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22화 배신자들에게 보내는 폭탄(3)
알고 있는 걸까.
바리엘이 루크를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루크도 바리엘을 관찰하고 있다.
보름 동안 관찰해 보니, 바리엘이 아레나 공국의 공작원인지 아닌지 판단이 섰다.
사건의 경과가 궁금해진 제랄드가 저택에 찾아와 루크와 일대일 회담을 가졌다.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파크라 영지 출신인 것과 백작 가에서 집무관 생활을 했던 것은 사실이더군요.”
“일단 아레나 공국 출신인 것에서 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지. 보름 동안 꽤 조심스럽게 움직이긴 했어도, 놈도 사람이다 보니 조금씩 냄새를 풍기더군. 십중팔구 공작원이야.”
일부러 과중한 업무를 부여하여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용해 먹을 생각으로 유인했다고는 해도 중요한 정보를 내줄 생각은 없으니 말이다. 바리엘도 나름대로 업무 외의 시간에 정보를 수집해 보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사전에 손을 써 두었기에 놈이 얻어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제랄드는 일련의 흐름이 모두 루크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게 신기했다.
“조사해 보니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바리엘은 본래 파크라 영지 예전 영주의 아들이더군요. 아비는 예전에 자결했고, 공국으로 전환될 때까지 영지를 방치했다는 책임을 물어 작위를 몰수당했다고 합니다.”
“공작원으로 활동하는 동기까지 확실해졌군. 겐크 왕국을 정복하면 작위를 새로 부여하겠다고 약속한 거겠지. 공국 입장에선 버리는 돌로 쓰기에 안성맞춤인 소모품이로군.”
“솔직히 정말로 공작원이 제 발로 굴러 들어올 줄은 몰랐습니다.”
“쥐구멍 앞에 놓은 치즈에 쥐가 다가왔다고 해서 놀라는 사람은 없지. 공작원을 노리고 함정을 파 놨는데, 공작원이 걸리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쥐와 인간은 다르지 않습니까.”
“수준이 짐승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쥐나 다를 바 없지. 쥐는 생각보다 똑똑하다고들 하니, 오히려 쥐 쪽이 나을지도.”
“어흠! 어흠! 어쨌든 공작원인 게 확실하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군요.”
공작원이 개인 보좌관으로 들어온 후의 작전도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참이었다. 치즈로 쥐를 유인하는 단계에서 끝낼 생각은 전혀 없다. 치즈에 쥐약을 섞어 쥐새끼가 가져가게끔 해야 다른 쥐새끼들과 치즈를 나눠 먹고, 같이 곯아 죽을 것 아닌가.
이미 쥐덫은 쳐놨다. 나머지는 저택에 숨어든 쥐새끼가 쥐약이 섞인 치즈를 가져가게 만드는 것뿐이다.
루크와 제랄드는 미리 짜 놓은 각본대로 가짜 정보를 흘릴 준비에 나섰다.
* * *
“후우,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라 여겼는데, 오히려 날이 갈수록 지치는구먼.”
흔히들 요령이 생기면 일에 익숙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과중한 업무에 익숙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루크 같은 체력 괴물은 예외로 치고, 평범한 사람들은 하루에 15시간씩 일하면 금세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게 보통이다.
더군다나 휴일조차 없다. 이놈의 영주는 ‘농사꾼이 일주일 내내 일하는데, 그 농사꾼의 뒤를 봐줘야 하는 사람이 쉬는 게 말이나 되나?’라면서 쉬질 않는다. 계약상 루크가 일하면 개인 보좌관은 무조건 업무에 들어가야 한다. 때문에 덩달아 바리엘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남들보다 많은 업무, 그리고 남들보다 적은 휴식은 차츰차츰 바리엘의 체력과 정신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사람이 지치다 보니 점점 생각하는 것이 거칠어지고, 집중력이 떨어졌다. 집중력이 떨어지니 일하는 동안 실수가 많아졌으며, 그것 때문에 루크에게 갈굼을 당하여 스트레스가 쌓이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힘든 탓에 바리엘은 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래선 곤란해. 공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정보를 얻기도 전에 내가 먼저 쓰러지겠어. 단장에게 연락해서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고 할까? 아냐, 이제 겨우 보름이 지났는데, 교대하는 건 아무래도 너무 부자연스러워. 제길, 적당히 일하면 어디 덧나나? 업무 때문에 정보를 수집할 시간이 없어. 이래서야 어느 쪽이 본업인지 알 수가 없잖아!’
