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9 Bridge 6. The eight : 그들은 살아남고 싶었다 =========================
5. 아이린, 세계에 관하여.
아이린의 세상 속 라니아는 진정한 악녀였다.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아이린은 수많은 시간을 버텨내야만 했다. 라니아가 역겹도록 증오스러웠다. 마침내 새하얗게 예쁘장한 그 얼굴이 단두대 너머로 굴러떨어지는 순간, 아이린은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목숨의 위협을 받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발발한 전쟁에 휘말려 머나먼 타국에서 죽음을 맞을 때 아이린은 큰 의문을 가졌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는가? 다 끝난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야 겨우 행복이 시작되려 했는데.
시릴만큼 푸른 적국의 왕에게 처참히 죽임당하며, 아이린은 이 허무하고 의미 없는 세계에서 자신을 내보내 달라고 소망했다.
아이린은 윤하린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곳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대로 한참 살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토록 치열했던 전생이 우스워졌다. 그녀는 사랑이든 복수든 죽음 앞에서는 무가치하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한탄했다.
소망의 대가로 이리저리 꼬인 개인사 탓에 윤하린은 딸 윤이설을 홀로 키우게 됐다. 이설은 하린에게 꽤나 의지가 되는 존재였다. 낯선 곳에서 자신과 똑닮은 어린아이와 함께한다는 것은 묘하게 위안이었다. 적어도 외롭지는 않았다.
어느 날 윤하린은 익명의 발신자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이 세계 담당의 '전달자'가 보낸 메일이었다. 소망을 사용했고 전생의 기억도 잊지 않은 희귀한 상태에서 일정 조건을 만족하여 세계의 진실을 알 자격이 생긴 것이다. 그녀는 이제 와 그다지 동요하지는 않았으나 약간은 억울해졌다. 단지 그뿐이었다.
가족들과 연을 전부 끊은 채 혼자 힘으로 두 명 분의 생계를 유지하기는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바쁜 생활 중에도 윤하린은 전생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싶다는 열망은 버리지 못했다. 새벽 시간을 활용해 소설을 써서 인터넷에 올렸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하던 것이 어느새 즐거운 취미로 자리잡았다. 소설 '꽃물 든 하늘'은 인기가 많았고, 성황리에 완결이 났다.
자신도 모르는 새 치명적인 병에 걸려 쓰러지던 날, 윤이설이 걱정됐고 '꽃물 든 하늘'은 아까웠지만 소망을 빌 기대에 부풀지는 않았다. 인생은 여기서 이만 끝이다. 윤하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남긴 소설이 딸에게 어떤 일을 불러올지 전혀 모른 채로.
*
라니아의 세상 속 아이린은 이용만 당하다 버려졌다. 그래도 에단은 자신이 좋다고 했다. 걸리는 점이 많아 일정선 이상은 다가오지도 못하는 주제에. 하여간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린이 피 흘리며 독화처럼 웃었다.
이 허무하고 의미 없는 세계에서 나를 내보내 줘. 다시 같은 소망이 아이린의 마음을 스쳤다. 과정은 달라졌어도 결과는 같기에.
6. 에단, 진심에 관하여.
에단 르웰린은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매사에 진심이었다. 기사단 동료들은 그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평했다. 머리 쓰는 것만 보면 누구보다도 완벽한 대귀족인데, 이상하리만치 정직하고 순박했던 탓에 외려 그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워했던 것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주변인은 에단을 적대하지 않았다. 흔치 않은 인물인 만큼 실컷 이용해 먹을 의도로든 그냥 순수한 접근으로든 많은 사람이 그의 곁에 모여들었다.
아주 최초에는 라인하르트가 있었다. 라니아와 르쉬네가 그 뒤를 이었다. 에단은 타고난 천성대로 그들에게 진심을 다했다. 그러나 숙청으로 대부분을 잃고 외면당했다.
잘 지내고 싶었는데, 너무 많은 사람이 그의 반대편에 있었다. 처음에는 르웰린 후작가를 원망했다. 나중에는 자신을 탓했다. 그 생각 때문에 에단은 르쉬네 가족의 시신을 거두었고, 라니아를 대하기 어려워했다.
