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88화 (88/102)

00088 14. 세계 =========================

레비욘은 뭉근하게 웃었다. 얼빠진 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당신, 뭐야. 뭔데 그 이름을 입에 올려?"

기억 저편에 묻어둔 이름이 파헤쳐지자 내 예전 말투도 자연히 튀어나왔다. 내 전생을 아는 자인 이상 존대는 무의미했다.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어서 숨이 찼다. 생각을 정리하려 고개를 내렸다. 곧 방 전체가 붉은 빛의 복잡한 회로로 희미하게 덮여있음을 깨달았다. 놀라서 고개를 도로 들었다. 레비욘이 손을 한 번 휙 휘저었다. 엄청나게 빽빽한 마력 회로가 핏줄이 도드라지듯 순간 선명해졌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내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런 것 같았다.

"이 방 밖으로는 이제 아무것도 오갈 수 없다. 하물며 소리마저도. 그러니 안심해도 좋다."

그는 아마 현 시대에는 감히 대적할 자가 없을 대단한 마법사였다. 차오르는 경외감을 억누르며 본론을 지켰다.

"나는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어."

"성격이 급하군. 나는 레비욘 가셋수트 리우네아, 리우네아의 국왕이다. 그대가 나를 모를 리 없을 텐데 구태여 묻는 이유는 무엇이지?"

"내 질문이 무슨 정보를 원하는지 모르는 척 하지 마. 당장 대답해,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어?"

다그쳐 묻자 레비욘이 짧게 소리내어 웃었다. 새하얀 신관복 자락을 툭툭 쳐 정리하고는 느릿하게 말했다.

"여행가의 이정표고, 비밀의 전달자이며, 세계의 파수꾼인 동시에, 지혜의 신 에웬께 그대에 대한 신언을 들은 자. 이거면 되겠는가?"

"이정표? 전달자? 파수꾼?"

여전히 비상식의 범주였다.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나 찾아 헤메던 세계의 마지막 비밀이 이 자의 손에 있는 것 같았다. 눈매를 날카롭게 세웠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겠는데."

"처음 듣는 소리일 테니 당연하다."

"혹시 인외의 존재?"

"나는 평범한 사람이 결코 알 수 없는 지식을 전달받은 신관이다. 어쨌든 인간이지."

"그래서, 당신의 존재에 그런 의미가 부여된 것도 작가의 의도야?"

"저런. 이곳이 아직도 그저 소설 속 세계 같은가?"

그는 내가 이 세계를 소설 속 세계라고 결론지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방금의 말은 그걸 부정하는 투였다. 점점 미궁 속이다.

내게 갑작스레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참 말을 고르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꽃물 든 하늘'. 내가 전생에 읽었던 책 제목이야. 그 책에는 이 세계의 인물과 동일한 자들이 등장하지. 죽었다가 깨어났더니 나는 그 책 속 세계의 악녀가 되어 있었어. 중간 줄거리가 많이 틀어지긴 했지만 결과는 결국 비슷하게 나왔고. 이렇게 딱딱 들어맞는 상황에서 내가 다른 경우를 의심해 볼 이유가 있나?"

그런데 레비욘의 입이 열리기 전에 내 발 밑에 푸른 마력이 글씨 모양으로 늘어섰다. 주춤 물러섰다. 레비욘이 깔아놓은 마력 회로에 부분적으로 침투한 모양이었다.

- 무슨 짓입니까? 마력장 푸세요.

시안이 말을 전달하려고 마법을 썼다. 레비욘이 흥미롭다는 투로 말했다.

"시안, 못 본 새 부쩍 강해졌구나. 하지만 대공녀와 나눌 말이 있으니 너는 잠시 기다리는 것이 좋겠지."

그의 발언이 시안의 글씨를 지우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 잠시 후 힘에 부쳤는지 시안의 답이 짤막하게 적혔다.

- 그럼 허튼 짓은 마시길.

"걱정은 접어두렴."

상냥하게 끊어낸 레비욘이 다시 내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대가 사전 지식 없이 환생했다는 것은 잘 알겠다. 허면 지금부터 설명하도록 하지."

그가 책상 위에 손을 얹었다. 천천히 손목을 돌리자 그 궤적을 따라 새까만 원이 하나 생겼다. 이어서 검은 원과 일부가 겹치도록 붉은 원을 그린 그는 검지로 검은 원을 짚었다.

"이것을 지금 그대가 살아 숨쉬는 세계라고 가정하겠다."

이어서 붉은 원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가 한때 머물렀던 세계. 그대의 소속이었던 국가가......한국이라고 했던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 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내 심연까지 궤뚫릴 것만 같다. 딱딱하게 그렇노라 했다. 레비욘은 검은 원을 손바닥으로 짚고 비스듬히 섰다.

"한국에서 그대는 이 세계를 책으로 읽었다 했지. 허나 순서가 잘못되었다. 이 세계가 책으로써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이야기를 '누군가'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그는 '누군가'라는 단어를 말하며 손가락을 까딱 움직여 검붉게 겹친 부분을 탁 쳤다.

