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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5화 (15/200)

# 15

15화 능글맞은 아저씨(3)

그란데 백작가에서 열린 간담회는 첫날부터 모두의 예상과는 다른 형태로 흘러갔다.

드래프트 영지의 망나니 남작이 화제의 중심에 오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란데 백작이 친히 같이 식사를 하자며 권유까지 했거늘, 거절을 해? 귀족들은 루크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란데 백작이다. 겐크 왕국 남서부 지방의 귀족으로서 중앙 정계로 진출하려면 그란데 백작의 후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즉, 출세하려면 그란데 백작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소리다.

한데 그 시발점이 될 식사 권유를 거절하다니!

제 스스로 출세의 기회를 걷어찬 격이다.

잠시나마 루크에게 질투와 시기를 느낀 귀족들은 루크의 행동에 안심하며 뒤늦게 그를 비웃었다.

“한동안 영지에 틀어박혀 살면서 자숙을 하나 싶었는데, 역시 망나니는 망나니군요.”

“오히려 전보다 더 심해진 것 같지 않습니까? 쯧쯧,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철이 들어야 하는데 명색이 남작이라는 사람이 그 모양이니, 원.”

“제 아비는 안 그랬는데 아들놈은 왜 저 모양인지. 드래프트의 영지민들이 불쌍할 따름입니다.”

선입견이라는 것이 이토록 무섭다. 한번 미운털이 박히면 뭐든 부정적으로 해석해 버린다. 한 걸음만 물러나서 상황을 일관했다면 ‘역시 루크는 멍청하다’는 생각보다는 ‘왜 그란데 백작이 루크에게 식사를 권유한 걸까?’란 의문에 도달했을 것이다. 루크에 대한 부정적인 해석에, 원래 그들이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인 것도 한몫했다.

오랜만에 씹고 뜯을 거리가 나타난 탓일까.

귀족들은 루크를 안주로 삼아 술을 마시는 데 열중한 나머지, 어느 순간부터 그란데 백작이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귀빈용 숙소로 안내 받은 루크는 하녀가 가져온 더운물로 몸을 씻고 잘 준비를 하였다. 그란데 백작의 권유를 에둘러 거절하기 위해 피곤하다고 말했는데, 단순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피곤하기도 했다.

아무리 내 발로 걷는 게 아니라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일주일 내내 마차 안에 있어 봐라. 누구라도 피곤을 호소할 것이다.

목욕 가운을 두르고 창문을 열어 땀을 식히고 있는데 제랄드가 찾아왔다.

“식사도 안 하시고 연회장에서 나오신 게 계속 마음에 걸려서 주방에 갔다 왔습니다. 드시지요.”

그란데 백작의 식사 권유를 거절할 당시, 연회장 안에 제랄드도 있었기 때문에 루크가 식사를 하지 않고 나온 것을 고스란히 목격한 참이었다. 그가 가져온 쟁반에는 빵과 고기 수프, 스테이크와 생선 요리, 디저트가 한꺼번에 담겨 있었다. 마치 풀코스 요리를 한꺼번에 만들어 쟁반에 담아 온 듯한 모양새였다.

루크는 제랄드가 주방장을 얼마나 닦달했을지 상상하며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안 먹고 그냥 자도 상관없는데 괜한 수고를 하게 했군.”

“수고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남작님께 봉사하는 것이 제 유일한 기쁨이자 보람이니까요. 그리고 한 끼라도 거르게 했다간 드골 집사가 노발대발할 겁니다.”

“요즘 드골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기름기 없는 식단을 자꾸 추천하더군.”

“뭐, 그럴 나이이긴 하지요.”

마치 이곳이 드래프트 영지인 것처럼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 문 쪽에서 다소 힘이 들어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똑!

“식사 계속하십시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식사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한 제랄드가 루크를 대신하여 문 쪽으로 가 방문객의 정체를 물었다. 문 너머에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들려왔다. 방문객의 목소리는 루크에게 닿지 않았으나 문 앞에 있는 제랄드에게 분명하게 전해졌다. 제랄드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지는 걸로 봐서 예사 손님이 아닌 듯했다.

