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Bridge 3+. Shachar Menderope : ætérnĭtas =========================
내가 끝내 듣지 못한
영원의 비밀이 있어.
***
유년 시절의 샤카르 멘데로프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방향이 정해진 삶 따위는 넌덜머리가 났다. 운명을 피해 단신으로 떠난 험한 길 끝에서, 어른이 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운명을 만났다.
"나도."
절대 잊혀지지 않도록. 각인처럼, 그렇게.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은 그의 전부가 되었다.
사랑은 잔혹하게도 다정해서, 거스를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무엇이 그리도 서러웠는지 모른다. 그냥 눈물이 났다. 하여 웃음으로 감추었다.
1061년의 말미에, 재회를 뒤로하고 본가로 돌아가려는 그를 더욱 재촉한 것이 있었다. 분홍색 표지의 낡은 공책 한 권.
한글, 그러니까 에온 북부 지방에 사는 소수민족의 고유 언어로 가득한. 라니아의 물건이었다.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가 귀를 어루만졌다. 음색이 햇살에 비친 강물처럼 맑게 흘렀다. 그러나 샤카르는 어두운 서재에서 홀로 두려움에 휩싸였다. 아연히 헛숨을 뱉어냈다. 공책을 가져갈 수는 없으니 그 자리에서 다 외워야 했다. 곧 음악이 멎었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밖으로 나섰다.
평정을 지키는 것 정도야 그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다간 당신이 위험해져."
"에빌. 이럴 때면 이 모든 게 거짓이길 바라게 되니까, 거기까지만 하자."
제발.
그는 간절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욱여넣은 글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벌써부터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작별이었다.
에온 지방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샤카르는 얻어낸 정보를 차근히 분석했다. 공책에 쓰인 글자는 에온에서도 아는 사람이 적어 뒷세계 일부에서는 암호로 쓰이곤 했다. 그 역시 벤에게 정보상 일을 배울 때 하나의 은어로써 숙지해두었던 언어다. 이런 걸 어떻게 라니아가 사용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몰랐던 것은 때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알게 된다고 했다. 공책의 초입에서 그는 믿기 힘든 글과 마주했다.
- 1049년 6월 2일. 기억이 더 사라지기 전에 이 공책을 마련했다. 보는 눈이 없을 때마다 틈틈히 써나갈 생각이다.
일단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한 거. 내 이름은 윤이설이었다. 열일곱 살의 나이로 죽었다. 죽기 전의 일 중에 기억나는 것은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 나의 절망, 엄마에게 가고 싶다는 부질없는 소망, 지직거리던 컴퓨터 화면, 마지막으로 본 웹소설의 오만한 악녀, 음독자살 정도. 그리고는 의식이 끊겼다가 다시 돌아왔다. 나는 이상한 근대풍 세계의 귀족으로 태어났다. 여러 정황과 직감으로 미루어 볼 때, 여기는 아무래도 소설 '꽃물 든 하늘' 속 세계인 것 같다. -
그는 날짜를 휙휙 건너뛰며 이어졌던 기록을 기억나는 대로 빈 공책에 적었다. 워낙 급하게 읽은 터라 뒤로 갈수록 헷갈리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확실하게 꽂힌 부분이 있었다.
- 1050년 4월 10일. 지금은 '라니아'로서 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한 날의 늦은 저녁이다. 이 공책을 한글로 쓰길 잘했다. 오늘 사용인 한 명이 청소하다 이걸 발견했지만 별 일은 없었다.
황족으로 태어났으므로 나는 필연적으로 사교계에 나가야 한다. '꽃물 든 하늘'에서 라니아의 최대 조력자였던 샤카르를 거기서 만나게 될까? 소설에 그들의 첫 만남이 제대로 명시되어 있었는지의 여부가 불확실하다. 내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샤카르의 퇴장 뿐이다. 그는 소설 후반부에서 죽는다. 시기상 대충 라니아가 처형되기 한두 달 전쯤. 왜 죽는지는 잘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나는 건지, 아니면 아예 작중에 나오지 않은 건지도 불확실하다. -
그녀는 공책 한 켠에서 '라니아'의 처형 시점이 1062년으로 추정된다고 기술했다. 그러니까, 내년이다.
