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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95화 (95/102)

00095 16. 겨울의 종말 =========================

아무것도 남지 않은 행복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까.

사라진 이별 뒤에서 내가 무엇을 그리워하면 좋을까.

잔혹하게 아름다운 결말 끝에서 내가 무엇을 아파하면 좋을까.

악녀는 그저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라고, 구차하게 변명하며 도망쳐왔다고. 누구에게 말하면 좋을까.

***

전쟁이 가득한 그 세계. 떠나왔지만 계속 생각하게 되는. 두고 온 세계.

바람이 서늘하게 불었다. 나는 아직 덜 자라 짧은 다리를 까딱이며 눈을 가만히 내리깔았다.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의미가 가득했던 그 곳이 나를 살게 했다. 하지만 끝내는, 이렇게 망가지고 마는 얄팍한 행복이었다.

슬픔이 사랑을 동반하고서야 슬픔이었듯이, 선택도 대가를 수반하고서야 비로소 선택이다. 그렇기에 나는 필연적으로 후회했다. 가장 서글펐던 것이라면, 후회는 하되 내 지난 선택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게는 그 선택이 최선이었으니까.

담쟁이덩굴로 군데군데 점령당한 저택 담벼락은 어린 몸으로 혼자서는 내려가기 힘든 높이였다. 물론 올라가는 것도 지금 내 옆에서 안절부절하고 있는 이 남자가 도와줘서 가능했다.

"레온, 나 안 떨어지니까 걱정 마."

밝은 금발에 선명한 벽안을 가진 키 훤칠한 남자가 내 나지막한 말에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걱정한대?"

"딱 봐도 불안한 얼굴이면서 거짓말은."

붉은 빛이 도는 벽돌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무감하게 대꾸했다. 레온 이셀로, 내 친오빠 되는 자가 반박하고 나섰다.

"아니거든? 라니아, 이 오라버니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본 적 있어?"

"어. 많은데."

담쟁이 잎을 괜시리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레온이 눈매를 내리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좀.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면 내가 무안하잖아. 너 나중에 사교계 나가서도 이러면 따돌림당한다?"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이었을 때의 사교계 경험을 다 합치면 레온보다 내가 훨씬 고수다. 그래봤자 레온 눈에는 여덟 살 난 아이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냥 가벼운 농담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 말 십 년 후에 번복하게 해 줄 테니까 기다려, 레온."

"흥. 근거 없는 자신감 같은데. 그리고 너, 언제쯤이면 날 오빠 취급 해 줄래? 맨날 레온이라고만 부르잖아."

나는 그의 불평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할 말이 없어서였다. 가족 구성원이 여동생에서 오빠로 바뀐 게 팔 년 전이건만 아직도 어색해서, 차마 입에 올리질 못하겠다. 레온은 대답 없는 날 꿍하니 째려보다가 혼잣말처럼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래. 내가 '라니아 이셀로'로 다시 태어난 지 벌써 팔 년이 지났다. 흘러넘치는 미련과 상념과 후회, 그리고 기타 수많은 감정들을 모두 정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이제 비극으로 끝난 그 이야기 속에 없고, 내 입맛에 맞게 복제된 새롭고도 익숙한 세계에서 안온하게 숨쉬고 있다.

- 이 세계는 그의 것이고, 소망은 세계를 뒤집으리라. 두고 온 세계는 잊혀지되 소멸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는 두고 온 세계에 뿌리를 내리리라. 시작과 끝은 그의 선택이며 인과이고 죗값이어라.

책 '세계'에 쓰인 그 문단이 꼭 맞았다.

나는 사실 이렇게 얻은 삶이 허상 같다. 이곳의 모든 인물은 내가 두고 온 세계에 남겨진 인물들의 복제에 지나지 않고, 심지어 레온처럼 몇몇은 새로 생겨났다. 소설 속 세계보다도 현실감 없었다.

가장 비현실적인 건 나였다. 나는 황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푸른 눈에 백금발을 지닌, 후작 영애 라니아 이셀로다. 황위 계승권자도, 가문의 후계자도 아니다.

나는 그냥 나였다.

작게 한숨을 쉬고 팔을 벌렸다. 용케 뜻을 알아챈 레온이 말을 멈추고 날 안아 내려주었다.

"당신 여동생 아직 여덟 살이야.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봐. 덜 어색해지면 불러줄 테니까."

