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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27화 (27/200)

# 27

27화 제가 원하는 것은 제가 이룹니다(1)

청문회가 끝난 날, 볼트 후작은 도망치듯 부랴부랴 사절단을 이끌고 아레나 공국으로 돌아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국에서 유언장까지 조작하며 난리를 쳤는데, 조용히 넘어갈 리 없다. 한데 막상 엘리나가 내궁에 청문회의 결과를 알리니 내궁에서 한다는 말이…….

“내궁에 그따위 안건을 가져오지 말거라. 외궁 선에서도 끝낼 수 있는 일 아니더냐.”

괜히 국왕으로부터 질책만 받았다고 한다.

겐크 왕국의 국왕이 정복에 미쳤다더니, 이미 한번 꿇린 나라는 관심도 없다는 듯 전쟁 준비에만 신경을 쏟고 있다. 자기 자식들에 대한 처우 또한 매우 각박하기 그지없다는데, 왕자와 왕녀를 자기 자식이 아닌 일개 귀족과 동일 선상에 놓고 본다고 한다. 좀 오래 알고 지낸, 왕위 계승권이 있는 부하 정도일까.

권력 앞에서 혈육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 * *

당일 저녁, 엘리나의 별궁에 엘리나, 루크, 그란데 백작이 자리를 가졌다.

그란데 백작은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붙여 스파이스를 살짝 집어서는 스테이크 위에 뿌렸다. 그러고는 결을 따라 고기를 썰며 말을 꺼냈다.

“그따위 안건이라니, 그건 좀 심했군요. 다섯 귀족이야 공국 내부의 집안싸움이니 등한시한다 쳐도 자국 귀족이 엉뚱한 시비를 당했는데 그냥 넘어가다뇨.”

“그냥 넘어가는 게 아니라 외궁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거죠. 뭐, 제가 처리하면 제 실적으로 인정되니까, 개인적으론 마냥 나쁜 일은 아니에요.”

“아무튼 여차하면 엄호하려고 했는데 제게 차례조차 돌아오지 않았군요. 자문 역할로 불려 왔는데, 구경만 하다 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만큼 루크 남작의 대처가 완벽했죠. 루크 남작, 마치 상대방이 뭘 준비해 올지 다 안 것처럼 맞춤으로 대비해 왔던데, 비결이라도 있나요?”

루크는 듣는 둥 마는 둥 티본스테이크의 귀퉁이를 잘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주변과 상관없이 혼자만의 맛의 세계에 빠진 미식가 같아서, 쉬이 말을 붙이기 힘든 분위기를 띠었다.

왕궁 내에서 타인과의 식사는 정치적 목적으로 실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음식의 맛을 일일이 음미하면서 먹지 않는다.

한데 루크의 모습은 마치 제 집 안방에서 먹는 것처럼 편안하기 그지없어서, 보는 사람마저도 없던 식욕이 솟을 정도였다.

홀린 듯이 루크의 먹는 모습을 보던 엘리나가 이내 곧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정말 맛있게 드시네요. 왕궁 요리가 입맛에 맞으시나 봐요.”

“오랜만에 먹으니 나쁘지 않군요.”

“오랜만?”

“그냥 해 본 소리입니다. 그보다 질문이 뭐였죠?”

“볼트 후작이 젖은 두루마리랑 가짜 유언장을 쓸 걸 사전에 미리 알고 있었나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요.”

“예상이 제대로 적중한 셈이네요.”

“…….”

엘리나의 말에 루크가 침묵을 고수했다. 재차 묵묵히 고기를 써는 루크를 두고, 엘리나는 자신이 뭔가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졌다.

“저… 제가 무슨 기분 나쁜 말이라도 했나요?”

“아뇨, 평범한 사람은 다들 그리 생각한다고 생각하니 재밌어서 말이죠.”

“평범하다니…….”