멘데로프 백작가는 눈에 띄는 일 없이 조용히 에온 지방에 박혀 있었다. 그러니 샤카르에게 죽음의 위기란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만약 라니아와 엮이지만 않는다면.
라니아는 모르겠다고 적었으나, 샤카르는 알 것도 같았다. 라니아를 제외하면 세상 천지에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위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만일 죽는다면 필시 라니아와 연관된 일 때문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항상 위태로운 사람 곁에 있다가는 다치기 십상이다. 샤카르는 그것을 감수하고 라니아와 일 년 만에 재회하기로 결심했었다. 라니아의 길은 혼자서 걷기에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이제 와 그 결심을 되돌리지는 않았다.
이듬해 봄, 그는 고민을 끝내고 좋아하는 사람의 옆으로 돌아갔다.
죽어도 안 울 것처럼 굴던 사람이 제 품 안에서 마구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샤카르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미어지는, 그런 생소한 느낌. 누나의 초상화를 받고 그가 슬퍼했듯, 친구의 초상화를 보고 그녀는 울었다. 서로는 부재의 아픔이 가진 무게를 아프도록 알았다.
내가 죽어도 너는 이렇게 슬퍼할까.
그건 싫은데.
샤카르는 말하지 못한 것을 삼키며 고요히 눈을 접었다.
격변하는 수도 귀족 사회에 뛰어든다는 자체로 샤카르는 현저히 위험해졌다. 차라리 한량 노릇이나 하며 예전처럼 정치에 관여 않고 살았다면 어떤 피바람이 불어닥쳐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도 한복판에는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 서 있었고, 샤카르는 그 공책의 내용이 하루하루 신빙성을 더해가는 것을 직감하며 허탈하게 숨을 뱉었다.
"처남, 불에 너무 가까이 가지는 마십시오."
세크네트가 드물게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라니아가 전생에 이 세계의 원래 줄거리를 소설의 형태로 읽은 것 같다는 샤카르의 추측을 듣고 난 직후였다.
"계속 가다가는 재가 되고 말 겁니다."
로엔세르 공작가 핏줄 특유의, 예언에 가까운 추리력이 또 발동했다. 그는 개의치 않고 농담했다.
"멋진 일이구만, 뭐."
"샤카르 멘데로프!"
"매형은 꼭 날 협박할 때만 이름을 부르더라? 그래봤자 내가 안 들어먹을 거 뻔히 알면서. 그래도 날 아직 친척으로 생각하나 봐, 걱정해 주게? 누님이 기뻐하시겠군."
"제가 처남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그 입 다물어 주시죠?"
"싫은데."
"와, 진짜 너무한 것 아닙니까? 기껏 충고해 줬더니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어휴......레트가 절 뜯어말릴 때 딱 이런 기분인가 봅니다. 크흡. 미안하다, 내 형제! 앞으론 자제할게!"
"그래, 이 틈에 반성 좀 해라."
샤카르가 개구지게 말했다.
세크네트는 자기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은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사람이었다. 그 습성은 부인 셰카이나를 잃고 나서 더 심해졌다. 샤카르는 자신의 존재가 라니아의 방패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세크네트에게 있어서 라니아는 이용할 명목으로 가까워진 사람이었다. 셰카이나가 아끼던 남동생이라는 이유로 샤카르까지는 용납이 되지만, 그 샤카르의 연인이라는 이유로 라니아를 범주에 넣는다는 건 지나쳤다. 훗날, 세크네트는 끝내 라니아를 쳐내는 방법을 택했고 샤카르만 빼낼 계획을 따로 세웠다.
라니아가 위협당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샤카르는 평정을 잃었다. 한때 제 목숨이 최고로 중요했던 자신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회의가 들기 일쑤였고, 주변을 고려하지 않은 멍청한 선택이었다며 자책하기도 했다. 언제나 선택이란 후회를 동반하니까. 선택지를 고를 당시에 얼마나 확신에 차 있었든간에.
