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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92화 (92/102)

00092 15. 밤의 장막 =========================

"사람 하나를 잡겠다고 분산될 수는 그리 많지 않겠지요. 결코 효율적이지 않은 전략입니다."

"시안, 나는 전대 황제의 외손녀고 희대의 악랄한 반역자예요. 새로 즉위한 황제가 국내를 깔끔하게 쓸어버렸지만 해외로 도주한 제 목만은 베지 못했죠. 게다가 제가 군사를 가지고 있다고 떠벌리기까지 하면, 황제는 반드시 병력을 움직여요."

나는 지금 스스로를 전장의 제물로 바치게 해달라 청하고 있었다. 시안이 점점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게 눈에 들어왔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충분할 겁니다."

"이상하네요. 당신은 나처럼 좋은 패를 왜 썩혀두려는 거죠? 나였다면 당장에 써먹었을 텐데."

"하지만, 이런 식일 필요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일이 그의 희귀한 반응에 작게 감탄성을 뱉었다. 시안은 아차 싶었는지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음성을 누그러뜨리고 다시 말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내 결말은 내가 정해요."

아무리 소설 속이 아니래도, 세계는 어쨌든 하나의 이야기다. 작가의 부재를 전제로 한 자유로운 시대에 나라는 인물은 스스로 끝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이십 년 전 열일곱 살의 윤이설이 새로운 시작을 직접 열었듯이.

하여 이것은 이들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닌 내 주도로 내미는 희생책이었다.

"당신들이 나를 이용했으니까, 나도 당신들을 이용해야 공평하지 않을까요? 당신들에게 해가 되는 일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결정적인 도움이죠."

조곤히 설득했다. 시안은 완연한 반대 의사를 표시했지만, 엘피샤는 그게 아닌 듯했다. 하일이야 아무 생각 없어 보이니 제외하더라도 엘피샤가 긍정적인 검토를 해 준다면 시안이 마냥 무시하기는 힘들다.

"어때요? 난 할레시온에게 꼭 복수하고 싶은데."

못을 박았다. 시안이 눈에 띄게 갈등했다. 내 바람대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지만 여전히 마음 정리가 덜 된 모양이었다. 이때 엘피샤가 의견을 실었다.

"눈속임을 완벽히 하기 위해 대공녀님 주위에 함정이나 증거를 몇 개 놓아둔다면 가능할 거예요. 대공녀님의 제안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일도 가세했다.

"사실 전략적으로만 본다면 나도 엘피샤랑 똑같은 생각이야. 근데 궁금한 게 있어."

뭘 알고 싶느냐고 물어봐줬다. 그러자 그가 사뭇 경쾌한 어투로 물었다.

"하필 할레시온 군에게 잡혀가는 길을 택하려는 이유가 뭐지?"

악의 없는 질문이 예상치 못하게 정곡을 찔렸다. 시안은 내 답변을 듣기도 전에 눈을 착 내리깔았다. 푸른 머리칼에 가려 그가 검은 눈 안에 어떤 감정을 담았는지 보기 어려워졌다.

"난 할레시온 사람이니까 이왕이면 그게 낫죠."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기억을 시시각각 잃어가면서도 내 옛 스승 로제 카나이클이 이 자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건가. 그는 상당히 예리했다. 결국 덧붙였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있고요."

이번에는 엘피샤의 얼굴이 굳었다. 이 자리에서 말 한 마디 없는 베르크만 외관상 감정 동요 없이 멀쩡했다.

"흐음. 다시 만나자고 기약했던 게 이런 식으로 실현될 줄이야. 역시 미래는 알 게 못 된다니까. 제자가 자살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별로 안 보고 싶었는데."

