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12화 해협을 넘나들며
루크가 지난 1년간 영지 내부의 일에만 신경을 쓴 것이 아니다.
당분간 할 일이 없는 정찰 부대를 놀리지 않고, 영지 외부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활용했다.
겐크 왕국, 그러니까 국내의 사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북방의 거인국과 전쟁을 끝내고 휴전 조약을 맺었다. 전쟁은 겐크 왕국이 치렀는데, 나라 사정은 아레나 공국이 나빠졌다고 한다. 겐크 왕국이 전쟁 물자와 인력을 속국인 아레나 공국에서 왕창 끌어다 썼기 때문이다.
아레나 공국의 백성들은 유례없는 기근에 시달리고 있고, 카인이 국왕이던 시절보다 더 나빠진 상황에 폭동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메우 공왕은 아슈타르 교를 국교로 선정하고, 이교도들이 나라의 혼란을 가중하고 있다며 반발하는 자들을 이교도로 몰아 처벌하는 중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카인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서 민심을 휘어잡더니, 이젠 아예 이교도란 가상의 적을 만들어 공포정치로 민심을 장악하려 들고 있다. 그때와 같은 수법으로 정치생명을 연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역겨울 따름이다.
타국의 상황은 해협 너머에 위치한 프라임 왕국과 하니온 왕국을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왜냐하면 드래프트 영지는 겐크 왕국 남서부의 돌출된 반도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서쪽 해안만 넘으면 바로 두 왕국이 있는 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라임 왕국과 하니온 왕국은 하나의 섬에서 오랫동안 각자 통치해 왔는데, 최근에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지금은 하니온 왕국이 프라임 왕국을 압도하고 있으나 프라임 왕국이 필사적으로 버티며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루크의 계획은 이렇다.
넘쳐 나는 곡물을 프라임 왕국에 팔자!
옛날부터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제3지역이 전쟁 국가에게 물자를 팔아먹어 배를 불리는 현상은 빈번하게 존재해 왔다. 이번에는 드래프트 영지가 제3지역이 될 차례다.
대량의 곡식을 나르기 위해서 대형 선박이 필요하다.
선박 제조는 손재주가 좋은 바다 모래 부족에게 일임했다.
* * *
6개월 후.
바다 모래 부족으로부터 선박이 완성되었으니 시운전을 할 예정이라는 연락이 왔다. 두 척의 배를 만들기 위해 숲에 있는 나무의 10분의 1을 베어 냈다고 한다. 그 드넓은 숲의 10분의 1을 말이다.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투자한 만큼 루크도 직접 서쪽 해안까지 찾아가 시운전의 과정을 참관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흘수선을 확인하기 위해 최대 적재량의 5할, 7할, 9할 순으로 가상 화물을 실어 시운전을 한 결과, 해협을 건너기에 충분한 부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팔아넘길 곡식을 서쪽 해안으로 옮기는 동안, 루크는 소수의 호위 병력과 함께 어업용 소형선을 타고 프라임 왕국으로 넘어갔다. 프라임 왕국의 동부 해안 도시인 파이넨에 도착할 때까지 보름의 항해 기간을 거쳐야 했다. 현지에서 신분과 목적을 밝히자 어렵지 않게 영주와 조우할 수 있었다.
“겐크 왕국의 드래프트 영지라면 오래 전에 들은 적이 있소. 오크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곳으로 알고 있는데, 팔 곡식이 있긴 하오?”
영주는 십 년 전에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현재의 드래프트 영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드래프트 영지의 현황은 겐크 내부에서도 모르고 있는데, 타국의 영주라고 알 턱이 있겠는가.
루크는 현지 영주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코웃음을 치며 우문현답을 날려 주었다.
“팔 곡식이 있으니 팔겠다고 한 것이지요. 정 우려되신다면 이곳의 상인들을 통해 팔겠습니다.”
