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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화 (1/200)

# 1

1화 허울뿐인 왕

이상적인 왕과 신하의 관계는 신하들이 왕을 떠받쳐 줄 때가 가장 이상적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내게 실수가 있다면 겉으로만 떠받쳐 주는 형태도 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20살의 젊은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벌써 나라꼴이 개판이었다. 귀족들은 제 잇속만 챙기기 바쁘고, 군대의 기강은 해이하다 못해 엉망이 된 지 오래이며, 백성들은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엉망이 된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죽도록 노력했다. 물가 안정을 위해 화폐를 새로 발행하고, 백성의 복지를 위해 법을 뜯어고쳤으며, 비리를 적출해 내기 위해 국왕 직속의 조사단까지 만들었다.

그런데도 나라 꼴은 전혀 나아지지 않더라.

결국 외세의 간섭이 들어오며, 군대를 움직일 권리와 외교권부터 시작하여 차례차례 나라의 권리를 빼앗겼다. 나라의 주권을 모두 빼앗긴 후에야 깨달았다. 왜 그토록 노력해도 나라의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는지, 어째서 이리도 쉽게 이웃 나라에게 모든 권리를 빼앗겼는지, 그 모든 것은 내부의 적 때문이었다.

내 편이라 여기던 신하들은 겉으로만 충성을 외칠 뿐이지 사실은 적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제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백성을 쥐어짜고, 왕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았으며, 종국에 이르러선 나라까지 팔아먹은 것이다.

내 나라, 내 왕궁, 내 백성.

이 모든 것을 내게서부터 앗아간 자들이 이제 내 목숨까지 앗아 가려 하고 있다.

* * *

“전하, 이것이 아레나 왕국 국민 모두의 뜻입니다.”

신하 한 명이 카인에게 검 한 자루를 내밀었다.

한밤중에 찾아와 칼을 내미는 것도 어이가 없거늘, 검을 내민 이유 자체는 더 황당하기 짝이 없다.

나라의 주권을 적국에게 넘긴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란다.

카인은 신하가 두 손으로 떠받치고 있는 검에 손을 뻗어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스릉!

검집 안쪽 면과 검날이 예리한 마찰음을 내며, 검이 뽑혀 나옴과 동시에 카인의 호통이 떨어졌다.

“너희가 나라를 망가뜨리고 팔아먹었잖느냐! 그런데 나보고 책임을 져라? 이 상황 자체가 역모죄임을 알기는 아느냐? 여봐라! 당장 이놈들을 끌고 가서 옥에 가두어라!”

위엄을 실어 바깥에 있는 경비병들을 불러보았으나, 그 누구도 오지 않았다. 궁녀들마저 아무 것도 못 듣고, 못 본 양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가만히 복도에 서 있을 뿐이었다.

비어 있는 검집을 든 염소수염의 중년 사내, 로메우 공작이 꿇고 있던 무릎을 펴고, 왕의 앞에서 머리를 꼿꼿이 들며 예를 버렸다.

“전하, 오래전부터 이 나라의 군대는 전하의 것이 아니게 된 것을 잊으셨습니까? 전하 스스로가 자초하신 일입니다.”

“네게 권한을 위임하는 게 아니었어. 로메우 공작, 네가… 가장 믿었던 네가 주모자인 걸 알았다면 절대로 위임하지 않았을 거다.”

“주모자라니, 섭하군요. 저는 전하께서 엉망으로 만드신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뒷수습에 전념했을 뿐입니다.”

“그 뒷수습이라는 게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인가 보지?”

“귀족의 것을 빼앗아 백성에게 베푼다. 그 시점에서 이미 귀족들은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지요. 먼저 저희를 이 나라로부터 배제한 것은 전하입니다.”

“네놈들이 빼앗은 것을 원래 가져야 할 자들에게 준 것일 뿐이지 않느냐!”

“그 백성들도 전하가 책임을 지시길 바라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명예를 지킬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유언장은 대필가가 미리 써 두었으니 안심하고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시길.”

차례차례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는 동안, 간신배들은 그 모든 일이 카인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여론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온 백성들은 카인이 나라를 팔아먹은 줄 알고 있으며, 입을 모아 카인에게 죽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잠시나마 백성들의 울분을 가라앉힐 화풀이의 소재가 되어 달라?

이 무슨 근본 없는 요구란 말인가!

여기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나라를 팔아먹은 게 카인 자신이라고 인정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정작 팔아먹은 자들은 여기 있건만! 간신배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식민지 왕정에서 다들 한자리씩 꿰차고 떵떵거리며 살 건데, 나 홀로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으라고?

카인은 뽑아 든 검에 마나를 부여했다. 검날의 테두리를 따라 푸른색의 기운이 일렁였다. 이는 곧 그가 마나유저 상급임을 의미했다.

“내게 잘못이 있다면 네놈들을 믿은 거겠지. 오늘 네놈들을 베어, 지금이라도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잡겠다.”

“끝까지 손이 많이 가는 분이시군요. 혼자 가시질 못한다면 이쪽에서 저승으로 모셔다 드리지요.”

로메우 공작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카인이 그를 무시하고 검을 휘두르려던 찰나, 등 뒤에서 불에 덴 듯 뜨거운 통증이 번졌다.

푸욱!

“크윽!”

등 뒤에서 시작된 통증은 가슴까지 번져 나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등을 관통한 검이 가슴 앞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통증과 출혈로 인해 몸의 힘이 빠지며, 온몸에 무력감이 엄습했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찌른 자의 얼굴을 확인해 보았다. 등 뒤를 찔린 것보다 등을 찌른 자의 정체가 더욱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카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렌디, 너까지…….”

