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4화 마나 영약(1)
흔히 오크라하면 배불뚝이 돼지에 말할 때마다 ‘컹컹’거리는 콧소리를 접두사마냥 붙이는 자들을 상상하는데 이는 마계에 있는 오크를 말한다. 마계의 오크들은 몬스터로 분류되고, 그 외에 인간계에 있는 오크들은 엘프, 드워프, 용인처럼 아인종의 일종으로 분류되고 있다.
오크 평야는 겐크 왕국의 행정 구역으로 치면 드래프트 영지에 속하는 땅이다. 하지만 오크들에게 있어 인간이 정한 행정 구역은 알 바 아니었다.
자신들이 정착했으니, 자신들의 땅이라는 게 오크들의 인식이었다. 오크 평야에 있는 10개의 부족 중에서도 큰 바위 부족은 약탈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부족이었다.
큰 바위 부족의 부락 안.
신장이 2미터에 녹색의 피부와 근육질의 몸, 게다가 입술 바깥으로 삐져나올 정도로 기다란 아래쪽 송곳니를 지닌 오크들이 무기를 쥐고 원정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큰 바위 부족은 같은 오크와 비교해도 장대한 기골을 타고난 렉서스 족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가을이 되면 항상 인간들의 마을을 습격하여 식량을 약탈했다.
“지금부터 마을 순회를 시작하겠다. 인간들의 것을 빼앗아 우리의 배를 불리자꾸나!”
“우오오오오!”
이번 원정은 약간의 보복이기도 했다. 얼마 전에 인간 측에서 군대를 끌고 와서 부락을 습격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기습을 당한 탓에 예상 이상의 피해를 입긴 했으나 인간 측의 우두머리가 주제를 모르고 혼자 돌격해 온 덕에 인간 병사들의 진형이 무너져서 손쉽게 대승을 거두었다.
대승을 거두었다곤 해도 오크 전사들이 죽은 건 마찬가지이다. 이번 원정에서 죽은 이들의 피의 값을 톡톡히 받아 낼 생각이었다. 인간이면 인간답게 식량이나 꼬박꼬박 채워 둘 것이지, 감히 주제를 모르고 덤빈 것을 후회하게 해 줄 것이다.
출정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장로 아르투먼이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왔다.
“족장이시여, 제가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대가 일부러 출정 전에 노쇠한 몸을 이끌고 찾아온 것엔 이유가 있겠지. 말해 보게.”
“어젯밤 하늘을 보니 부족의 별이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별이 경고하고 있으니 이번 원정 내내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부족에서 최고령자이자, 평소 현명한 조언을 많이 해 주는 아르투먼이다. 렉서스도 평소에는 어지간해서 아르투먼의 조언을 참고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바로 점술이었다. 점은 어디까지나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이 렉서스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원정을 떠날 때 방심하지 않는 거야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그걸 굳이 별의 경고니, 붉은빛이니, 하면서 거창하게 말하는 것이 은근슬쩍 거슬린다.
하지만 대장부다운 면을 과시하려면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말에도 묵직하게 반응해야 한다.
“주의하도록 하지. 바람이 차니 들어가 있게.”
“부디 조심하시길.”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렉서스는 아르투먼의 경고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렉서스의 머릿속은 늘 해 오던 대로 빼앗고, 짓밟으며, 인간들에게 오크의 힘을 과시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영주의 업무는 생각 이상으로 많다. 특히 변두리 귀족의 경우, 자금의 사정상 휘하에 사람을 많이 둘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업무를 영주와 영주의 가족 및 고용인들이 도맡는 편이다. 루크의 경우는 부모님이 양쪽 모두 돌아가셨고, 변변한 형제조차도 없던 몸인지라 대부분의 업무를 루크, 드골, 제랄드가 분담해서 맡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랄드는 군사 쪽의 업무를 도맡고 있어서, 행정 쪽은 아예 루크와 드골 둘이서 해 나가고 있는 참이었다.
