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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93화 (93/102)

00093 15. 밤의 장막 =========================

나는 미리 준비된 곳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무한히 사색하는 것밖에 없었다. 세부적인 계획은 엘피샤가 다 짰고, 사전 작업도 내 몫은 아니었기에 나는 말 그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얼굴 봤으니까 됐어. 잘 가.'

출발하기 직전 하일이 건성인 척 건넨 작별 인사가 떠올랐다. 그 옆에서 엘피샤가 목 메인 소리로 하던 말도.

'죄송했습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모두 진심이었길 바란다. 내가 그들의 모습을 길게 바라본 것도 지난 시간을 무의미하다 치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겨울이 무너지고 있다. 사람들은 죽어가고, 망국은 되살아나고, 마법은 소멸해가고, 세계는 갈라진다.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별 감흥은 없었다. 그냥 미리 생각해 둔 문장 몇 개를 곱씹으며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바를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었다.

밤바람에 별이 흔들렸다. 저것들도 다 세계일까. 엄마는 저 별 하나하나가 다 세상이라고 말해줬었는데.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었다. 윤하린과 일레인 둘 다.

그러나 윤하린만큼은 평생 절대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윤이설의 세계에는 가지 않을 테니까.

텅 빈 그리움을 넘어 아침이 되었다. 여느날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아침이었지만, 나는 기류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몰려온 할레시온 군이 내가 머물던 곳을 겹겹이 둘러쌌다. 내가 비밀스레 떠나던 날부터 반란군이 전투를 잠시 소강상태로 만든 탓인지 이리로 온 수가 꽤 많았다.

이만하면 성공이다.

이윽고 그들이 창과 칼, 방패를 들고 일제히 건물 안으로 침입할 때. 나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 무표정을 지켰다.

문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났다.

"저기다! 잡아라!"

병사 하나가 외쳤다. 나는 바깥을 내다보던 것을 그만두고 무표정히 고개를 돌렸다. 그 찰나에 포위당했다.

차갑고 섬뜩한 칼날이 내 목을 겨누고, 저항하지 않는 나의 손목을 밧줄로 포박하며 군사들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나는 우선 그들의 지휘관 앞에 끌려가 무릎을 꿇었고, 곧장 임시 감옥에 실려 할레시온으로 호송됐다. 그동안 할레시온 군은 내가 보유하고 있다던 별도의 반란군을 수색했으나 찾지 못했다는 듯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애초에 그 첩보는 거짓이었으니까. 나를 데리고 가던 군사 몇십 명이 그 소식을 저들끼리 떠들며 분통을 터뜨렸다. 나를 해코지하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이었지만 황제의 명령 같은 게 있었는지 차마 그러진 못했다.

내가 잡힌 지역부터 할레시온까지는 멀고도 멀었다.

수도 할렌센에 도착할 즈음에는 시안 측 군대가 승전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엘피샤의 모국인 시힐레는 할레시온 남동쪽에 홀로 고립된 땅이라 지금 당장은 넘보기 힘들겠지만, 일단 시안과 하일의 모국을 되찾는다는 목표에는 한 발 더 다가간 셈이었다. 원래는 살아남은 세 개의 왕국 리우네아, 블로텔지아, 엘비올리스만 상대하면 되는데 이번 패전으로 졸지에 2개국을 추가하게 생긴 제국은 충격에 빠진 것 같았다. 수도의 거리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실의에 잠긴 평민과 귀족으로 인해 잔뜩 가라앉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죽어라, 나라를 판 악녀!"

"위대한 황실의 수치 같으니!"

여러 폭언이 거리를 지나는 내게 쏟아졌다. 돌을 비롯한 각종 물건도 날아왔다. 어차피 거리상 하나도 제대로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저주와 비난을 흘려들으며, 나는 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수레에서 내려 황궁 정문 앞에 섰다. 육중한 문이 양쪽으로 벌어져 열렸다. 나는 그 안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이런 모습으로 만나지는 않았으면 했던 사람들이었다.

"......반역자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은 지금부터 우리 오십현과 3기사단이 호송한다. 무장한 일반 병사 전부는 황궁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도록 유의하라."

검은 제복을 입은 사현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했다. 전쟁 중이라서 오십현마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나 보다. 사현 옆에서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십이현이 나를 인도받았다.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며, 날 감시하려 주위에 잔뜩 둘러선 이들 몰래 작게 말을 걸었다.

"주군. 왜 그러셨습니까."

잔떨림이 가득한 십이현의 물음은 수많은 의문을 응축한 것이었다. 내 등 뒤로 문이 다시 닫혔다. 시선을 정면에 고정하고 입술만 움직였다.

"살고 싶었어. 루이제랑 헬렌이 살려고 검을 잡았듯이."

앞장서 길을 트던 사현, 헬렌이 남다른 감각 탓에 내 말을 들었는지 검을 소리나게 고쳐쥐었다. 손에 과한 힘이 들어간 게 멀리서도 대강 보였다.

"......살려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어진 십이현, 루이제의 부탁 같은 제안은 내 고개를 돌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눈매를 내려뜨리며 아주 살짝 웃었다.

"그럼 네가 죽을 거야."

"주군을 위해 죽는 것만큼 호위 기사에게 명예로운 일은 없습니다."

루이제가 흔들림 없이 말했다. 위험할 정도로 우직하고 미련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것이 내 호위들의 가장 큰 문제이자 장점이었다. 이런 자들을 길들일 생각을 하다니, 과거의 나는 굉장히 무모했던 게 분명하다.