루크의 곁으로 돌아온 제랄드가 찾아온 이의 정체를 전해 주었다.

“남작님, 그란데 백작님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솔직히 이번 것은 조금 의외였다.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거절을 했으니, 체면이 있어서라도 간담회 중에는 접근해 오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한데 거절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그란데 백작은 본인이 직접 루크의 방까지 찾아오는 기행을 선보이고 있었다. 속을 알기 힘든 사람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체면을 불구하고, 계속 접촉을 시도할 만한 이유를 품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저리 애타게 만나고 싶어 하는데, 한 번 정도는 응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루크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제랄드에게 턱짓했다.

“들여보내.”

제랄드가 문을 열자 그란데 백작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매를 희번덕이며 루크를 보는가 싶더니, 음식을 그득히 차린 테이블에 시선을 두었다.

“혼자 먹을 거면 자리를 함께하지 그랬나.”

“서커스단의 라마도 아닌데 구경 받으며 식사할 이유가 없지요.”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놀랍군. 예전의 자네라면 관심 받는 것을 즐겼을 텐데 말일세.”

“사람이 늘 한결같을 순 없는 노릇이지요.”

“지금이 훨씬 더 보기 좋아 보인다는 뜻일세. 예전에는 심해도 너무 심했지.”

“피곤하다는 말씀을 드린 건, 반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본론으로 넘어가시지요. 무슨 용건이십니까?”

그란데 백작은 루크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랄드가 눈치껏 그란데 백작에게 와인 잔을 건네며 들고 있는 와인을 한 잔 따라 주고자 하였으나 백작은 그럴 필요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오랫동안 앉아 있을 생각은 없다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피차 지분거리며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기에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먼저 운을 띄운 것은 그란데 백작 쪽이었다.

“병사로부터 보고를 받았네. 드래프트 영지의 상황이 최근 들어 물이 올랐다고 하더군.”

“예전 수준이 낮았던 거고, 지금에 들어 겨우 남작령다운 모습을 갖춘 것이지요.”

“과한 겸손은 의심을 만들지. 자네 영지에 간섭하려는 게 아니니 너무 경계하지 말게.”

“덕담이나 하려고 찾아오신 건 아닐 텐데요?”

“자네가 그리 말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오크 평야는 어떻게 평정한 건가?”

“병사들과 영지민들의 각오가 이루어 낸 업적이지요.”

“열정만으로 어찌 될 수준이 아니잖은가.”

“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군요. 오크 평야를 평정한 과정을 꼭 알아야 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나 역시 자네가 오크 평야를 평정한 과정을 굳이 숨기는 이유를 모르겠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솔직하게 말해 주게나.”

그란데 백작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대강 그가 원하는 대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루크, 너도 힘이 없고, 영지민도 힘이 없는데, 무슨 수로 오크를 평정했느냐? 제3 세력이 개입한 게 아니더냐? 그것이 의심스럽다!’

그란데 백작은 자꾸 제3 세력이 개입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루크에게 대답을 종용하고 있다. 의심할 만도 하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비정상적인 상승폭을 그리긴 했다.

루크는 날카로운 눈빛을 띠며 그란데 백작을 노려보았다.

“방금 그 말은 철회해 주시지요.”

“뭐?”

“부모를 잃은 아이가 창을 쥐고 싸우겠노라고 말한 것이 병사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습니다. 작은 불씨가 하나씩 모여 큰불이 되었고, 오크들의 살을 태워 지금의 영지를 만들어 냈지요. 백작님이라 한들 영지민들이 스스로 대들보가 되어 쌓은 업적을 모욕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합니다.”

당장이라도 살을 저밀 것 같은 날카로운 루크의 눈빛에 그란데 백작이 일순 어깨를 흠칫거렸다.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 꼬아서 생각했다 싶었는지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불쾌했다면 사과하겠네. 혹시나 다른 세력이 개입한 거라면, 내겐 그에 대해 명확히 파악할 의무가 있어서 물은 것이니 이해해 주게나.”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군요. 오크들 때문에 고통 받을 땐 모른 척하더니, 잘되는 꼴을 보자마자 의무를 운운한다? 본인의 행동이 모순된 행동이라는 건 알고 계십니까?”

