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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91화 (91/102)

00091 15. 밤의 장막 =========================

어둠 속에서는 작은 빛도 찬란하다. 그러나 단 하나 남은 빛마저 꺼지면 어둠은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는 공포가 된다. 나는 매일 그 사실을 절감했다.

그가 보고 싶었다. 새벽 세 시의 숨결에 손 닿았던 그 날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 목걸이, 평생 걸고 다녀 줘.'

그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걸렸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놓고선 전혀 아는 게 없는 사람인 양 웃으면서 내 옆에 머물렀던 거다. 떠날 거라면 그렇게 찬란하게 웃지는 말았어야지. 위험한 것을 알았으면 피했어야지.

사랑한다 말하고 내 품에서 숨을 멈추지는 말았어야지.

잔인한 사람.

나는 한 번도 그에게 사랑한다 하지 못했는데. 보고 싶었다고도, 당신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즐겁다고도 해주지 못했는데.

왜 슬픔은 사랑을 동반하고서야 슬픔인지.

깊은 밤이지만, 더는 잠을 이루지 못하겠다. 적막한 공기를 헤치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머리를 단박에 식힐 만큼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엉망으로 흉터가 남은 손목이 시큰거렸다. 하기사 그렇게 난도질을 했는데 멀쩡하게 회복될 리가 없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젠 내가 살아있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뭔가 크게 헛돌고 만 기분이었다.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게 된 엄마 윤하린이 앞서 걸어간 길에 말려들어 '라니아'를 멸하고 소중한 사람들의 손을 놓쳐가며, 나는 여기까지 왔다.

끝간 데 없이 외로웠다. 이 감정, 다시 태어난 후로는 별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아득하고 막막했다.

목이 조이듯 메였다. 창틀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별빛이 아주 여리게 손끝을 적셨다. 오늘은 그들의 위로도 소용이 없었다. 견딜 수 있는 한도를 넘은 상황에서 사람은 경우를 가리지 않고 울게 된다.

정말 간절하게 되돌리고 싶었다. 시간을 거슬러서도 바꾸지 못함을 알지만, 그럼에도 바라고 소망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답답함을 넘어서서 증오스러웠다. 숨이 막힌다.

나는 또다시 까마득히 먼 곳에 자리한 미래의 모습을 예측해야 했다.

밤의 장막이 드리운 하늘에, 오직 별빛만이.

별빛만이, 산산이 부서졌다.

***

시안은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었다. 맞은편에 앉은 나 역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전쟁터로 가시겠다는 겁니까?"

"나를 끝까지 이용하기 위해 여지껏 살려뒀다면서요. 그 말 지켜요."

담담하게 말했다. 시안이 조금 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라니아. 그건 제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설령 홧김에 뱉은 말이었대도, 지켜줘요. 부탁할게요."

나는 그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그에게 있어서 최악일 수도, 최선일 수도 있는 이 결정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시안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당혹감을 내비쳤다. 말을 고르고 또 고르다가, 두서없이 호소했다.

"제가, 제가 잊어버리고 만 것이 있습니다. 유일한 기쁨이었을지도 모를 기억을, 다수의 타인을 위한 구심점으로 굳건히 자리하고자 지워버렸던 것 같습니다."

과연 그는 내가 굳이 세계의 비밀을 마구 털어놓지 않아도 이미 꽤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결단을 막아설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 그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먼 거리를 뛰어와 겨우 소식을 전하는 전령처럼, 시안은 힘겹게 말했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후회가 됩니다."

끝맺음이 사정없이 떨렸다. 안쓰러울 정도로 처연했다.

"일전에 물으셨던 것도 지금 대답해드리겠습니다. 그대에 대한 하일의 기억은, 우리의 기억을 지우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만 해요. 사라진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아요."

일부러 더 냉정하게 거부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대로 미래를 조종할 수만 있다면 망설임 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붙잡는 손을 뿌리쳤다.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잘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끔찍하게 이기적인 사람이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비하하며 합리화했다.

"......그대는 결국."

한참 후에야 시안이 무너지듯 말했다.

"제 선택에 징벌을 내리시는군요."

시선을 떨군다.

나와 그는 다음 말, 또 그 다음 말까지 눌러담느라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미 서로는 무언이 된 것들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내일 모레 쯤에 떠날까요?"

다시 긴 뜸을 들이고 나서야 건조하게 물었다. 시안이 이제까지의 어떤 것보다도 슬픈 눈을 하고, 목소리만은 담담하게 내었다.

"채비하겠습니다."

저항 없는 체념이 때로는 더 처절하다.

***

출국은 레비욘이 손을 좀 써 주었다. 덕분에 비교적 쉽고 빠른 길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시안은 마음 정리를 하려는지 가는 내내 내게 거의 말을 걸지 않았다. 나 역시 구태여 그를 흔들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쏟아질 듯 반짝이는 은하수를 감상하며 냉막한 밤을 건넜다. 푸르다 싶을 만큼 창백한 시안의 얼굴을 이따금 곁눈질로 살피면서.

엘피샤와 하일이 있는 전쟁터 한복판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날의 한밤중이었다. 시안이 바람을 막아주기는 했지만 온도 자체가 낮았다. 나는 마중 나온 그들과 함께 곧장 본거지 안으로 들어갔다.

등불이 아늑하게 방 안을 밝혔다. 칼바람이 문을 때리는 소리가 낮고 둔하게 울렸다. 그들과 나는 투박한 책상에 둘러앉았다. 가장 먼저 하일이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꽤나 오랜만이네, 대공녀. 그다지 잘 지낸 얼굴은 아닌 것 같으니까, 그간 잘 지냈냐는 인사치레는 생략할게."

