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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97화 (97/102)

00097 16. 겨울의 종말 =========================

샤카르는 내가 사람을 착각한 줄 알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덕분에 나는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벌었고, 의뢰 내용을 묻는 그에게 그럴 듯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사람을 찾고 싶어요."

나는 샤카르에게 샤카르를 찾아달라고 의뢰했다. 물론 이름을 밝히지 않고 여러 특징만 두루뭉술하게 말해주었기에 들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어느 날에는, 햇살이 말간 창가 자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마셨다.

"그래서, 그 인간을 찾아내야만 하는 이유는?"

샤카르의 질문하는 음성과, 펜촉이 종이를 쓸고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힘찬 필체가 검푸르게 종이 위에 수놓인다. 그걸 멀거니 구경하느라 살짝 긴장이 풀려 턱을 괴었다.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반쯤 웅얼였다. 샤카르는 그런 나를 슬며시 떠보았다.

"어떤 말인지는 물어보면 안 되나?"

조금 망설이다가, 푸스스 웃으며 고백했다.

"......사랑해요."

샤카르가 순간 멍해져서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라고 말해줄 거예요."

내가 장난하듯 한 발 빼자 그제서야 긴장이 탁 풀렸는지 인상을 쓰면서 한숨을 쉬었다.

"어이 의뢰인, 앞으로 주어는 확실히 하자."

"그러죠, 뭐."

지난 생에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것보다는 약간 앳된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대답했다. 샤카르는 또 숨을 길게 뱉어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레온은 내가 한층 밝아졌다고 평했다. 그 때는 한창 샤카르와 사적으로 친밀해지던 시기였다.

"오빠도 요즘 꽤 좋아보여. 얼마 전에 연애 시작한 것 같던데, 그것 때문이야?"

"헉,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우린 분명 완벽한 비밀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다 아는 방법이 있어요."

"이런......"

나는 실력 좋은 정보상 라카스에게서 접수한 사실을 까발려 그가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다. 결국 레온은 얼마 안 가 다른 대화 주제를 꺼냈다.

시간은 빨랐다. 내가 열일곱 살이 되자, 샤카르는 정보가 너무 적고 내 의지도 묘하게 약해서 의뢰를 더는 수행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또한 애초에 내가 찾는 사람이 존재하긴 하는지 의문스러워했다. 슬슬 눈치챌 때가 되기는 했다. 그래서 다시 일 년이 지나 성년이 되던 날, 나는 진실을 밝혔다.

"꿈을 꿨어요."

"꿈?"

"네. 딱 지금 시대의 할레시온을 배경으로 하는, 굉장히 길게 이어진 꿈이 있는데......거기서 난 황족이었어요."

대신 어느 정도의 비밀은 남겨두었다. 전부를 알려주었다가는 샤카르가 혼란스러워 할 게 뻔하니까. 그 세계만은 영원히 숨기기로 했다.

"그곳에서의 나는 이십 년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친해졌고, 지켜내지 못했어요. 정말 소중했는데 끝내는 다 놓치고 말았죠.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선택은 그들에게 가장 끔찍한 구원이 되었어요. 물론 나한테도요."

허무맹랑한 헛소리라 치부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진지한 눈을 하고 내 말을 경청했다. 따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사실 이 때 굉장히 감동했다.

"그 꿈이 계속 내 주위를 맴돌아요. 하필이면 거기 나온 사람들 중 다수가 실제로 현실에 살고 있어서, 이야기가 끝난 지는 한참 지났지만 아직 어디가 진짜인지 헷갈려요. 당신을 찾아간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어요. 그 꿈 속에서 난 당신과 똑같은 사람을 사랑했거든요."

폭풍 같았던 세월을 한낱 꿈으로 포장해 설명했다. 4월 10일, 해 지는 저녁이었다. 노을빛을 받아 한층 찬란해진 금안이 내 말 끝에서 살짝 흔들렸던 것도 같다.

"......그랬냐."

그는 한참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나지막이 반응하곤 다정한 언어로 나를 토닥였다.

"이 이야기의 사실성을 입증할 아무런 증거가 없어도 난 널 믿을 거야. 안 좋은 기억이 사람을 얼마나 오랫동안 쥐고 흔드는지 아는 사람으로서 충분히 공감이 가거든. 힘들었겠다, 너. 내가 감히 상상하지 못할 만큼이겠지."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더 확실하게 이해하려 노력할 거야. 그런데, 하나만 물어봐도 돼?"

갑작스런 요청이었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그는 이내 조금 슬프게 물었다.

"그럼, 나는?"

