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6 16. 겨울의 종말 =========================
사라진 사람들을 제하고는 대부분 르쉬네처럼 그대로였다. 마치 내가 아주 긴 꿈을 꾸고 일어난 거라고 주장하듯, 그들은 멀쩡하게 살아갔다.
1057년 11월 7일, 르쉬네는 죽지 않았다. 3황자의 아들 율리시즈와 다른 귀족 자제들도 별 탈 없이 잘 지냈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 정말로 이야기가 바뀌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날 나는 이유 모를 울컥함에 겨워 소리내어 울었다. 그냥 한없이 서러웠다. 나는 소중한 사람들을 끝내 지켜내고야 말았다. 비밀 같았던 마법사와 무너진 왕국,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 그 밖에 내가 인지하거나 잊어버린 수많은 무언가를 제물로 바쳐서.
끝내는 내가 이겼다.
방향 잃은 비탄이 내 속을 끝없이 휘돌았다. 아득한 빛 앞에서 나는 눈이 멀었다.
시안, 그 세계의 해악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였어요.
***
"엇, 라니아 영애! 안 오신다 하지 않으셨어요?"
황궁에서 열린 대귀족 자제 대상의 야외 파티에 참석한 내게 르쉬네가 말을 걸었다.
"심심해서 그냥 와 봤어요."
"그래요? 아무튼 다행이에요, 친한 사람과 함께 파티를 즐길 수 있게 돼서. 저기 맛있는 초콜릿이 있는데 같이 가지러 갈래요?"
"그러죠."
르쉬네는 유쾌하게 웃으며 내 팔짱을 끼고 걸었다. 나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르쉬네와 친해졌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나 에단 같은 사람들은 일부러 피해다녔다. 지금도 내가 두고 온 세계의 어딘가에서 비극에 잠겨 있을 또다른 그들이 자꾸 떠올라서였다.
나는 이곳의 그들과 두고 온 세계의 그들 중 누가 진짜인지 알고 있다. 나의 비극은 그것에서 비롯된다. 내게 주어진 가장 끔찍한 대가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어스름이 푸릇하게 깔렸다. 공기가 싸늘해질 무렵 차양막 아래 마련된 야외 만찬장에 불이 켜졌다. 참석자들은 전부 큼지막한 테이블에 합석해 저녁 식사를 했다. 한때 나와 친했고, 제각각 처참한 결말을 맺었던 사람들이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었다. 나는 그 광경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식사를 마치고서는 완연한 밤이 올 때까지 르쉬네가 몰고 온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전생의 나로 인해 파멸을 맞았던 알피어스 하시펜도는 아무 것도 모르고 습관대로 내게 포도 주스를 권했다. 내가 기억을 떠올리며 멈칫하자 그는 내 행동을 오인하고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남에게 줄 잔에 독 넣는 취미는 없습니다. 그래도 찜찜하시다면 거절하십시오, 제가 마실 테니까."
아직 앳된 얼굴이 말의 진지함을 반감시켰다. 나는 살짝 웃고 잔을 받았다.
"오해하게 해드려 죄송해요. 제가 망설인 이유는 그게 아니었어요."
"그럼 뭐 때문에......?"
알피어스가 이상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나는 능숙하게 변명했다.
"다른 분께 음료수 잔을 건네받는 게 처음이라서요."
타인에게 뭔가를 자꾸 챙겨주는 게 그의 버릇임을, 여기서는 모른 체 하는 게 정답이다.
"뭐,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알피어스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포도 주스가 담긴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는 하는 짓마저 똑같은 이 세계의 알피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숨결 섞어 짧게 웃었다.
에단이 한참 전부터 나를 묘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그를 일부러 피한다는 걸 대충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저 눈을 내리깔고 잔에 입을 댔다.
다행히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형 에셀레드에게 신경을 쏟느라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그는 열등감이라는 늪 속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에게 최고의 복수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를 죽이고 형을 추방해서 겨우 얻어낸 해방을 내가 수포로 되돌려 버렸으니까. 그걸 당사자가 깨달을 리 없다는 점은 나를 기쁘게 했다.
혹시나 해서 둘러봤지만 로엔세르 쌍둥이는 이 파티에 없었다. 그들은 올해 스물두 살로, 여기 오기에는 나이가 조금 많았다. 이번 생에서는 아직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아마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나를 배신하고 죽음으로 몰리게 둔 것은 단지 내 편이 되었을 때 수지 타산이 안 맞기 때문이었을 테고, 이제는 그런 것이 무의미하기에 세계가 뒤집혀도 그들은 온전할 수밖에 없다.
