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8화 비약적인 발전(1)
드래프트 영지의 영지민들에게 오래전부터 품고 있는 불만이 있다.
‘왜 왕국에선 우리 영지에 있는 오크를 방치하는가! 북방에는 군사를 많이 보내면서 우리는 등한시하다니, 지역 차별이다!’
지금의 오크 평야라 불리는 땅은 행정구역상 드래프트 영지의 것인데, 정작 영지민들은 평야를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었다. 명색이 한 나라의 영토에 다른 종족이 멋대로 들어와 살고 있는 것인데도 수도의 왕궁에선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왕궁도 이유 없이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 명분이 있다. 겐크 왕국의 북부에는 거인족의 나라가 있는데, 거인족과 전쟁을 벌이느라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있는 탓에 사실상 최후방에 속하는 남쪽 끄트머리의 변방까지 신경 쓰기 어려웠다.
영지 하나를 살리자고 나라 전체의 운명이 걸린 방어선을 무너뜨릴 순 없지 않은가.
이러한 사정 속에서 지원군의 파견이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오크 평야를 되찾는 것은 드래프트 영지민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200년 전만 하더라도 남부의 곡창 지대라 불렸던 곳이다. 지금이야 시간이 지나 처음부터 다시 개간해야 하는 흙자갈밭이 되었다지만, 토양 깊숙한 곳엔 과거에 곡창 지대라 불리던 저력이 남아 있을 터였다. 개간할 의욕은 가득한데 오크들 때문에 평야로 나가질 못하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흘러 오늘에 이르러서야 영지민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 줄 지도자가 나타났다.
루크가 대대적으로 오크 평야의 탈환을 선언하면서 영지민 전원이 기대에 부풀었다.
기념비적인 탈환 원정의 첫 출정식 날.
모든 영지민들이 브리람 마을에 모여 루크와 휘하의 병사 150명에게 뜨거운 성원을 보냈다.
“루크 남작님께 승리만이 있기를!”
“드래프트의 아들들아! 오크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거라!”
“반드시 서쪽 바다 끝에 이르길 바라마!”
병사는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남편이자, 누군가의 친구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울지 않았다. 사지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영지의 미래를 닦으러 가는 것이기에 자랑스럽게 떠나보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자랑이 된다는 것이 병사들의 전의를 고양시켰다. 오크 평야의 끄트머리에 있는 서쪽 바다를 볼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리라! 남작님의 검이 서쪽으로 향해 있는 한, 두 팔이 끊어지고, 두 다리가 망가진다 하더라도 오크 평야에 뼈를 묻을 각오로 나아가리라!
루크가 징병 대상자들을 소집하지 않고 상비군 150명만 데려온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보급의 문제였다. 병력의 덩치가 불어나면 그만큼 많은 보급품을 옮겨야 한다. 게다가 평야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보급로의 길이가 길어지니, 오크들에게 보급품을 털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150명 정도의 규모라면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니, 괜히 병력의 규모를 높게 잡는 것보다 훨씬 낫다.
두 번째는 기동력을 꼽을 수 있고, 세 번째는 루크의 힘으로 병력의 모자람을 메우고도 남는다는 점을 꼽을 수 있었다.
* * *
첫 번째 타깃은 검은 노을 부족이었다.
“검은 노을 부족도 예전부터 마을을 자주 습격했다지?”
루크의 질문에 제랄드가 칼같이 왼쪽 가슴에 손을 얹으며 예를 갖췄다.
“네, 악질적인 걸로 따지면 큰 바위 부족보다 더 심합니다. 소수의 오크들이 몰래 산을 타고 넘어와서 사람들을 한두 명씩 납치해 가곤 합니다.”
“납치 목적은?”
“장난감으로 삼기 위해서죠. 번식용, 식량용이 아닌 순수하게 데리고 놀기 위한 목적으로 영지민들을 납치해 가는 녀석들입니다.”
“제랄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겠지?”
