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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89화 (89/102)

00089 14. 세계 =========================

나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소개했던 레비욘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인간이고서야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임을 상기했다. 이런 거대한 비밀을 나 같은 '여행가'에게 전달하기 위해 홀로 간직하고 있었다면 남들과는 다른 점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를 일반적인 의미의 '사람'으로는 보지 않기로 했다. 곧장 물었다.

"소망은, 나와 엄마에게만 허용된 기적이었어?"

"죽음을 전제로 모두에게 열린 길이다. 하물며 과도한 비밀을 알고 있는 내게도 죽음 이후의 미지를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갈지 결정할 권리는 있지. 그것이 의무는 아니더라도."

"엄마나 나처럼 소망이 환생의 형태로 이루어진 사람들 중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이다. 다만 전생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존재한 기록이 세계 곳곳에 남았으니 아예 없지는 않을 듯한데."

레비욘은 이어 자신을 일컬어 망각하지 않는 자라고 했다. 그렇기에 세계가 내 등장으로 인해 한 번 뒤집어져도 그 전후 상황을 전부 기억한다고.

나직하게 혼잣말했다.

"죽음 직전에 소망을 전부 쓰는 것도 아니고, 소망 때문에 환생을 하더라도 전생의 기억을 망각하지 않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건가."

레비욘의 설명으로 인해 사실 관계가 확실해졌다. 특별한 마법적 능력이 있든 없든 죽음의 순간 누구나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 나의 엄마 윤하린과 내가 이미 한 번씩 쓴 그것은, 소망이었다.

소망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고, 무너뜨렸다.

말이 잠시 끊겼다. 나는 그 틈을 타 방금까지의 대화를 곱씹었다. 너무 엄청난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와서 정리가 필요했다.

생각지도 못했지만, 엄마가 비밀의 핵심이었다. 이 세계의 여러 언어에 지구의 것이 섞여 있길래 틀림없이 엄마가 쓴 소설 속 세계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원래 멀쩡하게 존재하던 세계고 원형과 내가  끼어든 뒤의 모습으로 갈라진 것 뿐이라니.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떠오른 김에 언어에 관해 물어보았다. 레비욘도 그것에 관해서는 추측성 답변을 내놓았다. 단지 두 세계의 여러 조건이나 사람들의 생각 수준이 비슷해서 만드는 과정이 거기서 거기였던 게 아닐까 하고. 그러고 보면 이 세계에는 익숙한 언어가 많지만 활용하는 방법이 엄연히 달랐다. 할레시온과 달리 미국에서는 회오리감자를 트위스테이토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언어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감성의 옷차림이나 서양적 식습관, 그 밖의 문화도 이런 맥락인 것 같았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세상을 구축한다. 그렇기에 사람은 곧 세계다. 그럴 듯한 말이지 않은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싶을 때 레비욘이 가볍게 말했다. 나는 눈만 들어 그를 응시하며 침묵을 지켰다.

아이린의 세계와, 라니아로서의 나의 세계는 서로 같으나 다르다. 어쩌면 내가 자처한 비극이었다.

"말이 없군. 허면 외람된 소리를 하나 해 볼까. 아이린이라는 이름의 여행자는 소망을 통해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로 환생했기에 내 담당이 아니고, 또한 이 세계에 비정상적인 변동을 가하지는 않았기에 이렇다 할 영향도 주고받지 않았다. 허나 그대는 달라. 그대가 내 권역에 들어와 망가뜨린 것은 고스란히 타격이 되어 내 명운을 결정지으니 말이다."

"나를 원망하는 소린가, 그거."

얼마 전 시안에게 받았던 질문을, 나는 레비욘에게 했다. 나와 그의 말씨에는 어느새부턴가 음의 고저가 없었다.

"그저, 인간의 삶을 아직 버리지 못한 죄악 많은 마법사의 넋두리라고 해 두겠다. 그대 이제 내게서 얻을 정보는 얼추 들은 것 같군. 이만 대화를 마무리하는 게 어떤가?"

그는 권유조로 말을 맺고, 잇새로 조용히 생소한 문장을 중얼였다. 내가 아는 언어는 아니었다. 일종의 주문이었는지 그가 중얼임을 멈추자마자 붉은 빛의 마력장이 산산히 깨져나갔다. 그 즉시 문이 벌컥 열렸다. 시안이었다. 여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투였다.

