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26화 외궁에서의 청문회(2)
골디브의 외곽의 어느 고급 여관 안.
어느 고급 여관이든 항상 고립된 별채를 한 채씩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고급 여관 별채는 여관 부지의 구석진 곳에 있어서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별채 안에선 사절단 대표로 온 볼트 후작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한 사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바리엘로부터 연락은 어떻게 됐지?”
“사표를 내고 수도로 오겠다는 서신을 보내온 이후로 감감무소식입니다.”
“내일이면 청문회일세. 연기 요청도 거부당한 마당에 가장 중요한 증인이 감감무소식? 그걸 보고라고 하고 앉아 있나?”
“쉐도우 나이트는 기밀 유지를 위해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 지배력이 모든 단원에게 미치지는 않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일개 기사 나부랭이가 건방지구나. 네놈의 부하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될 지경인데, 모르쇠로 일관하겠단 말이냐?”
볼트 후작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이번 청문회 계획을 획책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볼트 후작 본인이다. 로메우 공왕에게 반드시 성공할 거라며 자신 있게 계획을 내밀었는데 실패해 봐라. 공국의 격을 떨어뜨린 책임을 물어, 지금까지 쌓은 모든 신뢰와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
‘한 번 좌천은 영원한 좌천이다’ 라는 것이 로메우의 지론이기에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한데 가장 중요한 열쇠인 바리엘은 올 생각을 안 하지, 쉐도우 나이트의 단장이란 놈은 제 일이 아니라는 양 방관하고 있지, 답답함에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불난 곳에 기름을 붓듯, 사내는 끝까지 이번 계획과 자신은 무관함을 주장했다.
“저희는 공왕 전하께서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는 이상 조직의 존속을 최우선으로 여깁니다. 저희가 협조해 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이며, 이후의 결과에 따라 올 보상 혹은 책임은 모두 볼트 후작님의 몫임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풀어 말하면, ‘나는 할 것 다 했으니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라는 것이었다.
참다못한 볼트 후작이 폭발했다.
“협조? 협조를 했다고? 나는 바리엘을 여기로 데려오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어떻지? 바리엘이 여기로 왔나? 데리고 왔냐는 말이다!”
“방금 말씀드렸지만, 조직 특성상 단원들의 사정을 일일이 파악하기가 어렵기에…….”
“네놈은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느냐! 왜 안 오는지! 어떻게 하면 데려올 수 있는지! 그 부분에 대한 대답을 내놓으란 말이다!”
“모자란 제가 뭘 알겠습니까.”
“크윽, 제길! 가지고 있는 수단만으로 어떻게든 할 수밖에 없는 건가.”
“제 역할은 여기까지이니 잠입 임무에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시이나 왕녀님이 의심하실 테니 말이죠.”
완전히 손을 떼듯 물러나는 사내에게 볼트 후작은 분이 섞인 목소리로 의미 없는 위협을 날렸다.
“렌디, 공왕 전하의 후광만 믿고 그리 시건방지게 굴다간 언제 한번 큰코다치게 될 거다.”
렌디, 카인 국왕의 등 뒤를 찌른 공로를 인정받아 로메우의 오른팔이 된 기사이다. 그는 지금 쉐도우 나이트의 단장으로서, 겐크 왕국의 왕궁에 잠입해 있다. 공왕이 아끼는 사람이라는 입장과 공왕의 직속부대는 공왕 이외에는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귀족들마저도 오시하고 있었다.
렌디는 한심하다는 듯 대놓고 조소를 머금으며 휙 몸을 돌렸다.
“누가 이번 청문회 소동을 벌였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고 말씀하시길.”
로메우에게 점수 따려고 일을 크게 벌여 놓고, 변수 하나에도 대응하지 못하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다.
렌디가 방 밖으로 나가는 내내 볼트 후작은 이를 빠득빠득 갈기만 할 뿐,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 * *
다음 날 오전, 루크가 공국의 반란에 연루되어 있는지를 두고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는 엘리나 왕녀와 하원 의원 20명 앞에서, 루크와 공국의 사절단 대표가 공방을 펼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엘리나는 강당에 설치된 단상 위의 상석에 앉아, 서류에 적힌 사건의 개요를 읊었다.
“아레나 공국은 지난여름, 공국 소속인 다섯 귀족의 반란 혐의를 밝혀냈다. 조사 결과, 겐크 왕국 소속의 루크 남작이 다섯 귀족의 반란을 돕기 위해 물자를 제공한 것을 알아냈다. 이에 시시비비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겐크 왕국에 청문회를 요청했다. 리비아 칸 엘리나 외 하원 의원 20명의 참석하에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하니, 규명 대상은 루크 남작으로 한한다. 여기까지가 개요가 되겠네요. 그럼 어디 볼트 후작의 의견부터 들어 볼까요?”
청문회 시작과 동시에 발언권을 얻은 볼트 후작은 초장부터 물에 젖어 번진 두루마리를 증거품으로 내세웠다.
