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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86화 (86/102)

00086 13. 그 1062년, 우리는. =========================

나의 비극이다.

《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 - 제 4장 : 겨울》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맑은 아침이었다. 목재로 지어진 방 안에 놓인 침대. 그 옆의 큰 창문에서 내게로 쏟아지는 햇살. 부드러운 이불.

아, 역시 꿈이었구나.

입가에 미소를 피우며 안도했다.

그 끝에서 처절하게 절망했다.

목 끝까지 긁어내어 울기 시작했다.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엘피샤가 한숨을 쉬고 나를 달랬다. 뒤따라온 시안은 증상을 확인하곤 내가 진정할 때까지 벽 한 구석에 기대어 서 있었다.

울음소리는 차차 잦아들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어요. 많이 심각한 것 같은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엘피샤가 탈진해 의식이 흐려진 나를 눕히며 말했다. 시안은 침묵을 지키다가, 한참 후에야 짤막하게 대꾸했다.

"상실에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 상태로 한 달을 보냈다.

***

나는 한 번 발작을 일으키고 나면 그대로 하루에서 이틀 정도를 내리 잤고, 다시 깨어나서는 탈진할 때까지 울거나 손목을 그었다. 나중에는 엘피샤가 방 안의 날카로운 도구를 죄다 치워버렸다.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더 이상 부서질 정신이 없게 되자 나는 조금씩 평정을 찾았다. 아니, 이걸 평정이라 불러도 좋을까.

물에 잠긴 채로 땅 위를 올려다보는 것 같은 무딘 감각을.

꿈꾸는 듯 희미한 현실감을.

"일어나셨습니까."

내가 잠에서 깨어도 이상 행동을 하지 않게 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크리스마스다. 물론 이 세계에 그런 기념일은 없지만. 어쨌든 오늘은 12월 25일이다. 하도 난도질당해 엉망이 된 손목이 비로소 아물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여전히 죽 외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없다시피 했지만 그만큼 움직이질 않으니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시안은 해가 뜨면 내 방에 와서 상태를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요 며칠 조용했음에도 그는 내게 찾아왔다.

"네."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건조하게 운을 뗐다. 시안은 변함없이 미미한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밖으로 나가보시겠습니까?"

"글쎄요."

"낙엽은 이미 다 졌고, 첫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겨울이에요, 라니아."

내 미지근한 대답에 굴하지 않고, 그는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마지못해 천천히 일어났다. 몸이 많이 축나서 걷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되긴 되더라.

"조심히."

잠깐 휘청거리자 그가 재빨리 균형을 잡아주었다. 계단을 걱정했지만 알고 보니 내 방은 1층이었다. 별다른 장애물 없이 수월하게 집 밖으로 나섰다.

"리우네아는 대륙 남부에 위치한 나라라 첫눈이 비교적 늦게 내리는 편이지요."

하얀 눈송이가 얇게 대지를 덮었다. 처음 제대로 마주한 집 주변의 풍경은 그야말로 그림이었다. 여름이었다면 굉장히 볼만했으리라. 탁 트인 바다를 향해 넓고 평평하게 뻗어나간 절벽의 초입에 집이 자리했고, 그 앞으로 절벽 끝까지 낮은 키의 잔디와 들풀이 얼어붙어 있었다. 리우네아라면 할레시온 서남쪽 국경과 맞닿은 나라다. 시안은 일찍이 마련한 대안을 따라 이곳으로 온 것 같다. 형세로 봐선 상당한 시골인 듯한데.

"어느 지역이죠?"

바람 소리는 나는데 내 옷가지나 머리카락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시안의 손에 휘도는 푸른 기운을 발견하고 조용히 납득했다.

"리우네아 서쪽 해안입니다."

"할레시온 쪽 국경과는 멀겠군요."

"그렇지요."

조금의 틈을 두고, 무감하게 말했다. 소리를 죽이고 상처 투성이 손에 내려앉는 눈송이가 참 하얬다. 먼 바다에 흰 파도가 물결쳤다.

"제가 다시는 거길 넘어갈 수 없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으시네요."

"위태로운 분께 구태여 그런 비수를 꽂을 필요가 있을까요."

"이제는 뭐가 됐든 상관 안해요. 그저 돌아가는 상황을 좀 알고 싶을 뿐이죠. 한 달간의 공백이면 이야기가 길겠군요."

"블로텔지아의 정보원 소수가 아직 남아 간간히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집 안으로 돌아가서 그간의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죠. 하지만 그 전에, 잠시만 더."

뜻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 메이는 목을 애써 가다듬었다.

"잠시만 더 구경하고요, 첫눈."

끝에 웃으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웃는 법을 잊어버렸는지 눈물만 계속 떨구고 말았다. 머릿속에 자꾸 그 목소리가 맴돌아서 더 그런 걸까.