"유익한 대화, 잘 나누셨는지 모르겠군요."

시안이 조금 싸늘하다 싶을 정도의 어조로 말을 건넸다. 레비욘은 짧게 웃고 손을 살짝 그쪽으로 뻗었다.

"아무렴."

시안이 옆에 끼고 있던 책이 단박에 레비욘의 손에 들어왔다. 특별한 존재라서인지 그는 구현하는 능력이 남달랐다. 시안이 불쾌한 양 옅게 인상을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비욘은 책을 펼쳤다.

"'주황의 파도'군. 내가 예전에 가명으로 쓴 책."

"당신이 렘사 이시프라고?"

놀라서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레비욘이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뜻을 알 수 없는 문장만 가득하다 했습니다. 과연 전하의 작품이었군요."

시안이 신랄한 감상평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내놓았다. 레비욘은 호탕하게 소리내어 웃으며 일어나 발걸음을 떼었다. 그 작은 거동만으로 긴장감이 형성됐다.

"내 덕에 운 좋게 얻은 실마리를 그리 표현해선 안 되지, 에온의 왕세손."

말하는 본새로 보아 주황의 파도 역시 예언서나 다름없는 속뜻을 담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하께서 굳이 그런 식으로 언질 주시지 않아도 알아서 깨달은 것이 많습니다. 저를 깔보지 마세요."

"어릴 적 바람 정원에 갇힌 유순했던 왕손이 시대의 얼음 열쇠가 될 줄이야. 역시 세계는 안전하고 볼 일이군. 그렇지 않은가, 할레시온의 대공녀?"

"말을 알아듣기 쉽게 할 생각은 여전히 없지, 당신?"

떨리는 숨을 겨우 진정시키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아직 일어나지는 못하겠다. 그런 내게 시안이 다가왔다. 말없이 손만 내민다. 나도 가만히 손만 잡았다. 보드랍고 여린 손의 감촉이,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어느 투박한 손과 확연히 대비돼서. 또 눈앞이 흐려지려 했다. 억지로 참아내고 시안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레비욘이 그런 나를 인공적인 애상을 담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대로 뒤돌아 나가려 하기에 재빨리 붙잡았다.

"대신전 도서관에 '세계'가 있다면, 그 책에 내가 접근하게끔 허가를 내려줘. 한 번은 읽고 싶어."

"......내일, 도서관 25구역에서 만나지. 시안, 너도 오고 싶으면 와도 괜찮단다."

"제가 가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군요. 내일 시간 맞춰 깨워드릴 테니 이번에는 혼자 다녀오세요, 라니아."

"그러죠."

"하하, 날 싫어하는 건 여전한가. 할 수 없지."

나는 시안이 그 흔한 미소를 여태 띄우지 않았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예전에 레비욘이 정에 휩쓸리는 결정을 내리자 시안은 교류를 끊었다 했었지. 나중에서야 정치적인 목적으로 연락을 재개했고. 지금까지의 인상으로만 봐선 레비욘은 감정이라는 것에 전혀 휩쓸리지 않을 사람 같았는데, 다른 면모도 가지고 있던 거였나.

"전하의 왕국을 무너뜨리려던 반역자를 살려주신 것으로도 모자라 동부 신전의 신관으로 삼으신 처사는 당시의 제가 납득하기에 무리가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별로 상관하지 않지만, 그 때의 저는 왕국이라는 것에 상당히 집착하고 있었으니까요. 물론 그와는 별개로 지금 제가 두는 거리는 전하의 본질에서 느낀 막연함 때문입니다."

"그래, 나는 네가 그랬을 줄 알았지. 지나치게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것은 사실이니. 그 신관 자리가 실상은 귀양지와 다름없게 잘 꾸며진 무대였음을 이제 와 설명해봤자 의미 없겠지만, 알아는 두렴. 하지만 내게 느낀 막연함이란 것에는 이런 식으로 변명할 말도 없구나."

"......전쟁 중이니 왕국민 전체가 전하의 지시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속히 돌아가시길."

시안은 앞선 말을 싹 무시하고 딴 소리를 했다.

"왕국민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책사들은 그럴 듯 하군. 그럼 가 볼까."

