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5화 외궁에서의 청문회(1)
겐크 왕국의 수도 골디브는 굉장히 화려한 도시였다.
마차 네 개가 나란히 지나가도 남을 법한 넉넉한 너비의 도로, 인도 위를 꽉 채운 인파, 거리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화려한 건축물 등등.
군사 강국이기 전에 문화 강국이라 불리는 겐크 왕국다운 위용을 자랑했다. 구획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마차가 한껏 돌아다니는데도 혼잡함이 없었다. 광장이 여러 군데 존재했는데, 광장마다 역대 왕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겐크 왕국에선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골디브의 심벌, 타국에선 겐크 왕족의 허영심을 상징하는 값비싼 쓰레기로 불리는 물건이었다. 실제로 겐크 왕국의 왕족들이 치장에 쓰는 비용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미술품이나 장신구, 의상 등에 국가 예산의 1할을 소모할 정도로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고 있으며, 왕궁에는 각종 호화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서, 유지비만 1년에 수백억 루소가 든다고 한다.
시가지를 횡단하여 왕궁에 다다르자 경비병들이 정지 수신호를 보내며 앞을 가로막았다.
마차가 멈춰 서자 경비병 중 한 명이 마차의 문을 두드리며 경례 자세를 취했다.
똑! 똑!
“실례합니다! 신원 확인에 협조해 주십시오!”
루크는 차창을 열어 왕궁으로부터 전해 받은 공문을 내밀었다.
“루크 남작가에서 왔고, 청문회에 참가할 예정이지. 이건 왕궁으로부터 받은 공문이고.”
경비병은 두 손으로 공손하게 공문을 받아 들고 내용을 확인하였다. 가지고 있는 왕궁 직인의 사본과 공문에 찍힌 직인을 대조하더니, 곧 공문을 돌려주며 재차 경례했다.
“어서 오십시오, 루크 남작님! 지금 바로 외궁에 언질을 넣겠습니다. 안내하시는 분이 나오실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기다리자 성문 안쪽에서 비단으로 만든 자색 의복을 입은 자가 말을 타고 나왔다. 매끌매끌한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었고, 구릿빛 피부에 울끈불끈한 근육을 자랑하는 마초남 스타일의 30대 사내였다.
사내는 정중하게 허리를 45도로 숙이며 인사부터 올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루크 남작님. 로얄 나이트 소속의 기사단장 호프먼이라 합니다. 안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호프먼이라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겐크 왕족을 수호하는 로얄 나이트의 기사단장이자 겐크 왕국의 10대 마나마스터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다. 거인족과의 전쟁 때 호프먼이 하룻밤에 수십 명에 달하는 거인을 벤 일화는 휴전협정을 맺은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회자될 정도이다.
루크는 호프먼의 안내를 받으며 겐크 왕궁에 입성했다.
“루크 남작님의 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오크들을 제압하고, 드래프트 영지의 수준을 대폭 끌어올리셨다지요? 밤이 되어도 술 익는 냄새와 영지민의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영지를 일구어 내신 수완과 인품이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좋은 말만 늘어놓고 있는데 아첨의 느낌은 풍기지 않았다. 한 분야의 극에 달한 자답게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솔직하고 다감하게 타인을 평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궁전 안은 화려한 공예품과 특이한 모양으로 다듬은 정원수로 가득하여 정신이 사나웠다. 그 안에 소금기가 없는 담백한 사람이 섞여 있는 것이, 루크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귀족보다 더 귀족다운 모습을 보이는 기사 앞에서 루크도 적절한 태도를 취했다.
“나와 병사, 영지민들이 제각각 자기의 본분에 충실한 결과지.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수행한 것밖에 없어.”
“그게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부분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왕궁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정신 사납게 꾸며져 있군.”
“하하하, 처음 오신 분들은 으레 겪는 일이지요.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리고 청문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직 공지 받지 않으셨지요?”