“모든 적의에 불의를. 그날 이후로 계속 가슴 속에 품고 있습니다.”
루크는 말을 몰아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섰다. 태양이 후광처럼 그의 등을 내리쬐는 가운데, 언덕 아래에 위치한 검은 노을 부족의 부락이 보였다.
놈들도 척후병을 통해 토벌군의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는지, 대열을 갖춰 대기하고 있었다. 무기는 조잡한 편이다. 돌을 날카롭게 갈아 나무 막대에 매달아 만든 돌도끼와 나무를 깎아 만든 나무 곤봉이 대부분이다. 그 외에는 대강 출처가 짐작이 가는 군용 장창을 든 오크가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숫자는 대략 1,000마리.
오크 전사들을 물론이고, 비전투원에게도 죄다 무기를 들려 튀어나온 듯하다. 얼마 전에 큰 바위 부족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여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관인 것은…….
“큭, 저 개자식들이!”
“짐승만도 못한 것들! 어떻게 저딴 짓을 할 생각을 하지?”
검은 노을 부족의 진영의 앞줄에 일렬로 서 있는 자들을 발견한 병사들이 분노를 금치 못했다. 분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으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오크를 처죽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검은 노을 부족이 전방에 앞세운 행렬.
그들은 곧 영지에 침입하여 납치한 영지민들이었다. 영지민들의 몰골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는지 피골이 상접했으며, 다트판 대용으로라도 쓴 건지 온몸에 돌팔매로 인한 멍 자국이 만연했고, 머리카락과 치아는 뽑혀 나간 지 오래였다.
줄곧 장난감으로 쓰이다가 지금에 와서 화살 받이용으로 끌려 나온 것이다.
그들 역시 한때는 영지의 마을에서 살던 자이다.
검은 노을 부족에게 잡혀 가면 장난감 취급을 당한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검은 노을 부족의 의도에 토벌대가 냉정을 잃도록 만드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정확하게 성공한 셈이었다.
실제로 병사들은 흥분한 나머지 집중력을 잃은 상태였다.
거기에 쐐기를 박듯 검은 노을 부족의 진영에서 뼛조각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친 오크가 걸어 나오며 외쳤다.
“인간들이여! 당장 무기를 버려라!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면 여기 있는 인간들을 하나씩 죽이겠다!”
처음에는 인질 용도로 쓰다가 안 먹히면 화살 받이용으로 쓸 작정인 건가.
얼마나 이용해 먹으려는 것이냐!
병사들이 이를 악물며 창대를 꽉 쥐었다. 그러고는 루크의 등을 바라보았다. 존경해 마지않는 남작님이 이 난국을 파훼할 묘안을 가지고 있길 바라며.
가만히 검은 노을 부족의 행패를 지켜보던 루크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전군, 화살 일발 장전.”
부관으로서 루크의 옆에 자리 잡고 있던 제랄드가 루크의 명령을 복창했다.
“화살 일발 장전!”
“장전!”
궁수대가 복명복창을 하며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화살을 머금은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가운데 루크의 검이 전방 상공을 향해 올라갔다.
“70도 발사.”
“70도 발사!”
“발사!”
피잉! 핑! 피잉!
궁수대가 쏘아 올린 화살이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검은 노을 부족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분명 방금 무기를 놓지 않으면 인질들을 죽이겠다고 말한 참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경고 없이 바로 공격을 개시해 버렸다. 인질을 살릴 생각이 없나? 인간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오크들도 자기 동료가 인질로 잡혀 있으면 주춤하기 마련이다. 한데 저 인간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공격을 개시했다.
인간들을 당황시키기 위해 인질을 내세운 것이거늘, 되레 오크들이 당황하는 역효과가 발생했다.
당황한 오크들이 인질을 내팽개치며 나무 방패를 위로 들었다.
한데 정작 화살은 예상보다 훨씬 멀리 뻗어 나가, 오크 진영의 후방에 떨어졌다.
퍽! 투퍽! 퍼퍼퍽!