그럼에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걸어야 라니아와 계속 함께할 수 있으니까. 같이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시간은 그에게 더없이 소중했다.
"아무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세상에 존재할까요?"
라니아의 물음에 샤카르는 제일 먼저 감정, 그 중에서도 사랑을 떠올렸다. 당장은 대충 얼버무렸지만 근 시일 안에 꼭 사랑한다고 말해줄 작정이었다.
노을 지는 언덕에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샤카르는 눈을 돌렸다. 태양처럼 찬란한 사람이 옆에 있었다. 숨결에 섞여 흘러나온 웃음이 바람 소리에 묻혀 흩어졌다.
"내게 너는 뭐냐고 물었었지?"
실은 처음부터 둘 다 정답을 알고 있던 문제였다.
"뭐긴 뭐겠냐."
그는 거스르기 힘든 감정에 깊이 빠져들었다.
"소중한 사람."
노을이 지고, 이윽고 밤의 장막이 푸르게 하늘 끝을 적시던 새벽의 반대편에서.
"사랑스런 사람."
끝내 후회하고야 만 고백을 건넸다.
"좋아해."
-
너와 함께 언제까지나
저 노을을 보고 싶었어.
하지만.
사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파멸이었던 거야.
-
가끔은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거짓을 말해야만 할 때가 있다. 공주의 결혼식에서 샤카르는 공책에 대한 라니아의 물음을 그럴 듯하게 넘겼다.
그녀 말대로 들어맞은 것이 많지만, 바뀐 것도 많으니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상황을 뒤집을 최후의 카드, 반역이 아직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성공한다면 운명과 영원히 작별하게 된다.
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의 새벽 세 시, 샤카르는 라니아에게 선물한 목걸이를 항상 걸고 다녀달라 부탁했다. 한동안 만나지 못하지만, 마치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끔.
헌데 그게 이별 선물이 될 줄은.
샤카르는 허탈하게 미소했다. 날숨이 하얗게 하늘로 올라가다가 사그라들었다. 추웠다.
결국 이런 식으로 운명은 모습을 드러냈다.
정보상 건물로 기사들이 빽빽하게 몰려왔다. 직원을 죽이고 가구를 부수며 순식간에 건물을 점령했다. 정보상이 당했다. 즉 라니아 역시 위험했다. 그 생각이 온통 머릿속을 지배했다. 재빨리 쪽지를 적어 손에 쥐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새까만 어둠 아래 기사가 든 수많은 횃불이 악마처럼 밤을 밝혔다. 외진 곳을 노려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려 했지만, 전서구를 불러내기도 전에 발각됐다.
그 때. 그를 포위한 기사들 사이로,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어두운 낯을 한 채 그의 앞에 나타났다.
"에단."
황태자파, 르웰린 후작가의 후계자.
아연히 부르자 에단이 눈물부터 한 방울 떨궜다. 그리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샤카르의 목에 날을 가져다 대었다.
"저는 이상을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감히 용서를 받으려 억지를 부리는 일이 없을 테니까요."
샤카르는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짐작하기 어려워서였다. 분명 상황만 봤을 땐 목숨의 위협을 받는 중인데, 어쩐지 이상했다.
"제가 토벌단의 지휘를 맡지 않았다면 아버지 손에 죽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르웰린 후작이 토벌대장으로 자기 아들을 세웠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세크네트는 에단에게 샤카르를 붙잡아 놓으라고 지시했었다. 나중에, 상황이 대강 정리되고 나면 적절한 변호를 해주어 샤카르 하나만 무죄로 풀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에단은 세크네트와 달리 라니아를 옛 친구로 둔 사람이었다. 그는 샤카르가 여기서 벗어나면 곧장 루 할레시온 저택으로 갈 것임을 알았다.
"당신을 보내주기 위해 정보상을 직접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를 마음껏 적으로서 증오하시고."