“날짜에 맞춰서 왕궁에 오라는 내용만 적혀 있었지.”
“청문회는 내일, 외궁의 제7강당에서 실시되고, 엘리나 왕녀님과 왕궁 하원 의원 20명이 참가할 예정입니다.”
“국왕 전하가 아니라 왕녀님이?”
“상원 의회에서 내궁까지 들일 만한 사건은 아니라 판단을 내려서 말이죠. 겐크 왕궁이 원래 그렇습니다. 웬만큼 중대사가 아니면 내궁 안까지 일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보통은 외궁에서, 왕족분들 선에서 끝나는 편이죠.”
호프먼이 말하길, 겐크 왕궁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국왕과 상원 의원이 국가의 중대사를 정하는 내궁.
왕자, 왕녀와 하원 의원이 각종 잡다한 일을 도맡고 있는 외궁.
내궁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으며, 대부분의 일은 외궁에서 처리된다고 한다.
외궁에 출입하는 것 또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지라 지방 출신들은 외궁에서만 활동해도 출세했다고들 한다. 가까운 예로 그란데 백작이 이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루크에게는 이번 일을 외궁 선에서 해결한다는 게 의외일 따름이었다.
“반란과 관련된 일이 사소한 일이라니, 놀랍군.”
“공국 사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속국의 집안 다툼에 신경 쓸 정도로 여유가 넘치진 않거든요. 내궁에선 천공섬 정복의 원정 건으로 연일 회의가 치러지고 있어서 말이죠.”
“거인국과 휴전협정을 맺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았건만, 또 원정인가.”
“국왕 전하께선 야심이 넘치시는 분이잖습니까. 천공섬 정복에 성공하면 거인국의 후방을 칠 수 있으니 단단히 벼르고 있지요.”
왕궁에선 이번 일에 아예 관심이 없는 듯하다. 만약 청문회에서 루크가 연루된 것이 밝혀지면 루크만 처벌하고 끝. 루크가 연루되지 않았다면 아레나 공국에게 책임을 묻고 끝.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왕궁은 아무런 연관이 없고, 아레나 공국 혼자서 왕궁이 뒷배라고 착각하고 있으니, 서로 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루크를 안내하던 호프먼은 어느 별궁 앞에서 말을 세웠다. 덩달아 루크가 타고 있던 마차도 멈춰 섰다.
루크는 열려 있는 창을 통해 도착 여부를 물었다.
“여기가 숙소인가 보지?”
“아뇨, 엘리나 왕녀님의 별궁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시겠지만, 왕녀님으로부터 남작님이 도착하면 바로 안내하라는 명령이 있어서 말이죠.”
엘리나 왕녀와는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다.
무슨 일로 얼굴을 보고자 하는 걸까?
이번 청문회의 담당자가 엘리나 왕녀라고 하니, 청문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 터.
청문회에서 사절단을 짓뭉갤 준비는 다 해 놓았으나 판단하는 것은 엘리나 왕녀이니 청문회에 앞서 그녀의 성향을 파악해 둬서 나쁠 것은 없다.
루크는 마차에서 내려 처음으로 겐크 왕궁의 지면에 발을 딛고는 별궁으로 들어갔다.
* * *
겐크 왕국은 여왕 체제를 허가하고 있는 나라인지라 왕녀에게도 왕위 계승의 권리가 부여된다.
내궁, 외궁 제도는 외궁에 왕위 계승권자들을 배치하여 실무에 익숙해지게 함과 동시에 각 후보자들의 기량을 확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기도 했다.
현 국왕의 슬하에는 1남 2녀가 있으며, 막내인 엘리나 왕녀는 제3왕위 계승권자에 속한다.
실제로 그녀와 처음 대면하자마자 가장 먼저 ‘가냘프다’란 생각이 들었다. 가늘어도 너무 가늘다. 키는 늘씬하니 큰데, 팔다리가 가늘어 건드리면 부러지지 않을까,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혈색은 좋아서 건강하다는 인상이 강했다. 목이 적당히 파인 드레스를 입어, 물이 고일 듯 깊은 쇄골이 돋보였다.