아홉 시가 넘어갈 무렵, 하도 말을 많이 한 탓에 목이 잠겼다. 오늘은 르쉬네가 함께여서인지 드물게 열심히 활동했다. 나는 이만 양해를 구하고 먼 구석의 텅 빈 테이블로 갔다.
조명에서 먼 곳이라 어두침침했다. 살짝 헤멘 끝에 음료수를 담은 유리병과 새 잔을 발견했다. 잔을 꺼내고, 이어서 병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다른 사람의 손과 닿았다. 고개를 들었다. 눈이 딱 마주쳤다. 어두웠지만, 나는 분명히 얼굴을 알아봤다. 두고 온 세계에서의 내가 열다섯 살까지 굉장히 많이 만났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야, 라인하르트.
"황태자 전하?"
내게 불린 라인하르트는 놀란 눈을 하고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를 알아봐서 놀란 게 아닌 것 같았다. 굉장히 슬퍼 보인다면, 착각일까?
"전하께서도 쉬러 오셨나요?"
멍하니 직시하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어서 내가 먼저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든 다시 만나면 못 버티고 무너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그냥 약간 반가웠고, 많이 아렸지만 참을 만했다. 그런데 나를 처음 본 라인하르트는 왜 나보다도 아픈 표정을 짓는 것인지.
"......아."
어째서 영문 모를 눈물을 떨구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왜 이러지."
라인하르트가 당황하며 급히 눈물을 닦아냈다. 자각 없이 흘린 거였나. 두 세계의 그가 무의식으로 연결되어 있기라도 하다는 건가. 비상식에 하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별 거부감 없이 이런 추측부터 하게 됐다.
어찌되었든 이 어색한 상황은 수습해야겠지. 나는 그의 갑작스런 감정 표현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꽉 막혀 잘 나오지 않았다. 당혹스러웠다. 라인하르트가 어리둥절하게 나를 살폈다. 손이 머뭇거리다 다가와 내 볼을 살짝 쓸고 물러났다. 그제서야 나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울음은 쌓아둔 양과 기간에 비례해 변덕스럽고 충동적이어서, 작은 계기만으로 자제력을 잃고 튀어나오곤 한다. 나는 특히 그랬다.
"왜, 왜 그런 눈을 해."
반쯤 떠밀리듯, 원망의 말을 내놓으며 소리내어 울어버렸다.
"네가 뭔데, 네가 뭘 안다고 울어......"
라인하르트가 쩔쩔매는 게 흐릿한 시야에 잡혔다. 자기가 뭘 잘못했기에 나를 울린 건지 감도 안 잡힐 거다.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시절의 그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동일인에 가깝다면, 그는 내게 일단 사과할 것이다. 그리고 위로하겠지.
"미안, 미안하다. 울지 말아."
그래, 이렇게.
나는 오차 없이 들어맞은 예측에 한층 서러워졌다. 눈물이 도통 멈추지 않았다.
"무엇이든 내 잘못이라 할 테니 눈물을 거둬."
나직하게 달래는 목소리가 사무쳤다. 내 기억 속 어린 날의 그도 분명 이처럼 다정했는데.
우리는 정말 많이도 어긋났었구나.
나 때문인지 금세 눈가에서 물기를 말끔히 거둔 그는 억지로 소리를 눌러담는 내 어깨를 조심스레 토닥였다.
나는 차차 진정했다. 그리고 그에게 무례를 저질러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괜찮다고 해 주었다.
귀족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에게 다가올 즈음에는 내가 이미 그 자리를 뜬 뒤였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그가 참석하는 사교 행사에는 아예 걸음하지 않았다. 우리의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찰나로 흩어지도록.
라인하르트는 이제 그만의 인생을 살 때도 되었다.
***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샤카르가 첫 가출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수도에 흘러들어온 그는 두고 온 세계에서와 다름없이 정보상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오 년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기반을 잡아 잘 살고 있었다.