“훗, 아차, 이거 또 사과해야겠군. 미안하네. 이 근방에서 옳은 소리 하는 사람을 본 지가 오래돼서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구먼. 오랫동안 같잖은 아첨만 듣다 보니 나도 격이 낮아진 모양일세.”

“영혼에도 지방은 붙는 법이지요.”

“그런 말도 할 줄 알게 되고 멋지게 성장했구먼. 예전의 자네 수준이 머리에 박혀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만 의심하는 쪽으로 생각이 뻗더군. 반성하고 수정토록 하지.”

“용건은 그것뿐입니까?”

“정말로 그것뿐이었네. 피곤한 사람을 계속 깨어 있도록 붙들어 둬서 미안하군. 앞으론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내게 말하게. 내 흔쾌히 돕도록 하지.”

제3 세력의 개입 여부에 대해 묻는 것.

정말로 그 외의 다른 목적은 없었는지 깨끗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그란데 백작이었다. 백작이 떠난 직후 제랄드가 루크의 잔에 와인을 따르며 불편한 심정을 토로했다.

“힘들 땐 외면하더니 잘나가니까 태도가 바뀌는군요. 속내는 알 수 없어도 뚝심 있다고 소문난 분이셨는데, 왠지 실망스럽습니다.”

“그런 게 아냐.”

“네? 무슨 말씀이신지?”

“능글맞은 아저씨 같으니. 중앙 정계에서 놀다 온 사람답군.”

“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어서 그런데, 제게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왜 제3 세력의 존재를 강조했겠어? 실제로 존재하니까 강조했겠지. 그냥 모르고 있는 거랑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 얘기가 달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날 끌어들이겠다 이거지.”

“허, 그런 뜻이 있었군요.”

“정치가는 입으로 먹고사는 직업이야.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눈 뜨고 코 베이기 십상이지.”

“그리 말씀하시는 것치곤 즐거워 보이십니다만.”

제랄드의 말마따나 어느새 루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겐크의 귀족 중에서도 말이 통하는 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참이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서로 이해관계를 맞출 수 있다는 것. 그란데 백작과는 비즈니스 관점에서 아주 유익한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 * *

루크의 방에서 나온 그란데 백작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가 나온 기분이군.”

자기 집인데도 마치 처음부터 루크의 영역이었던 것처럼 숨이 턱턱 막히는 분위기였다. 루크 쪽은 아무렇지도 않았던 모양이지만 말이다.

특히 루크가 진심으로 정색하고 나섰을 때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남작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위압감이었다. 왕도 저만큼 위압감이 넘치진 않는다.

아니, 기억나는 선에서 저런 눈빛을 띠는 자가 한 명 있긴 했다. 오래전 아레나 왕국 어린 국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에 섞여, 먼발치에서나마 어린 국왕을 알현한 적이 있었다. 그때 보았던 어린 국왕의 눈빛이 딱 저런 느낌이었다.

‘로메우 공왕만 아니었더라면 우리 겐크 왕국에 큰 위협이 될 사내였지.’

그란데 백작은 심호흡으로 기분을 환기시키며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이번 간담회에서 제3 세력의 존재를 밝혀내야 한다. 그를 위해 일부러 남북부로 이전하려던 마탑의 수장을 설득하여 남서부로 이전하도록 만든 것이니까.

최근 들어 왕국의 곳곳에서 불안을 조장하는 사건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그란데 백작은 우연히 놈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알게 되어 왕궁에 이 사실을 제보했으나 근거 불충분으로 기각을 당했다. 만약 이번 사건으로 놈들의 존재를 증명한다면 왕궁에서도 본격적으로 움직여 줄 터.

놈들이라면 마탑이 가장 불안정해지는 지금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이용하고 싶을 테니, 반드시 수작을 부릴 것이다. 마탑 유치를 미끼로 삼아, 놈들이 접근하도록 끌어들인 다음 제압할 생각이었다.

‘일단 루크 저 아이는 관계없는 게 확실해졌군. 적어도 거짓말을 하면서 내비칠 수 있는 위압감은 아니었지.’

그란데 백작은 과감하게 의심이 가는 사람의 명단에서 루크를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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