뜻을 해석하지 못해 당황하는 사이 그가 고쳐 말했다.

"꿈 속에서의 나를 사랑했다며. 그럼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는 아니야?"

내 당혹감이 급격히 짙어졌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샤카르는 이번만큼은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투였다.

"내가 네 꿈 속의 샤카르일 수는 없는 거야?"

세계를 건너온 이후 십수 년이 지나는 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한 문제를 그가 깊숙히 파고들었다. 일찍이 예견했던 바다.

나는 여전히 정답을 몰랐다. 그러나 하나는 확실했다. 표정을 풀고 입술을 열었다.

"솔직히 완벽한 동일인이라고는 생각 못 하겠어요,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너무 달라서.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줘요."

작게 심호흡하고 이어서 내놓았다.

"나는 어느 세계에서든 변함없이 당신이 좋아요."

샤카르는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이 순간을 놓치면 애매해질 것 같아서, 나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끌어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예전에 내가 그랬죠? '그 사람'을 찾으면 사랑한다고 말해줄 거라고."

귓가에 고동 소리가 둔중하게 울렸다. 하늘에 흩뿌려진 주홍색 노을 자락이 우리를 현실로부터 말끔히 분리했다.

"여기 있네요, 내가 찾던 사람."

울기 싫어서 눈을 접어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사랑해요."

노을에 숨어 속삭였다.

그 날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때때로 나를 들쑤셨다. 이제 이 세계에서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비극이 가끔 악몽이 되어 찾아왔다. 샤카르에게 변명 삼아 했던 말은 사실 거짓이 아니었던 셈이다.

샤카르가 나를 가로막았다. 그를 관통한 칼날 끝에서 검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 어깨를 세게 붙잡고 신음을 삼키며 눈물도 삼켰다.

우리는 함께 나락으로 떨어졌다.

'다행이야, 내가 널 만나서.'

그는 나를 구하려다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던 순간마저 이해 못할 소리를 했다.

'사랑해.'

그리고 멋대로 이별을 말했다.

'사랑한다.'

숨결이 내 품에서 사그러들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두려움이 나를 잠식했다. 새까맣게 뻥 뚫린 밤하늘이 빠르게 녹아내리더니 나를 뒤덮었다. 숨이 턱 막혔다.

"헉!"

헛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가슴께를 손으로 꾹 눌렀다. 꿈이라는 걸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는데도 너무 처참해서 죽을 것 같다.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라니아? 왜 그래, 또 악몽 꿨어?"

곤히 자다가 나 때문에 깬 듯한 샤카르가 놀라 물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덜덜 떨며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살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조금은 안심이 됐다. 샤카르는 진정하려고 애를 쓰는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팔을 뻗어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아, 괜찮아. 나 여기 있잖아."

나보다도 따뜻한 체온이 와닿았다. 울먹이며 그의 허리를 둘러안았다. 그는 아이를 달래듯 내 등을 느리게 토닥였다.

"내가 잘못했어......그러니까 가지 마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횡설수설했다. 샤카르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주며 낮게 확언했다.

"안 가.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약속해 줘요."

"그래, 약속. 피곤할 텐데 더 자라. 아직 이른 아침이야."

"자면 또 당신이 죽는 꿈을 꿀 거예요. 싫어."

"......알았어. 그럼 잠들진 말고 이대로 있자."

그는 나를 더 꼭 끌어안았다. 안온했다. 그의 목소리도, 체온도.

나는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숨만 좀 고르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다시 잠들어버렸다. 겁낸 게 무색하게 이번에는 꿈 안 꾸고 잘 잤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의 색이 아까와 조금 달랐다.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다. 내가 깬 걸 확인한 그가 손가락으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품에 파고들어 바스락대던 나는 고개를 빼꼼 들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까 그 꿈은 잊고, 좋은 아침인 걸로 할까?"

"그래요, 좋은 아침."

씩 웃는 그를 마주한 나도 살포시 미소지었다.

시계를 보니 늦은 아침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궁정 회의에 참석해야 할 사람이 왜 여태 여기 있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입궁 안 해요?"

침대에 걸터앉아 갈아입은 셔츠 소매 단추를 잠그며, 그가 장난스레 대답했다.

"네가 아무 데도 가지 말라며. 그래서 쨌어."

"그건......정신이 없어서 아무렇게나 한 말이었어요."

"그런 것치곤 엄청나게 진심이던데? 거역하면 세계 끝까지 쫓아가서 한 대 칠 기세였다고, 너."

나는 그의 놀림에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끙 소리를 내며 인상을 썼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만 열리는 귀족 회의에 불참했다 이거죠?"

