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8 Bridge 6. The eight : 그들은 살아남고 싶었다 =========================
사람은 스스로 운명을 만든다.
- 코르넬리우스 네포스
***
1. 라니아, 비극에 관하여.
레비욘 가셋수트 리우네아는 말했다, 보통 전생을 기억하는 여행자는 소망의 진실을 알아도 다시는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고.
라니아는 쉽게 납득했다. 소망의 대가를 이미 한 번 뼈저리게 경험한 자가 또다시 그 끝없는 나락에 발을 들일 리 없음은 당연했다. 지독한 가난과 불행한 최후라는 대가에 시달린 윤하린 또한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은 소망을 두 번 사용하는 예외가 되리라고, 라니아는 생각했다.
라니아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남고 싶었다. 일부의 사람에게 악녀가 되어서라도. 그렇게 죽음을 넘어서 운명을 깼다.
윤이설은 윤하린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극은 스스로가 선택한 끝에 다가온 인과지, 윤하린이 몰아세운 길이 아니었다.
라니아는 죽음 이후 황가와 귀족, 운명에 대한 복수심도 접었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복수할 대상도 없었기에.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이 끝내는 다른 사람에 이어 세계마저 사랑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비극은 현실로 찾아왔고, 라니아는 모든 증오를 없던 일로 돌렸다. 탓할 자는 오로지 자신뿐이었으니까.
"내가 전쟁으로 얼룩진 세계에 두고 온 사람들이 있어요."
라니아가 물 마른 분수대에 걸터앉아 여상히 털어놓았다. 샤카르는 우수에 잠긴 그녀의 얼굴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유독 옅고 아스라했죠. 바람보다는 차라리 여우비 같았어요."
시처럼 읊는 목소리가 석양의 고요와 닮아 있었다.
"구원해주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결국에는 비극 속에 버려두게 되더군요. 난 어쩔 수 없는 악인인가봐요."
낙엽 같은 미소 끝에서 쓴 맛이 느껴졌다.
"그 놈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는 것 자체로 죗값을 치르면 돼."
샤카르는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라니아는 입가만 조금 끌어올렸다.
"그렇게 넘어가기에는 그 사람의 슬픔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렸는걸요."
"그만큼 그 놈도 네 비극을 잘 알겠지."
"......"
"어쩌면 그 놈도 너를 생각하면서 자책하고 있을지 몰라. 네가 그렇듯이."
"그럴까요."
과연 시안은 정말로, 내게 또 하나의 대가를 쥐어준 죄를 곱씹고 있을까요. 그와 나는 끝내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서로에게 저주받았을까요. 라니아는 뒷말을 생략하며 허공에 조금 뜬 발을 앞뒤로 살살 내저었다.
2. 샤카르, 행복에 관하여.
자유를 사랑했던 소년은 유능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슬슬 일상이 무료해지던 무렵 어딘지 신비로운 분위기의 귀족을 만났고, 천천히 가까워졌다. 의뢰인이었다가, 친구였다가, 연인이 되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였다. 모든 과정은 평범했고 자연스러웠다.
셰카이나를 잃고, 아버지를 잃었을 때 라니아는 그의 마음에 파인 상실의 깊이를 온전히 헤아렸다. 마치 그보다 더한 것도 겪어본 사람처럼. 이윽고 라니아는 혼자 남은 그에게 새로운 가족이 되어 주겠다고 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를 사랑했다. 신기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 라니아는 기적 같은 사람이었다.
샤카르는 라니아의 지저에 자리잡은 설움도 보듬어주고 싶었다. 그게 아주 크고 짙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얼마가 걸리든 그녀 곁에서 함께할 테니.
"이번만큼은 끝까지 행복하고 싶어요. 도와줄래요?"
순백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라니아가 말했다. 샤카르가 그녀 손에 지그시 입맞췄다.
"당연히 그래야지."
3. 시안, 비밀에 관하여.
존재가 희미했던 이름 없는 왕손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진 이상, 이제 살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시안 리델라 에온과 리데르흐 히엘로, 두 개의 이름으로 인해 그는 가시만 잔뜩 돋친 길에서마저 살아남아야 했다. 그는 두 이름을 증오했다.