“남작님, 그 땅에서 제가 5년 전부터 농사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 사람이 원래 자기네 땅이었다며 5년 치 소작료를 모두 지불하랍니다. 원래 버려진 땅을 저희 일가족이 돌을 하나하나 골라내 가며 일구었는데, 이제 와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 너무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일이 있어 신경 쓰지 못한 것일 뿐인데, 남의 땅에 멋대로 농사를 지어 놓고 오리발을 내밀더군요. 땅문서를 보시면 알겠지만, 10년 전부터 저희 집안의 땅이었던 곳입니다. 땅 주인 모르게 땅을 이용하고 있었으니, 그에 해당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영주의 업무 중에서 가장 골치가 아픈 업무를 꼽으라면 재판을 빼놓을 수 없다.
대부분의 분쟁은 각 마을의 촌장 선에서 해결되는 편이나 촌장의 권한에서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는 무조건 영주에게로 돌아왔다. 특히 재판은 두꺼운 법률 사전을 모두 꿰고 있어야 명확한 판결을 내릴 수 있어서 함부로 위임하지도 못하는 일이다. 어지간한 베테랑 영주들도 판결을 내릴 때마다 법률 사전과 판례 모음을 뒤적이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편이었다.
그러나 루크는 법률 사전과 판례를 통째로 암기한 양 시원하게 판결을 내렸다.
“겐크 왕국 토지법 제3조 2항에 의하면, 주인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토지는 상업적 가치가 없을 경우, 무단으로 개간한다 하더라도 죄를 묻지 않는다. 해당 조항에 따라 피고는 지금까지의 소작료를 지불할 의무가 없으며, 앞으로 계속 사용하고자 할 경우 정식으로 소작 계약을 맺고 소작료를 지불하도록. 원고 측은 할 말 있나?”
정확히 법에 근거하여 판결을 내린 덕에 억울하게 피해를 입는 자의 숫자가 대폭 줄어들었다. 이전의 몸 주인은 법률은커녕 제대로 된 기초 지식조차 없이, 기분에 따라 대충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피해자가 되레 형을 받는 얼토당토않은 일이 많이 발생했다.
추수를 맞이하여 세금을 조정한 것부터 재판에서 명쾌한 판결을 내리는 것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루크에 대한 미담이 퍼져 나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루크의 평가가 180도로 바뀌었다.
“남작님이 완전히 다른 분이 되셨어. 예전에 그 망나니 같던 남작님이 아니라니까?”
“예전 같으면 귀족을 귀찮게 한다고 재판을 신청하러 가기만 해도 곤장을 치더니, 이젠 칼같이 해결해 주시더라. 너도 억울해서 참고 있던 일 있으면 한번 찾아가 봐.”
* * *
일을 너무 잘해도 문제라고들 한다.
우수한 만큼 수수료를 더 떼이는 법이다.
루크의 수완이 뛰어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너도 나도 그간 참고만 있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재판을 신청했다. 본래 재판소는 주에 하루만 열기로 되어 있으나 쇄도하는 재판 신청 때문에 주에 2회, 주에 3회로 계속 늘리게 되었다.
안 그래도 재판 업무 외의 행정 업무와 개인 단련까지 해야 하는 루크는,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에 이르렀다.
“괜찮으십니까, 남작님? 나머지는 제가 할 테니 쉬시지요.”
오늘도 8시간 동안 재판을 맡고,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다음 달의 군비 예산안을 검토하고 있는 루크를 보고 있자니, 건강에 해가 될까 염려하여 드골이 말을 꺼냈다.
걱정하는 마음이 제대로 전달된 것인지 루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예산안은 맡기도록 하지.”
드골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라면 ‘내가 원하는 영지의 모습이 되려면 아직 멀었어’라며 단칼에 거절했을 텐데, 오늘 따라 너무 순순히 말을 듣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남작님, 혹시 수련장으로 직행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잘 아는군.”