이따금 르쉬네의 무덤을 찾아가 꽃을 두고 왔다.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었다. 꿈꾸던 대로 기사가 되었고 3기사단의 부기사단장 직책까지 거머쥐었지만 여전히 그가 가문의 후광을 입지 않고 휘두를 수 있는 권한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여 라니아의 편을 들어주지도, 후작의 뜻을 꺾지도 못했다. 뭐든지 염려를 가득 담아 방관했다. 살고 싶으면 그래야 했다. 아이린이 그랬다, 세상에는 참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다고. 에단은 그 말에 깊이 동감했다.
에단은 어릴 적부터 자신의 마음대로 무언가를 이룬 적이 거의 없었다. 필연 같은 우연이 겹쳐 좋아하게 된 아이린에 관한 것마저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굴레를 깨고 싶었다. 친구들의 세상이 무너지던 날 직접 현장에 나간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반란 진압 당일, 에단은 아버지로부터 토벌대 일부 병력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고서야 상황을 인지했다. 황태자파가 돌발 행동의 위험성이 큰 라인하르트와 에단을 정보망에 접근할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눈앞이 깜깜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관망하다 끝낼 수는 없었다. 에단은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에 무엇이 있을지 떠올려 보았다.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이, 지금껏 그렇게나 지키고 싶어했던 스스로의 안위를 포기하는 조건하에 존재했다.
이번만은 제 몫을 하고 싶었다. 하여 그는 검을 잡아, 진심이었던 우정을 지키고 산화했다. 결과적으로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는 항상 진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고. 누군가는 알아주었으면 했다.
라인하르트가 전부 실패한 그를 다시 수도로 불러들인 것은 먼 훗날이었다.
*
새로운 세계에서 그는 더 이상 친구의 반대편에 서지 않아도 되었다.
에단은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듯한 라니아에게 한때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나 곧 잊었다.
라니아는 그의 무지를 반갑게 여겼다.
7. 프리드리히, 결핍에 관하여.
야망 덩어리의 수재. 프리드리히가 어릴 적부터 달고 살던 평이었다. 타고난 머리가 있는 데다가 그 몇 배의 노력까지 퍼부어대다 보니 또래 중 그를 따라잡을 아이는 없었다. 그가 아는 한 딱 두 명, 세크네트 로엔세르와 자신의 형 에셀레드 스카일러를 제외하고.
정말이지 억울한 일이었다. 형만 아니었다면 자신은 진작에 후계자가 되었을 테다. 채 열 살이 되기도 전에 프리드리히는 형에 대한 질투와 증오를 산처럼 쌓았다. 그게 그를 스스로의 세계에 고립시켰고 이윽고 결핍을 불러왔다.
즉, 프리드리히의 만성적인 결핍은 형의 그늘에 가려 사랑받지 못한 유년에서 기인했다. 후작 부부는 굳이 피 흘리며 노력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프리드리히보다 뛰어났던 에셀레드에게 온 기대를 쏟았다. 태양 아래 에셀레드가 귀족으로서의 정치와 판단력을 배울 때 그믐달 아래 프리드리히는 암투장에서의 더러운 술수와 무자비한 행동력을 익혔다. 그는 아주 간절하게 꼭대기에 올라서고 싶었다.
할레시온의 수도 귀족 사회는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 달리 말하면, 그물의 양쪽 끝만 어떻게든 손에 쥐면 제멋대로 주무르는 게 가능하다. 열다섯 살의 프리드리히는 숨쉬듯 자연스럽게 그것을 깨달았다. 한쪽 끝은 우선 황태손 라인하르트로 지정했다. 황태손은 운 좋게도 알아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다음은 나머지 한쪽 끝이었다. 그는 거기에 딱히 한 사람만을 두지 않았다. 사교계를 장악해감에 따라 점차 두터워지는 인맥 중에서 적당한 인물을 골라 그때그때 갈아끼웠다. 황태손이 노라면 나머지는 방향키였다.
