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87화 (87/102)

00087 13. 그 1062년, 우리는. =========================

눈물이 아직 멎지 않았을 때 방문이 열렸다. 나는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숙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곧 방 안을 은은하게 채우기 시작한 바람의 향기를 맡고서야 여기 들어온 자가 시안임을 알았다.

"엘피샤 씨가, 오늘은 이걸 제가 하라고 떠밀었습니다."

달그락. 시안이 들고 온 붕대와 핀셋 같은 것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슬며시 일어나 얼른 눈물을 닦았다.

"......또 우셨습니까."

"맨 앞의 '또'가 상당히 거슬리네요."

우는 모습에서 신경 끄게 하려고 굳이 더 날카롭게 대꾸했다. 시안이 곤란한 낯으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아까의 일도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화 돋우려고 일부러 그런 거였어요."

"제가 그 말씀을 어찌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무시해요. 막 하는 말이니까."

대충 둘러댔다. 실제로 별 뜻은 없었다. 그는 별 수 없다는 듯 희미하게 입가를 당기고 침대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나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레 붕대를 벗겨내자 찢기고 곪아 엉망진창이 된 손목이 드러났다. 나는 멀쩡했는데 시안이 살풋 인상을 썼다.

"아프지 않으십니까?"

"별로요."

"거짓을 말씀하고 계시는 듯하군요."

대꾸하지 않았다. 시안은 상처 위에 약가루를 뿌리고 새 붕대를 감아주었다. 닿은 손의 온도가 따뜻했다. 그는 나와 눈을 맞추지 않고 대신 손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경고 같은 염려를 건넸다.

"평생 글을 쓸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상관 없어요."

"당연히 궁술도 불가하고요."

"당신 정말 의외로 오지랖이 넓네요."

"이 손으로 셰룩은 쥐실 수 있습니까?"

그 대목에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샤카르가 가지고 있었으나 내게 넘어온 그 검은색 단검을 떠올렸다.

"방금 당신의 말을 사교계에서의 해석 방식대로 풀이해볼게요. 나 하나 살리겠다고 죽은 자들의 목숨값을 이 꼴로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묻는 거죠?"

"그대에게 그들이 멋대로 얹은 책임이라 내키지는 않지만, 지금 그대를 깨우려면 이 말이 제격인 것 같습니다."

"노력은 가상한데 그 이전에 당신이 벌인 일들을 상기해 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이제야 원래의 화법을 사용하시는군요."

"망할."

아까 내가 한 도발이 악에 받쳐 따지고 드는 종류였다면, 지금 그가 하는 도발은 계획적으로 감정의 표출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결국 비속어를 뱉고 손을 쳐냈다. 그 바람에 잊고 있던 통증이 확 밀려와 눈살을 찌푸렸다.

"보통은 잃을 게 많았던 사람이 가장 불행할 테지만."

이에 아랑곳 않고 시안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가장 두려울 때도 분명 있지요."

무슨 소린지 파악하기도 전에 그가 치료 도구를 챙겨 일어섰다.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미래를 확정짓고 나가는 자의 뒷모습을, 나는 노려보았다.

그 1062년,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위태로웠고. 냉혹한 나락에서의 비극을 맞이했고. 이제 종말을 향한다.

나는 잃을 것이 너무도 많았던 사람이고, 그로 인해 완전히 무너졌다. 명백한 불행이었다. 절망에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매일 밤 꿈을 꿨다. 엄마를 보고 싶다고, 따라가겠다고 소리치는 어린 윤이설부터 시작하는. 소망이 때로 기적을 일으킨다는 엄마의 말대로인지 아니면 그냥 모종의 사슬로 엮인 우연인지, 윤이설은 낯설고도 익숙한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 가득했던 유년을 지나, 열다섯 살의 라니아는 속수무책으로 마음에 둔 것을 놓아주어야만 했다. 그 때의 라니아를 다시금 일으켜 세웠던 사람들도 이제는 없다.

피투성이가 된 소중한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며 무어라 말했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울고 싶어졌다. 꿈 속에서의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그립지만 반갑지 않은 슬픈 환영이었다.