무뚝뚝하게 핀잔주고 먼지 묻은 치마를 털었다. 레온은 어이가 나간 얼굴이었다.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너 말하는 거 너무 이상해. 가족 중에서 이런 말투 쓰는 사람도 없는데 대체 어디서 배워왔어?"

그는 내 조막만한 손을 감싸쥐고 저택 안으로 향했다. 나는 타박타박 열심히 발을 놀려 뒤따르며 퉁명스레 말을 던졌다.

"배운 거 아니야. 원래 이래."

"말도 안 되는 소리. 아기가 어떻게 원래 이래?"

"그럴 수도 있지."

"아, 역시 이상하다니까......"

나와 그는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잔디가 보드랍게 깔린 앞마당을 지났다. 문 앞 계단에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거짓처럼 평화롭다. 그야 거짓이니까. 울컥 치고 올라오려는 것을 조용히 삭였다.

***

열여덟 살이나 먹은 레온이 내게 쩔쩔매는 건 비단 늦둥이 동생이여서만은 아니었다. 태어나고 몇 년간은 평범한 척할 여유가 없었던 탓에, 나는 정신에 문제가 있는 아이 취급을 받았다. 읽고 쓰는 건 엄청나게 빨리 배우지만 가족과 도통 소통하려 들지 않았던 라니아 이셀로는 다섯 살이 되어서야 나름의 정돈을 마치고 마음을 열었다. 여전히 다들 날 조심스럽게 대하는 이유가 이거다. 그래도 여덟 살인 현재는 가족과 얼추 친해졌다.

가주인 어머니, 백작가 출신의 아버지, 3기사단 소속 기사인 오빠 레온, 그리고 나. 특이한 것 하나 없는 전형적인 대귀족 가정에서 나는 지극히 안정적인 생활을 누렸다. 행동 반경의 제한도 희미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그 덕에 새로운 세계에 대해 알아볼 방법이 차고 넘쳤다. 나는 그 중 도서관을 택해 자주 드나들었다. 오늘도 내 일과의 대부분은 도서관 방문으로 채워졌다.

마른 책 냄새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익숙하게 책장들 안쪽으로 들어가 돌아다니다 원하는 책을 찾고 사서에게 꺼내달라고 부탁했다. 곧 몇 권이 내가 앉은 테이블에 놓였다.

먼저 귀족 계보서부터 펼쳤다. 이미 몇 번 읽긴 했지만 내게는 필독서라서 또 보는 거다. 뭐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숙지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 책에 따르면 이셀로 후작가는 유서 깊은 재력가다. 가주 일가는 수도의 저택에서 살고, 남부 지방에 있는 드넓은 관할 지역에는 관리인이 따로 내려가 있다. 두고 온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문이다. 가족의 대화를 들어 보자면 오랜 시간 중립파였던 듯하다.

황실 가계도 역시 여러 군데가 변했다. 한때 나의 증조부였던 정복왕 아렌도스 2세가 프리제와의 전쟁 막바지에 죽었고, 그의 아들 오벨 3세 역시 에온 정복 직후 사망했다. 그래서 현 황제는 황태자였던 루인 1세다. 시기상 3황자는 황위를 이으라는 오벨 3세의 지령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1057년의 반역과 숙청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지금의 황제가 이미 즉위한지 꽤 되었고 다른 황자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마땅히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쥐었다고, 레온에게 들은 바가 있다. 하여 황자들이 처신만 잘 한다면 1062년의 숙청 또한 필요성을 잃을 것이다. 나는 머리 쓰는 데 일가견이 있는 2황자비 일레인을 믿기로 했다. 그녀는 적어도 승산 없는 전쟁의 발단이 되려 들지는 않을 인물이니까.

시야를 황위에서 그 주변으로 넓혔다. 그리운 이름들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르쉬네, 라인하르트, 에단, 3황자의 아들 율리시즈, 2황자 카시우스와 그의 부인 일레인, 딸 셀리아.

그 시대의 우리는 모르는 것이 참 많았지.

이제는 나만이 기억하는 시간 속의 그들이 그립다.