프리드리히는 타인에게 호의를 얻는 법을 잘 알았다. 그 지식은 자신의 가면을 끊임없이 제련한 결과 가족을 뺀 거의 모두에게 통했다. 그걸로 수많은 소모품을 손에 넣었다. 귀족들은 영애, 영식, 부군, 가주를 불문하고 그에게 족족 걸려들어 판세를 휘두르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어렸던 그의 눈에 두려운 괴물로 보였던 스카일러 후작가의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을 괴물로 여겼다. 그것이 그렇게 기꺼울 수가 없었다. 드디어 전세가 역전됐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스물다섯 살의 그는 가문을 집어삼킬 준비를 마쳤다.
때마침 에네아스 백작가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황태자파 내부 세력은 스카일러와 르웰린을 각각 대표로 하여 반토막 난 상태였는데, 에네아스는 스카일러 쪽이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에네아스는 충분한 재력과 황태자의 신임을 원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을 적당히 이뤄주는 동시에 한몫 제대로 챙길 좋은 방법이 있었다. 그는 에네아스의 친척 가문 세이잔 자작가에 오벨 3세 독살 미수 사건의 진실을 흘렸다. 단기간에 일이 터지고 수습됐다. 황태자의 명을 받은 에네아스는 세이잔을 과격한 방법으로 제거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아이린을 양녀로 들임으로써 막대한 재산을 얻었고, 세이잔을 최초 고발한 스카일러와 함께 황태자파 내에서의 권력도 잡았다. 가짜 범인으로 라니아를 내세웠고, 공범 피치엔 공방은 잘려나갔기에 이 모든 걸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라니아에게는 의심을 피하려는 의도로 접근했다. 화재 사건의 최초 원인은 프리드리히였지만, 라니아는 정보를 제공하며 일시적인 조력자를 자처한 그가 그저 황태자파와 2황자파 사이에서 간을 보는 중이라고만 여겼다. 거기까지는 의도대로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로엔세르 공작가의 쌍둥이가 끼어들더니 라니아까지 싸잡아 끌어내리려던 그의 계획을 망쳤다. 로엔세르는 정면으로 맞서서 이길 자신이 없는 거의 유일한 대상이었던 탓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황태자파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프리드리히는 황태자에게 위협이 될 종자를 싹 다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런 와중에 로엔세르 가의 후광까지 업은 기색의 루 할레시온 대공가가 상당한 눈엣가시로 급부상했다. 목표물 설정은 거기서 끝났다. 그는 에네아스 백작가의 후계자 이나르와 주로 연대해 다방면에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루 할레시온은 가만히 당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칼을 빼들었다. 위험부담이 큰 대신 효과적인 말고삐였던 약혼을 파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사실 라니아가 화재 사건에 휘말리기도 전부터 이미 그들은 라니아 몰래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전부터 불안하던 황태손이 결국 감정에 휘둘려 사고를 쳤다. 프리드리히는 약혼 파기에 동의한 라인하르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옛 친구일지언정 적에게 손을 내밀다니? 그는 자신의 명목상 상사가 삶의 의지라는 걸 가지고 있기는 한지 의심스러워졌다.
결과적으로, 약혼의 단물만 쏙 빼먹은 루 할레시온 때문에 2자 대결 구도가 생성됐다. 세력 정리를 위해 언젠가 일어날 사건이긴 했다. 프리드리히는 경험을 거울 삼아 더 신중하게 움직였다. 이런저런 행사에 참석해 동태를 읽고 여러 가능성을 조사했다.
그러던 중 제압했다 여겼던 가문 내부 문제가 또 불거졌다. 프리드리히는 초조해졌다. 때맞추어 황태손이 그를 말로써 은근히 흔들어댔다. 미칠 노릇이었다. 라니아의 조언에 따라 주시하고 있는 그의 앙숙인 에단이 조만간 에셀레드와 결탁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정보까지 들어오니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와 함께 마지막 남은 도덕성까지 날아갔다.
프리드리히는 끔찍한 패륜을 저질렀다. 일이 의도대로 진행되자 라니아는 로엔세르 쌍둥이와 샤카르를 이용해 스카일러 후작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물론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라니아뿐만이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역시 아무리 충동적인 행동처럼 보일지라도 수습책은 마련해두는 편이었다. 그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형까지 치우기로 했다. 하여 조사가 끝나고 범인으로 규정된 자는 그가 아닌 형 에셀레드였다.