“드래프트 영지의 루크가 엘리나 왕녀님께 인사 올립니다.”
엘리나는 화사한 미소를 띠며 테이블의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루크 남작. 그란데 백작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듣던 대로 듬직한 인상이시네요.”
그란데 백작의 이름이 거론된 순간, 루크는 어떻게 된 내막인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귀족들은 으레 자신의 뜻에 부합하는 왕위 계승권자를 골라 줄을 서기 마련이다. 그란데 백작도 한때 중앙 정계에서 활동했으니 왕위 계승권자와 안면이 있을 테고, 현재 엘리나 왕녀를 밀어주고 있는 듯했다.
루크는 엘리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운을 떼었다.
“왜 부르시나 했는데, 그란데 백작님이 미리 언질을 넣어 둔 것이었군요.”
“어머, 그란데 백작으로부터 아무 말도 못 들었나요? 전 이미 얘기가 다 된 줄 알았는데.”
“전혀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바쁜 모양이었던지라 저 혼자 바로 수도로 올라왔습니다.”
“별건 아니에요. 그란데 백작이 하도 칭찬해서 어떤 분이신가 보고 싶어서요.”
얼굴이나 보자고 부른 것치곤 분위기가 상당히 진중하다. 엘리나 왕녀는 루크와 비슷한 연배 같아 보이는데도 그란데 백작급의 관록이 느껴진다. 흔히들 왕녀라고 하면 제멋대로에 앵앵거리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엘리나 왕녀에게서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인의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부모고, 형제고, 나발이고 항상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왕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만한 관록이 있어야 하기 마련이다.
시점을 달리할 필요가 있었다. 겉은 20대의 젊은 왕녀이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정치 경력 20년의 베테랑이다. 입으로 먹고사는 직종인 만큼 휘말리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찻잔에 립스틱 자국을 남긴 엘리나가 차를 한 모금 넘기며 입을 열었다.
“공국의 사절단 측에서 청문회 연기를 요청해 왔어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무언가 사정이 생겼나 보지요.”
“전 이렇게 생각해요. 청문회의 필승 카드를 가지고 있었는데, 모종의 이유로 필승 카드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루크 남작의 생각은 어떤가요?”
“전 엉뚱하게 휘말렸을 뿐이니, 무사히 오해가 풀리길 바랄 뿐입니다.”
“정말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엘리나와 루크의 시선이 마주쳤다.
겐크 왕족 특유의 금빛 눈동자가 촉촉함을 과시하며 루크의 속을 꿰뚫을 듯 시선을 난사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녀의 미모와 언행에 휘둘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루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외면에 흔들릴 단계 따윈 지나친 지 오래다.
그란데 백작 때처럼 적당히 받아넘기려던 찰나, 엘리나로부터 흥미로운 발언이 튀어나왔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알고 있는 암중 세력에 대한 정보와 루크 남작이 알고 있는 정보를 교환하도록 해요. 참고로 이건 그란데 백작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정보랍니다.”
“왕궁에선 암중 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걸로 압니다만.”
“저는 믿어요.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왕국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죠. 왕궁 안에까지 공국의 끄나풀이 침투해 있을 정도이니까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 나라는 겉보기엔 화려해도 속은 썩어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왕궁에 사람을 심어 놓는 건 일도 아니죠. 전 암중 세력을 처리하면서 왕궁의 썩은 부분을 모두 도려내고 싶어요. 후에 제가 왕이 되어 나라를 개혁하기 위해서라도요.”
“그만큼 확신하고 계신다면 도려내기 어렵지 않으실 텐데요.”
“그러고는 싶은데, 힘이 모자라서 말이죠. 부끄럽지만, 왕위 계승권자들 중에서 가장 세력이 약해서, 알고 있어도 실행에 옮길 힘이 없어요. 이 나라를 위해, 저를 위해 힘을 보태 주지 않으시겠어요?”
