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23화 수도로 가는 길(1)
어느 날, 아레나 공국 소속의 레노스 백작가에 별안간 왕궁의 조사단이 찾아왔다. 조사단을 이끌고 있는 자는 로메우 공왕의 측근인 볼트 후작이었으며, 조사단은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는 몇몇 귀족과 왕궁 기사단 등등 호화로운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평소에는 얼굴 보기도 힘든 요인들의 방문에 레노스 백작은 잔뜩 긴장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볼트 후작님.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신지요?”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것이라 레노스 백작은 조사단이 다른 곳에 가던 중에 잠깐 들른 정도라 여겼다. 왕궁에서 파견을 나온 사람이 목적지로 떠날 때, 여관이 아닌 현지 귀족의 저택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는 것은 흔하디흔한 일이니 말이다.
한데 볼트 후작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발언이 튀어나왔다.
“레노스 백작, 자네를 반란 혐의로 체포한다.”
반란 혐의? 누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변고에 레노스 백작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자신에게 반란 혐의가 씌워진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왕국 시절 때도 카인 국왕이 아닌 로메우에게 충성을 바쳤다. 로메우를 공왕으로 밀어 올리겠다는 목적을 달성한 지금에 와서 반란을 꿈꿀 이유가 없지 않은가.
“뭔가 잘못 아신 것 아닙니까? 제가 반란이라뇨. 그런 생각을 품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건 조사해 보면 알 일이지. 당장 레노스 백작을 포박하고 저택 안을 수색해라!”
“오해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볼트 후작님! 제가 반란을 꿈꿀 사람이 아니라는 건 후작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레노스 백작이 애타게 무죄를 주장해 보았으나 볼트 후작은 요지부동이었다. 왕궁 기사단이 직접 저택을 들쑤시며 수색에 나섰고, 때아닌 소란에 백작가는 불안에 휩싸였다.
졸지에 죄인처럼 포박을 당한 레노스 백작은, 양쪽 무릎을 꿇은 채로 심호흡을 하였다. 난데없는 반란 혐의에 놀라긴 했으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당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정말로 반란을 꿈꾼 적 따위,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반란과 관련된 증거물이 있을 리 만무하다. 여기서 불필요하게 흥분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면 알아서 혐의가 풀릴 것이다.
그러나 레노스 백작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창고를 수색하던 왕궁 기사 한 명이 두루마리를 가지고 나와서 볼트 후작에게 넘겼다.
“볼트 후작님, 찾았습니다.”
저건 겐크 왕국의 루크 남작에게 받았던 품질 보증서이다.
저게 무슨 대수라고…….
한데 볼트 후작은 두루마리를 펼쳐 한번 스윽 훑더니 미간에 금을 그었다.
“직인을 대조해 봤나?”
“네, 약간 번지긴 했어도 루크 남작가의 직인과 동일합니다. 다만 글자는 너무 심하게 번져서 분석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일부러 물을 끼얹어 내용을 감춘 것이로군. 레노스 백작,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 이 서신은 어떻게 설명한 건가?”
“그 서신은 루크 남작에게 받은 곡물의 품질 보증서입니다. 그게 어찌 반란의 증거가 된단 말입니까?”
“봉기 때 쓸 군량미를 제공받았다는 걸 다 알고 왔거늘, 끝까지 발뺌을 하는구나! 이게 정녕 품질 보증서라면 왜 물에 적셔 파기한 것이냐!”
“억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파기할 거면 불에 넣었지, 왜 물에 넣었겠습니까?”
“네놈이 물에 넣어 파기한 건데 그 이유를 내게 물어서 어쩌잔 거지?”
“정말 아닙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럼 한 가지만 물으마. 왜 루크 남작이 다른 곳을 놔두고, 이 먼 곳까지 와서 파격가에 곡식과 무기를 넘긴 것이냐? 그에 대해선 어떤 변명을 할지 기대되는구나.”
“저도 모릅니다. 갑자기 와서 싸게 판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서 쟁여 뒀다가 다시 되팔 생각으로 들여 둔 것입니다!”
“끝까지 발뺌하는군. 여봐라! 레노스 백작과 그 일족을 모두 호송차에 태워라! 모두 포박하여 수도로 연행해라!”
레노스 백작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자기가 한 일이라고는 물건을 싸게 사들인 것밖에 없다. 그런데 물건을 산 것이 반란 행위가 되고, 품질 보증서는 반란 계획서로 둔갑해 버렸다.
내막을 모르는 레노스 백작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똑같은 억울함은 느낀 이가 있었으니…….
그가 자신이 느낀 억울함과 파멸을 똑같이 되갚아 주고 있다는 것을 레노스 백작이 알 리 없었다.
* * *
같은 시각, 레노스 백작 외에도 4명의 귀족이 같은 과정을 거쳐 체포되었다. 다섯 귀족은 전원 역모죄의 혐의를 뒤집어쓴 채로 공국의 수도로 호송되었다.