하일이 매우 직설적인 감상을 내놓았다. 살아온 나날을 마법 때문에 수없이 잃어버린 그만이 지을 수 있는 복잡다단한 표정이 천진함을 뒤집어 쓰고 얼굴 위에 떠올랐다. 마땅히 대꾸할 것이 없어서 나는 그냥 그를 뜻 없이 응시했다. 엘피샤는 막 나가는 연인의 언사를 제지할 심적 여유가 없는지 착잡하게 숨을 내쉴 뿐이었다.

끝내 시안이 선을 그었다. 좌중의 눈길이 쏠렸다.

"그대 마음 닿는 대로 하세요."

시안은 나를 감정 빼고 바라보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누구든 그대를 막을 자는 없습니다."

아무도 반박하거나 이견을 내놓지 못했다. 늦은 밤의 재회와 회의는 거기서 막을 내렸다.

다들 임시로 마련된 막사로 각각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나는 오랜 이동으로 피곤했지만 의식이 끊어지는 느낌이 싫어서 버텼다. 그러다 그만 새벽이 밝고 말았다. 축축하고 푸르른 겨울의 새벽이었다. 두꺼운 겉옷을 걸치고 마른 억새와 들풀이 널린 황량한 들판에 나왔다.

해가 막 뜨고 있었다. 끝부분이 지평선을 찬란하게 뚫고 올라왔다. 내 목걸이가 그 빛을 반사했다. 습관처럼 그걸 손에 꼭 쥐었다. 부질없음을 알지만, 이렇게 하면 함께 있는 것만 같아서.

"일찍 일어나셨군요."

뒤에서 시안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몸을 돌렸다. 행색이나 음성으로 보아 그는 아예 안 잔 눈치였다. 태양을 등지고 서서 그가 일출과 정면으로 마주선 장면을 감상했다. 언제나 양지에 서 있었으나 그것이 단 한 번도 축복이지 못했던 사람이 서리 낀 햇빛을 입으니 이상했다.

"계속 깨어있었어요, 당신처럼."

"......제가 밤을 샌 것은 어떻게 아셨는지요."

"자다 일어난 사람 치곤 너무 쌩쌩해 보여서요."

"그런가요."

말할 때마다 입김이 나왔다. 시안은 두르고 있던 연갈색 목도리를 풀어 내게 건넸다. 얌전히 받아 둘렀다. 한결 따뜻했다. 목도리에서 나는 달콤한 바람의 향기는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대는, 제가 이기적이라 생각하십니까."

내 옆에 다가와 선 시안이 일출에 눈을 고정하고 나직이 질문했다. 유감스럽게도 정답이었다.

"네."

내 긍정에 시안의 무표정이 약간 깨졌다.

"저는 당신이 정말 이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시안이 부드럽게 미소했다. 분명 웃는 건데 왜 울기 직전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실컷 써먹어놓고선 뒤늦게 개인적인 후회를 내게 고해했잖아요."

그는 내가 차게 내뱉는 비난을 여린 미소와 함께 수긍했다.

"그랬지요."

"그거 정말 이해 안 되는 짓이에요."

참다 못해 지적했다.

"기억도 없는 과거에 묻혀서 사는 건 그만둬요. 적어도 현실에서 살아가란 말이에요. 제게 마음쓸 필요 없어요. 어차피 피차 서로를 망친 관계인데 뭐가 그렇게 걸린다는 거죠?"

시안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 사이 해는 이글거리는 둥근 모습을 반쯤 드러냈다.

"그런 조언을 하시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이어진 물음에 나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창피한 일이었다.

"그래야 내가 앞으로 저지를 일에 죄의식을 덜 가질 것 같아서요."

하는 수 없이 자백했다. 사실 이기적이라는 건 나 자신에게 주고픈 말이기도 했나 보다. 시안이 예상 안쪽의 질책을 했다.

"그대도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군요."

"그러게요."

허무해서 짧게 비식 웃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언쟁이 뜻대로 되질 않았다.

"화가 난다면 내세요."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말고요."

