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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90화 (90/102)

00090 14. 세계 =========================

"1061년에 내가 한 예언을 혹시 봤나?"

도중에 레비욘이 서론 없이 곧장 물었다.

"마침내 너의 비극이 그들의 비극이 될 때. 모든 명운은 거짓이 되고, 모든 시간은 기억이 되리라. 이거 아닌가?"

나는 그 예언의 전문을 쉽게 읊었다. 레비욘이 낮게 웃음지으며 느긋하게 한 발 앞으로 딛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웠군. 혹시 그 뜻을 알 것 같은가?"

"......대충은."

그 예언이 내 상념에 큰 짐을 얹었다.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선택을 한 가지 방향으로 몰고 갈 만큼의 힘이 그 예언에 있었으니까. 레비욘은 내 속내를 다 궤뚫어봤는지 굳이 그걸 언급했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대와 연관이 있을 법한 예언이 20년 전 것으로 하나 더 있는데, 그 문장도 외우고 있나?"

"거기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예언서를 볼 때 가장 최근의 것에만 집중했어서."

"허면 내가 지금 말해주지."

다음 줄의 책장으로 가며 레비욘이 조금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차분한 음색으로 뇌까렸다.

"개기 일식이 일어난다. 스무 개의 종말이 지나가고 나면 여행자의 파도가 시간을 가른다."

내가 라니아로서 태어난 해에 내려진 예언이, 짜맞춘 양 나를 가리켰다. 사뿐히 걸어 레비욘의 뒤를 따르며 무감각하게 감상평을 남겼다.

"당신에게 이런 예언을 속삭이는 신은, 내 저주가 그렇게도 듣고 싶었나보지?"

"7왕국이 모시는 신이란 본래 대지와 마력의 초월적인 의지를 일컫는 바, 그것들 자체가 그대를 싫어할 까닭은 없다. 그저 그대와 주변인의 선택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그대를 짓눌렀을 뿐이지."

유려하게 말하고, 그는 서고 깊숙한 곳으로 나를 인도했다.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자의 그림자를 밟으며 나는 천장으로 시선을 올렸다. 리우네아 어로 추정되는 글씨가 부적처럼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주위에 묘한 아우라가 도는 것으로 보아 마법적 처리가 된 글자다. 7왕국다웠다.

"당신은 이 예언들을 왜 내가 접하게끔 하는 거야? 당신이 그랬잖아, 나 때문에 또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면 당신이 직격타를 맞는다고."

고개를 든 채로 물음을 던졌다.

"그것이 나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책무를 다하지 못한 파수꾼은 소멸하는데, 나는 아직 소멸을 바라지 않는다. 먼 후일, 그대나 다른 자가 몇 번이고 문을 열고 나서야 스스로 책무를 유기하고 죽음을 맞을 생각이다."

"인생 계획이 구체적이네."

"무료한 여가 시간이면 때때로 삶을 떠올리게 되다 보니 그렇게 되었군."

그 점은 나와 비슷했다. 단, 나는 그게 나중에 가서는 머리 아파서 아예 여가 시간을 여러 활동으로 가득 채웠다. 독서라던가, 피아노 치기라던가, 정원 가꾸기라던가 하는 것들로.

"당신의 진짜 시작은 몇 년 전이었지? 당신이 기억하는 모든 시간을 다 고려한다면 말이야."

약간 효용성 없지만 그냥 궁금한 것도 한 번 물어봤다. 초월에 가까운 존재를 앞으로 더 만날 확률은 영에 가까워서였다.

"그런 생소한 질문에는 계산할 틈을 주면 좋겠군."

"제대로 세어본 적이 없구나."

잔잔하게 단정지었다. 레비욘은 잠시 침묵했다. 가장 안쪽의 책장 앞에서 멈춰서고는, 이윽고 대답했다.

"대략 백 년."

이미 한 번 환생한 나조차 상상도 못할 아득한 숫자였다.

"그러고도 아직 죽을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을 보면, 인간으로 태어난 자가 얼마나 아득한 미련 속에 사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그 대목에서 이 주제로 대화를 잇길 단념했다.

옆에서 목도한 그의 잿빛 눈은 여전히 변함없는 공허였다. 그는 팔을 위로 뻗어 책장에서 커다란 책 다섯 권을 꺼냈다. 제국어로 번역된 '세계'였다. 책장에는 여러 부 복제된 그것이 가득 꽂혀 있었다.

"이 책, 실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전대 파수꾼, 또 그 전대의 파수꾼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왔지. 여행자들을 위해서."

"당신도 그럼 전체 내용을 다 알지는 못해?"

"아주 드물게 전문이 한꺼번에 나타날 때가 있다. 나와 시안은 그런 경우를 겪은 경험 덕에 어느 정도의 내용은 기억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기본 골자는 마법이지?"

"마법은 맞지만,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수준이라 해제하는 것은 나를 포함한 마법사 수십이 시도해서 전부 실패했다."

나와 그는 마지막 책장 너머의 공간에 마련된 테이블로 갔다. 푹신한 의자에 그와 마주앉아 책등을 손가락으로 쓸며, 나는 냉소했다.

"백 년간 나 같은 여행자에게 이걸 보여준 적이 없구나, 당신?"

"그렇다. 파수꾼조차 평생에 두어 번 만날까 말까 한 것이 기억을 갖춘 환생자니까."

"그래서인가? 당신은 '세계'가 여행자를 위해 전해지는 책이라면서도 여행자가 어떻게 이다지로 불편한 책을 결정적일 때 읽을 수 있는지는 모르네."