바리엘은 공적을 세워야만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뭐 하나 걸리기만 해 달라는 심정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도 없는데, 무작정 날만 세운다고 정보가 들어와 주겠는가.
바리엘은 지친 나머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루크의 집무실로 향했다. 저택 본채의 모퉁이를 지나 정문으로 향하던 중 머리 위에 있는 2층 발코니에서 루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랄드, 아레나 공국의 귀족들로부터 연락은 왔나?”
아레나 공국의 귀족?
기회는 우연히 찾아온다더니, 바리엘은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때마침 발코니의 뭉툭 튀어나온 바닥 밑을 걸어가고 있던 참이라 들키지 않고 목소리만 몰래 들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제랄드라면 루크의 오른팔이니 둘만 있을 때 온갖 기밀이 오갈 것이다.
바리엘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자연스럽게 벽에 기대는 척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네, 물자만 확보되면 곧바로 거사를 일으키겠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물자? 거사?
반역을 연상하게 하는 각종 단어의 향연이 펼쳐졌다. 관련된 대상이 아레나 공국의 귀족들이기에 더더욱 그냥 흘려 넘길 순 없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루크와 제랄드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 화물선 다섯 척 분량의 물량을, 거사를 일으킬 영지로 각각 한 척씩 보내도록 해.”
“그만한 물량을 그냥 제공했다간 부자연스럽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원가로 넘기면 될 일이야. 마진을 남기지 말고, 유통비와 인건비만 포함시켜. 그 정도면 공국의 귀족들도 그리 부담되진 않겠지.”
“알겠습니다. 거사가 성공하면 중앙 정계에서도 본격적으로 남작님을 신임하게 되겠군요.”
“전하께서도 아레나 공국 녀석들은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 항상 불안하다고 하시더군. 우리 겐크 입장에선 공국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자멸하는 형태가 가장 깔끔하니까 잘된 셈이지.”
드래프트 영지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기만 해도 감지덕지라 여기던 차에 바리엘은 상상 이상의 이야기를 들어 버렸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만 놓고 보면 마치 아레나 공국 내에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 같지 않은가!
갑자기 충격적인 정보가 들어온 터라 바리엘의 머릿속은 혼잡해졌다. 공국 내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게 사실일까? 하지만 실제로 루크와 제랄드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이야기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들이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
‘잘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긴 해. 겐크 왕국이 합리적으로 우리 공국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싶어 한다면, 뒤에서 몰래 반란을 부추기고 있어도 이상한 건 없어. 우리도 공작원을 투입해서 혼란을 유도하고 있잖아.’
본인들도 뒤에서 공작을 펼치고 있는데, 겐크 왕국이라고 하지 말란 법은 없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구두쇠의 눈에는 쓰레기조차 돈으로 보이기 마련이며, 음란 마귀가 씌인 자들에게는 나뭇결마저도 야하게 보일 따름이다. 공작원인 바리엘에게 지금의 대화는 겐크 왕국이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각 귀족들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해야겠군. 내전을 치르는 내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하면 거사를 일으킬 결심이 설 테지.”
이 말을 마지막으로 루크와 제랄드는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발코니를 떠난 후에도 바리엘은 한동안 발코니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박인 정보를 얻어 냈다.
잘만 하면 공국 내의 반역자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데다, 운이 좋아 겐크 왕국이 연루되어 있다는 증거까지 잡는다면 겐크 왕국을 꼼짝 못 하게 할 큰 약점 하나를 쥐는 셈이다. 일이 잘 풀린다면 그 누구도 바리엘의 공적을 부정할 수 없을 터. 잘만 하면 이전의 작위를 되찾는 정도가 아니라 백작 이상의 작위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장님께 연락을 넣어야겠어. 크크크, 안 그래도 때려치우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군.’
