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9화 비약적인 발전(2)
검은 노을 부족을 전멸시킨 후, 전리품 정리에 들어갔다. 올해는 검은 노을 부족이 한 번도 마을을 약탈하러 온 적이 없었는데, 부락을 뒤지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부락 한편에 도축하여 차곡차곡 쌓아 둔 고기와 말린 나무 열매가 그득했다.
기본적으로 오크들은 육식과 초식을 겸하는 잡식성 종족인데, 농업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여 수렵과 채집으로 식량을 확보한다. 그래서 인간의 마을 쪽은 연이은 연작으로 토지의 양분이 메말라 있는 데 반해, 오크 평야 쪽은 오랫동안 경작이 이루어지지 않아 땅이 비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득 쌓여 있는 고기와 말린 나무 열매가 그 증거였다.
토지가 비옥하니 풀과 나무가 싱그러운 열매를 맺고, 그를 먹고 자란 초식 동물의 개체가 늘어나면서, 덩달아 오크들이 사냥을 성공하는 횟수와 열매의 채집량이 늘어난 것이었다.
루크는 토벌을 마친 부락을 그대로 중간 베이스캠프로 이용하고자 했다.
“고기 중에서 상태가 좋은 것들은 가져온 소금통에 넣어서 땅에 묻고, 말린 열매들은 인원수에 맞게 분배하도록.”
오크 평야에 존재하는 10개의 부족 가운데 2개의 부족을 처리했다.
이제 남은 부족의 숫자는 8개.
큰 바위 부족과 검은 노을 부족 외의 다른 부족은 지난 역사상 한 번도 인간의 마을을 약탈하러 온 적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인간의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 나머지 8부족에 대한 정보는 굉장히 적은 편이었다.
한창 뒷정리를 지휘하고 있는데, 제랄드가 다가와 부상자 현황을 알렸다.
“남작님, 부상자 집계 결과가 나왔습니다.”
“보고해.”
“사망자 4명, 중상 10명, 경상 25명입니다. 경상을 입은 자들은 다음 전투에 지장이 없는 수준입니다.”
“저번 토벌보다 피해가 많군.”
“저번엔 술 취한 오크들이었고, 이번엔 미흡하게나마 진형을 갖춘 오크들이었으니까요. 사망자가 겨우 4명인 것 자체가 기적인 수준입니다. 물론 남작님이 앞장서 주신 덕분이지만요.”
“인솔자를 선정해서 인질들과 중상자들을 마을로 돌려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이전의 큰 바위 부족 토벌이 제랄드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나 보다. 그일 이후로 사람이 점점 묵직한 분위기를 띠게 되더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단단해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얼마 전에는 병사들의 개인 능력을 강화하는 훈련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홀로 타 영지를 순회하고 왔다고 한다.
겉으로 자랑하지 않을 뿐이지, 뒤에서 엄청 노력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인다. 병사들도 제랄드를 본받아 단단히 정신이 무장되어 있고 말이다.
차라리 이게 낫다.
이전에는 신분의 격차 생각하지 않고 마냥 살갑게 대해 주는 사람이야말로 마음이 통한 사람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늘 살갑게 대해 주었던 개인 호위 기사마저도 결국에는 배신을 때리지 않았는가.
사람을 고를 때 말보다 신념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루크는 사람을 파악하는 통찰력이 남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누가 어떤 신념으로 움직이는지 가늠할 수 있는 눈을 얻은 셈이다.
제랄드의 경우에는 루크가 표명하는 ‘불의에는 적의’란 신념을 그대로 흡수했다고 볼 수 있다.
루크는 부하의 변화를 흡족스럽게 받아들이며 향후 전투에 대비한 브리핑을 가졌다.
“그리고 남은 8개의 부족에 대한 정보는 모아 뒀나?”
“정찰병들이 몇 달간 수고해 준 덕에, 각 부족의 대략적인 위치는 모두 파악했습니다.”
“분명 평야 안쪽의 오크들은 저희들끼리 세력 다툼을 하고 있다고 했었지. 현재 놈들의 분쟁 구도는?”