그러나 명백한 적 진영에 자리잡았다고 여겼던 세크네트가 불쑥 찾아와 그에게 배신을 말한다는 것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돌발 상황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세크네트를 일개 체스말로 쓸 재간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상당히 곤란해졌다.
"곧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세크네트는 입가를 끌어당기며 장난처럼 말했다. 프리드리히는 조금 인상을 썼다.
"그것은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장차 스카일러 후작가의 대항마가 되실 분께서 왜 배반을 입에 올리시는지 여쭤볼 수 있겠는지요?"
"정치에 아직 서투르시군요, 스카일러 영식은. 그런 건 제게 묻지 않아도 알아야 할 사항인데."
"후작께서는 무엇으로 그런 확신을 하십니까?"
"제가 영식보다 나은 게 하나 있거든요."
그는 쓰게 탄 커피를 홀짝이고 나서 단어 하나를 툭 뱉었다.
"추리력."
순진한 척 씨익 웃는다.
"저는 이걸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라고도 표현하고 싶습니다."
아예 대놓고 심기 불편하라고 던져대는 말을 받아내며, 프리드리히는 제 앞의 이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너무 어려운 상대였다.
"저를 깎아내리려 오신 것은 아닐 테지요. 해서 본론은 무엇입니까? 영식께서 알고 계신 루 할레시온 대공가를 쓰러뜨릴 약점을 모조리 이쪽에 보고하기라도 하실 것입니까?"
"하하. 아직 모르시나봅니다."
날선 말 끝에서 세크네트는 대뜸 웃어젖혔다. 예측 불가한 행동에 프리드리히는 자기가 이 자에게 말려들고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 사이 세크네트의 표정이 싹 식었다.
"루 할레시온이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눈빛이 심해처럼 가라앉았다.
"진격에 눈이 멀어 등 뒤를 간과할 작정이시라면 뭐,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만......그게 아니라면 지금 붙잡으시죠. 저는 일부러 날을 골라 마지막 기회만 사용하는 중이니 말입니다."
10월의 초입에서 세크네트가 오만하게 입술을 휘었다. 맹수 앞의 쥐.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위치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그 날 세크네트를 황태자파로 끌어들였다.
첩보에 따라 11월 18일을 반란 진압일로 정했다. 대규모 숙청이 또다시 벌어졌다. 세크네트는 일등공신이 되었고, 라니아와 시안은 도주했으며, 에단이 추방됐다. 프리드리히 스카일러 후작은 마침내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올라섰다.
하지만 라인하르트 엔리케 할레시온이 하사한 죽음 앞에서도 그는 성공한 인생이었다며 지난날을 회고했던가?
8. 세크네트, 전쟁에 관하여.
자신, 부인 셰카이나, 딸 에리카, 형 레테일, 부모, 처남 샤카르. 세크네트 로엔세르는 그들 외에는 친척이든 친구든 지킬 생각이 없었다.
"너 이상해. 왜 나처럼 알아서 잘 사는 사람까지 책임지려 들어?"
뒤뜰에는 늙은 버드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똑같이 생긴 쌍둥이 형제는 그 그늘에 곧잘 몸을 기대고 시간을 흘려보내곤 했다. 레테일의 물음에 세크네트가 눈을 감고 드러누운 채로 설렁설렁 대답했다.
"내가 더 세니까."
"어이가 없네. 장차 가장 큰 권력을 가질 공작가 장남은 네가 아니라 나거든?"
레테일이 읽던 책을 덮고 따졌다. 세크네트는 반박했다.
"그걸로 되겠어? 우리 유약한 형제님은 공작이 아니라 황제가 돼도 무고한 사람한테 칼을 휘두르지는 못할 거면서."
"내가 마왕이라도 되냐, 무고한 사람한테 칼을 휘두르게?"
"우와. 엄청나게 안일한 생각이야, 그거. 우리가 사는 곳이 어떤 세계인지 잊었어?"