언제나 그 악몽은 검은 공간에 혼자 남겨진 내가 주저앉아 울며 끝이 난다. 광활한 외로움은 깨어나고 나서도 짙은 그림자처럼 내 뒤에 남았다.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1062년은 과거가 되었다. 새해 첫 날, 얼어붙은 절벽가에 서서 나는 바다를 비추는 새하얀 달을 구경했다. 세상을 다 잃고서 망연히 그러고만 있었다. 파도치는 바다와 거친 바람이 다른 모든 소리를 삼켰다.

끝도 없는 나락에 내가 있었다.

1월 3일은 샤카르의 생일이었다. 축하해주지 못했다. 그가 나의 스무 번째 생일에 함께해주었듯 나도 그에게 하루쯤은 커다란 의미가 되어주고 싶었는데. 이뤄지지 않은 소원 쪽지는 멀고 새까만 밤의 강물에 젖어 떠내려갔다.

전쟁에 참여한 리우네아의 국경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대격전이 벌어진 옛 프리제의 영토에서도 그랬다.

일주일 후. 시안과 엘피샤, 그리고 나는 수도 근처의 자그마한 마을로 이동했다. 할레시온에서 탈출하다가 입은 잔부상을 회복한 엘피샤는 곧 하일을 쫓아 전쟁터로 뛰어들었지만 시안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계속 내 곁에 있었다. 꼭 무언가를 아는 사람마냥.

외진 별장에 머무는 동안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냈다. 그러면서 미련을 키웠다. 그들은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됐다. 정말 이대로 끝이어야 할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내가 할 일이 분명 있을 텐데.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 보았다. 추측하기로 여기는 윤이설의 어머니 윤하린이 쓴 소설 속 세계다. 내가 그 소설이 다룬 시대를 살았다. 나로 인해 과정은 바뀌었지만 결과가 같은 줄거리가 많았다. 아무리 다른 세계에서의 기억을 간직한 나라도 이미 지나간 시간을 역행하는 것은 불가하니 이제 와 결말이 난 줄거리들을 되돌릴 방법이 없다.

하지만 작가는 이야기를 또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윤하린이 만약 작가라면 그녀를 찾으면 된다. 어느 세계에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지만, 어딘가에 분명 힌트가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머무는 나라는 다른 곳도 아닌 예언의 왕국 리우네아다. 시안이 갖고 있었던 책 '세계'만 해도 리우네아의 국왕이 선물해 준 환상이론 서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알아볼 가치는 충분했다.

"큰 도서관에 가볼 수 있을까요?"

눈이 소복이 쌓인 한겨울이라 도서관에는 사람의 통행이 적을 것이다. 리우네아 입장에서 나는 적이 아니니 사실 딱히 외출을 경계할 필요도 없다. 이런 내 의견을 말하자 시안이 자신과 동행하는 조건으로 수긍했다.

적이 아니라고 해서 할레시온의 황족인 것을 티내고 다녀도 된다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두꺼운 겨울용 로브를 썼다. 눈길을 뚫고 간 곳은 수도에 위치한 신전이었다.

신전은 대부분 도서관을 겸한다. 내가 원하는 서적들을 찾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지혜의 신 에웬을 숭배하는 리우네아에는 신전이 많았다. 이곳은 그 중에서도 중앙신전에 해당했다. 거대한 기둥이 떠받친 건물은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사방으로 울리는 구조여서 말을 되도록 작게 해야 했다.

시안을 따라 천천히 내부를 돌아보았다. 유려한 문양이 양각된 기둥과 벽 장식이 눈에 띄었다. 곳곳에 정교한 조각상도 놓여 있다. 자연광이 적절한 밝기로 들어오도록 교묘하게 배치된 창문 탓에 신성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와 나는 신전 본관 왼쪽에 난 회랑을 지나 도서관에 들어섰다. 적당한 구역을 찾아 책장들 사이를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내가 찾는 정보와 연관이 있는 듯한 제목의 책은 뽑아서 대충 훑어 읽으며 필요성을 판단했다.

