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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94화 (94/102)

00094 15. 밤의 장막 =========================

그가 나에게 저지른 죄에 필적하는 괴로움을, 나는 그에게 돌려준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 이상인지도 모르겠다.

"안녕."

감정을 삭이고 간단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마치 며칠 만에 다시 만난 친구에게 하듯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를 담담히 올려다보았다. 까칠해진 얼굴이 그간의 온갖 심경을 대변했다.

"너는......어떻게 그런 말을."

라인하르트가 울 것처럼 말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내게 인사를 할 수 있는 거지?"

가엾게도 그는 영원한 나락에 갇혔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나 역시 그를 좋아했었지. 그래서 나도 기꺼이 그 나락에 발을 들였다.

"안될 건 없잖아?"

일부러 입가를 끌어당겨 웃었다.

"라니아. 제발."

그는 절박하게 애원했다.

"이 모든 게 거짓이라고 해 줘."

그래봤자 내 성격에 고운 대답이 날아올 리가 없다는 걸 알 텐데도.

"내가 뻔한 사실을 숨기게 할 셈이야? 날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은 거야, 대체."

나는 원래부터 모두에게, 특히나 소꿉친구에게는 더 거침없었다. 질타하듯 말을 맺자 라인하르트가 눈에 띄게 절망했다. 그는 헛숨을 내뱉고, 나를 허무하게 바라보았다.

"잘 지내겠다면서."

탓하는 어조였다. 나는 에티에네트 공주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그와 했던 짧은 대화를 떠올렸다.

그 때 나는, 우리가 다시 만나는 건 둘 중 하나가 패배한 다음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예상이 들어맞은 날이다.

패배자는 나였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에게 망발을 지껄였군.

"나보고 먼저 죽지 말고 잘 살라며."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울음을 삼킬 목적으로 시선을 내리며 숨을 뱉듯 웃었다. 딱딱한 바닥에 꿇은 무릎이 아팠다. 다 낫지 않은 상처 위를 옭아맨 밧줄 때문에 손목도 따가웠다. 하지만 그게 내 슬픔의 원인은 아니었다.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산산히 부서졌다.

"그런데 왜, 네가 이런 꼴을 하고 내게 찾아와."

그는 나를 원망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이 조용한 홀 안에 검 빼드는 소리가 스쳤다. 칼날은 내 목을 향하지 않고 밧줄만 잘랐다. 그는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선 칼을 손에서 놓았다. 얕은 바다를 투영하듯이 느릿하게 일렁이는 햇볕이 내려앉은 대리석 바닥에, 검이 반짝이며 나뒹굴었다. 그의 텅 빈 손이, 그리고 물기어린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너는 왜 끝까지 잔인한 거지?"

라인하르트는 주저앉듯 무릎을 꿇고 나를 확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워서 뭔가 행동할 새가 없었다. 그는 나를 놓칠새라 꼭 껴안았다. 내가 죽어가는 샤카르를 안았던 것과 같이. 부질없는 간절함을 품고서.

나는 이 사람에게 최악의 상실을 선물하는 중이구나. 그제서야 깨달았다.

황태자의 아들과 2황자의 딸은 어쩔 수 없이 적이다. 처음부터 한 쪽만 살아남을 운명이었다. 우리는 일찌감치 현실을 직시했어야 했다. 감당하지 못할 진실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거짓을 믿은 죄로, 우리는 몰랐어도 될 비애를 나눠 가졌다.

"엔리케."

한 번도 제대로 불러보지 않은 그의 중간 이름을 나직이 입에 올렸다.

"날 경멸해도 좋아."

양심적으로 이 정도는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안는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숨이 막혔다. 그가 어렵게 목소리를 냈다.

"그런 말은 하지 마. 차라리 함께 도망치자고 해라."

내 죽음을 바라지 않는 자들은 어째 한결같았다. 우습게도, 실현성 없는 도주를 말하는 그들은 본래 가장 현실에 충실한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만큼 이성을 잃었다는 거겠지.

나는 어쩌다가 하나의 세계에서 이토록 많은 관계를 쌓았을까. 모든 게 후회였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잘 알잖아."