“그냥 좀 쉬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러다 쓰러지시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쉬면 내일은 전력으로 뛰어야 하지. 그것보단 매일매일 걷는 게 훨씬 편하지 않나?”
“남작님은 매일매일 전력으로 뛰시니까 문제죠. 하루쯤 쉬신다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제발 좀 쉬십시오. 부탁입니다.”
“드골.”
“네.”
“메리한테 수련장의 양초 갈아 두라고 전해 둬. 벌써 다 닳아 가더군.”
“네? 간 지 얼마나 됐다고… 설마 어제도 밤새서 수련하셨습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늘 하루를 쉬면…….”
“남작님!”
* * *
이러다 정말로 우리 남작님 쓰러지시겠네.
예전에는 너무 놀아서 문제였는데, 이제는 무엇이든 너무 열심히 해서 걱정이다.
사람이 정도라는 게 있어야지!
루크를 말리는 것은 도무지 무리라고 판단한 드골은 며칠을 밤낮으로 궁리한 끝에, 미약하게나마 루크의 짐을 덜어 줄 방법을 떠올렸다. 그 방법이란 다름 아닌 각 마을의 촌장들을 소집하는 것이었다.
드골이 돌린 공문에 따라 각 마을의 촌장들이 영주의 저택이 있는 브리람 마을에 모였다.
드골은 촌장들을 모아두고 절실한 마음을 담아 자신의 뜻을 전했다.
“여러분, 남작님이 과로로 쓰러지게 생기셨습니다. 하다못해 자기 마을의 문제는 촌장 선에서 끝냅시다. 저리 고생하시는데, 재판 업무라도 좀 덜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크가 달라진 이후부터 영지민들의 표정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촌장들도 현지에서 직접 체감하고 있었기에 드골의 말을 허투루 흘려 넘기지 않았다.
“확실히 달라지신 이후로 영지민들이 너무 남작님께 의존하는 감이 없다곤 할 수 없지. 내 마을로 돌아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겠네.”
“드골 자네가 그리 말할 정도면 정말로 고생하고 계시나 보구먼.”
“말도 마십시오. 근 두 달 동안 하루에 3시간 이상 자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쉬시라고 말씀드려도 통 들으셔야 말이죠.”
하루에 3시간씩 자는 생활을 하루도 아니고 두 달 동안 해 왔다는 드골의 말에 촌장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생한다고 해 봤자 귀족치고 고생하는 편이겠거니 했는데, 그 정도 수준이 아니잖은가!
처음에 드골의 말을 들을 때만 하더라도 진지한 축에 속했는데, 루크의 수면 시간을 듣자마자 촌장 모두가 심각한 분위기를 띠었다.
“하루 3시간밖에 안 잔다고? 두 달 내내? 몸이 남아나나?”
“벌써부터 그리 혹사하면 혼례 올리신 후에 후계자 만드실 때도 영향을 미칠 것 아닌가. 그거 큰일이군. 그것만은 절대로 있어선 안 될 일이지.”
“허어, 이거 참, 예전 행적 때문에 스스로에게 너무 부담을 주시는 것 같구먼. 지금처럼만 하시면 충분하시거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먼. 돌아가서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좀 해 봐야겠네. 기껏 남작님께서 참사람이 되셨는데 우리 때문에 과로로 쓰러져서야 본말전도이지 않은가!”
* * *
며칠 후, 저택에 대량의 짐이 도착했다. 그 양이 꽤 많아서 말 두 마리가 이끄는 대형 수레가 가득 찰 정도였다.
예정에도 없는 대량의 짐 꾸러미가 온 것을 두고 루크가 의문을 표했다.
“드골, 무기 납품일이 오늘이었나? 주문한 무기가 온 것치곤 양이 적은 것 같다만.”
드골도 오늘 짐이 들어온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인지라 의아해하였다.