"......여기가 소설 속 세계가 아니라고?"

한 발 늦게 멍하니 물었다. 상당히 갑작스러운 방문에, 그보다 훨씬 당혹스러운 대화였다. 다짜고짜 찾아와 하는 말이 이런 거라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니, 내가 지금 뭘 듣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로부터 탄생하는 세계란 없다. 세계로부터 탄생하는 이야기는 수없이 많지만. 모든 이야기는 결국 세계를 바탕으로 하지."

레비욘 가셋수트 리우네아, 대신관이자 한 왕국의 주인된 자가 우아하고 나긋하게 말을 내놓았다. 떠듬떠듬 내가 이해한대로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껏 겪은 삶이 전부 다 실시간으로 새로 벌어지는 일이었다는 뜻이야? 소설에 명시된 사건이 아니고?"

"헌 것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완전히 새것이라 단정짓기에도 적절치 않은 면이 있다. 그대의 어머니였던 자가 살아간 시대이기에."

귀를 의심했다. 전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내 어머니였던 자라면 윤하린이다. 여러 정황상 그녀가 '꽃물 든 하늘'의 작가일 거라는 예상은 전부터 했지만......그녀가 이곳에서 살았다니?

나 이전에 이 시대를 겪은 외부인이 있었고, 그 사람이 바로 내 어머니라는 건가? 아니지, 순서가 잘못됐다고 했으니까 외부인이라는 말은 맞지 않다.

그렇다면.

"그대는 기억을 잃지 않은 채로 환생했다. 그것은 그대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고. 즉, 그대 어머니의 시작은 이 세계였다. 그대와는 반대의 경우지."

눈을 크게 떴다. 허무맹랑하지만 소름끼치게 말이 되는 소리였다. 이 세계는 원래부터 독자적으로 존재했고, 여기서 누군가로 태어난 윤하린의 전생이 죽은 뒤 윤하린으로 환생했다면. 그리고 나처럼 전생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면. 그녀가 전생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얼마나 사실에 입각해 썼는지에 따라 내가 바뀌었다고 믿은 줄거리의 신빙성이 달라지겠지.

내가 정의내린 세계가 단숨에 무너졌다. 그의 말대로라면 내가 믿던 모든 것이 틀렸다.

내가 본 소설은 그저 세계의 본래 줄거리를 명시해 둔 가이드라인에 불과했다. 과정은 여기저기 엇나갔으나 돌이켜 보면 궁극적인 결과 자체가 틀린 적은 드물었다. 나는 세이잔 자작가에 화재를 낸 악녀로 몰렸고, 황태손과 약혼을 했고, 소설 속에서 아이린의 조력자로 설정된 황태자파에게 패배했고, 샤카르와 내 가족들이 죽었다.

내가 정해진 운명에 얽매인 건 소설 때문이 아니라 이미 결말이 완성된 세계에 떨어져서였다.

"엄마는 원래 할레시온 사람이었고, 죽어서 한국인으로 환생했고, 잃지 않은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소설을 썼는데 그걸 내가 죽기 직전에 읽었다. 완벽한 시나리오네."

혼잣말에 가깝게 읊조렸다. 레비욘은 내 말이 맞다는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쯤 납득이 갔다. 내가 마지막으로 빌었던 소원은 '엄마를 보고 싶다, 엄마에게 가고 싶다'와 같은 류였다. 엄마는 오래전 별을 보며 내게 말했다. 소망은 때로 기적을 일으킨다고. 이거라면 내가 죽기 직전에 소망한 것이 최악의 형태로 이뤄졌고, 엄마를 다시 만나기 위해 사후 세계가 아닌 엄마의 전생이 있는 세계에서 환생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헛웃음을 삼키고 이어서 질문했다.

"엄마의 전생은 누구였지?"

레비욘은 미심쩍게 입가를 끌어올렸다. 나는 재를 뭉친 듯 진한 회색의 눈이 하나도 웃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나는 그대가 세계의 어떠한 '결과'에도 손을 대지 못하게 된 이후에만 그대 앞에 나타날 수 있다. 그 시점을 정확하게 집어내자면, 대전쟁의 발생과 아이린의 파멸 정도가 되겠군."

"잠깐, 아이린의 파멸? 아이린은 아직 멀쩡하잖아."

설마. 에네아스 백작가가 움직였나? 아연하게 레비욘의 입술이 벌어지는 것을 응시했다.

"소식이 느려 듣지 못했나 보군. 아이린 에네아스이자 아이린 세이잔이었던 자는 이틀 전 사망했다. 사인은 병사라고 하나 에네아스의 속사정을 아는 그대라면 믿지 않겠지."

"타살......에네아스 백작가가 아이린을 죽였구나."

"그렇다. 그들은 국내를 피바다로 만들고, 조용해진 틈을 타 이용 가치를 잃은 눈엣가시를 제거했다."