* * *
며칠 후, 쉐도우 나이트의 단장은 바리엘로부터 서신을 전해 받았다. 이번에 도착한 봉투의 두께는 이전과는 남달랐다. 봉투 안에는 서신과 함께 다량의 서류가 동봉되어 있었다.
서신을 읽는 내내 쉐도우 나이트 단장의 표정이 굳어 갔다.
“다섯 개의 가문이 반란을?”
서신 안에는 겐크 왕국이 비교적 세간에 덜 알려진 드래프트 영지를 통하여 아레나 공국에서 공작을 가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공국 내에서 반란을 꾀하고 있는 귀족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쉽사리 믿기 힘든 내용이었다.
반란을 꾀하는 귀족은 레노스 백작, 스라인 자작, 굴렘 자작, 드링키 남작, 스미스 남작으로, 모두 공국의 건립에 일조한 자들이다. 카인이 국왕이던 시절 그를 끌어내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귀족들이 모두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한 번 배신한 놈이 두 번 배신하지 말란 법은 없지.’
동봉된 서류는 드래프트 영지의 무역 수출, 수입 예산안 사본이었다. 예산안에 따르면, 다섯 귀족에게 파는 물건의 가격은 다른 곳에 파는 것에 비해 3할가량 낮았다. 그야말로 다섯 귀족에게만 파격적인 가격에 물건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엘이 보내온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리 적혀 있었다.
[루크 남작이 다섯 귀족에게 반란 내내 물자를 제공하겠다는 서신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서신을 확보할 수 있다면 반란 분자들과 겐크 왕국의 숨통을 조일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드래프트 영지란 개천에 용이 사는지, 미꾸라지가 사는지 확인하려고 바리엘을 파견한 건데, 의외의 큰 수확을 얻었다.
바리엘의 보고대로 겐크 왕국의 공작을 입증할 서신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두 나라의 관계는 180도 역전될 것이다.
쉐도우 나이트의 단장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서신을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 * *
보름 후, 드래프트 영지의 대형 상선이 아레나 공국에 도착하여 다섯 귀족에게 직접 거래를 청했다.
귀족들에게 드래프트 영지의 거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서 다시 팔아도 이득일 정도로 물건을 싸게 팔아 준다는데 누가 마다하랴. 눈앞의 이득에 다섯 귀족은 눈이 멀어 아무 의심도 없이 대형 상선의 물건을 모두 사들였다.
“여기까지 싣고 온 것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이렇게 싸게 팔면 남는 게 있긴 한가?”
“걱정 마시길. 겐크 남서부의 곡물 가격이 폭락해서 여기에 파는 게 훨씬 이득입니다.”
“그만한 생산량을 갖추고 있는 게 부럽구먼. 혹시나 물량이 남으면 언제든지 또 물량을 풀러 오게나. 아예 제휴 관계를 맺는 것도 고려해 볼 법하겠어.”
“돌아가면 남작님께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루크 남작가의 도장이 찍힌 원산지 보증서입니다.”
“드래프트 영지에선 별의별 걸 다 발행하는구먼. 곡식이야 썩지만 않으면 어디가 생산지인지 누가 신경 쓰기나 하나.”
“남작님께서 영지 곡식의 브랜드화를 노리고 있어서 말이죠. 경쟁력이 전부인 세상 아닙니까. 협조해 주시는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가지고 있긴 하겠네.”
레노스 백작령, 스라인 자작령, 굴렘 자작령, 드링키 남작령, 스미스 남작령.
다섯 영지에서 동시에 다섯 귀족에게 품질 보증서란 이름의 두루마리가 전달되었다. 귀족들은 두루마리를 펼친 후, 바닷물 때문에 보증서의 글자와 도장이 모두 심하게 번진 것을 확인하고 코웃음을 쳤다.
브랜드화는 무슨,
두루마리 관리나 똑바로 하고 넘길 것이지.
그래도 지속적인 이익을 가져다줄 자들이니 겉으로는 웃어넘기며 두루마리를 받아 두었다. 드래프트 영지의 사람들이 떠난 후 두루마리는 곧장 창고에 처박혔다. 귀족들은 금세 두루마리라는 것을 잊었다.
그것이 죽은 국왕, 카인이 배신자들에게 보내는 폭탄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