“저도 무슨 짐인지 모르겠군요.”
때마침 마수레가 나가도록 저택의 정문을 열어 준 경비병이 문을 닫은 후 다가와 전후 사정을 보고했다.
“남작님, 영지의 각 마을로부터 짐을 보내왔습니다.”
“각 마을에서? 내용물이 뭔지 확인해 봐.”
“네.”
경비병이 창날로 나무 상자의 끈을 끊었다. 어찌나 내용물을 꽉꽉 채워 보냈는지, 끈을 풀자마자 상자 뚜껑이 내용물에 밀려나며 벌컥 열렸다. 벌어진 뚜껑 사이로 상자의 내용물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어떤 상자에는 버섯이 가득 담겨 있고, 어떤 상자에는 담금주가 담겨 있었으며, 어떤 상자에는 짐승의 신체 일부를 말린 것 같은 식재료가 담겨 있었다.
일련의 물품을 죽 둘러보던 차에 드골이 무릎을 탁 쳤다.
“아, 마을 사람들이 남작님 건강 챙기시라고 몸에 좋은 것들을 보냈나 봅니다. 얼마 전에 촌장들을 불러다가 남작님께서 너무 고생하신다고 재판 업무만이라도 덜어 드리자고 했더니, 이런 식으로 또 마음 씀씀이를 보여 주는군요. 정말 좋은 영지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최근에 재판 신청 수가 급감한 거였나.”
“남작님께서 영지민을 생각하시는 것처럼, 영지민들도 남작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혼자서 하려 하지 마시고, 조금은 여유를 가지시지요.”
보통은 이쯤 되면 영지민들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여 그 마음에 응해야겠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보통 그렇지 않은가. 남이 이렇게까지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 주면, ‘내가 남에게 걱정을 끼칠 정도로 열심히 했구나’ 하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작 루크의 반응은 드골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재판 업무가 빈만큼 수련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겠군.”
“하아, 남작님은 정말…….”
“무슨 문제라도?”
“아뇨, 제가 졌습니다. 살다 살다 쉬라고 말하다가 지치기는 처음이군요. 하다못해 영지민들이 보내 준 건강식품이라도 드십시오.”
“기왕 보내 준 것인데 당연히 먹어야지. 보관 기간이 짧은 것부터 처리해야겠군.”
루크는 물건을 좀 더 상세하게 확인하고자 상자 뚜껑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담금주가 들어 있는 상자에는 뱀술, 말벌주, 산삼주, 와송주 등등 딱 보기에도 몇 년 이상 보관한 술들이 가득했다. 동물의 신체를 말린 것은 웅담, 녹용 가루 등등 흔히 몸에 좋다고 알려진 물건들이었다.
의외로 보물 상자를 여는 듯한 기분이 들어, 루크는 상자를 확인하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한데 버섯이 담긴 상자의 뚜껑을 젖혔을 때, 처음으로 루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옆에서 같이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드골이 사뭇 진지해진 루크의 상태를 이상히 여겨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루크는 상자에 담긴 버섯 더미에 손을 넣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적갈색이나 흰색을 띠고 있는 다른 버섯과 다르게 유일하게 푸른빛을 띤 버섯이었다.
독버섯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화려한 빛을 띤 버섯을 앞두고 루크가 심각한 투로 말했다.
“이 버섯 캔 사람 찾아와.”
이 버섯의 정체를 알고 있다. 물론 독버섯은 아니다. 그렇다고 평범한 버섯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세간에서 좀처럼 구하기 힘든 버섯이라 할 수 있다.
마나유저가 먹으면 마나가 대폭 증가하는 식품을 두고 ‘영약’이라고 하는데, 이 버섯이 바로 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하나를 먹으면 10년 치의 마나를 얻을 수 있다고 알려지는 깊은 산의 푸른 버섯.
그 빛깔이 하늘을 담은 것 같다 하여 창공 버섯이란 이름이 붙은 영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