“친애하는 엘리나 왕녀님, 그리고 존경하는 하원 의원 여러분. 이것은 저희가 반역자들의 저택에서 찾아낸 물건입니다. 저택 고용인들의 말에 의하면, 각 귀족들은 드래프트 영지의 상단과 거래를 하며 이 문서를 건네받았다고 합니다.”
“문서의 내용을 알 수 있을까요?”
“물에 번져서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우나, 분석해 본 결과, 반란 내내 물자를 제공하겠다는 약조가 적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엘리나는 사절단 측에서 미리 제출한 자료를 한번 훑어보곤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루크 남작가의 직인이 찍혀 있네요. 루크 남작, 저 서신에 대한 해명을 듣고 싶네요.”
멋진 반론을 기대한다는 듯,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시선을 보내는 그녀였다.
누가 보면 구애의 눈빛이라도 보내는 줄 알겠다.
루크는 도도한 철벽남처럼 무심하게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며, 대차게 볼트 후작을 말로 후려쳤다.
“제 입장을 밝히자면, 아레나 공국이 괜한 트집으로 생사람 잡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공식 석상에서 매도를 당할 줄은 몰랐는지, 볼트 후작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끈했다.
“트집? 지금 트집이라고 했는가?”
“왕녀님, 누군가가 발언권도 없이 막 떠들고 있군요. 여기가 시장 바닥인 줄 아나 봅니다.”
“볼트 후작,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 줬으면 좋겠네요.”
“크윽, 주의하겠습니다.”
볼트 후작은 기선을 제압할 요량으로 초장부터 세게 나온 것일 터이나, 루크의 능청스러운 화술 앞에서는 손바닥 뒤집듯 손쉽게 분위기가 바뀌었다.
가볍게 볼트 후작을 흔들어 놓은 루크는 준비해 온 두루마리를 꺼냈다.
“볼트 후작께서 물에 젖은 두루마리를 내세우셨는데, 그럴 줄 알고 원본을 가져왔습니다. 해당 두루마리는 드래프트 영지의 곡식 브랜드화를 위해 남작가에서 직접 발행한 품질 보증서입니다.”
“물에 번진 것과 동일한 물건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나요?”
“증명이라면 지금 당장 할 수 있지요.”
이어서 또 한 차례, 남들이 보기엔 기행이라 할 수 있는 행동이 이어졌다.
루크가 책상 위에 두루마리를 펼치는가 싶더니, 그 위에 차를 뿌리는 게 아닌가!
촤악!
청문회용으로 가져다 놓은 홍차가 두루마리 위에 쏟아져 품질 보증서의 잉크가 번졌다. 이 자리에서 새롭게 탄생한 젖은 두루마리는 곧장 증거품으로 제출되었다.
“지금 홍차를 뿌린 두루마리를 보시면 알겠지만, 잉크가 번진 패턴이 볼트 후작이 가져온 두루마리의 패턴과 매우 흡사하다는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똑같을 수밖에 없다. 애당초 다섯 귀족들에게 넘긴 두루마리 또한 품질 보증서를 물에 적신 물건이니까.
바리엘로부터 가짜 정보를 전해 받은 아레나 공국이 멋대로 내용을 상상한 것에 불과하다.
방금 만든 젖은 두루마리는 엘리나가, 그리고 하원 의원들이 차례차례 확인하며 잉크가 번진 패턴이 똑같다는 게 증명되었다.
“이번 상행에 파견한 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바다를 통해 이동하면서 폭풍우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보증서가 물에 젖은 건 그 때문인 듯한데, 이만하면 설명이 되었는지요.”
“이상의 증거와 증언을 통합하면, 루크 남작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네요. 볼트 후작, 설마 이것만 가지고 청문회를 요청한 건 아니겠죠?”
볼트 후작도 잉크가 번진 패턴을 대조해 보았기에 더 이상 두루마리를 근거로 삼는 건 무리였다. 증거가 이렇게도 쉽게 파훼당할 줄은 몰랐던 나머지, 볼트 후작은 벌써부터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바리엘만 있었더라도, 녀석이 오기만 했더라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기도한다고 실종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날 리 없었다.
볼트 후작은 소매로 이마의 진땀을 훔치며, 대필가를 이용해 조작한 유언장을 꺼냈다.
“무, 물론 진짜 증거는 따로 있습니다. 반역자인 굴렘 자작이 옥에서 목을 매며 남긴 유서에, 루크 남작이 지원을 약속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물에 번진 내용이 지원을 약속하는 글이 아니었을까, 추측한 것이었지요. 실제로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가격에 대량의 물량을 제공한 이력이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루크 남작의 개입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유언장과 굴렘 자작의 평소 필적이 담긴 문서가 제출되었다.
필적을 대조해 본 엘리나는 필적이 일치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필적만 봤을 땐 본인의 유언장이 맞는 것 같네요. 루크 남작, 해명할 기회를 드리죠.”
청문회 참가 전, 유언장을 조작하는 수법에 대비하면서도 설마 또 조작하겠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질리지도 않고 똑같은 수법으로 나올 줄이야.
