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10화 비약적인 발전(3)
스스로를 대족장이라 칭하는 오크가 고작 호위 둘만 데리고 적진까지 왔다고 한다. 협상이란 개념이 없는 전투 민족인 줄 알았건만, 조금은 머리가 돌아가는 자가 있긴 한가 보다.
루크는 오크 대족장이 무슨 말을 나불거릴지 궁금하여 들여보내라 했다.
잠시 기다리자 병사가 대족장의 일행을 데리고 왔다.
찾아온 오크 중에서 양팔에 검은색 사자 문신을 새긴, 상남자 인상의 근육질 오크가 앞으로 나섰다.
“오크 평야 8개의 부족을 이끌고 있는 대족장 러스트라고 하네. 대화에 응해 준 것에 감사를 표하네.”
대족장 러스트는 오크가 맞나 싶을 정도로 격식을 갖춘 자였다. 물론 인간의 격식과는 형태가 많이 다르다. 하나 행동거지며 말투에서 품격이 느껴졌다. 적어도 스스로 오크 평야의 정점이라고 소개할 만한 도량을 가진 것만큼은 분명했다.
루크는 마찬가지로 손님을 맞이하듯 적절한 격식을 갖춰 주었다.
“드래프트 영지의 영주인 루크다. 남작의 직위를 가지고 있지. 오크 족장 위에 대족장이란 직위가 있을 줄은 몰랐군.”
“원래는 존재하던 자리였으나 오랫동안 직위에 어울리는 오크가 없었을 뿐이라네. 5년 전, 내 직접 전사들을 이끌고 8개의 부족을 찾아다니며 오랫동안 이어져 온 부족 다툼을 종결시켰지.”
“나머지 2개의 부족을 빼먹었군.”
“흥! 큰 바위 부족과 검은 노을 부족을 말하는 겐가? 놈들은 각 부락에서 추방당한 자들끼리 모여 부락을 세운 자들일세. 놈들과 같은 취급하지 말게. 생각만 해도 토가 나올 것 같군.”
“그래서 그 잘난 대족장이 여기엔 무슨 일이지? 영웅담이나 읊으러 온 건 아닐 텐데?”
러스트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경고하듯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물러나게. 지금 물러난다면 벼락 나무, 제비부리, 산들바람 부족 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겠네.”
“그거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군.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거지?”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우리를 먼저 건드린 것은 그쪽일세.”
“그 전에 이 땅의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 읊어 보실까?”
“과거를 논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네. 우리의 선조들이 처음 이 땅에 도착한 이후로 몇 세대가 지났지. 이 땅은 우리에게도 고향일세.”
“제랄드,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들을 두고 뭐라 했었지?”
척하면 척이라고 제랄드는 눈치 빠르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보통 짐승들이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곤 하지요.”
“우리가 큰 실수를 했군. 짐승에게 손님 대접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촌극이 따로 없었겠어.”
루크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날이 러스트의 목에 드리워졌다.
목의 피부에 검날의 끄트머리가 닿으며 러스트의 녹색 살갗이 살짝 벌어졌다. 섬뜩한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을 터이건만, 러스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정녕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너희가 누리고 있던 풍요는 원래 우리가 누렸어야 할 풍요였지. 모른다면 지금이라도 똑똑히 기억해 둬라. 네놈들은 지난 세월 내내 영지민들의 희생 위에서 호의호식해 왔다는 것을.”
“자네들도 나름대로 고충을 겪었나 보군. 하지만 우리가 자네들의 사정을 몰랐던 것처럼, 자네들도 우리의 사정을 모르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네. 대족장이 결정될 때까지 수많은 오크가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해 왔네. 우리가 풍요롭게 살아왔다고 했나? 내가 태어날 때만 하더라도 지옥이 따로 없었네. 그 지옥을 끝내고자 미친 듯이 싸워 왔지.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룬 것이 지금의 평화일세. 우린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네.”
여기까지 오며 루크와 토벌대가 보았던 세 부족의 풍요는 러스트가 대족장이 된 이후부터 누리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대족장의 자리를 놓고 수없이 싸움을 이어 가, 오크 평야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루크는 검에 서서히 마나를 부여하며 냉랭한 투로 말을 꺼냈다.
“그럼 너희가 떠나면 되겠군. 세상을 떠나든, 여길 떠나든 어차피 떠나야 할 것이라면 후자 쪽을 추천하지.”