"응. 나 오늘은 교활한 놈들 사이에서 머리싸움 안 해도 돼. 야호 신난다!"

그가 얄밉게 기뻐하며 머리를 고쳐 묶었다. 여전히 솜씨가 엉망이었다. 결국 내가 그를 붙잡고 제대로 다시 묶어줬다.

준비를 마친 그가 먼저 침실에서 나가고, 나는 잠옷에서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아침 정돈을 한 뒤에 나왔다.

식탁에 마주앉아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잠이 덜 깨서 몽롱한 상태로 수프를 떠먹다가 한 방울 흘리자 샤카르가 킬킬댔다. 내 모습이 꼭 겨울잠 자다 끌려나온 여우 같단다. 그러는 그도 말 끝나기 무섭게 샐러드를 떨궈서, 똑같이 놀려줬다.

"칠칠맞군요. 도토리 흘린 다람쥐 같아요."

"이, 이건 너 팔베개 해주다가 팔에 쥐나서 그런 거거든?"

"당신이 언제 나한테 팔베개를 해줬어요? 안아준 것밖에 기억 안 나는데."

"잠결이라 몰랐겠지!"

"변명은 좀 그럴 듯하게 하는 게 어때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일부러 꼼꼼하게 반박해주자 그가 더는 뭐라 하지 못하고 입에 샐러드를 쑤셔넣었다. 그 대목에서 빵 터졌다. 샤카르는 마구 웃는 나를 잔뜩 골이 난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무하다, 정말. 나는 너 때문에 일도 내팽개쳤는데."

"아까 신난다고 함성 지르던 사람은 어디로 갔죠?"

"아, 진짜!"

샤카르는 끝까지 내게 한 마디도 못 이겼다. 투닥대는 사이 메인 요리가 나왔다.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히 식사했다. 사용인들은 이제 이런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해져서, 전혀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시중을 들었다.

오후에는 함께 서재로 가 책을 읽었다. 중간에 황궁에서 온 전령이 샤카르에게 불참 이유를 묻고 갔다. 그는 대단히 불만스런 표정을 하고 툴툴거렸다.

"백작위 물려받고 나서 정보상 나온 게 제일 후회돼. 작위 버리고 정보상에 눌러앉았어야 했는데......어휴. 성가신 귀족 같으니."

"돌아가신 전 백작께서 들으면 뒷목 잡으실 소리예요, 그거."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조곤하게 대꾸했다. 샤카르는 내 앞에 앉아 다시 책을 집어들었다.

"벤은 좋아할걸? 쓸만한 인간이 돌아왔다고."

"자신감 넘치네요."

"그럴만하잖냐. 나 꽤 똑똑해."

"알아요."

우리는 짧게 웃었다. 그걸 끝으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둘 다 독서에 집중하려 했지만, 몇 마디 주고받는 동안 분위기가 깨져서 쉽지 않았다. 결국에는 동시에 책을 덮었다.

"산책이나 갈까?"

나는 그의 제안에 냉큼 동의했다.

봄은 아직 태양을 오래 붙잡아두지 못했다. 꽃이 만개한 벚나무길 사이로 해가 진다. 모처럼 번화가 바깥으로 나와 걷는 한산한 길은 구석구석 다 예뻤다.

샤카르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공기가 달았다. 겨울이 종말하고, 봄이 피어나 모든 것이 새로워진 탓이리라. 아마도.

불그스름하게 물든 세상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마음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절벽 너머 먼 곳에서 파도가 아득하게 너울지듯이.

천천히 딛는 걸음이 그와 함께여서 즐거웠다. 이렇듯 사랑은 나의 전부였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생명을 잃고 다시 부서질 것이다. 이번 생 자체가 사랑을 전제로 시작되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모든 것을 감내하겠다.

"너랑 걸으니까 좋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그가 곁에 있기에.

"나도 그래요."

꽃잎을 품은 바람이 불었다. 연분홍 잎 하나가 내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그가 멈춰서서 그걸 떼어내주었다.

시선이 허공에서 미묘하게 얽혔다. 이럴 때 언제나 결말은 같다.

샤카르가 내게 키스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폐허 속에서 기꺼이 웃었다.

나는 허상 속에서 영원히 행복했다.

============================ 작품 후기 ============================

아무것도 없는 것 속의 모든 것. 본편 완결입니다.

아직 외전과 에필로그가 남아 있으므로 완전한 완결은 아닙니다. 98~99편(브릿지 6), 100편(에필로그)가 30일 자정부터 하루에 한 편씩 올라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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