등 뒤에서 찌른 자는 지금은 해체된 국왕 직속 호위대의 대장이던 렌디였다. 렌디의 배신이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렌디가 어릴 때부터 자신의 개인 경호를 맡아왔던 자이기 때문이다. 왕족과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계급을 뛰어넘는 우정을 지니고 있던 사이였다. 국왕 직속 호위대가 해체되며 왕궁을 떠나는 마당에도 마지막까지 그는 카인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았었다.

아니, 충성심을 잃지 않았다고 믿었다.

지금 그의 행동은 여태까지의 우정을 모두 부정하는 행위였다. 그 역시 출세를 위해 우정을 가장한 아첨을 떨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카인은 깨달았다. 매국노들이 자신을 왕위에서 끌어내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은 왕위에 오르지도 못했다는 것을.

혼자만 왕위에 올랐다고 착각한 것에 불과했다. 허울뿐인 왕관을 쓰고, 허울뿐인 왕좌에 앉아, 허울뿐인 어명만 내렸던 것이다. 허울뿐인 왕이 왕 노릇을 해보려고 발버둥친 것이니 개혁을 하려고 해도 안 될 수밖에.

몸에 힘이 풀려 쓰러지는 가운데 로메우 공작과 간신배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목 앞에 칼을 대고 그으라 했잖느냐. 등 뒤에 상처는 자결로 얼버무릴 수 없거늘.”

“스스로 침소에 불을 지른 것으로 하시지요, 공왕 전하.”

“아직 즉위식은 하지 않았으니 말을 삼가도록. 뭐, 깔끔하게 태우고 새로 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태워라.”

적국인 겐크 왕국, 그곳의 속국인 공국으로 격하되는 대신 공왕의 자리를 보장받은 듯하다. 쓰다 버린 장난감을 처리하는 것처럼 태우라는 말이 가슴에 사무친다.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다.

이딴 놈들에게 그간의 인생과 노력이 모두 부정당하고 농락당한 것이 분해서 미칠 것 같다.

한 번 더!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빌어먹을 것들에게 비수를 꽂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가슴이 분노로 차오르는 것과 달리 몸은 점점 힘을 잃어 갔고, 끝내 눈이 감기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루크 남작님.”

발코니에서 급사 차림의 한 여성이 루크 남작을 불렀다. 그에 흔들의자에 앉아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던 금발의 젊은 청년이 상념에서 벗어나며 반응했다.

“왜?”

“저, 붕대 갈아야 할 시간이라서요. 몸은 좀 어떠신가요?”

“이젠 그럭저럭 혼자 움직일 만큼은 회복된 것 같아.”

하녀인 메리가 행여 발소리라도 날까 싶어, 종종걸음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붕대와 약이 담긴 쟁반을 책상에 올려놓으며 루크의 눈치를 살폈다.

“붕대… 갈아 드려도 될까요?”

“방금 붕대 갈러 왔다고 말하지 않았어? 눈치 보지 말고 하려던 일 해.”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붕대를 갈 수 있도록 루크가 상의를 벗어 주었다. 상의를 벗자, 상체에 두른 붕대가 겉으로 드러났다. 붕대의 곳곳이 진물로 얼룩져 있는 것에서, 얼마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는지 알 수 있었다.

메리는 루크의 몸을 감은 붕대 끄트머리의 매듭을 풀었다. 한 겹, 한 겹 붕대가 아래로 늘어지던 가운데, 살갗과 닿아 있는 붕대를 푸는 단계에 이르렀다. 메리가 조심조심 붕대를 풀었지만, 붕대에 붙어 응고된 진물이 떨어져 나가며 상처를 자극했다.

루크는 쓰라림을 참느라 입을 꾹 다물며 미간을 좁혔다.

“흐음.”

신음 소리 대신 코로 긴 숨을 내뿜는 순간, 문득 메리가 루크의 찌푸린 표정을 보더니 지레 겁을 먹었다.

“죄,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잘 풀었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누가 보면 입에 도돌이표라도 붙인 줄 알겠네.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 하는 거야? 빨리 풀기나 해.”

“네?”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아픈 거야 당연하지.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어?”

“아, 죄송해요. 예전에는 이럴 때마다 때리셔서…….”

“예전 일 같은 건 기억 안 나. 그리고 지금부턴 사소한 일로 때릴 생각도 없고. 하던 일 계속해.”

“감사합니다.”

보아하니 본래 이 몸의 주인인 루크 남작은 이름난 망나니였던 모양이다. 툭하면 고용인들에게 가혹 행위를 일삼고, 백성들을 쥐어짜 내려고 하며, 귀족들 사이에서도 예의범절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왜 ‘본래’란 말을 붙이냐고?

현재 루크 남작의 알맹이는 루크 남작이 아닌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로메우 공작의 수작 때문에 죽은 이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루크 남작이란 자가 되어 있었다. 이게 문헌에만 존재하던 환생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환생한 시간은 내가 죽은 지 반년이 지난 후였다. 아레나 왕국은 겐크 왕국의 속국이 되어 아레나 공국으로 격하되었고, 로메우 공작이 공왕으로 등극했다. 그를 따르던 간신배이며, 기사들도 모두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고 말이다.

‘날 제물 삼아 모든 오명을 지우고, 자기네들은 깨끗하게 새 출발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기다려라. 이번엔 내가 너희들 등에 비수를 꽂아 주마.’

겐크 왕국의 귀족이란 신분, 산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환경, 같은 나라의 귀족들에게도 무시 받는 기존의 인식까지.

조용히 힘을 키우기엔 너무나도 안성맞춤인 환경이다.

이번에야말로 힘을 갖춰 왕이 되겠다.

허울뿐인 왕이 아닌 진짜 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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