공국의 왕궁은 쉐도우 나이트로부터 ‘공국 내 다섯 귀족이 반란을 꾀하고 있으며, 루크 남작가로부터 싼값에 군량미와 무기를 제공받았다’라는 말을 듣고 조사단을 파견했다.
쉐도우 나이트의 보고대로 다섯 귀족의 저택에는 싼값에 제공받은 물자가 있었고, 반란 내내 루크 남작가에서 물자를 제공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두루마리가 있었다.
수도로 끌려온 다섯 귀족과 그 일가는 감옥에 갇혀 쉴 새 없이 취조를 당했다. 취조 과정에서 주리를 틀거나, 곤장을 치는 등 다소 과격한 행위가 이어졌으나 다섯 귀족은 끝까지 누명을 주장했다.
* * *
공국 왕궁의 대강당 안.
계단 위의 단상에 위치한 왕좌에는 로메우가 앉아 있었다. 예전만 하더라도 염소수염에 퀭한 눈과 옴폭 들어간 볼 등 해쓱한 인상이었던 로메우는, 공왕이 되면서 급격히 살이 불어 턱에 층이 생겨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아이덴티티라도 되는 양 여전히 염소수염을 고수하고 있었다.
취조가 시작된 지 한 달째 되는 날, 볼트 후작으로부터 보고가 올라왔다.
“오늘 아침, 레노스 백작과 스라인 자작이 사망했습니다. 상처가 곯았는데 본인도 심해져 가는 걸 몰랐던 모양입니다.”
“엉덩이로 의자나 닦을 줄 알던 놈들답게 약해빠졌군. 그런 주제에 반란이라니, 나도 꽤 얕보였나 보구나.”
“어딜 가나 주제를 파악할 줄 모르는 녀석들은 넘쳐나니 말이죠.”
“나머지 녀석들은 어떻게 됐지?”
“굴렘 자작과 드링키 남작은 발칙하게도 끝까지 거짓 무죄를 주장하며, 옥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스미스 남작은 반쯤 미쳐서 더 이상 취조가 힘들 것 같더군요.”
“흠.”
로메우는 왕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고 턱을 괴었다. 두어 번 침음을 흘리며 상념에 잠기는가 싶더니 재차 질문을 던졌다.
“반역자들의 저택을 수색한 결과는 어떻게 됐지?”
“좀 더 명확한 증거를 찾아내려고 재수사를 해 보았는데, 찾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골치 아프게 됐군. 겐크 왕국에 압박을 주려면 놈들이 개입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하거늘.”
“저번에 가져온 두루마리로는 부족한지요?”
“그딴 걸로 놈들이 꿈쩍이나 하겠느냐. 글자를 알아볼 수 없으니 증거물로는 효과가 떨어져. 좀 더 확실한 무언가가 있으면 좋으련만.”
매년 겐크 왕국이 모르게 계속 군사력을 키워온 덕에 정면으로 대결해도 꿀리지 않을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속국이 되면서 로메우는 겐크 왕국의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지금 군사를 일으키면 가신이 주인을 친 격이라 왕이 된다 하더라도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려웠다.
겐크 왕국이 뒤에서 공국에 수작을 부렸다는 증거만 있다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얻게 된다. 덤으로 겐크 왕국의 위상이 바닥을 칠 테니, 주변국의 협조를 얻기 쉬워진다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증거를 얻지 못하면 탁상공론에 불과한 작전일 뿐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차에 볼트 후작이 꾀를 내었다.
“복잡하게 움직일 것 없이 직설적으로 가시지요.”
“직설적이라면?”
“이번에 구속한 다섯 명이 반역자인 걸로 밝혀졌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도록 하죠.”
“공식 발표에도 그만한 증거는 있어야 할 텐데? 아직 혐의만 있을 뿐, 증거는 없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잊으셨습니까? 카인 국왕 시절에도 유언장을 조작했지요. 이번에도 같은 방법을 쓰면 될 일입니다.”
“음, 생각해 보니 그때 그런 방법을 썼지.”
“유언장에 역모죄를 인정하고, 그 밑바탕엔 루크 남작가의 지원이 있었다는 내용을 적는 겁니다. 실제로 지원한 이력이 있으니, 루크 남작을 빌미로 겐크 왕궁에 청문회를 신청하면 좀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겐크 왕궁에선 루크 남작을 버리면 그만일 텐데?”
“그럴 땐 루크 남작가에 심어 둔 바리엘을 증인으로 내세우면 됩니다. 바리엘이 직접 루크와 그의 기사가 나눈 대화를 들었다 했으니까요.”
거짓 유언장을 빌미로 청문회를 신청하고, 바리엘을 증인으로 삼아 겐크 왕국이 뒤에서 수작을 부린 것을 만천하에 알리자는 얘기였다.
로메우는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볼트 후작의 계획을 채택했다.
