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7화 작은 아이의 용기가 가슴에 불을 지핀다(2)
루크는 렉서스를 발견한 순간, 그가 족장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남다른 덩치 때문이 아니다. 척 봐도 가장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이놈이 가짜 봉화를 지펴, 인간 농락을 획책한 녀석일 테지.
놈과 많은 말을 나눌 필요는 없다. 곧 죽을 놈이란 것만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루크는 검을 높이 들었다. 마나 회로에서 마나를 한껏 뽑아내어 검에 두르자 검 주변에 마나가 한껏 더해지며 마나 오라가 요동쳤다. 마나 오라에서 비롯된 실오라기, 마나블레이드가 주변 일대를 휩쓸었다.
콰콰과콰!
이때다 싶어 루크의 양측과 후방에서 덤벼들던 오크들이 마나블레이드에 휩쓸리며 칼에 닿은 두부처럼 깔끔하게 썰려 나갔다.
마나블레이드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있던 십수 마리의 오크는, 새로이 시체가 되어 기존의 시체 위에 포개졌다.
이미 죽은 시체에게도 냉랭하기는 여전했다.
“방해하지 마라. 순서대로 보내 줄 테니.”
방해꾼을 제거한 후에 다시금 렉서스를 내려다보니 놈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신들린 무위를 코앞에서 목격하고 나니, 본능적으로 격의 차이를 느낀 모양이다.
렉서스의 몸은 벌써 격의 차이를 느끼고 있건만, 머리는 아직 이 상황을 못 받아들이는 듯 창을 들고 루크를 위협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네놈, 정녕 두 달 전의 그 애송이가 맞느냐?”
짐승의 울부짖음에 일일이 대답할 정도로 루크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때문에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 차례 검을 휘두르자 실오라기처럼 일렁이던 마나블레이드가 전방으로 뻗어 나가며, 닿는 족족 모든 것을 베어 냈다.
서걱! 서걱! 서걱!
“흐억!”
마나블레이드의 흉흉한 기세를 목전에 둔 렉서스가 헛숨을 들이켜며 황급히 몸을 숙였다. 체면까지 버리고 꼴사납게 엎드렸으나 마나블레이드 한 가닥이 바닥을 스치며 렉서스의 창과 오른쪽 팔을 베어 냈다.
잘린 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오르며, 렉서스의 비명이 전장을 뒤덮었다.
“크아아아아!”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설설 기던 렉서스의 면전에 서슬이 퍼런 마나블레이드가 드리워졌다. 죽일 줄만 알지, 죽임을 당하는 경험은 처음인 렉서스에게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상상 이상의 압도적인 전력 차 앞에서 생각을 갈무리할 참도 없었다.
그저 살고 싶다는 욕망만이 정신을 지배하며, 뇌를 거치지 않은 본능적인 말들을 쏟아 냈다.
“허억허억, 기다려! 사, 사죄하겠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사죄할 테니 살려 다오! 다시는 그대의 영역에 얼씬도 하지 않을 테니, 제발!”
필사적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렉서스의 앞에서 루크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개돼지의 언어라 그런지 무슨 소릴하는 건지 모르겠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이 아래로 떨어졌다.
서걱!
* * *
렉서스가 죽은 이후부턴 그나마 저항하던 오크들마저 전의를 잃고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동이 틀 무렵, 큰 바위 부족의 부락에는 9할에 달하는 오크들이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2천이 넘는 오크의 사망자 가운데, 1,500마리는 루크의 작품이었다. 그 정도로 마나마스터의 힘은 강대하고도 압도적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격렬한 전투에도 상비군의 사망자는 0명이었다는 점이었다. 중상을 입은 자는 몇 명 있어도 사망자는 없었다.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은 이유로는 오크가 술에 취한 상태였다는 점, 루크의 무력이 압도적이었다는 점 등 많은 이유를 꼽을 수 있다만, 그중에서도 사생결단의 마음가짐으로 싸웠다는 게 가장 크게 작용했다.
사람이 마음가짐에 따라 얼마나 독종이 될 수 있는지를 반증하는 결과였다.
드래프트 영지의 역사상 유례없는 대승을 거둔 후, 제랄드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승을 거뒀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마나마스터가 되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한 탓이었다.
‘설마 남작님께서 마나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셨을 줄이야! 원래 재능이 있는 분이라고 여겼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어쩌면 역사에 길이 남을 분을 옆에서 모신, 산증인이 될지도.’
주군이 자신의 재능을 자각하고 각성한 모습이 자랑스러워 제랄드의 충심이 끓어올랐다.