유언장 조작에는 안 좋은 기억이 있다. 국왕 시절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로메우가 멋대로 조작한 적이 있으니까. 덕분에 나라를 팔아먹은 국왕으로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된 참이었다.
똑같은 수법에 또 당할쏘냐.
루크는 같잖다는 양 피식 웃고선 반박 자료를 제출했다.
“청문회 공문을 받고, 바로 아레나 공국으로 사람을 파견하여 현지 조사를 시켰습니다. 곡식을 매입한 다섯 귀족은 차액을 챙기기 위해 유통 하청을 맡길 상단을 알아보았다더군요. 이것은 각 귀족들이 상단과 맺은 계약서의 사본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공국은 반란용 군량미인 줄 알고 있었기에 상단 쪽은 완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차액을 남기기 위해 되팔려 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반란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섯 귀족이 곡식을 되팔려 했다고? 군량미로 쓰지 않고?
정말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단 거잖아! 그럼 애먼 귀족들만 조진 거야?
그럼 바리엘이 입수했다는 정보는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볼트 후작은 믿을 수가 없어 말을 더듬거렸다.
“하, 하면… 어, 어째서 그 가격에 곡물을 판 건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곡식 브랜드화 기획의 일부입니다. 홍보용으로 알릴 생각으로 처음에만 물량을 싸게 푼 것이죠.”
“그럴 리가.”
“반대로 묻죠. 처음부터 반란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운 증거밖에 없는데, 반란 정보는 어디서 입수했으며, 유언장은 어디서 나온 건지 출처를 명확하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때다 싶어 엘리나도 나이에 걸맞지 않은, 관록 어린 미소를 띠며 한마디를 거들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저도 궁금하네요. 볼트 후작, 반란 소식은 어디서 입수했죠?”
“그, 그건…….”
“만약 유언장을 조작한 거라면 일이 커지는데…….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주셨으면 하네요.”
“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뭐, 이 자리는 루크 남작을 심문하기 위한 자리이니 더 이상은 묻지 않도록 하죠. 저는 루크 남작이 무관하다고 판단되는데, 의원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의 없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청문회에 참석한 하원 의원들도 모두 무관하다는 의견을 밝히며, 싸늘한 시선으로 볼트 후작을 노려보았다. 한 나라의 대표란 자가 청문회에서 조작된 유언장을 당당하게 들이민 것부터가 겐크 왕국을 무시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엘리나는 더 이상 볼트 후작으로부터 반론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무리에 들어갔다.
“볼트 후작, 이번 무례는 따로 공식 절차를 거쳐 아레나 공국에게 책임을 묻도록 하겠습니다. 국가 대 국가의 대화에선 필히 말할 수 있는 대답을 준비해 놓으시길 바라죠.”
이대로 청문회가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루크가 지금부터 본방이라는 양 볼트 후작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볼트 후작님, 이번 일로 제 명예는 추락하였고, 시간과 금전적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어떻게 보상해 주실 겁니까?”
“그 부분은 이미 왕녀님께서 공식 절차를 밟는 걸로 결론이 나지 않았나.”
“왕녀님이 말씀하신 부분은 겐크 왕가를 우롱한 대가를 말씀하신 거고, 저와 관련된 부분은 아직 대가를 치르시지 않았지요. 공왕 전하를 상대로 재판을 거시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닐 테니, 합의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공왕 전하를 상대로 재판을? 이 사람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관례로서 금기시될 뿐이지, 법률상으로는 문제없지 않습니까? 졸지에 반역자를 지원한 무뢰한이 될 뻔했는데, 합의로 넘어가 드리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할 텐데요?”
과거에도 국왕이 재판에 연루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통은 폭군을 상대로 봉기를 일으켜서 왕을 죽이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재판에 회부시키는 것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명예훼손을 빌미로 일국의 왕에게 재판을 거는 귀족은 없다. 계급 제도하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재판을 거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슴지 않고 재판을 거론하는 루크의 행동력에 볼트 후작뿐만 아니라 장내의 모든 이가 술렁거렸다.
볼트 후작은 땀을 뻘뻘 흘리며,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 자신도 돌아가면 숙청당할 판국에 합의고 나발이고 무엇을 약속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뭐든 뜯어내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루크의 모습에 엘리나가 부랴부랴 중재에 나섰다.
“루크 남작, 정식 절차를 밟을 때 루크 남작에 대한 개인적인 피해 보상 협의도 할 테니, 그 부분은 나중에 논하도록 하죠.”
“제 요구는 하나뿐입니다. 30억 루소 현찰 혹은 그에 준하는 값어치의 병기나 선박. 그 이하로는 굽히지 않을 테니, 협상할 때 분명히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왕가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죠. 그러니 이제 끝내도 될까요?”
얼마나 철저한지 확인할 만큼 확인했으니, 그만 좀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라는 신호였다.
루크는 언제나처럼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멋들어진 움직임으로 예를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