“흐음, 개인 보좌관의 증언이면 해 볼 만하겠지. 유언장을 만들어서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겐크 왕국에 청문회를 신청하도록.”
“네, 쉐도우 나이트에도 바리엘을 미리 복귀시키도록 지령을 내려놓겠습니다.”
* * *
루크 남작가에 한 통의 서신이 도착했다. 겐크 왕궁으로부터 내려온 공문이었다.
서신에는 아레나 공국에서 반역자들을 검거했는데, 루크와 연관이 있다는 증거를 포착했으니 청문회에 참석하여 해명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구속하는 형태가 아닌 통지서만 보낸 것으로 봐선 겐크 왕궁에서도 괜한 트집 정도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일을 복잡하게 만들 것 없이, 본인을 참석시켜 해명하게 하는 것으로 끝낼 모양이었다.
루크는 공문을 고이 접어 봉투에 도로 넣으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쥐구멍에 쥐약이 전달됐군.”
전달된 쥐약은 의도대로 쥐구멍 속의 쥐새끼들을 죽였다. 배신자의 손으로 배신자들을 처단하게 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알고는 있는 걸까? 이번에 죽거나 폐인이 된 자들은 모두 한 충성 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즉, 로메우는 스스로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죽인 셈이다.
그것도 모자라 청문회까지 신청했다고 한다.
아마 바리엘을 증인으로 삼아, 겐크 왕국이 뒤에서 공작한 것이라고 주장할 생각일 것이다. 이는 곧 아직도 루크가 흘린 가짜 정보를 진짜라고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겐크 왕국은 뒤에서 아무런 공작도 펼치지 않았는데 말이다.
멋대로 착각하여 청문회까지 건의해 주었는데 어찌 이용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쏘냐.
차려진 밥상을 마다할 정도로 너그러운 성격은 아니다.
놈들이 알아서 목덜미를 드러냈으니 철저히 뜯어먹어주겠다.
‘저쪽은 바리엘의 증언이면 필승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미리 손을 써 두고 출발해야겠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바리엘이 루크의 집무실에 찾아왔다.
“남작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마침 잘됐군. 나도 할 말이 있었거든. 먼저 말하도록 해.”
“사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래도록 보좌하겠노라고 말씀드려 놓고 지키지 못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미안해할 것 없어. 청문회에서 증인 노릇을 하려면 미리 몸을 빼놔야 할 테니 말이야.”
“네? 그게 무슨…….”
바리엘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루크가 움직였다. 벽에 걸린 검을 집어 들고선, 가벼운 손목의 움직임만으로 낮게 휘둘렀다. 일순 검날에 마나 오라가 맺히는가 싶더니, 검의 끄트머리가 지면에 붙을 듯 낮은 궤적을 그리며 바리엘의 양발의 뒤쪽을 그었다.
서걱!
숙련된 조교의 동작처럼 부드러운 동작 속에서, 바리엘의 양발의 뒤쪽이 깊은 검상으로 벌어졌다. 예기치 못한 일격을 받은 바리엘은 발 쪽의 신경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무너지듯 쓰러졌다.
“커헉!”
이어 루크는 체중을 실어 바리엘의 복부를 강하게 짓밟았다.
투콱!
듣기만 해도 내장이 요동칠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바리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악!”
도망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바리엘을 제압한 루크는 발에 무게를 실은 채로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 수고해 준 것을 감안해서 목숨은 살려 주지. 청문회가 끝나면 무사히 공국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그때까지는 옥살이를 해 줘야겠어.”
바리엘은 고통에 잠겨 정신이 아득해져 가다가, 루크의 말에 정신을 번뜩 차렸다. 가둬 뒀다가 산 채로 공국에 돌려보내?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이미 공국에 사표를 쓰고 겐크 왕국의 수도에서 사절단과 합류하겠노라고 편지를 보내 놓은 마당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참가하지 않는다? 청문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본인이 참가하지 않으면 공국에서 뭐라 생각하겠는가. 바리엘이 배신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배신자로서 공국에 송환된다니!
그냥 죽이는 것보다 더 처참한 처사이지 않은가!
바리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발뺌했다.
“으으, 왜, 왜 이러십니까? 청문회라니, 전 아무것도 모릅… 크아아악!”
투콱!
루크는 재차 바리엘의 복부를 발로 밟으며 고통을 가중시켰다.
자근자근 부러진 부위를 밟으며 루크가 입을 열었다. 루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바리엘의 남은 희망을 모두 꺾어 버리기에 차고도 남았다.
“포상은 받고 싶다. 하지만 위험에 처하고 싶진 않다. 그런 쪼잔한 근성을 가진 놈에게 진짜 정보를 내줄 거라 생각했나 보지?”
다섯 귀족의 반란 자체가 거짓 정보라고 한다. 이미 한참 전부터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함정이었음을 알게 된 바리엘은 눈앞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