제랄드는 일출을 이루고 있는 지평선을 등진 채로 걸어오는 루크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햇살 때문에 눈이 따갑기는 하다. 그래도 눈을 떼지 않았다. 훗날 음유 시인이 읊을, 한 영웅의 역사적인 첫 승리의 광경을 똑똑히 새겨 두기 위해서.
제랄드는 루크가 지척에 이르자마자 왼쪽 가슴에 손을 얹으며 예를 갖추었다.
“마나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을 축하드립니다, 남작님.”
살가운 말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살벌한 질책이 날아들었다.
“제랄드, 내가 분명 큰 바위 부족이 아침 해를 맞이하지 못하게 만들라고 했을 텐데?”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그러나 금세 남은 1할의 오크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은 오크들은 전투 능력이 전무한 늙은 오크와 조그마한 어린 오크들밖에 없었다.
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잔챙이들뿐이었다.
제랄드는 루크의 위압감에 압도당하여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들은 가만히 놔둬도 굶어 죽거나 다른 부족의 오크들이 정리할 겁니다. 오크는 강자에겐 한없이 약하고, 약자에겐 가차 없는 종족이니 말이죠.”
“명령이 가볍게 들리나 보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모든 불의에 적의를. 이를 실천하지 못할 거면 내 밑에서 떠나도록.”
제2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루크가 다짐한 것이 있다.
나를 향한 모든 불의에 적의로 보답하겠노라고.
적에게 자비를 품어선 안 된다. 적을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안 된다. 적에게 후일을 도모할 기회를 줘서 안 된다.
놈들은 내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를 말살하려고 했던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오만이자 사치다.
적어도 루크란 사내는 오만에서 가장 거리가 먼 이였다.
항상 영지를 위해 노력하는 루크만 봐 왔던 제랄드는 소름이 돋아 한동안 꿈쩍도 못 했다. 그러나 루크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처음 맛보는 승리의 미주에 취해 적들이 누구인지 잊고 있었다. 저 늙은 오크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빼앗은 식량으로 저 나이가 되도록 무탈하게 지내 온 것이고, 저 어린 오크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빼앗은 식량을 이유식 삼아 자란 녀석들이다.
여기서 저들에게 동정을 품는 것은 창을 쥐고 싸우겠노라고 울음을 삼키던 아이에 대한 모욕이자 목숨을 걸고 선두에 선 주군에 대한 모욕이었다.
제랄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두 무릎을 꿇고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군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고, 나아가 나약한 생각을 품은 이 못난 기사를 베어 일벌백계로 삼아 주십시오.”
루크는 바닥의 검을 들어 검자루가 제랄드에게 향하도록 내밀었다.
“적들에게 악마가 될 자신이 있다면 쥐도록.”
이미 제랄드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루크의 말대로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 점을 간과하고서 어찌 큰 뜻을 이루리. 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의 주군은 부족 하나를 토벌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상상도 못 할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 테지. 다시는 시체 위에서 로망을 그리는 어리석은 생각은 품지 않을 것이다.
기사가 머릿속에 담아야 할 것은 주군의 명령뿐.
그 외에는 모두 사족에 불과하다.
제랄드는 검자루를 쥐어 검을 뽑아 들고, 벌벌 떨고 있는 오크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주군의 뜻이 곧 자신의 뜻이라는 양 입술을 달싹였다.
“모든 불의에 적의를.”
서걱!
* * *
큰 바위 부족의 토벌을 끝낸 루크는 병사들을 이끌고 영지로 복귀했다. 영지로 복귀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데이먼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아이를 찾아간 것이었다.
루크는 아이를 찾아가 렉사르의 목을 벤 검을 아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네가 적장의 목을 베었다. 부모님도 자랑스럽게 여길 테지.”
아이는 언젠간 이 검을 쥐고 진짜로 적장의 목을 베겠다는 대답을 남기며 예사롭지 않은 의지를 내비쳤다.
다행히 이웃 마을에 살던 아이의 친척이 아이를 거두기로 한 모양이었다.
훗날, 그 아이의 이름이 정식으로 루크에게 닿을지, 안 닿을지는 아직까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 * *
토벌을 끝낸 후, 루크는 한동안 뒷정리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방책을 세우고, 중상자들이 부상을 회복하기 위해 부대를 이탈한 동안 부족한 인원을 어떻게 메울지 등등 루크의 지시하에 모든 뒤처리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성공적인 토벌 이후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다.
가장 먼저 루크를 찬양하는 영지민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남작님께서 큰 바위 부족을 하룻밤 만에 토벌하셨대!”
“이제 언제 놈들이 쳐들어올지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이게 꿈이래, 생시래?”