할 말을 잃었다. 세크네트는 옳다구나 하고 단정지어 말했다.
"이것 봐, 레트 넌 나보다 약하잖아. 손에 칼이 있든 펜이 있든 쓸 수 있어야 강한 거지. 그러니까 내가 너를 지킬 거야."
"......오지랖 한 번 더럽게 넓은 녀석."
결국 레테일은 비꼬듯 퉁명스레 인정하고야 말았다.
"미안하게 됐다, 네게 또 하나의 의무가 되어서."
세크네트가 싱긋 웃었다.
"내가 자원해서 하는 일이니까 괜찮아."
라니아 대공녀는 범상찮은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하나가 여기에 있다면, 나머지는 어디에 있을까? 답은 이 세계 밖에 있다는 걸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세크네트는 현 시대의 수준을 뛰어넘는 사고를 해냈다. 라니아의 주변인으로부터 모은 조각이 한몫을 했다.
'라니아가 어릴 때 쓴 공책을 우연히 본 적이 있어. 미래에 대한 예측과 그 녀석이 겪은 일이 주 내용인데, 놀라운 게 많더라고.'
그 중 샤카르 멘데로프의 증언이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다. 세크네트는 길고 복잡한 분석을 거쳐 결론을 냈다.
시대를 종결하고, 나아가 세계를 뒤집어 엎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라니아다.
그렇다면 길 위로 끌어내야지. 라니아가 가장 불행한 자가 될지도 모르지만,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세크네트가 종이에 잿빛 글씨를 휘갈기며 계획을 세웠다. 처음으로 실행에 옮긴 것은 카리스티아와 신년 축제에서 눈도장을 찍어두는 일이었다. 그는 라니아의 조력자가 될 작정이었다. 곁에 이미 샤카르가 있지만, 그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분명 근시일 내에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곧 사건이 터졌다. 로엔세르 쌍둥이는 자연스럽게 판에 끼어들었다.
1061년부터 1062년 여름까지는 황태자와 2황자 중 누구의 승률이 더 높은지 가늠하며, 여러 곳에 용도에 맞는 안전장치와 기폭제를 깔아두던 시기였다. 여름의 끝물에 시안의 존재를 눈치채고, 세크네트는 그의 세계에 가장 해로운 사람이 일찍이 산정한 바와 달리 라니아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가장 두려운 자가 라니아였다. 그걸 깨달은 즉시 세크네트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프리드리히를 찾아가 첩자 노릇을 하겠다고 말했다. 약간의 의심을 받았으나 구태여 긴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우위에 있는 자는 그였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는 결국 쫓기듯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것으로 가장 두려운 자를 세계에서 추방하기로 했다. 이미 2황자의 반역에 깊숙히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배신이라는 방법을 사용하면 세크네트 혼자서도 충분히 승리자를 바꿀 수 있었다. 세계의 열쇠가 라니아라면 전쟁의 열쇠는 세크네트였다.
결말은 대부분 그의 뜻대로 되었다. 일레인을 잘라내고, 샤카르를 잃은 것을 제하면 만족스러웠다.
세크네트는 목적을 달성했다. 반역을 무산시키고 공신이 되어 소중한 사람들을 지켰고, 세계에 자꾸만 변수를 만드는 라니아는 다른 세계로 보내버렸다. 할레시온은 끝내 수십 년간 힘들게 정복한 땅을 전부 잃어버렸지만 수도 할렌센에 사는 고위귀족 세크네트와 그의 사람들은 안전했다.
처세의 대가 헤일렌 나인하트 공작이 그러하듯 세크네트 역시 이후로도 몇 번이고 절묘한 선택을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라인하르트가 해묵은 복수를 대리할 때마저 그들은 살아남았다.
지극히 한정적인 평화는, 영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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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일 내 인생의 전환기를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얻은 바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잃은 그 무엇 때문이다. - 알베르 까뮈
============================ 작품 후기 ============================
제목과 소개글에 먼저 공지해둔 바와 같이, 본 소설은 11월 11일경 본문 삭제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정주행에 참고해주세요.
+내일 자정에는 Arrival과 후기 편이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