나는 그렇게 두 권을 연달아 읽었다. 그리고는 국외 쪽으로 넘어갔다. 대륙 역사서에 명시된 망국은 전생에서와 같이 에온과 시힐레, 프리제와 카슈테르였다. 그러나 몇 가지 변한 것이 있다. 우선, 리우네아에 레비욘이라는 이름의 왕족이 없다. 또한 반역의 주축이 되었던 각국의 왕족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고 온 세계에서는 할레시온의 귀족으로 편입됐던 시힐레의 왕가, 카르텔리 후작가가 여기선 말끔하게 삭제됐다. 하일에 관한 흔적은 프리제와 엘비올리스 둘 다에서 찾지 못했다. 히엘로 공작가 역시 공작 슬하에 자식이 아예 한 명도 없는 걸로 나온다.

전쟁이 없는 세계를 바랐던 나의 소망이 망국의 사람들을 지웠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영원히 소멸시켰다.

전쟁이 나의 안온한 삶을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할 요소였던 것은 맞다. 하지만 예견했던 대로 현실이 되는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세요, 라니아. 가장 먼 곳으로. 저는 이곳에 머물다 가겠습니다.'

시안이 했던 마지막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그건 내 평정을 갉아먹었다. 시안은 다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잔인한 짓을 벌일지 훤히 들여다보고서, 저항할 권한을 가지지 못한 자답게 최후에는 나를 부드럽게 떠밀었다.

존재 자체가 나의 새로운 세계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그와 마법사들은 내가 두고 온 세계에 매몰됐다.

우리는 너무도 먼 길을 돌아왔고, 그 간극에서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안은 내가 이기적이라고 했지. 맞는 말이다. 나는 끔찍하게 이기적인 사람이다.

에온에 관해 서술한 장에 오래도록 시선을 고정하고서, 짙은 설움에 잠겨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나를 건져 줄 때까지.

"저기, 혹시 이 책 다 읽은 건가요?"

내 앞에서 어느 발소리가 멈추었다. 얇은 손가락이 내가 다 보고 옆에 쌓아둔 귀족 계보서를 가리켰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은자색 머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고가 반쯤 정지한 채로 시선을 살짝 내렸다. 직계 황실로부터 촌수가 멀어 약간 갈색이 섞인 적안과 마주쳤다.

내가 지금 누굴 만난 건지 제대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볼가를 타고 눈물부터 흘렀다. 나는 놀란 나머지 멍하니 굳은 얼굴을 하고선 소리도 없이 울었다.

무려 14년 만에 보는, 살아있는 르쉬네 제드릭 할레시온이었다.

"무, 물어봐서 미안해요! 울지 마요!"

열두 살의 르쉬네가 당황하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따뜻했다. 분명 산 사람의 체온이었다. 정말로, 이게 꿈이 아니란 말이지. 아니, 꿈인가?

"아......죄송해요, 너무 기쁜 일이 있어서 그만......공녀님 때문에 우는 건 아니에요."

소매로 눈가를 슥슥 닦아내며 목 멘 소리로 해명했다. 르쉬네는 그런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로즈마리 향이 물씬 나는 그 천조각을, 나는 훌쩍이며 조심스레 눈에 가져다 댔다. 그만 울고 싶은데 아이의 몸이라 그런지 뜻대로 되질 않았다.

"너무 기쁘면 울 수도 있죠, 뭐. 더 울어도 괜찮아요, 영애가 우는 동안 외롭지 않게 제가 곁을 지켜줄게요."

이 사람은 르쉬네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상냥할 수가 없다.

"아니에요, 집에 갈 시간이 지나서 나가 봐야 해요. 그 책, 다 가져가셔도 좋아요."

하지만 나는 그녀와 오래 함께 있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얼른 발을 뺐다. 손수건을 돌려주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르쉬네가 의아한 듯 뒤에서 나를 몇 번 불렀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는 르쉬네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지도 못했다. 언젠가, 먼 훗날에라도 다시 만나면 그 때는 아무렇지 않게 초면인 척 해야지. 그렇게 다짐했다.

1050년의 가을, 나는 라인하르트가 아닌 르쉬네와 스치듯 마주했다. 그 외의 모든 것이 평온했다.

============================ 작품 후기 ============================

완결까지 이제 앞으로 5편 남았습니다. 이제 나올 반전은 두어 개 정도 빼고 다 나온 것 같네요. 다음 편 연재는 26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하겠습니다.

+두고 온 세계=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의 세계, 새로운 세계=라니아 이셀로의 세계 입니다.

++이셀로라는 라스트네임을 보고 일전에 제가 뜰에 올려둔 해리포터 AU 인물설정에서의 라니아의 라스트네임을 떠올리셨다면, 정확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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