어린 날에 들은 유언을 받들어 왕국 재건을 목표로 삼았다. 최초에는 라니아를 이용하려 들었고, 그 다음에는 라니아를 망가뜨릴 자신을 두려워해 기억을 지웠다. 다시 여섯 해가 지나고선 과거의 망각이 라니아를 죄책감 없이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추정에 더 무게를 두고, 그녀를 제 일에 끌어들이기 위한 그물을 쳤다. 그리고 라니아가 자신의 체향을 감지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부터 갈등했다. 가을이 오자 주체할 수 없이 후회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 과거에 대한 후회는 거두겠습니다. 기억 또한 영원히 꺼내지 않겠습니다. 작별 준비는 이 정도로 족할까요?'
시안은 당치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평온을 가장했다.
'가세요, 라니아. 가장 먼 곳으로. 저는 이곳에 머물다 가겠습니다.'
울음을 머금고 웃어야만 했다. 실은 레비욘과의 대화를 상당 부분 엿들었다. 게다가 책 '세계'와 '주황의 파도'의 내용도 라니아보다 먼저 알았다. 반란이 실패하던 그 날 라니아를 구한 뒤 굳이 곁에 머물렀던 것도 일말의 이기적인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이타적인 결정을 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를 철저히 배제했다.
시안은 그 상황에서 라니아가 벌일 짓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추리해냈다. 그럼에도 억지로 붙잡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명감인가, 배려심인가, 벌을 자처함인가, 전부 끝내기 위함인가. 시안은 무지에 휩싸였다.
마침내 라니아는 그를 두고 영원히 떠났다.
높푸른 천공을 공허히 응시하며, 시안은 초연하게 지시했다.
"공격을 재개하세요. 지금쯤이면 병력이 대공녀 쪽으로 이동했을 겁니다."
하일은 거친 바람에 펄럭이는 망토 자락을 손으로 붙잡으며, 마찬가지로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격전지에서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뒀다.
며칠 후 라니아가 황태자의 손에 죽임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일과 엘피샤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은 길게 눈을 감았다.
그는 라니아의 비극을 가장 외로운 형태로 종결시킨 자신을 자책했다. 자신이 바로 알려주어도 됐을 세계의 비밀을, 굳이 레비욘을 만날 때까지 기다리게 하며 최악의 상실을 몇 달이나 되새기게 두지는 말았어야 했다. 아니, 차라리 그 날 살리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랬다면 그녀의 소망이 상당히 달라졌으리라.
1063년이 끝나기 전에 시안은 에온과 프리제를 완벽히 되찾았다. 비록 실패했을지언정 라니아의 반란은 그 자체로 할레시온 내부에 어느 정도 타격을 주었고, 라니아의 희생으로 큰 기회도 하나 잡은 탓이다.
하일은 프리제의 영토를 엘비올리스에 편입시키려는 어머니 샤샤 왕녀에게 맞섰다. 결국 프리제는 에온에 귀속됐다.
반란군은 리우네아와 협력해 재전쟁을 벌여 엘피샤의 왕국인 시힐레 또한 되살렸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였다. 각자는 오랜 시간을 들여 나라의 기강을 다졌고, 유민들을 불러모았다.
시안은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미리 찾아둔 살아남은 에온 왕족 중 가장 총명한 자를 후계 삼고 나자 정말로 더는 할 것이 없었다.
기억은 무뎌졌다. 화려하게 피었던 비밀은 모두 졌다. 어린 시절 마음을 두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목표를 위해 살아왔는지 잊었다. 비로소 끝이었다.
햇살이 적당히 들어오는 왕좌의 방 안, 시안은 홀로 드넓은 바닥 중앙에 섰다.
하얗게 웃었다. 겨울의 한복판은 무언가를 매듭짓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자신의 부재로 이룩했을 라니아의 새롭고 평화로운 세계가 궁금했다. 이 세계에 남은 자신은 절대 맞이할 수 없는 아침이 그곳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리로 가려 소망 같은 잔혹한 것을 사용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 세계 역시 비극의 잔재가 가득할 텐데 가서 무엇하겠는가? 시안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수많은 기억을 혼자 떠안고 있을 라니아를 상기하며 마지막까지 편안하지 못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자신의 결말을 내기에 어떤 마법이 좋을지 고민했다.
이윽고 그는 작게 읊조렸다.
"라 웨스타 이트."
그건 언젠가 하일에게 무자비하게 가했던 고유 마법의 시전어였다. 생애 최후로 쓰는 마법이 스스로를 향할 줄이야. 그는 살짝 허무해졌다.
낙화하듯 무너졌다. 바닥과 닿은 채로 숨이 멎어갔다. 수없이 얽힌 비밀의 편린과 함께.