엘리나는 본인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평범하다고 여기는 편은 아니다. 실제로 이 거친 왕궁에서 별다른 세력도 없이 잘 헤쳐 나가고 있다는 것만 봐도 스스로 평범한 수준은 이미 뛰어넘었다 여기고 있다.

그렇다고 루크가 자신을 깔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루크는 마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듯 태연하기 그지없다.

루크는 조금 전의 평범하단 발언을 엘리나가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 확인하고는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한 조각 썰었다. 그러고 나서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엘리나에게 슬쩍 내밀었다.

“왕녀님, 제 그릇에 담긴 스테이크를 드셔 보시겠습니까?”

“네? 이건 루크 남작이 먹던…….”

“음, 조금 지저분해 보일 수도 있겠군요. 다른 걸로 하죠.”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너무 생뚱맞아서요.”

“그럼 상관없겠군요. 제 그릇에 담긴 스테이크를 드셔 보십시오.”

엘리나로선 루크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갑자기 자기 스테이크를 먹으라니, 무슨 의도일까?

루크 정도나 되는 사람이 생각 없이 권한 것은 아닐 테고, 일단 속는 셈 치고 엘리나는 루크의 그릇에 포크를 가져다 대었다.

엘리나는 루크가 미리 썰어 둔 고기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조막만 한 입을 오물거려 고기 조각을 삼키곤 의문을 표했다.

“맛있네요. 그런데 갑자기 고기는 왜 준 거예요?”

“방금 왕녀님은 제가 썰어 둔 부위를 드셨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부위를 먹을 수 있었는데도 말이지요.”

“엥? 그러라고 썰어 둔 거 아니었나요?”

“아레나 공국도 제가 썰어 둔 부위를 먹었을 뿐이지요. 거기에 독을 섞어 둔 줄 모르고 말이죠. 상대의 카드에 맞춰 대비책을 짜 온 게 아닙니다. 상대가 그 카드를 고르도록 제가 유인한 것이지요.”

“……!”

엘리나, 그리고 같은 식탁에 있던 그란데 백작마저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평범한 사람은 자기의 일만으로도 벅차다. 자기가 할 일에 온 힘을 쏟다가 간간이 여유가 생기면 다른 사람의 행동을 예측한다. 그마저도 빗나가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한데 이 남자는 상대방의 사고를 조작하려 들고 있다.

그러니 소름이 돋을 수밖에.

조금 전도 루크는 그저 먹으라고 내민 것밖에 없거늘, 엘리나가 알아서 루크가 의도한 부위를 먹었다. 원하는 고기 조각을 먹게 하는 것이나, 상대방이 특정 수단을 취하게 하는 게 동급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멋들어지게 표현한 셈이었다.

이 지략이야말로 이전 생에서는 미처 꽃피우지 못한 루크의 재능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엘리나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치다가 괜히 부끄러운 꼴을 보였다 싶어 황급히 헛기침을 했다.

“음음,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약속대로 공동 전선을 펼칠 일이 생기면 루크 남작이 지휘권을 가지도록 하세요.”

“이번 일도 공동 전선의 일부이니 피해 보상을 받아 내는 단계까지 확실히 마무리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30억 루소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을 받아 내 보이겠어요.”

“기대하도록 하죠.”

두 사람 사이에 한창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그란데 백작은 자기만 소외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약속? 지휘권?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대화 내내 두 사람 사이에서 길을 잃은 오리처럼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도저히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어, 식사가 끝나고 식후주를 마실 때쯤 가서야 겨우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왕녀님, 저로선 지휘권이니, 공동 전선이니 하는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만. 어찌 된 것입니까?”

“어머, 말하지 않았던가요?”

“금시초문입니다만.”

“루크 남작이 듣던 것보다 유능하신 것 같아서, 앞으로도 종종 협력하자고 했어요. 대신 협력할 땐 지휘권을 넘기는 조건으로만 협력하신다고 하셔서, 이번 청문회 과정을 보고 판단하기로 했죠. 뭐, 그란데 백작도 이번 청문회를 같이 봤으니 이의는 없죠?”