샤카르를 다시 만날 기회는 분명 오 년 전부터 수없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하늘에 박힌 별의 갯수보다도 많이 망설였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자주 뒤바뀌는 결정이 나를 괴롭혔다. 세계를 건너와서까지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가까이에 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는 사실상 나로 인해 죽었다. 내가 그의 인생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평생 별 탈 없이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나를 사랑했기에 나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내 존재가 비극으로 빠져드는 열쇠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내 곁에 남았다. 나는 그게 무서웠다. 그 끔찍한 일이 또 반복되면 어쩌나, 하고.
1057년 11월의 잔혹한 숙청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확신을 가졌다. 샤카르는 이제 나의 비극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비극은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이라는 이름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라니아 이셀로에게는 황위계승권도, 정치적 위기도, 운명도 없다.
하여 11월 18일, 나는 샤카르를 직접 찾아갔다.
나는 거리 가장자리에 차곡차곡 쌓인 붉고 노란 낙엽에 눈길을 주며 걸었다. 가을은 고즈넉하고, 하늘은 파랬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계절이 선선하게 내게 불어왔다. 세상에 다시 없을 경험이었다. 걸음을 조금 가볍게 했다.
빌데론 거리의 뒷골목으로 한참 꺾어들어가다 허름한 외양의 정보상 건물을 발견했다. 다행히 위치가 변하지 않았다.
곧 부서질 것처럼 낡은 나무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에서 퉁명스런 문지기가 나왔다.
"누구슈?"
차분하게 말했다.
"정보상에 의뢰하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다. 라카스를 불러 줘."
"굳이 그 인간을 콕 찍는 의뢰인은 처음이다만은......일단 알겄수."
문지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도로 들어갔다. 나는 누군가의 향기가 날 것만 같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기다렸다. 뒷골목 언저리지만 주변이 정리되어 있어 내가 선 곳에는 햇빛이 잘 들어왔다. 한산한 고요가 시간을 채웠다.
심장이 초침보다 한참이나 빨리 뛰었던 탓일까? 기다림은 짧았지만, 내게는 한 생애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이 다시 열렸다.
손바닥만 덮는 장갑을 끼고, 손목에는 금빛 링 팔찌를 찬 남자가 문을 닫고 나왔다. 헐렁한 셔츠에 대충 묶은 꽁지머리가 익숙하게 눈에 들어왔다.
샤카르 멘데로프다. 그렇게나 아프게 죽어갔던 사람이 만들어진 세계에서 허상으로 다시금 피어났다. 그는 태양 같은 금안을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어떤 복잡한 감상에 젖었다. 그것이 그리움의 해소인지, 반가움인지, 애상인지, 그도 아닌 무엇인지는 차마 알 길이 없었다. 모두 다인가.
규정되지 않은 감정이 흘러넘쳐서, 이성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그가 첫 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세 발짝 빠르게 다가가 안았다. 시원한 향이 물씬 풍겼다.
따뜻한 체온이 그가 살아있음을 실감케 했다. 정말이지 믿기지 않았다. 안 울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샤카르는 엄청나게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나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뭐야, 이번에는 사연 많은 의뢰자야? 골치 아프게 됐네."
그는 그냥 몇 마디 혼잣말을 내놓고는 가만히 있었다. 그게 너무 고마웠다. 울음 틈새로 작게 웅얼였다.
"보고 싶었어요. 나 진짜, 당신 너무 보고 싶었어."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내가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했는지 몰라.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생각나질 않아. 그러니까 그냥 하나만 할래요."
그가 나를 떼어놓기 전에 알아서 한 발 물러났다. 다행히 과하게 울지는 않아서, 얼굴이나 목소리가 아예 엉망은 아니었다. 이에 안도하며 잠시 진정하고, 어느 정도 됐다 싶을 때 고개를 들었다. 샤카르는 살짝 묘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가을이 청아했다. 비극으로 막을 내렸던 계절 대신, 낙엽이 곱게 날개를 펴는 계절이 여기 있다.
"반가워요."
나는 슬픔에 마침표를 찍고, 작게 미소했다.
============================ 작품 후기 ============================
샤카르 두 번째 외전의 마지막 문단은 이번 편의 재회를 암시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완결까지 앞으로 네 편 남았습니다. 마지막까지 함께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두어 개 남았다던 반전 사실 별 거 없습니다. 하나는 오늘 나왔고, 다른 하나는 99편에 있는데 그다지 놀랍지는 않아요. 아마도. 그저 알아내기조차 힘들지도 모르는 소소한 반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