정말 이상하긴 했다. 보통 이렇게 나쁘게 얽힌 관계면 진작에 한쪽이 칼을 빼들고도 남았을 텐데. 그와 나는 묘하게 서로에게 적개심이 없었다. 그가 나의 선택이 어느 행선지를 염두에 두었는지 알아서인가. 아니면.

우리가 모든 것에 초연해져서인가.

아마 후자일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고요히 해를 구경하고만 있었다. 둥근 모습이 완전히 드러날 무렵, 시안이 눈가에 어렴풋이 미소를 피워냈다.

"천 년을 이어진 바람의 마법사 계보는 제게 몇 가지 특이한 점을 물려주었습니다."

갑자기 뜬금 없는 소리를 하기에 그와 눈을 맞췄다.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향기가 더 짙어진 것 같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마법사의 체향에 관한 것이지요."

시안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주춤하다가 얼결에 손을 겹쳤다. 왜인지 불길했다. 체향이라면 에온 왕실의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고유의 특징이고, 다른 사람은 다 못 맡는데 나만 맡는 것이다. 이걸 언급하는 까닭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어울리지 않는 새벽빛을 받은 창백한 얼굴이 지는 꽃처럼 웃었다.

"그대가 제 향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주 오래 전 제 이기심이 그대에게 걸었던 마법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끊어내야겠지요."

아련하게 빛이 바랜 그림 같았다.

"이것으로 그 과거에 대한 후회는 거두겠습니다."

그가 내 손에 나비가 앉듯 사뿐히 입맞추었다. 찰나의 접촉이 끝나자마자, 후각이 얼어붙기라도 하는지 그의 향기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가 내게서 멀어지는 것처럼. 존재가 사라져가는 것처럼.

"기억 또한 영원히 꺼내지 않겠습니다."

아침이었으나 밤의 장막이 걷히지 않은, 종말의 어딘가였다.

"작별 준비는 이 정도로 족할까요?"

시안의 향기가 물음이 아닌 물음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날의 나는 이 말들이 전부 저주가 되어 박히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시안이 몰래 선사한 지옥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은 그를 안 시점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결말이었다.

***

시안은 아직 내게 할 말이 많은 투였다. 그러나 그는 익숙하게 그것을 전부 삼켰다. 쓰게 웃기만 했다. 그는 알까, 그 모습이 가장 서러워 보인다는 것을.

말에 오르기 전, 시안에게 많은 것을 생략한 질문을 했다.

"어때요?"

시안은 얼핏 듣기엔 엉뚱한 듯하지만 사실은 정확했던 대답을 돌려주었다.

"가장 서러웠던 나날에 매몰되어도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나는 어쩐지 묵직한 감정에 휩싸였다.

"어째서죠?"

"죽음만이 저를 구원할 테니까요."

시안은 최후까지 웃었다. 그러나 그것을 과연 미소라 불러도 좋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볼을 타고 눈물 한 자락이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순간 나는 직감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또 하필이면 우는 얼굴을 눈에 담지는 말았어야 했다고.

"그대는 정말 잔인하시군요, 라고 말해도 돼요."

나는 차마 그가 하지 못한 말을 대신 입 밖에 냈다. 엘피샤나 하일 같은 사람들이 전부 전쟁터에 나가서 시안만이 나를 배웅하던 차라 안 될 것은 없었다. 시안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무엇이 제게 그나마 도움이 될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보는 거군요."

"네."

차가운 숨결의 말미에 그가 간신히 나를 떠밀었다.

"가세요, 라니아. 가장 먼 곳으로. 저는 이곳에 머물다 가겠습니다."

모든 걸 다 궤뚫고 하는 말을 듣는 기분은 감히 형언할 수 없었다.

"잘 지내요."

나는 시안마저 구원하지 않고 인사했다. 내가 가기로 정해진 지역을 향해 말머리를 돌리고, 시안에게서 멀어져갔다.

그건 정말이지 마지막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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