라니아. 이것이 그대는 영영 모를 나의 결말입니다.
4. 라인하르트, 후회에 관하여.
최대한 아프지 않게 보내주려 했는데, 멍청하게도 망설이는 바람에 검의 향로가 심장을 빗겨났다. 라니아는 피 흘리며 고통스럽게 유언했다. 그래도 그에게 죽게 되어 다행이라고. 다행, 이라고 했다.
그는 참담히 절망했다.
그리 갈 거라면 내게 웃어주지는 말지. 내 손에 갈 거라면 용서하지는 말았어야지. 라인하르트가 영구히 잠든 라니아를 끌어안고 울며 말했다.
'너는 전생을 기억한다고 했지. 다음 생에는, 부디 그러지 마. 내가 없는 세상에서 전부 잊고 행복해져라.'
안일했다. 너무 안일해서, 그만 잊어버린 경고가 한가득이었다. 라니아는 자신 때문에 죽은 것이다. 분명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밖에 못 끝내나. 자신은 어째서 이다지로 무능한가. 수많은 후회가 책망을 빌어 그를 뒤덮었다.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어버린 다음에는 타인에게 칼날을 돌릴 차례였다. 전쟁은 비극의 시초였고, 그 중앙에는 그가 한때 존경해 마지않았던 아버지가 있었다.
결코 거스를 수 없었던 거대한 권력자, 황제 루인 1세가 바로 라니아의 원수였다.
라인하르트는 아주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즉위를 준비했다. 라니아가 죽을 장소로 그의 앞을 택한 것은, 그리고 그가 라니아의 뜻대로 한 것은 마지막 기회를 만들었다. 황태자에게 자신이 더는 적의 편에 서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덕에 파고들 틈이 생긴 것이다. 시대가 변했고 판세가 바뀌었음이 확연히 보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아버지를 거역할 수 있게 된 그는 칼을 빼들었다.
그는 라니아가 생전에 알아냈던 황실의 비사 중 선대 황제 오벨 3세의 독살 미수 사건을 터뜨렸다. 그 때는 이미 시간이 흘러 쇠약해진 루인 1세가 어떤 무마도 할 수 없게 된 뒤였다. 그것으로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직접 폐위했다. 본래는 반란 전 멘데로프 백작 영식에게서 입수하고, 반란 성공 시 공표하기로 했던 정보는 그렇게 늦게라도 세상 밖으로 나왔다.
에네아스 백작가를 멸하는 것도, 프리드리히 스카일러를 지옥에 처박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라니아가 제 복수를 대신 해달라 부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라인하르트는 의무를 진 양 차근히 그녀를 공격했던 자들을 도륙했다. 그 과정은 평생을 소모할 만큼 길고 힘들었다.
라인하르트는 싸움의 끝에서 자신을 파멸시키며 한 시대를 종결했다.
라니아가 두고 온 세계는 그런 식으로 저물었다.
*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네피아 황태후의 말벗으로 초대된 몇몇 귀족들 중 하나였던 라니아 이셀로는 시종이 내준 우산을 쓰고 홀로 후원을 거닐었다. 그녀는 하인의 실수로 마차 도착 시간에 착오가 생긴 까닭에 다과회가 파하고 나서도 귀가하지 못하고 대기하던 중이었다. 그냥 실내에 머물러도 괜찮았지만, 비만 오면 괜히 싱숭생숭해지곤 하는 기분에 산책을 하겠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온 지 약 이십 분쯤 되었다.
라니아는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 익숙하게 이곳저곳을 누비다가 별안간 누가 해사하게 웃는 소리를 들었다. 아는 목소리였다. 과연 저 멀리 갈대숲 사이에서 두 사람의 형체가 보일락말락 흐릿했다. 그들은 우산 하나를 나눠 쓴 채 다정한 밀어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르쉬네와 라인하르트가 한창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이제야 꼬인 실이 풀렸다. 라니아는 뭉근하게 미소하며 우산 속에 자신을 숨겼다. 그리고 최대한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리는 비가 소리를 지우고, 흔적도 지웠다. 라니아는 효력 없는 소망이나마 속삭여 보았다.
이제 더는 슬프지 않기를.
============================ 작품 후기 ============================
마지막 브릿지는 여덟 명의 주연이 이야기하는, 그들 각자의 엔딩입니다. 다음 편은 내일 자정에.
+이거시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