내 목소리는 이제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나의 밤은 곧 끝이 나기에.

"대신 더 이상은 너를 증오하지 않을게."

끝없는 비극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이런 의미 없는 말뿐이었다. 무자비한 행동은 있는 대로 다 해놓고 이제 와서, 이런 말밖에 할 게 없었다.

"그러니까 너도 나를 너무 많이 기억하지는 마."

나는 잘 움직이지 않는 손을 들어 그를 살며시 밀어냈다. 가당치도 않은 힘일 테지만 그는 순순히 물러났다. 불안감을 한껏 담은 핏빛 적안이 잘게 흔들렸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건넸다. 라인하르트는 받지 않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서 손을 끌어다 직접 쥐어주었다.

이제는 작별을 마무리할 때다.

"네가 어서 나가지 않으면 황제가 너까지 죽이려 들 거야. 넌 이미 의심스런 일을 너무 많이 했어, 여기서 그만 둬야 해."

내가 생각해도 참 잔인한 짓이었다. 하지만 엄연히 이건 황제가 깐 판이고, 라인하르트가 살아서 이곳을 나가려면 나를 직접 죽여야만 한다. 결국 이게 내 최선이었다. 돌이키지 못할 상황이라는 것을 라인하르트는 분명 잘 안다. 조곤하게 재촉했다.

"어서, 라인하르트."

"......나는 분명 르쉬네는 죽여도 너는 못 죽인다고 말한 적이 있어."

"그럼 내가 직접 죽게 할 거야? 그건 너무하잖아."

꼭 옛날처럼 가볍게 말해보았다. 그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 그렇게, 나는 망가질지언정 비탄하지 않았던 냉철한 황족의 우는 모습까지 보고야 말았다. 우리가 반역을 통해 완전히 적으로 돌아서길 망설이며 경계해 마지않았던 점이 바로 이런 거였는데. 염려가 최악의 형태로 들어맞았다.

"......기억하지 말라는 부탁은 들어줄 수 없다. 나는 기억하기 위해 살아갈 테니까."

그는 결정을 내렸다. 서글프게 일그러진 어조로 단언하며 천천히 검을 고쳐잡았다. 날 끝이 아주 날카로웠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작게 수긍했다. 먹먹하게 미소했다. 공기에 녹아든 여린 빛조각이 달다.

모든 것을 얻고, 다시 잃었다. 많은 것을 증오했고, 또 용서했다. 이윽고 세계가 내게 알려준 비밀을 나는 사용하려 한다.

소망은 누구나 죽음의 순간 갖는 마법이다. 그렇기에 무엇을 빌든 예외 없이 대가성을 지니며, 그 때문에 윤이설은 엄마의 전생을 만났지만 감히 이 세계의 사람들을 사랑하게 됐다. 잃을 것이 너무도 많았고, 종래에는 그로 인해 사슬에 묶였다. 이번에는 또 무슨 벌이 내려질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길이 정해진 세계의 마지막 장에서 무엇이든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가장 끔찍한 행복을 고르겠다.

"라니아."

라인하르트가 나를 불렀다. 더없이 고통스런 얼굴을 한 채 간신히 조언했다.

"움직이지 말고, 부디 가만히. 그래야 아프지 않다."

생긋 웃었다.

"알았어."

이 순간 결코 가늠하지 못할 감정이 말 없이 오가고 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보고 싶어."

샤카르.

내 최후의 문장을 오해한 듯한 라인하르트가 이를 악물고 흐느끼다, 나를 다시금 끌어안았다. 날카로운 칼이 나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네 손에 죽게 되어서 다행이야. 나는 주어를 정확히 해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그리고 소망했다.

다음 생에는, 이 세계와 같지만 전쟁 없는 곳에서. 황족이 아닌 라니아로 태어나기를.

***

나의 밤. 그 끝자락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던 걸까.

우리는 어째서 그토록 모르는 것이 많았던가.

의미를 잃은 세계가 무가치해졌을 때, 나는 마침내 내 비극을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비극의 세계를 사랑했다.

============================ 작품 후기 ============================

끝이야. 나의 세계, 나의 비극, 나의 사랑스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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