그렇게 도서관을 몇 번 들락날락 했지만, 의외로 건질 것이 너무 적었다. 기껏해야 간혹 전생을 기억하는 자가 있다고 기술한 책 정도가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최대였다.

읽지도 듣지도 못했지만 '세계'라는 제목을 가진 그 책은 뭔가 의미심장했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는 일부러 그것만 뒤지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시안은 그게 국왕이 직접 쓴 책이라 열람등급이 아주 높은 구역에 처박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여기가 내가 반역자가 되기 이전 시점의 할레시온이라면 못 뚫을 구역이 없겠지만, 리우네아에서의 나는 외국인에 불과했다. 시안에게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 물었으나 그는 자신도 요즘 레비욘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밝힐 뿐 이렇다 할 방책을 내놓지 않았다.

소득 없이 부질없는 시간만 계속 지나갔다. 결국 나는 도서관에 가는 일을 포기했다.

하다못해 로제, 아니 하일이 시간의 흔적을 지우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심장에 관통상을 입은 스스로를 되살린 전적이 있고, 또다시 사람의 생명을 건드리려면 그에게 남은 기억을 전부 쏟아붓고도 부족하다. 한마디로, 현실성이 낮았다.

얼마 후에는 이거야말로 소용없는 후회에 갇힌 자들이 으레 하는 짓이 아닌가 하는 자각에 이르렀다.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것처럼 같은 자리만 뱅뱅 맴도는 꼴이었다.

나는 태양을 조각한 목걸이를 손에 꼭 쥐고 고개를 떨구었다. 길이 보이지 않아 발을 내딛을 수 없었다.

전세가 더욱 예측하기 어려운 구도로 휘몰아쳤다. 전 대륙을 삼킨 전쟁이 격화되던 나날에, 정말이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칩거하던 내게 누군가 찾아왔다.

할레시온에서는 사형 대상에 속하는 반역자로 규정되었고, 간신히 도망쳐 나와 타국에 숨은 나를 만나려고 방문하는 사람이라니.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시안은 그 방문자를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별장에서 방문자와 마주했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은 끝부분을 묶었고, 감정 한 조각조차 엿보이지 않는 깨끗한 진회색 눈은 곧게 나를 응시했다. 흰 바탕에 금실과 여러 자잘한 보석으로 테를 두르고 장식한 신관복은 한눈에 봐도 고위직의 것이었다.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그대가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인가?"

삼십 대 초반 쯤의 외관을 가진 남자가 부드러이 물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 말했다.

"나는 그대를 언제나 기다렸으나 단 한 번도 만나길 고대한 적 없었다."

문장을 멀쩡히 들었건만 해석은 전혀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의 그 어떤 말보다도 어려웠다.

"허나 결국 운명은 이를 드러내는 법이지."

시안이 조용히 문을 닫고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눈매를 세우고 방문객을 주시했다.

"나는 그대에게 진실을 전하러 왔다."

리우네아의 국왕, 레비욘 가셋수트 리우네아가 나를 칭했다.

"라니아이자 윤이설인 자여."

이십 년 전에 잃어버린 이름으로.

============================ 작품 후기 ============================

이번화를 통해서 확실히 아셨겠지만, 4장은 대체적으로 별 일이 없는 화가 없습니다. 계속 뭔가 터질 것이므로 이쯤에서 정식으로 멘탈 주의보 발령하겠습니다. 예보가 너무 늦지 않았길 바랍니다...

+글쟁이의 중간고사가 오늘 끝났습니다. 13챕터도 이번화에서 끝났어요. 다음 챕터명은 '세계'입니다. 14챕이 진짜 악살다 전체 통틀어서 쓰기 어려웠던 챕터 탑5안에 드는데...(한숨) 사실 신경이 계속 쓰이고 걱정도 많이 됩니다만 일단 지르려고요.

++샤카르의 나이를 1061년 기준 27세에서 24세 정도로 하향하는 안을 검토중입니다. 시대 흐름상 그의 유년기에 안정적 공백이 너무 길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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