'이 글러먹은 작자가......당신 내가 활 잘 쏘는 것 모르죠? 내 손에 지금 활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요.'

'아는데? 난 네가 칼을 무서워해서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못 썬다는 것도 알고, 종소리를 꺼리는 것도 알고, 나른한 오후 나절의 햇살을 즐기면서 갖는 티타임을 좋아하는 것도 알고, 눈 내리는 풍경을 매년 겨울마다 기대하는 것도 알아.'

시안은 그런 날 가만히 응시했다.

엘피샤는 따뜻한 차를 나와 시안에게 내어주었다. 집은 내가 가지고 있던 겨울 별장 정도의 크기로,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 거실의 벽난로가 집을 데웠다. 불에 거부감을 느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가까이 가니 괜찮았다. 설마 했지만 정말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의미를 두지 못했다.

오랫동안 모아온 의미를 하루 만에 깡그리 잃어서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 날 쓴 마법이 다소 과해서 원래 능력을 찾으려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국경을 넘던 도중 엘피샤 씨가 다치기도 했고요. 리우네아 국왕 레비욘은 할레시온의 주 표적이 된 저희에게 전장으로 가기 전 어디론가 도피해 회복기를 가지라고 권했습니다. 하여 이곳에서 한 달간 머물며 전투는 중요 사항만 보고받거나 명령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여기에 오게 된 경위부터 설명했다. 나는 그 잠깐의 외출 때문에 오한을 느껴서 쇼파에 놓인 담요를 무릎 위에 덮었다.

"대륙 전체는 지금 전쟁 중입니다. 7왕국과 제국 할레시온이 대치하는데, 아직은 팽팽합니다. 아마 이 전쟁은 오래도록 이어지겠지요."

차를 한 모금 입에 대고 내려놓은 시안이 차근히 이었다. 엘피샤는 나와 그가 이야기하는 동안 하일에게 하루 단위로 보내야 하는 편지를 쓰겠다며 2층으로 올라갔다.

"오벨 3세는 '그 날'에 승하한 것으로 발표가 됐고, 황태자는 즉시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황태손은 황태자가 되었지만 그다지 안정적인 위치는 아니라더군요. 구금되어 있다가 최근에야 풀려났다고 합니다."

"공신 가문은요?"

"로엔세르 공작가, 나인하트 공작가, 카인 공작가, 미르엔 공작가, 퓌센 공작가. 7대 공작가 중 다섯 가문이 공을 인정받았습니다. 후작 가문 이하로는 르웰린 후작가와 스카일러 후작가, 에네아스 백작가를 비롯한 다수의 이름이 올라갔고요. 의외인 것은, 르웰린 후작가의 후계자가 배반 행위를 했다가 수도에서 영구히 추방당했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에단의 이름이 거론되자 나는 눈을 들어 그를 마주보았다.

"에단이 무슨 배신을 했죠?"

"멘데로프 영식을 도주시키기 위해 거느리고 왔던 토벌군 기사들을 도륙했다는 듯 합니다."

"황태손은 구금되고, 에단은 추방......"

심오한 말을 해석하는 양 무정히 곱씹었다. 과연 유년 시절에 쌓은 관계들은 현재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다 같이 파멸로 가는 길을 정말이지 잘 찾아냈다. 내가 어리석었다. 그가 어리석었고, 모두가 어리석었다.

"다음으로 가죠. 국내 반란군은 어떻게 됐나요?"

동요 없이 추가 정보를 요구했다. 시안은 감정 빠진 껍데기처럼 구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복잡다단한 감정이 그의 어렴풋이 검은 눈에 담겨 있었다.

"루 할레시온 대공가는 황가에서 제명되고 그 재산을 삭탈하며 반역자 명부에 올랐습니다. 유일한 생존자인 그대에게는 현상금이 걸렸고, 레테일 로엔세르 공작은 일레인 로엔세르의 이름을 가계도에서 지웠습니다. 아레스티제 공작가는 가문의 격을 두 단계 하향하고 제국 최남단 사막 지역의 관할 가문으로 파견, 히엘로 공작가는 마지막 일원이었던 제가 거짓이었음이 밝혀지며 멸문, 훼산 백작가는 직계 전원 처형, 하시펜도 자작가는 자작 처형과 귀족 작위 박탈, 멘데로프 백작가는 멘데로프 영식이 처형 대상이었으나 그가 전투 중 사망함에 따라 백작이 귀족 작위를 박탈당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수도에서 먼 에온에 머물던 백작은 체포되지 않았고, 현재 제국의 적이 되겠다 선언하고 반란군과 뜻을 함께해 에온 지역을 평정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하지만 나는 딱 하나의 감상만 입 밖으로 냈다.