샤카르가 빛 한 점 없는 냉막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에단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열없이 웃었다.
"여긴 제가 막을 테니 가십시오, 멘데로프 영식."
그는 자신이 직접 토벌대를 지휘해 샤카르를 탈출시킬 목적으로 르웰린 후작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것 때문에 제 손으로 샤카르의 정보상을 끝장내야 했지만, 적어도 그를 라니아 쪽으로 보낼 수는 있게 되었다.
샤카르의 목을 파고들던 검날이 한 순간에 호선을 그리며 빠르게 회전해 에단의 바로 왼쪽에 서 있던 기사의 목을 베었다. 일동 소스라치게 놀라 검날의 방향을 돌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샤카르가 움직였다. 놀란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제국 귀족을 대상으로 한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수석 기사'의 명예를 거머쥔 사람답게 에단은 빈틈 없는 검술을 구사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흙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샤카르는 에단이 기사들을 상대하며 주의를 끌어준 덕에 몇 번의 검놀림 만에 탈출에 성공했다.
그렇게, 허물 없이 어울리던 일상 속의 술친구도 여기서 안녕을 고했다.
휘파람으로 전서구를 불러낸 샤카르가 미리 적은 쪽지를 즉시 시안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루 할레시온 대공가의 저택으로 달렸다.
***
시간은 아슬아슬하게 맞췄다. 시안 놈이 조금, 아주 조금 늦었지만 아무렴 상관없어.
단지 너무 많은 양의 피를 흘렸다는 것만이 문제지. 아파서 도저히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 너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가 아직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데.
"......나도 시간 끄는 건, 자신 있어서."
겨우 내뱉은 문장에 너는 멍하니 대꾸했지.
"시안을 불렀군요, 당신이."
"응, 좀 급하게."
장미향이 짙다. 가슴이 꽉 저며들었어. 사실상 자살 행위를 한 에단과, 시간을 버려가며 내 부탁에 응한 시안, 여기로 온 나, 그리고 여지껏 버텨준 너까지. 네 명 모두는 한 마디 제대로 된 논의도 없이 미리 대비한 것처럼 맞추어 행동했고, 성공했는데. 너는 슬퍼해서.
나로 인해 울지는 말았으면 했는데. 내가 잘못한 걸까. 상실을 두려워해 한때 내게서 일부러 멀어지기까지 했던 너에게, 내 마음만 쫓아 다시 다가간 것부터가 잘못이었을까.
미안해.
하지만 정말이지 이기적이게도, 나는 이 순간이 그다지 나쁘지 않아.
"다행이야."
"......뭐가 다행인데요. 대체 뭐가,"
"내가 널 만나서."
네가 바라지도 않은 희생을 자처한 주제에, 살아있는 너를 눈에 담을 수 있는 지금이 좋다고 하면 나는 비난받을까.
네게 입맞추며 나는 몰래 울었어. 몇 초 후의 이별은 어쩔 수 없이 싫었거든. 그냥 딱 이대로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어.
눈앞이 점점 흐려지는데, 너는 애원했지. 가지 말라고. 서러웠어. 너무 서러워서.
"사랑해."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아껴두었던 말을, 두서없이 건넸어.
"사랑한다."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서. 그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시야가 완전히 점멸했고.
어딘가 먼 곳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어.
***
처음 만난 너의 얼굴은
무척이나 슬퍼 보였지.
그건 어쩌면
잃어버린 무언가의
파편일지도 몰라.
============================ 작품 후기 ============================
3장의 마지막 외전은 바로 샤카르의 두 번째 외전이었습니다. 3장, 완결입니다. 이제 드디어 마지막 장인 4장만이 남았네요. 마지막까지 함께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4장의 편당 분량은 4천~5천자 정도로 줄어들 예정입니다. 내용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아서, 읽으실 때 조금 더 상세히 집중하셨으면 하는 바람에 일부러 그렇게 해 보았습니다.
《오늘의 악살다》
ætérnĭtas : 라틴어로 '영원'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