“거기까진 알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황야에서 소수의 인원으로 보급 없이 돌아다니는 게 쉽지만은 않으니 말이죠.”
“지금의 정찰 부대에게 많은 기대를 바라는 건 사치겠지. 평야를 확보하고 군자금이 늘어나면 정보 부대 신설도 고려해 봐야겠군.”
조사한 바에 의하면, 8개의 부족에는 각각 3,000마리의 오크가 살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 제대로 된 전투가 가능한 오크 전사는 500마리가량이니, 8개의 부족을 모두 합치면 4,000마리의 오크 전사가 이 앞에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4,000마리면 어떻고, 5,000마리면 어떠랴.
어차피 500마리를 여덟 번 상대하는 것이니, 총 숫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봄이 되기 전까지 반드시 이 드넓은 평야를 차지하고 말리라.
* * *
세 번째 토벌 대상은 벼락 나무 부족이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녹음이 짙은 숲속에 살고 있는 부족이다. 그들은 풍요로운 숲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며 사시사철 배부르게 지내고 있었다. 숲을 벗어나지 않아도 잘 먹고 잘살고 있으니 약탈할 이유가 없었다.
달리 말하면, 원래 영지민들이 누려야 할 풍요를 오크들이 누리고 있는 셈이다.
집 안에 틀어박혀 먹을 것만 입에 쑤셔 넣는 백수처럼, 숲속의 오크들도 숲속에 틀어박혀 편히 지내 온 탓인지 본래의 근육질은 온데간데없고 살이 뒤룩뒤룩 찐 오크들만 있었다. 마계에도 녹색 피부에 돼지처럼 살이 찌고, 말할 때마다 ‘컹컹’거리는 오크란 동명의 몬스터가 있다는데 마치 그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벼락 나무 부족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사냥 대신 채집으로만 지내 왔는지 무기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더라.
놈들을 숲의 양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데 한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 * *
네 번째 토벌 대상은 제비부리 부족이었다.
오크 평야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강인 플램 강의 하구에 자리 잡은 부족이다. 그들은 강을 기반으로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오크 평야에 큰 강이 있다는 건 지도를 통해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보니 바다로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규모로 어마어마한 강줄기를 자랑하는 강이었다. 어류 또한 풍부하여 물 반, 고기 반이란 말이 낚시꾼들의 꾸며 낸 허풍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임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플램 강은 제비부리 부족에게 식량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천연 요새의 역할도 도맡고 있었다. 제비부리 부족을 토벌하기 위해서 강을 건너야만 했는데, 제비부리 부족의 오크들이 나룻배를 타고 창을 던지며 건너오지 못하게 견제했다.
그에 루크가 묘안을 내었다.
벼락 나무 부족이 살던 숲으로 돌아가 그들이 쓰던 천막을 모두 가져와 간이 부표를 대량으로 만들었다. 밤에 부표를 상류에서 흘려 더미를 뿌린 다음, 그 부표에 섞여 강을 건넜다.
말을 놔두고 와야 한 데다, 장비도 최소한으로 착용한 채로 싸워야 했던지라 쉽지 않은 전투를 벌어야 했다.
하지만 루크의 마나블레이드는 어김없이 오크들을 도륙했으며, 그에 힘입어 병사들이 배수진을 친 양 기백을 발하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밤새 이어진 전투가 끝나고 동이 텄을 때, 플람 강의 하구는 제비부리 부족의 시체로 가득 차 있었다.
* * *
다섯 번째로 토벌한 부족은 산들바람 부족이었다.
겨울이라 누렇게 뜬 풀이 끝없이 깔려 있는 초원에서 사는 부족이었는데, 놀랍게도 말을 타고 초원을 방랑하며 지내는 유목 부족이었다. 듣자 하니 오크 평야에 있는 템페르트 초원에 옛날부터 질 좋은 야생마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 일부를 길들여 이동 수단 및 식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크 전사 모두가 말을 타고 싸우는 기마 부대이고, 능숙한 기마 솜씨에 이들 또한 상대하기가 만만찮았다.