"알피어스 하시펜도가 저를 엄청나게 증오하고 있겠군요."

그는 일찍이 내게 세력을 모으는 짓을 그만두면 안 되겠냐고, 이대로라면 다 죽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가만히 있는 것이야말로 죽는 길이라고, 나는 반박했고.

둘 다 틀린 소리였다. 나는 존재 자체로 거대한 적을 맞이해야만 했으니까.

"알피어스의 행방은 혹시 전해진 바가 있나요?"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노예만도 못한 평민이 되었으니 수도에서 나와 먼 외곽 지역으로 떠났을 것이라 짐작할 뿐."

"그렇군요."

대화가 잠시 끊겼다. 장작이 타는 소리가 났다. 하늘을 뒤덮는 흰 눈과 땅을 에이는 겨울은 그저 고요했다.

시안이 고상하게 차를 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마디 던졌다.

"왜 저를 구하셨죠?"

찻잔의 손잡이를 잡은 손가락이 멈칫했다. 시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옅게 웃었다. 진짜 웃음은 아니었다. 그가 나를 본다.

"멘데로프 영식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 부탁을 들어줬냐고요. 그와 당신은 별로 친하지도 않았잖아요."

따지고 들자 시안은 더는 웃지도 못했다. 이내 작게 물었다.

"저를 원망하십니까?"

"그래요."

태연스레 수긍했다. 그는 눈을 슬프게 내리깔았다. 나는 무언가 한끗 어긋난 무감각인 채로 이어 말했다.

"차라리 다 같이 죽게 놔두지 그랬어요?"

"라니아."

"그랬으면 아주 깔끔했을 텐데. 시안 당신은 시간을 절약하고, 우리 가족과 샤카르는 흔적도 없이 이 세계에서 소멸해 버리고."

시안은 조금 길게 숨을 뱉었다.

"진심입니까."

"가치가 사라진 세계에 머물 이유는 없어요."

"잃어버린 가치를 찾아 여기까지 흘러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걸 찾았나요?"

"......"

이제껏 나를 구해준 사람이 이렇게 미웠던 적은 없었다. 침묵하는 시안에게 날카롭게 벼려진 물음을 던졌다.

"왜 저를 붙잡죠? 당신은 저를 처음부터 이용할 작정으로 접근한 거였잖아요."

"납득 가능한 대답이 필요하시다면 해드리지요. 저는 그대를 마지막까지 이용하기 위해 죽음에서 건져냈습니다. 어떠십니까?"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그는 언짢아했다. 화냈다고 하기는 민망할 만큼 잔잔했지만.

"......죄송합니다. 실언했군요. 한 달간 일어난 사건은 대강 다 알려드렸으니 이만 쉬세요."

시안은 자리를 떴다. 아무런 반응 없이, 나는 담요를 쥔 손에 힘만 더했다.

얼마 후에 돌아온 엘피샤의 도움을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서 멍하니 몇 시간을 보내자 눈이 그쳤다. 창 밖으로 소복이 쌓인 눈이 햇살을 받아 빛났다.

내 곁에서, 또는 내가 없는 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빛무리의 잔상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한 달 내내 꾸던 악몽의 잔재 같기도 하다.

피를 뒤집어 쓴 마리, 믿었던 친척의 칼에 찔린 대공과 일레인, 불타는 저택과 함께 스러진 셀리아, 그리고 샤카르.

소리내어 불러보려 했는데 말이 나오지 않고 목에서 턱 막혔다. 또 눈물이 났다. 이십 년 동안 몇 번 흘리지 않았던 것이 이제와 매일 볼을 적신다.

샤카르가 설마 나를 지키다 죽을 줄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죽을 줄도 몰랐다. 그를 최전선에서 빼려고 얼마나 철저히 조치를 취했는데. 그런 식으로 떠나면 안 되는 거였다.

태양을 닮은 목걸이가 아직 내 목에 걸려 있다. 그가 따스한 노을 속에서 웃으며 이걸 주던 게 어제 같다. 좋아한다고 속삭이던 것도 귓가에 선연하다.

과거의 내가 그에게 여러 번의 암묵적인 거절과 한 번의 상실을 준 대가를 이렇게 받는 걸까. 미안해서 어쩌지.

그가 너무 보고 싶어서 어쩌지.

나는 목걸이를 두 손으로 감싸쥐고 웅크린 채 숨죽여 울었다.

============================ 작품 후기 ============================

마지막 4장, 겨울. 시작합니다. 겨울은 기타 외전 포함 15편으로 가장 짧습니다.

+본문에선 한 번도 안 나왔지만 사실 오늘(9월 23일)이 시안 생일이에요. 시안 리델라 에온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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