“저야 이전부터 인정하고 있었으니 이의야 없지만서도…….”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왕녀님께서 그걸로 만족하신다면 저는 거기에 따를 뿐입니다. 하하하, 아무튼 까다로운 친구라 실례를 범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잘 풀려서 다행이군요.”

별것 아닌 것처럼 웃어넘겼으나,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그란데 백작이었다.

지방 출신인 귀족의 시점에서 봤을 때, 루크의 출세 속도는 보고도 믿기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란데 백작조차도 선대 때부터 쌓아 온 연줄을 통해 겨우 입성하여 몇 년간 실적을 쌓은 후에야 엘리나에게 연이 닿았다.

물론 루크도 그란데 백작이라는 연줄이 있긴 했으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단 며칠도 되지 않아 왕족을 상대로 주도권까지 독차지할 줄은 몰랐다.

귀족 중에서도 가장 말단에 속하는 남작이 왕족을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손에 쥔다?

도대체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대화가 오갔기에 일이 이렇게 된단 말인가.

그란데 백작은 끝을 알 수 없는 루크의 역량이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게 느껴졌다. 루크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만, 늘 그란데 백작을 두고 ‘협력 관계’라고 칭할 뿐이지, 아군이라 하지 않는다. 즉,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적도 되고, 아군도 될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이다.

‘저만한 역량을 가지고도 변두리에 웅크려 있다라……. 남들이 변두리의 남작이라 여기며 무시하는 것까지 이용할 작정인가. 만약 적으로 돌아선다면? 흠,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역시 가장 안전한 방법은 한집안 식구가 되는 것일 텐데 말이지.’

그란데 백작은 딸이 루크에게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답답한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까부터 계속 표정이 어두운데,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그나저나 그 얘기는 전해 주셨습니까? 왕궁 안에도 쉐도우 나이트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네요. 청문회가 끝나고 정보를 교환하기로 했죠. 루크 남작은 암중 세력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식후주로 나온 셰리주로 입가심을 하던 루크가 크리스털 잔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포도 향이 섞인 숨을 길게 내쉬어, 취기를 내뿜은 후에야 말을 꺼냈다.

“왕국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공국의 암중 세력이 있다. 그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다지 많이 알고 있는 건 아니네요. 정식 명칭은 쉐도우 나이트예요.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고, 연락 수단은 일회용 마법 도구를 사용하고 있죠.”

“전 왕궁 안에도 놈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부분이 신경 쓰이는군요.”

“네, 물증 없는 심증뿐이지만, 언니의 개인 호위 기사 겸 개인 보좌관을 맡고 있는 사람이 의심스러워요. 전에 한번 그 사람이 마법 도구로 연락을 취하는 걸 도청한 적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그를 단장이라 불렀어요. 정황상 그가 쉐도우 나이트의 단장이 아닐까 싶어요.”

루크가 바리엘을 잡고도 쉐도우 나이트의 증인으로 내세우지 못하는 것은 그가 말단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잘라 낼 수 있게 말단에게는 증거가 될 만한 요소를 조금도 부여하지 않는 터라 쉐도우 나이트의 존재를 증명한 증인으로선 부적합하다. 같은 맥락에서 독살 사건의 주모자인 폴 또한 그다지 가치가 없는 인물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쉐도우 나이트 중에서도 높은 직책, 특히 단장쯤 되는 자라면 수중에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을 터.

잡을 가치는 충분했다.

한데 이어지는 엘리나의 말에서 상대를 잡아야 할 이유가 늘었다.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올 줄 몰랐다. 루크가 카인이었을 때, 그의 등을 찌른 남자, 그 가증스러운 이름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름은 렌디, 아레나 공국이 왕국이었던 시절 왕의 호위 기사였던 자예요. 들어 본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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