나무 방패에 화살 꽂히는 소리가 무수히 발생하며 귀를 어지럽혔다.
인질을 맞히지 않기 위해 일부러 연사를 포기하면서까지 힘을 주어 후방으로 화살을 날린 것이었다. 인질을 피하여 공격하는 것에서 오크들은 토벌대의 움직임이 무척 허술하다고 여겼다.
여전히 인질들의 목숨은 오크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 토벌대가 인질을 공격하든 말든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인질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다.
오크들은 나무 방패 아래에서 토벌대의 행동을 비웃었다.
“어리석기 짝이 없군. 인질을 지킨답시고 한다는 행위가 고작 후방에 화살을 쏘는 것이더냐?”
오크들의 시선이 각기 따로 분산된 가운데, 루크가 홀로 말을 몰아 오크 진영으로 질주했다.
오크들 중 누군가는 루크의 접근을 목격했고, 누군가는 화살을 막느라 목격하지 못했다. 시선은 각기 분산되어 있지만 오크들의 생각은 모두 동일했다.
이대로 인질들을 방패로 삼아 전진하여 토벌대를 압살하겠다!
토벌대가 인질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오크들은 여전히 인질의 목숨을 쥐고 있는 자기네들이 유리하다고 여겼다.
우월감은 방심을 불렀고, 홀로 다가오는 루크의 행동에 대한 분석을 게을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윽고 루크가 오크 진영에 다다랐을 무렵.
오크들은 그제서야 인간들이 화살을 쏜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화살은 그저 오크들이 한순간이나마 인질에게서 손을 떼게 만들기 위한 위협사격에 불과했던 것이다.
루크가 오크들을 베기 쉽도록!
오크 진영의 첫 번째 대열과 마주한 루크는 검에 마나를 부여했다. 검날의 테두리에 마나 오라가 맺혔고, 이어서 마나 오라의 테두리를 따라 실오라기 같은 마나블레이드가 뻗어 나왔다. 마나블레이드는 하나하나가 제 의지를 가진 양, 섬세하게 움직이며 오크들을 베어 냈다.
서걱! 서걱! 서걱!
“크어어억!”
“크헉!”
“꾸에엑!”
단지 화살에 놀라 한순간 인질에게서 손을 놓았던 것뿐, 고작 그 한 동작을 취했을 뿐이다. 한데 그 행동 하나가 대학살로 이어지리라고 오크들은 상상도 못 했다.
루크의 신들린 무위를 목격한 오크들은 모두 직감했다. 큰 바위 부족은 이 사내에게 당했구나!
하지만 알면 뭐 하는가. 막을 수가 없는데.
루크의 검이 일선을 그을 때마다 수십 가닥의 마나블레이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궤적에 담긴 모든 것을 베었다. 나무 방패로 막으면 나무 방패와 함께, 돌도끼로 후려치려 하면 돌도끼와 함께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수 없어 오크들은 일방적으로 죽어 나갔다.
게다가 언덕 위에 있던 토벌대까지 아래로 내려오며 오크 섬멸에 박차를 가했다.
제랄드는 루크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내려오며,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1분대는 인질을 전장으로부터 격리시켜라! 나머지는 남작님을 따라 오크들을 섬멸한다! 이제는 참지 않아도 되니 마음껏 쏟아 내거라!”
“와아아아아!”
오크들이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병사들을 자극한 것이, 지금에 와서 역으로 병사들의 전의를 끌어올리는 촉진제의 역할을 하였다.
차가운 얼굴로 신들린 무위를 펼치는 루크와 스스로 오크들의 악귀가 되기로 작정한 병사들의 위용은 오크들에게 공포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겁에 질린 오크들이 도망쳤으나 루크와 병사들은 지옥 끝까지 쫓아갈 기세로 득달같이 달려들어 놈들을 섬멸했다.
이날 벌어진 전투의 결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오랫동안 평야에서 살아왔던 검은 노을 부족은 고작 단 하루 만에 깨끗이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