“의심하는 건 아니었소. 무례하게 들렸다면 사과하도록 하지.”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거래하실 생각이 있는지 대답을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전쟁 중 군량미를 확보하는 방법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영주가 영지민으로부터 곡식을 거두어들여 전방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일반적이라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영주가 상인에게 하청을 넣는 것이다. 상인이 발품을 팔아 상품을 싸게 사들인 후, 운반 비용과 마진을 얹어 납품하는 형태이다. 이 경우가 가장 비싸게 먹힌다. 현지의 상인이 타지까지 갔다가 와야 하므로 이동 기간이 두 배로 늘어나고, 그에 따른 비용까지 청구하니 말이다.
세 번째는 타지 사람이 직접 찾아와 거래를 제안하는 경우다. 이 경우는 타지 사람이 돌아갈 때 자기네 영지에 팔 물건을 실어 가기 때문에 유통비를 절반만 얹는 것이 관례다.
루크의 경우는 세 번째 방법에 속했다.
보통 선박을 이용하는 거래는 대부호나 귀족이 아니면 성사시키기가 힘들다. 초기 자금이 너무 많이 들고, 이익이 큰 만큼 리스크 또한 커서 일반 상인들은 염두도 못 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선박 거래가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드래프트 영지에 그만한 자금력이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파이넨의 영주는 가벼운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협상의 문을 열었다.
“커흠! 팔 의향이 확실하다는 건 알겠소. 곡식의 종류와 양부터 말해 주시오.”
“주류는 밀과 옥수수이고, 그 외의 건어물과 육류 등 종류는 많습니다. 현재 보유량은 대형 선박 열두 척 분량이고요. 곧 추수철이니 더 늘어나겠지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보유량에 대해선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지속적인 거래가 가능한 생산 기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열두 척 분량? 허허, 상상 이상이구려.”
“대신 대형 선박이 두 척이라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내년 초에 추가 선박이 완성될 예정이니 그때부턴 좀 더 많은 거래가 가능하겠지요. 물론 그쪽이 지속적인 거래를 원한다면 말이죠.”
“일단 두 척 분량을 싣고 와 주시오. 그동안 왕궁에 예산을 신청하여 자금을 마련해 두겠소. 계속 거래를 할지 말지는 첫 물건을 받아보고 결정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소?”
“그러시지요.”
이후에 일사천리로 판매 금액을 정하고,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금은 최소 금액으로 받았다.
파이넨의 영주는 중개역이고 실제 구입자는 왕궁이기 때문에, 당장은 영주에게 돈이 없는 것을 고려한 조치였다.
대신 판매 금액을 높게 잡았다. 관세와 운반 비용까지 고려해도 국내에 푸는 것보다 마진이 15퍼센트나 더 나오니 루크로서는 프라임 왕국에 파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무엇보다도 드래프트 영지의 사정이 국내에 알려지면, 겐크 왕궁에서 왕궁으로 보내는 납세액을 대폭 상승시킬 것이 분명했다. 카인이었던 시절, 겐크 왕국도 아레나의 속국화를 가속화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었다. 그런 자들의 배를 불려 주느니 차라리 바다에 곡식을 버리고 말겠다.
* * *
첫 거래는 매우 매끄럽게 성사되었다.
루크는 어업용 소형선을 타고 드래프트 영지로 되돌아가서, 곡식을 가득 실은 대형 선박을 타고 돌아와 거래를 성사시켰다.
곡식의 질을 두 눈으로 확인한 파이넨의 영주는 무척 흡족해하며 다음 거래도 부탁했다. 전선에 군량미가 많이 모자란지 빨리 운반해 달라는 요청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기껏 대형 선박을 몰고 해협을 건너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는 노릇이다.
루크는 파이넨의 영주에게 난민 문제를 거론했다.
“지금 프라임 왕국이 난민 문제 때문에 골치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쟁에서 밀리면서 대규모 피난민의 행렬이 형성되었고, 각 성마다 난민들에게 배식하느라 군량미가 턱없이 모자랐다.
터전을 잃은 자들을 방치할 수도 없고, 계속 돌보자니 병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없어 군의 전력이 약화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타국에서 난민을 수용해 준다면 고마울 따름이지만, 파이넨 영주의 입장상 대놓고 맡아 달라고 말하기도 뭐했다.