"나는 이제 루이제와 헬렌의 주군이 아니잖아."

"......"

다정하게 타이르자 목소리 대신 침묵이 돌아왔다. 조금 슬퍼졌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어차피 손이 밧줄에 묶여 있어서 불가능할 테지만, 그냥 마음만이라도. 루이제를 다독이고 싶었다. 그 옛날 르쉬네도 처형장에서 나와 말을 나누며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내 곁을 지켜줘서 고마웠어."

시간과 공간상의 제약이 큰 관계로, 나는 말로써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헬렌에게도 이 말을 전해줘, 꼭."

이미 그녀도 들었겠지만. 혹시 몰라 당부했다.

그 사이 나는 내궁 구역에 들어섰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던 사람을 하나 더 만났다.

황태후가 된 네피아였다. 든든한 사교계 뒷배였던 나의 할머니. 카넬린 황태후가 오벨 3세의 죽음이 발표되고 얼마 안 가 죽고, 황실의 가장 높은 웃어른이 된 네피아 황태후는 몇 달만에 많이 쇠약해진 모습이었다. 남편은 세상을 떴고, 자신이 낳은 자식들은 서로를 죽였으며, 그 자손마저 이런 꼴이라니 당연히 마음이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군사들 틈바구니에서 황태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황태후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슬프게 응시했다. 내 결백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선명한 적안과 마주쳤다. 안타깝게도 당신 손녀는 실제로 반역을 저질렀지만, 그저 묵언을 지키기로 했다. 황태후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알아서 비켜섰다. 나와 두 오십현, 그리고 수십의 기사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겨울의 황궁은 냉막함 그 자체였다.

길이 정해진 세계에 만약이란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 황궁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단지 내딛는 걸음마다 내 유년 시절이 들쑤셔진다는 점만이 애석했다. 저 잔디밭에서 어렸던 나와 친구들은 철없이 장난을 쳤고, 그보다 더 오래된 과거에는 저 꽃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 곁에 누군가 있었던 것도 같지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튼 떠오르는 추억이 한가득이었다.

나는 황족이었던지라 황궁에서 보낸 시간이 꽤 많았다. 그래서 이들이 지금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황태자궁이었다.

곧 황태자궁 구역에 들어섰다. 내가 간 곳은 본궁이 아닌 다른 건물 쪽이었다. 황태자궁에는 성당과 비슷한 구조의 독립된 건물이 하나 존재한다. 주로 공식적인, 특히 황태자와 연관된 중대한 정치적 일정이 여기서 치뤄지곤 했다.

거대한 목재 문이 천천히 열렸다. 기사 두 명이 내 양 팔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대리석과 오후의 햇살 미량이 어우러져 서늘하고 그늘졌다. 넓은 직사각형 내부에 자연광에 맞추어 낸 유리 창문과, 드높은 단상 위에 놓인 황태자의 의자와, 여러 장식물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안에 새로 즉위한 황제 루인 1세와 황태자 라인하르트가 있었다.

기사들은 나를 중앙에 꿇어앉히고 물러갔다. 황제가 곧바로 내게 추궁했다.

"저항도 없고, 거느리고 있다던 군사도 없다니. 반란군을 위해 희생하였던 것이냐?"

황제를 보자마자 극심한 살인 충동이 들었지만, 무기를 빼앗긴 데다 손까지 포박되어서 아무런 위해를 가할 수 없었다. 어차피 반란이 실패하고 나선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전혀 안 했기에, 내가 울고불고 난리치는 일은 없었다. 대신 비꼬듯 되물었다.

"반역자가 그럼 제국을 위해 희생하겠어?"

황제가 즉시 분노해 무어라 소리쳤다. 나는 대강 흘려들었다.

이윽고 흥분을 겨우 가라앉힌 황제는 라인하르트에게 자신의 보검을 주며 명령했다.

"이 안에 너와 저것만 두고 갈 것이다. 이후에 다시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너 혼자가 아니라면, 짐은 둘 다 죽이겠다. 선택은 네가 하거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황제는 나를 이용해 황태자가 확실하게 입장을 결정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대단한 강경책이다.

황제가 소리를 낸 나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용히 비웃기만 했더니 황제는 붉은 망토를 끌며 뒷문으로 나가버렸다.

뒷문을 비롯한 모든 문이 닫혔다. 그 직전에 문틈으로 병사들이 이 건물을 빙 두르고 진을 친 것을 확인했다. 저 병력은 내가 살아서 나오면 다시 잡아다 죽이려고 황제가 깐 안전망이었다. 황제는 라인하르트까지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아예 하지 않는 건가. 하기사 이렇게 된 마당에 내가 그를 죽이거나 그가 스스로 죽음을 택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 많던 생각을 뚝 끊어낸 건 내가 오랫동안 침묵 속에 있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라인하르트가 선 단상 위와 그 주변을 보았다.

창문을 투과한 여린 햇살이 얇은 커튼처럼 대리석 벽에 살랑였다. 고요했다.

완전한 단 둘이었다.

한참을 망설인 기색의 라인하르트가 그제서야 내게 걸어왔다.

한 발짝도 어려운지 더디기만 한 걸음이었다.

"......라니아."

귀퉁이마다 남김없이 무너진 목소리로, 라인하르트는 나를 불렀다.

============================ 작품 후기 ============================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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