초원에서 전원 기마병인 적을 상대로 정면 대결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도 없다. 마나블레이드의 위력만 믿고 정면 대결을 하기에는 적의 기동력이 너무 뛰어났다. 혹여나 싸워서 이긴다 할지라도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 뻔했다.
이번에는 병법의 정석 중 하나인 화공을 통해 적을 제압했다. 산들바람 부족의 기마대를 비탈길로 유인하고, 비탈길 위에서 풀을 뭉쳐 만든 거대한 건초 더미를 아래로 굴렸다. 겨우내 바짝 마른 풀로 만든 건초 더미는 불화살에 의해 구르는 불더미가 되어 적의 기마대를 낙마시켰다.
낙마한 오크들을 베어 내며, 손쉽게 산들바람 부족의 토벌에 성공했다.
* * *
오크 평야 평정에 나선 지도 어언 두 달째.
그간 토벌대의 행색은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다들 오랜 원정 생활로 인해 눈 밑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으며, 수염은 대충 자른 탓에 지저분했고, 가지고 있던 방어구는 부서지고 수리하길 반복하여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눈은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고된 여정은 용광로가 되어 병사들의 마음에 아주 약간 남아 있던 공포라는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해 주었다. 거듭된 승리 속에서 그들은 망치로 두드린 칼날처럼 예리하고 노련해졌다.
현재 루크의 병사들은 의욕만 넘치던 신출내기가 아니다. 오크와의 전투라는 최고의 단련을 거친 일당백의 정예병이 되어 있었다.
“저번에 보내온다던 지원병과 장비들은 어떻게 됐지?”
루크의 모습도 두 달 전과는 사뭇 달랐다.
두 달 전엔 늘 옆머리를 치고, 앞머리를 뒤로 넘긴 깔끔한 느낌의 미청년이었다. 그러나 수염을 기르고, 단검으로 대충 머리를 짧게 쳐 내면서 야생미가 넘치는 상남자로 인상이 바뀌었다.
“이제 막 플램 강을 넘어 이리로 오고 있다 합니다. 숫자는 100명, 지원군 응모에 지원한 자들 중에서 5년 이상 분기별 훈련을 받은 자들만 골라서 보냈다고 하더군요.”
목표치의 절반을 달성한 현재, 남아 있는 상비군의 숫자는 110명에 달한다. 여태껏 상대한 오크의 숫자에 비해 전사자가 겨우 40명밖에 없다는 것은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다른 영지의 군대가 어느 수준인지 모르는 병사들은 적과의 전투에서 아군의 사망자가 적은 건 당연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식량은 플램 강이나 숲에서 조달하고 있으니 풍족한 편이다. 반면에 장비는 쓰면 쓸수록 엉망이 되고 있으니 이쯤에서 보급이 한번 필요했다. 그래서 드골에게 사람을 보내어 보급품을 조달할 겸 인원 보충을 부탁한 참이었다.
“지원군이 도착하면 십인대를 재편성해 둬.”
“상비군 중에서 적합한 병사들을 골라 명단을 제출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토벌 대상인 하얀 이빨 부족을 정찰하러 간 병사들로부터 특이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봐.”
“남은 다섯 개 부족의 족장들이 모두 하얀 이빨 부족의 부락에 모이고 있다 하더군요.”
“부족들끼리 연합이라도 이룰 작정인가 보군.”
“그런가 싶었는데, 분위기로 봐선 다른 족장들이 하얀 이빨 부족의 족장을 공경하는 낌새였다고 합니다.”
자존심 강한 오크 족장이 다른 이에게 머리를 숙인다?
목숨이라도 구걸할 단계가 아니고서는 늘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니는 것이 오크 족장이다. 특히 오크들은 같은 오크끼리라도 부족이 다르면 배타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어서, 족장이 다른 부족의 족장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은 결코 없다.
반대로 말하자면, 족장이 다른 부족의 족장에게 머리를 숙일 정도로 특별한 관계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좀 더 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중.
토벌군 진지에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남작님! 자신을 대족장이라 칭하는 오크가 찾아왔습니다! 남작님과의 대화를 원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