현 국왕이 영토 확장에 연연하느라 내실을 다지는 데 소홀히 하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썩은 나라를 개혁하기 위해서 왕궁에 침투한 암중 세력을 걷어 내며, 그와 함께 기존의 썩은 세력도 몰아내는 것이 엘리나의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암중 세력의 존재를 알고, 귀족 독살 사건을 저지하여 능력을 증명한 루크를 원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왕위 계승권자들 중 가장 세력이 약하니, 귀족계의 떠오르는 별인 루크를 확보하여 세력을 강화시킬 생각인 것이다.
이래저래 둘러말했지만, 결론만 놓고 보자면 자기 세력에 오지 않겠냐고 권유하는 것이다.
평범한 귀족이라면 왕족의 권유에 엎드려 빌며 감복이라도 했을 테지만, 루크는 다르다.
왕족이 무슨 대수더냐.
루크에게 있어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는 이용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뿐이었다.
루크는 등받이에 기대어 편한 자세로 바꿔 앉으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정보 교환에 응하기 전에 왕녀님이 제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들어 볼까요?”
줄곧 진지함을 일관하고 있던 엘리나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자, 잠시만요, 이 나라의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작업이라니까요.”
“네, 그건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세간의 직종에 비유하자면, 우린 정치의 프로죠. 프로가 무엇으로 움직이는지 모르실 리 없을 텐데요?”
루크가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돈을 세는 시늉을 하였다. 이보다 더 적나라한 표현이 있을까. 프로는 이익으로 움직인다. 그런 당연한 이치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손을 잡을 가치가 없다.
엘리나는 심호흡으로 정신을 가다듬고선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협상에 나섰다.
“루크 남작, 만약 남작의 도움에 힘입어 제가 왕위에 오르고 개혁에 성공하면, 남작의 공을 모른 체할 것 같나요?”
“스스로를 언제 누구에게든 외상으로 걸어도 되는 특권 계층이라 여기는 시점에서, 개혁에 대한 신빙성이 많이 떨어집니다만?”
루크의 말에 엘리나가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양 멍한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앞뒤가 전혀 안 맞는 행동이었다. 권력을 보장해 줄 테니 날 밀어 달라고 말한 시점에서, 다른 왕족들과 똑같은 수준임을 증명한 셈이었다.
루크는 능숙한 화술로 엘리나를 한껏 흔들고 인심을 쓰듯 말했다.
“왕녀님께서 어떤 태도를 취하시느냐에 따라 외상을 허용할 수도 있습니다.”
“왠지 불안해지는데요?”
“전 이대로 청문회만 마치고 변두리에서 제 영지나 가꾸며 살아도 별 불만 없습니다만.”
“아, 알겠어요. 일단 한번 들어 보죠.”
“저와 왕녀님이 협력 작전을 펼칠 때마다 지휘권은 제가 가지겠습니다. 그 외에는 서로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 조건이라면 협조해 드리지요.”
루크가 주도권을 독차지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엘리나에게 선택권이 없었다. 안 그래도 힘이 부족한 그녀에게 최악의 영지를 최고의 영지로 끌어올리고, 단독으로 공국에 지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기량을 가진 이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처음과 비교하여 둘의 입장은 180도 바뀌어 있었다.
엘리나는 뭐 이런 사내가 다 있나 싶어 어이가 없으면서도 지금의 대화를 유도해 낸 루크의 화술이 감탄스러운 나머지 피식 웃고 말았다.
“후후, 그란데 백작이 왜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 했는지 알 것 같네요. 그럼 이렇게 하죠. 청문회에서 전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겠어요. 사절단을 상대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주도권을 넘길지, 말지 판단할게요. 암중 세력, 쉐도우 나이트에 대한 정보는 그 뒤에 공유하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