"눈치가 빠르군요. 맞아요. 난 지금 최악을 걷고 있어서 전혀 안녕하지 않아요. 참, 그러는 당신도 괜찮은 상황은 아닌 걸로 아는데."

"적군이 자색 머리의 마법사가 이 쪽의 최대 전력이라는 걸 알아버려서 고생이 많아. 하여간 인기가 좀 많아야지."

하일이 태평하게 으스대다가 그만 상처 부위를 건드렸는지 인상을 팍 썼다. 나는 그를 가만 관찰하다가 엘피샤에게 슬쩍 속삭였다.

"그새 능력을 또 썼나요? 말씨가 전보다 더 어려진 것 같은데요."

"......네. 조금 과했던 모양이에요."

그렇게나 당해놓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마법을 남용한 하일을, 나는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는 그가 미련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그냥 다 포기하고 막 사는 건지 모르겠다.

세계는 누구 하나가 없어지거나 끼어든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떠난 자의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고, 풍문조차 닿지 못할 뿐이다. 그렇기에 하일의 미래가 곧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이렇게 대책 없이 구는 게 탐탁찮았다.

"부상은 잘 낫고 있나요?"

"아마도."

"확신이 없나 보군요."

"우리 중에 치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으니까 회복 속도는 일반인과 똑같아."

그래도 자기 상처를 시간의 흔적을 지우는 능력으로 치료하려 들지는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그의 의식은 정말 심각한 상태가 되었으리라.

이어서 제국 탈출 도중 다쳤던 엘피샤의 안부를 묻고, 이제 괜찮다는 답을 들었다. 시안은 그 사이 뒤에 굳건하게 버티고 선 베르크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였지만, 재회는 나쁘지 않았다. 내 주위에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들이라 그런가.

"최근 전략적 요충지에서 격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길 차지하게 되면 에온과 프리제 땅을 한꺼번에 할레시온으로부터 분리하게 될 가능성이 상당히 커져서, 어느 쪽도 쉽사리 양보하지 못하지요. 병력의 열세로 인해 최근 들어서는 저희가 밀리는 실정이지만요."

엘피샤가 정세를 간단히 축약해 설명했다. 나는 속으로 이들이 목표했던 바를 이룰 확률이 얼마나 될지 계산했다. 레비욘이 그러길 소설 속, 아니 원래 세계에서는 왕국 재건이 성공을 거뒀다고 했다. 그러니 이 팽팽한 쟁탈전에서 승리한다면 현재의 그들에게도 가능성은 충분하다.

"만약 승전한다면 계속 밀고 나가서 할레시온을 멸망시킬 생각인가요?"

고저 없는 어조로 질문했다. 엘피샤는 약간 놀란 기색을 보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국 내부를 지속적으로 흔들 요소가 없기에 그러기는 힘들어요. 저희의 목표는 왕국 재건, 그 이상은 후일 다시 논의할 일입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였다.

할레시온은 수십 년 전 정복한 왕국 두 개분의 땅이 한꺼번에 떼일 위기이니 무슨 수를 써서든 지키려 들 게 뻔하다. 부상당한 하일과, 실질적인 공격 마법은 쓸 줄 모르는 엘피샤, 마법사가 아닌 베르크가 한계까지 버텼기에 왕국군은 그 할레시온을 상대로 지금껏 살아남았다. 내가 보기엔 기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제 시안이 도착했으니 전세가 바뀔 것이다. 상황은 더 봐야 알겠지만, 밀리기 시작한 제국군이 어떻게 나올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여기서 관건은 반역자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이라는 변수다.

가만히 헤아렸다. 내 최후를 어떻게 장식하면 좋을지에 대하여.

"이제 큰 전력이 될 바람의 마법사가 왔으니 판세를 바꿀 수 있겠네요?"

아무렇지 않게 입을 놀리는 나를 이 자리의 모두가 주시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렇겠지? 시안은 이미 할레시온 쪽에 얼굴이 팔릴 대로 팔린 마법사라 나보다 고충이 크겠지만."

하일이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시안에게도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고 했었나. 그래봤자 제국의 누가 달려들어도 잡을 수 없을 테지만. 나는 시안이 간단하게 부리던 상위 마법을 새삼스레 떠올리며 무감정하게 제안했다.

"그럼 제가 도와드릴까요?"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불안하게 묻는 시안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주황빛 촛불 하나가 그가 무의식적으로 일으킨 엷은 바람에 확 꺾였다. 시야가 퍽 침침했다.

"제국 진영으로 이중첩자를 보내세요. 제가 또다른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당신들의 지원을 받아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고 거짓으로 고발해서, 마음 급해진 그들이 전력을 쪼개 거기로 가도록 하면 꽤나 유리해지겠죠."

"......그들은 쉽게 믿지 않을 겁니다."

"믿게 해야죠."

시안이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슬픔과 당황과 분노가 적절하게 섞인 모양새였다. 작년 봄만 해도 웃음 외에는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굴었던 주제에, 요즘은 얼굴에 나타나는 게 상당히 다채로웠다. 감정을, 내가 잃어가는 만큼 그는 되찾고 있는 걸까.

"일단 첩보가 들어오면 사실 여부 확인을 위해 지휘관이 은신에 뛰어난 몇 명을 그 지역으로 보낼 거예요. 그 때 제가 실제로 거기 있으면 병사들은 곧장 보고를 날릴 거고, 가장 가까이에 주둔 중인 이곳의 군사가 파견되겠죠. 당신들은 그 순간을 노리면 돼요."

============================ 작품 후기 ============================

15챕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진짜로 차분한 후기만 남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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