“병사들한테 들었는데, 쑥대밭이 된 마을을 보고 남작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더라고. ‘누가 나와 함께 오늘을 큰바위 부족의 마지막 밤으로 만들 것이냐?’ 크으~”
“이런 날 술을 빼놓을 순 없지. 외쳐! 루크 남작님 만세!”
“만세!”
또 한 명 격변을 보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제랄드였다. 원래부터 충성심이 남다른 기사이긴 하나, 루크 개인에 대한 충성심보단 가문에 충성하는 경향이 적잖이 있었다. 그러나 제랄드는 이번 일로 완전히 루크의 신념에 매료된 충신이 되었다.
“오늘부터 훈련 방식을 전부 바꾸겠다. 저번 토벌에서 남작님 혼자 절반 이상 사냥하셨지. 남작님 혼자서 절반이야! 그분을 모시는 입장에서 부끄럽지도 않나? 나를 포함해서 모두 근본부터 싹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 따라올 자신이 없는 자들은 붙잡지 않을 테니 지금 그만둬라!”
루크는 마나마스터이니 자신들보다 더 많은 적을 사살한 걸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제랄드는 어떻게든 전력을 짜내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부하가 되기 위해서.
* * *
토벌이 끝난 후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저택에서 여느 때처럼 루크와 드골의 아침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드골은 어제 하루 동안 저택으로 전달된 각종 건의 사항을 하나둘씩 읊었다.
“제랄드 경이 상비군 모집을 건의하더군요. 확실히 감당할 수 있는 최대 인원수가 100명인 것에 비해 지금 숫자는 적긴 하죠. 어떻게 할까요?”
아침을 먹는 시간도 아까워 샌드위치를 한 손에 쥐고 브리핑에 임하던 루크가 입에 남아 있는 음식물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영지 내에 모집 공고를 내도록. 가능하면 영지 바깥에도 모집 공고를 내고.”
“영지 바깥에선 사람들이 올지 모르겠군요. 저희야 영지 상황이 개선된 걸 안다지만, 외부에선 아직도 드래프트 영지에 대한 인식이 안 좋으니까요.”
“그만큼 쓸데없는 정보가 유출되지 않으니 그 부분은 긍정적인 셈이지.”
“정말로 마나마스터가 되신 것을 알리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귀족계에서의 인식도 달라질 것이고, 왕궁에서도 매년 막대한 지원금을 보내 줄 겁니다. 어쩌면 중앙 정계에 진출하실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왕국에서 마나마스터에게 후하게 대우해 준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드러낼 생각이 없다. 이제 막 기반을 다지고 있는 참이다. 벌써부터 날파리가 꼬여서 좋은 건 없다.
보나마나 정치판의 장기말로서 이용하려는 자들이 꼬일 테니까.
지금의 기반을 가지고는 예전처럼 이용당하기 딱 좋을 뿐이다.
좀 더 기반을 다져야 한다.
역으로 놈들을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
“언젠간 드러내겠지만, 지금은 아냐. 지금은 알려서 좋을 게 없어.”
드골도 루크의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 * *
시간이 흘러 중상자들이 병석에서 일어나 군에 합류했고, 상비군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한 자들 중 옥석을 가려 신병을 추가했다.
드골이 힘을 써서 타 영지에도 모집 공고를 냈으나 외지인이 지원하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드래프트 영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좋지 않음을 의미했다. 게다가 시골에 가까운, 편의 시설이 좋지 않은 땅에서 박봉을 받으며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모자의 숫자는 가볍게 정원을 상회했다.
앞선 첫 원정 승전의 일화가 영지 내에 퍼져 나가며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내 영지는 내가 지킨다!
그 일념 하나로 징병 대상이었던 청년들이 자기 한 몸을 불사지르겠노라고 상비군 모집에 지원했다.
지원자의 숫자가 200명에 달하여, 그중에서 체격이 좋은 자만 골라 100명을 추가했다.
원래 남작가에서 수용할 수 있는 상비군의 정원은 100명이었으나 이번에 새 막사를 짓고 장비를 추가로 주문하여 정원을 150명까지 늘렸다.
신병들이 훈련을 거듭하여 쓸 만해졌을 무렵이 되자 벌써 계절이 지나 한겨울에 이르렀다.
오크들이 한창 굶주리며 다시금 약탈 행위를 개시할 시기가 되었다.
겨울에 맞춰 루크는 제랄드를 불러다 중대 발표를 하였다.
“검은 노을 부족을 치고, 그 너머의 오크들을 몰아내겠다. 봄이 되면 평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할 테니, 다들 그리 알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