"무슨 뜻이지?"

"'변화한 과정' 중 하나가 내게 장난질을 쳤어."

나는 천천히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것을 끌렀다. 칼집 위로 살짝 보이는 새까만 검신을 눈에 담은 레비욘의 표정이 싹 굳었다.

"엘비올리스의 보물이라지? 이 단검."

"입수한 경로가 어떻게 되지?"

"어째서인지 엘비올리스의 품을 벗어나 샤카르의 정보상 창고에 흘러들었고, 샤카르가 주워서 정체를 알아내고 소지하다가. 그가, 죽던 날에. 내게로 넘어왔어."

떨리는 입술을 중간에 살짝 깨물어 정상으로 되돌리고 마저 말했다. 레비욘은 약간 길게 숨을 뱉었다.

셰룩은 마법을 파훼하는 단검이다. 반응을 보니 그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조곤하게 단어들을 나열했다.

"당신이 내가 이걸 당장에 완독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어. 책무니 뭐니 하면서 혼자서만 기억하게 될 새로운 시간을 슬쩍 회피하려 했는지도 불확실해. 하지만 어쨌든, 나는 나를 주도할 거야. 나도 이제 그만 아이린의 발자국에서 벗어날 때잖아, 안 그래?"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레비욘은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참 뻔뻔한 자다. 나는 검을 두 손으로 꽉 쥐고 책을 향해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았다.

퍽!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을 게 분명한데도 셰룩은 다섯 권의 책을 전부 뚫었다. 내가 의아해 하는 사이 셰룩이 수많은 새까만 깃털로 부서져 흩날렸다. 이내 반짝이며 녹아내려 자취를 감췄다. 정가운데가 찢겼던 책 역시 빛과 함께 순식간에 원상복귀됐다.

"......요란하군."

한참 후에야 레비욘이 먼저 소리를 냈다. 나는 책을 물끄럼하게 내려다보다가, 허전해진 손을 툭툭 털어내고 말없이 1권을 펼쳤다. 찬란한 금빛 글자가 드러났다. 해제는 성공했다. 길쭉한 손가락으로 종이를 이리저리 살피던 레비욘이 일러주었다.

"마법 해제를 시도할 때의 경험대로라면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다. 책이 물리적으로 손상되면 얼마 후 산산히 흩어지는 구조라."

나는 즉시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심오하고 의미심장한 문장이 넘쳐났다. 가만 보니 레비욘, 그러니까 렘사 이시프의 작품 '주황의 파도'마냥 같은 말을 수백 수천 장에 걸쳐 하고 있었다.

'세계'는 나로 하여금 단 하나의 결정을 내리도록 끊임없이 재촉하고 있었다.

- 이 세계는 그의 것이고, 소망은 세계를 뒤집으리라. 두고 온 세계는 잊혀지되 소멸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는 두고 온 세계에 뿌리를 내리리라. 시작과 끝은 그의 선택이며 인과이고 죗값이어라.

예전에 시안이 내게 읽어주려다 실패한 문장도 찾아냈다. 공교롭게도 저게 거의 핵심이었다. 나는 빠르게 종이를 넘겼다.

짧은 책은 아니었지만 글씨가 꽤 큰 데다 동일한 내용 투성이라 읽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레비욘은 참을성 있게 내가 독서를 마치기를 기다려 주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심호흡을 몇 번 했더니 책이 모래가 되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아슬했다.

"결정은 온전히 그대의 몫이다."

한숨 섞어 온건하게 건넨 말을 나는 서늘하게 내쳤다.

"날 그런 말로 기만하지 마."

"기만이라기보단,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발언이었을 뿐이다."

"인간인 척 하지도 말고."

"이런. 할레시온 황족의 말본새는 본디 이 지경인가?"

"당신이 내가 욕하는 걸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적응을 못한 거겠지."

레비욘은 영원히 내가 어떤 지옥에 있었는지 모를 테지. 이해해 주고 보듬어 줄 사람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만 이런 자 앞에서 오래 버티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

용건은 마쳤다. 나는 이만 일어났다. 더는 놀랄 것이 없어서 내 표정은 깔끔했다. 레비욘이 모래 위에 손을 얹고 마법을 써서 말끔히 치우는 것까지 보고 몸을 돌렸다.

"한 가지 당부하지."

마지막으로 레비욘이 내게 말했다.

"세계는 잊혀지되 소멸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걸어나갔다.

도서관 로비에는 시안이 있었다. 스스로를 파괴하고 종래에는 시대마저 뒤튼 사람이, 무엇이 그리도 걸렸는지 내 곁을 맴돈다.

조금 알 듯도 하다. 그가 나를 비롯한 것들을 나락으로 이끌며 가졌을 자신에 대한 몰이해와 목표의 상실. 그게 시안 리델라 에온을 내게서 떠나지 못하게 붙잡았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내가 그를 버릴 차례인가.

"시안."

책에 집중하고 있던 그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태양빛 목걸이를 무의식적으로 만지작거렸다.

선택은 언제나 나의 몫이다.

내 손아귀에서 태양은 죽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14챕 세계, 끝입니다. 다음 편부터는 15챕, 밤의 장막 입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앞 편수들 퇴고 중인데 생각보다 군더더기나 비문이 너무 많아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습니다...퇴고를 통해 최대한 개선할 수 있게끔 노력하겠습니다...과거의 룬 너무했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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