“전쟁이 길어지면 응당 발생하는 현상 중 하나 아니겠소. 백성을 외면할 순 없으니 최대한 보살피려고 노력 중이오.”
“정 감당하기 힘들면 저희가 맡아 드릴까 했는데, 과한 참견이었나 보군요.”
“그럴 리가 있겠소? 고마운 제안이긴 한데, 그렇게까지 해 달라고 하려니 염치없어 보일 것 같아 뭐라 말할 길이 없구려.”
“백성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용의가 있으니 한번 고려해 보시지요.”
“크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고려해 보겠소. 다만 우리 백성을 타지에 보내는 것이니 나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구려. 왕궁에 문의해 볼 테니 며칠만 기다려 주지 않겠소?”
“얼마든지요.”
체면이 있어 바로 난민을 맡기지 못할 뿐이지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프라임 왕국의 왕궁에서도 내부의 불안 요소를 지울 기회인지라 일사천리로 승인을 내렸다. 그로 인해 파이넨 영주가 언급한 날짜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답변이 되돌아왔다.
각 지방의 영주들은 품고 있던 난민들 중에서 희망자들을 뽑아 파이넨으로 보냈다. 루크는 사람을 시켜 전과자와 출신이 불분명한 자를 제외한 일반 백성들을 배에 태웠다.
그리하여 갈 때는 곡식을 싣고, 올 때는 난민을 태우고 귀환하게 되었다.
* * *
프라임 왕국의 난민들은 드래프트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 번째는 땅을 공짜로 임대해 준다는 점이었다. 영지민들이 모두 넓은 농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고 있는 땅이 5할 이상이라고 한다. 거기다 5년 이상 임대를 유지한 자에게는 땅의 소유권을 공짜로 넘겨준다고 하니,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드려야 안 들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오크들이 인간들과 섞여서 살고 있는 점이었다. 이종족끼리는 섞여 살기 힘들다는 것이 세간의 상식인데, 드래프트 영지의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오크와 공존을 이루고 있었다. 오크까지 받아들인 영지가 같은 인간을 못 받아들이랴. 여기서 난민들은 영지민들이 굉장히 포용력이 넓다는 인상을 받았다.
루크는 난민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정착하고 싶은 자는 정착하고, 돌아가고 싶은 자는 언제든지 돌아가도 좋다.”
말이 선택의 자유지, 난민들의 마음은 모두 정착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5년 동안 평범하게 지내기만 해도 내 땅이 생기고, 세금도 다른 곳보다 월등히 낮은데, 본국은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는데 돌아가고 싶겠는가.
난민들은 이미 드래프트 영지의 영지민이라도 된 양, 너도 나도 토지 임대 분양을 신청했다.
프라임 왕국과의 거래 횟수가 늘어날수록, 남작 가의 재정은 부유해졌고, 드래프트 영지로 이주하는 자의 숫자도 늘어났다. 그에 따라 놀고 있던 땅이 제 역할을 되찾으면서 생산량은 배로 늘어났다. 프라임 왕국으로부터 유입된 고급 인력에게 재정 지원을 해주어, 각종 2차 산업과 교육 시설을 설립하면서 생활의 질이 한층 상승했다.
재정의 대폭 상승은 군사력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남작 가에서 수용할 수 있는 정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줄곧 미루어 두었던, 오크 전사를 상비군으로 편입하는 작업을 뒤늦게 끝마쳤다. 그간 오크 전사도 늘어난지라, 오크 보병의 수가 2,000명에 달했다. 제랄드가 이끄는 기마대의 숫자는 100명을 그대로 유지했으나, 인간 보병을 400명까지 대폭 늘리면서, 인간 상비군의 수를 500명으로 맞추었다.
총합 2,500명의 상비군.
징집병을 제외한 상비군의 규모만 따졌을 때, 이 규모는 겐크 왕국에서도 10위 안에 들어가는 숫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