끔찍했다. 에네아스 백작가가 아이린을 죽여서도 그렇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겠어."

"분석이 매우 빠른 편이군."

"대놓고 힌트를 주는데 어떻게 몰라?"

주먹을 꽉 말아쥐고 노기어린 어조로 씹어뱉었다. 내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윤하린이 아이린이었어."

도저히 못 믿겠어서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만난 적이 있는 아이린은 내 어머니로 환생하기 이전의 윤하린이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소설의 작가가 될 사람을 만났다. 시간선은 꼬였고, 의문은 늘어났다. 레비욘이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과정은 변화하나 결과는 일정하다. 아이린이 그대가 개입하기 이전과 다름없이 불행한 결말을 맞고, 같은 선택을 내리는 것처럼."

"그녀가 한 번 지나쳐 가며 완결된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 아이린이 원래도 끝이 좋지 않았다는 건 무슨 말이야? 내가 본 소설에서 그녀는 라인하르트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는데."

"작가가 글을 쓸 때는 모든 것이 그의 재량이니까. 예를 들자면, 작가는 그가 창조한 세계관에 한해서는 꽃을 돌이라고 설정할 수도 있다."

"......아이린이 여주인공이고 이야기 전체가 그녀 위주로 돌아간다거나, 실제로 만나 보니 사랑 따위 모르는 냉혈한인 프리드리히 스카일러가 서브 남주인공이라거나. 이런 것들은 전부 작가가 자신의 전생을 각색해서 쓴 탓이라는 거지?"

어린 시절에 힘을 모으고 남주인공들에게 접근했던 것은 여주인공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고 싶어서였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처음부터 여주인공이니 세계의 주인이니 하는 것들은 없었으니까. 다 허상이었다. 내 등장으로 바꿨다고 믿었던 이야기마저 실은 본래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글로써 만들어진 인형이라고 여겼던 이 세계의 사람들만이 끝내 진실이었다.

레비욘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작가의 시선에서 결국 편파는 완벽히 배제할 수 없으니."

그래서 편파가 사라진 진짜 세계에 떨어진 나는 세계의 실상을 보았고, 눈앞에서 엄마를 놓쳤던 것이다.

"아이린은, 원래 어떻게 죽었어?"

목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억지로 삼켰다. 죽음을 기점으로 세계와 세계를 오고 가야 했던 우리는 잠시 모녀 사이로 묶였고, 각자의 비극에 잠겼다. 환생하고 나서도 윤하린은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다. 나도 환생했지만 지금 희망 한 자락 없는 세상에 있고.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지금 전쟁을 벌이는 망국의 왕세손, 시안 리델라 에온은 '그 때'도 이 즈음 군대를 일으켰다. 아이린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리우네아의 국경과 가까운 세이잔 자작가의 영지에 내려가 있었고, 그 땅이 최초로 습격을 받아 정복당하며 포로가 되었다. 시안은 할레시온에게 충격을 주려 본보기로 그녀를 처형했다."

정말이지 어쩌다가.

소설에 나오지 않는 새로운 캐릭터인 줄 알았던 시안은 사실 한 시대를 끝장내는 인물이었다. 윤하린이 '아이린'의 해피 엔딩을 바라고 임의로 삭제한 바람의 마법사가, 지금 저 문 밖에 있다.

나는 아주 복잡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후련한 슬픔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서러운 분노라고 해야 할지. 둘 다인가.

창 밖으로 눈이 소리를 죽이고 내린다. 흐린 빛을 등지고 선 레비욘 가셋수트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의 은색 머리카락이 허리 뒤로 길게 늘어져 있다. 그는 차근히 말했다.

"아이린은 죽어가며 어떤 소원을 빌었고, 그것이 다른 세계에서의 환생으로써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온전한 형태로 이뤄진 것은 분명 아닐 테지. 언제나 하나의 기적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기 마련이니."

레비욘이 손 위에 나무 뿌리처럼 얽힌 수식을 띄웠다.

"마법이 그렇듯이."

우수에 찬 미소가 그에게는 꽤나 잘 어울렸다.

============================ 작품 후기 ============================

독자님들 모두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저는 연휴 동안 열심히 퇴고를...ㅠㅠ

+활기찬 후기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챕터 분위기상 자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만은 해제할래요.

왜냐하면 추석이니까(??)

++흐흑 후기를 위해서라도 차기작은 반드시 예쁘고 아기자기한 걸로 쓰고 말겠어요...!(라고 맨날 다짐하지만 현실은¿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이 후기 몇 분이나 보실까요? 확인해보고 싶군요 보신 분은 추천 한 번씩 눌러주세요(?)

++++앗 갑자기 자정감성이 넘쳐나는 관계로 전 이만 뒤쪽 편수들 다듬으러 가보겠습니다 (뜬금×인 건 저도 알고 있읍니다 아 이 후기 너무 노답인데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킥 하고 삭제할 확률 200%인 것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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