개의치 않고, 레비욘이 제 발 밑에 붉은 바탕에 새까만 기운이 도는 마법진을 구현했다. 나는 찰나의 강한 빛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꺼풀을 들어올렸을 때 레비욘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시안이 염려를 담아 물었다. 따뜻한 겨울용 외출복과 장갑, 검은 로브를 챙겨입은 나는 담담히 말했다.

"당신이 왜 나를 위하는지 아직도 잘 감이 안 잡히지만. 괜찮아요."

숨을 뱉듯 웃는 시안의 얼굴을 흘끔 들여다보았다. 이제 막 쌓인 흰 눈처럼 단정하다. 예전에는 알 수 없다 여겼던 표정이 이제는 그저 슬퍼 보여서, 더욱 외면하게 됐다.

"다녀올게요."

내가 루 할레시온 저택을 나서며 으레 하던 말이었다.

밖은 추웠다. 1063년,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해가 열린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 겨울의 한복판이었다. 눈이 덜 녹은 길을 걸으며 이따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리게 푸르렀다. 겨울 특유의 색감이 있었다. 무너지기 직전의 빙하 같은.

감정 회로가 고장난 건지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난다. 무덤덤하게 장갑으로 눈가를 훔치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오묘한 분위기의 대신전을 지나쳐 도서관에 도착했다. 25구역으로 가는 것은 사서의 안내를 받아 해결했다. 다행히 그 구역 자체는 일반인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거대한 아치형 문을 지나자 뜬금없이 회랑과 방의 중간쯤 되는 양식의 길쭉한 방이 나타났다. 긴 양쪽 벽에는 여러 초상화가 늘어서 있었다. 나는 그 방의 끝에 정자세로 선 레비욘을 발견했다.

"이 문을 넘어가면 신관 외 출입이 금지된 26구역이 나온다. 그대가 찾던 것이 보관되어 있지."

레비욘의 뒤에서 나무로 된 큰 문이 저절로 열렸다. 아마 그가 마법을 쓴 것이리라. 나는 시안과 로제 덕에 마법에 적응한 뒤였기에 동요하지 않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빽빽한 책장의 향연이 눈앞에 펼쳐졌다. 장서가 족히 수만 권은 될 듯했다. 마른 책 냄새가 났다. 극도로 고요한 26구역의 책장 사이로, 나와 그는 걸어들어갔다.

"'라니아'는 어떻게 됐을까?"

기묘한 고요가 깔린 방 안을 천천히 누비며 질문했다. 내가 등장하기 이전의, 아이린의 묘사에 따르면 완벽한 악녀였던 그 라니아는 어디로 갔기에 흔적조차 없는지가 예전부터 의문이었다. 멀쩡히 살던 라니아의 몸에 중간에 빙의한 것도 아니고 아예 그녀의 이름으로 태어났는데, 이걸 뭐라 받아들이면 좋을지.

"그대로 인해 희생당한 것이지. 처음부터 없던 사람이 되어서."

"그게 가능해?"

"완전함으로부터 멀어지고 만 세계에 자비란 없다."

레비욘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단언했다. 나는 그의 은하수 같은 머리칼을 뜻 없이 직시하며 계속 뒤를 쫓았다.

============================ 작품 후기 ============================

세ㅔㅔ상에 여러분 제가 난생 처음으로 서평을 받았습니다! 뮤토리시오 님께서 정성 가득한 고퀄리티 서평을 써주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ㅠㅠS2 칭찬이 과분할 정도여서 쑥쓰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렇네요. 칭찬에 걸맞는 소설이 되도록 열심히 퇴고하겠습니다. 사실 앞 편수들 보고 지금 약간 벙쪄있긴 한데(과거의 룬 주거라) 어떻게든 더 좋게 만들어 보려고요. 아 지금 너무 기쁜데 위에 있는 본문 내용이 너무 심각해서 더 날뛰지 못하는 점 정말 유감이군요......여러분 모두 뮤토리시오 님의 필력폭발 서평을 보러 갑시다 지금 pc버전 메인 화면의 최신 서평에 올라와있어요

+저번 편 추천수가 왜 저런가 했더니 제가 정신없이 쓴 후기의 내용 때문이었군요ㅋㅋ...생각보다 많이 보고 계셔서 놀랐어요. 전 제가 혼자 떠드는 줄 알았는데...약간 설레네요(??

++역시나 오늘도 자정감성에 절어버린 엉망진창 후기입니다...죄송합니다ㅋㅋㅋ큐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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