“자네의 머릿속에 공존이란 선택지는 없나?”
“너희의 무엇을 믿고 공존한다는 거지? 인간처럼 행동할 건가? 세금을 낼 건가? 나를 위해 피를 흘리기라도 할 건가?”
“순수한 의도로 한 가지만 묻겠네. 우리가 따르겠다고 하면 휘하에 넣을 의향은 있나?”
“제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그 이상 바랄 바가 없지. 하지만 너희로서도 인간을 따르고 싶진 않을 텐데?”
“조건에 따라 다르지. 자네가 대족장이 된다면 남은 다섯 부족의 오크들이 모두 자네를 따를 걸세. 꼭 오크여야만 대족장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대족장의 직위를 따낸다면 루크가 오크들을 부릴 수 있다. 매력적인 제안이다. 터프한 체력을 지닌 오크들이라면 평야를 개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고, 병사의 질 또한 대폭 상승할 것이다.
하지만 러스트가 어렵게 오른 대족장의 자리를 쉬이 내줄 것 같진 않았다.
“흔쾌히 받아들이기엔 조건이 너무 좋군. 무슨 꿍꿍이지?”
“꿍꿍이랄 것도 없네. 오크들은 모든 것을 힘으로 증명하지. 자네가 나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면 모두가 납득할 걸세. 대신 자네가 내게 지면 정식으로 이 땅이 우리 오크들의 땅임을 선언하고, 다시는 침범하지 말게나.”
“내가 이기면 다섯 부족을 손에 넣고, 네가 이기면 땅의 정식 소유권을 손에 넣는다. 단순해서 좋군.”
“애꿎은 피를 흘리는 것보다 훨씬 건설적이지 않나?”
확실히 이 방식대로라면 어느 쪽으로 결판이 나든 각 부족의 오크들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혼자만 피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러스트는 일대일 대장전을 신청한 것이다.
져도 좋으니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킨다.
그것이 바로 러스트의 신념이었다.
꽤 마음에 드는 신념이다. 승리에 미련이 없다는 것은 곧 승리하지 않아도 실익을 취할 능력이 있다는 뜻이니까.
루크는 개인적으로 러스트에게 흥미가 이는 것을 느끼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쪽의 제안을 받아 주는 대신 대결 방식은 이쪽이 정하도록 하지.”
“그 정도는 양보하겠네. 하지만 최소한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대결 방식을 선정해 주길 바라네.”
“그쪽이 단순한 제안을 해 줬으니 이쪽도 단순한 대결 방식을 제안하겠어. 남자는 주먹. 주먹다짐으로 결판내는 게 가장 단순하고 모두를 납득시키기에도 편할 테지.”
특별한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주먹다짐.
무기 없이 맨주먹으로 치고받고 싸워서, 이기는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하자는 뜻이었다. 승리의 조건은 상대를 기절시키거나 항복을 받아 내는 것. 이 이상 단순하고 명쾌한 승부 조건은 없었다.
의외의 대결 방식에 러스트가 손의 뼈마디를 풀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괜찮겠나? 마나를 사용해야 그나마 대결 모양새가 갖춰질 텐데?”
“배려라고 해 두지. 마나를 사용했다간 시작하자마자 그쪽 목이 날아갈 테니까.”
“오크라고 마나를 다룰 줄 모를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일세. 나 또한 마나유저 상급라네.”
“마나유저 상급이라면 더더욱 상대가 안 되겠군.”
러스트의 동공이 일순 확장했다가 원 상태로 복구되었다. 루크의 말에서 마나마스터의 경지에 대한 암시를 알아차리고 놀란 것이다. 그는 뒤늦게 맨손 대결이 루크의 배려임을 깨닫고 겸허한 자세를 갖추었다.
“굼벵이 앞에서 주름 잡는 꼴이었군. 하지만 맨손 대결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오크의 완력을 무시하다간 큰코다칠 걸세.”
“지고 나서 약속을 못 지키겠다며 드러눕지나 않았으면 좋겠군.”
“오크가 비겁하게 구는 자를 대족장으로 인정할 것 같나? 모든 부족의 어금니를 걸고 신성한 대족장 대결에 암계와 뒤끝은 없을 것을 약속하겠네.”
대결 일시는 내일 아침 동이 틀 때.
