***

가장 서러웠던 나날에 매몰되어도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죽음만이 저를 구원할 테니까요.

============================ 작품 후기 ============================

시안 외전, 끝입니다. 다음 편은 3장의 마지막을 장식할 한 편짜리 외전입니다. 자정쯤 올라갈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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