장소는 각 진영의 중간 지점에서, 대결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실시하는 걸로 결정했다.
러스트는 정직하게 대결에 응하겠다는 증거로, 토벌대 진지에 들어올 때 압수당한 대족장의 도끼를 그대로 맡긴 채로 돌아갔다. 대결이 끝난 후에 직접 가져가겠다면서 말이다.
도끼를 가져갈 정도의 여유를 남겨둔 채로 이겨주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사내다움에 대응하는 루크의 말이 압권이었다.
“미리 취임 축하 선물을 보낸다는 말을 잘못한 거겠지.”
* * *
다음 날 아침, 드넓은 평야에 오크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 무기는 들려 있지 않았다. 순수하게 대족장 결투를 지켜보러 온 것이다.
수천에 달하는 오크들이 몰려왔건만, 소란은커녕 모두 엄숙하게 원을 그리듯 자리를 잡고, 대족장 결투의 시작을 기다렸다.
앞서 토벌대가 여러 부족을 멸망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빛에 적의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태껏 오크들끼리도 수없이 부족을 멸망시키고, 재탄생시키길 반복해 왔다. 평야의 안쪽에 사는 오크들의 시점에서 보면 ‘드래프트 영지’란 부족이 새롭게 등장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드래프트 영지의 족장이 자신들의 대족장에게 도전한 것이고 말이다.
평야의 안쪽에 사는 오크들의 관심사는 대족장이 교체될지, 현상이 유지될지, 이 두 가지밖에 없었다.
다섯 부족의 오크들, 그리고 토벌대 병사들이 원형 인파의 가운데 공간에 둥그런 공터를 만들었다.
널찍한 공터 안에서 루크와 러스트가 마주 보고 섰다.
루크는 양손에 밴디지를 감고선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한 번 규칙을 확인하지. 기절하거나 한쪽이 항복하면 끝. 설명이 어려웠다면 좀 더 쉽게 말해 줄 테니,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물어보도록.”
“크흥, 결투 전에 너무 도발하지 말게. 힘이 들어가서 죽이기라도 하면 미안하잖나.”
“망신당하고 싶지 않다면 죽일 생각으로 하는 게 좋을 거야.”
현재 태양을 가리고 있는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결투의 시작 신호로 삼기로 했다.
구름의 그림자가 공터를 덮고 있는 가운데, 루크와 러스트는 서로 시계 방향으로 돌며 간격을 유지했다.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공터에 햇볕이 닿았을 때, 둘은 동시에 땅을 박차며 간격을 좁혔다.
선제공격권을 지닌 쪽은 러스트였다. 리치가 길어 루크보다 사정거리가 길기 때문에 먼저 공격을 시도할 수 있었다.
러스트는 자신의 간격 안에 루크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서 가볍게 주먹을 뻗었다.
‘완력 차이가 확연하니 민첩함으로 승부를 내려 하겠지. 첫 공격은 무조건 피할 터.’
러스트는 처음 주먹을 가볍게 뻗어 견제용으로만 쓰고, 루크가 파고드는 틈을 타 팔꿈치로 턱을 후려칠 작정이었다.
한데 오히려 루크는 러스트의 주먹을 향해 얼굴을 내미는 기행을 선보였다.
빠각!
러스트의 주먹이 루크의 이마에 부딪치며 영 좋지 못한 소리가 발생했다. 러스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첫 공격을 이마로 받아 내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완력의 차이가 만연하지 않은가. 조금만 잘못 받아 내면 얼굴이 뭉개질지도 모른다.
“무서운 놈 같으니! 처음부터 맞을 작정이었나!”
이번에는 루크의 차례였다. 루크가 축이 되는 왼발을 깊게 내디뎌 큰 동작을 취할 수 있는 자세를 확보했다. 그러고는 이마로 러스트의 주먹을 밀어내며 허리를 한껏 틀어 주먹을 날렸다.
러스트의 얼굴에 루크의 주먹이 작렬하며 묵직한 타격음이 발생했다.
투콱!
러스트의 머리가 뒤로 한껏 젖혀짐과 동시에 하얀 물체 하나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오크들이 애지중지하는 부위 중 하나인 기다란 아래 송곳니, 그중 한쪽이 부러져 하늘로 치솟은 것이었다. 인간으로 따지면 머리카락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부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