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28화 제가 원하는 것은 제가 이룹니다(2)
렌디.
그 이름을 어찌 잊으랴.
아직도 녀석을 떠올리면 등 뒤와 가슴 앞쪽에서 시큰거리는 통증이 느껴진다. 레몬을 먹어 본 사람은 레몬만 봐도 그 신맛이 떠올라 입에 침이 고이는 것처럼. 그날 느낀 통렬한 분노와 배신감은 여전히 가슴 언저리에 머무르며, 기억할 때마다 통증을 불러일으킨다.
녀석이 이곳에 있다.
그것도 제1왕녀의 개인 호위 기사 겸 개인 보좌관으로.
의도는 뻔하다.
제1왕위 계승권자인 그녀의 환심을 사서 나태지고, 타락하도록 유도할 생각인 것이다. 그녀가 왕이 되면 겐크 왕국의 힘은 자연스럽게 약화될 것이니,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잠입한 것이 틀림없다.
루크는 속에서 용암과 같은 분노가 들끓었으나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양 태연하게 반응했다.
“이름 정도는 들어 보았습니다. 한때 국왕을 호위하던 뛰어난 기사였다지요.”
“잘 알고 계시네요. 언니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언니로부터 영약이며 무기며 이것저것 얻어 가고 있죠. 만약에 그자가 쉐도우 나이트의 단장이라면 쉐도우 나이트 단원의 명단을 모두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요.
“머리를 잡으면 나머지는 줄줄이 딸려 온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지금까지 사방팔방으로 손써 봤는데, 도저히 꼬리가 잡히지 않네요. 무슨 좋은 방법 없을까요?”
코앞에서 날파리가 알짱거리며 날아다니고 있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쏘냐.
렌디의 성향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자기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것을 우선시하는 녀석이다. 이번 청문회 사건도 오지 않은 바리엘 잘못이지, 자기 잘못은 아니라고 잡아뗐을 터.
담장 너머에서 팔만 뻗어, 감만 쏙 따다 먹는 얌체 같은 사람. 그런 녀석들을 상대할 땐 직설적인 강타 한 방이 가장 잘 먹히기 마련이다.
루크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수단, 적의 성향, 그로 인해 발생할 각종 여파와 혹시 모를 변수들.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판단한 결과, 현재 상황에 가장 최적화된 작전이 튀어나왔다.
“좋은 방법이 있긴 합니다.”
루크의 머릿속에선 많은 생각이 교차했으나 실제로 흐른 시간은 고작 몇 초밖에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체감하기엔 질문을 던지자마자 해답을 내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토록 빠른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엘리나는 놀란 기색을 띠었다.
“벌써요? 와, 혹시 머릿속에 쪼끄마한 현자들이 눌러앉아 있는 건 아니죠?”
“의외로 메르헨스러운 발상도 하시는군요.”
본인도 뒤늦게 부끄러운 발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어쩔 줄 몰라 하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비유를 한 것뿐이에요!”
“뭐, 어떻습니까. 동화는 원래 어른들을 위한 작품이라지요. 그 나이까지 읽는다고 흉볼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진짜 아닌데…….”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그란데 백작은 안절부절못하는 엘리나를 보고선 시선을 돌렸다. 항상 나이에 걸맞지 않은 관록과 강인한 여장부의 모습만 보이던 사람이, 또래의 아가씨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 대쪽 같던 왕녀님이 저런 반응을 내비치시는 건 처음 보는군.’
날카로운 비판이라면 모를까, 짓궂은 농담에는 면역이 없는 엘리나인지라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종국에 가선 결국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것을 택했다.
“음음, 아무튼 좋은 방법이란 게 뭐죠? 어쩌다가 그 얘기가 제 취미로 이어졌는지 알 수가 없네요.”
“이 작전은 왕녀님이 협조해 주셔야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얼마든지요. 쉐도우 나이트를 붕괴시킬 수 있으면 뭐든 협조하겠어요.”
“일단 주변 사람들을 물려주시지요.”
주변 사람들이란, 방 안에서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궁녀들이었다.
기밀을 요하는 작전이기에, 루크는 궁녀들을 모두 내보낸 후에야 작전을 읊었다.
“작전 준비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저와 그란데 백작님은 표면적으로 볼일이 끝나 영지로 돌아가는 듯한 움직임을 취할 겁니다.”
“그때 전 뭘 하면 되죠?”
“협조라고 했지만, 사실 실제로 하실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제가 떠날 때 몰래 마차를 같이 타고 수도를 떠나기만 하면 됩니다.”
“아, 정말로 별거 없네요. 마차를 타고 이동만 하는 거라면… 네?”
“어느 단어가 어려우셨는지요?”
“아뇨, 아뇨, 아뇨! 단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 묻는 게 아니에요. 몰래 왕궁을 빠져나갔다가 들키면 곤란해져요.”
“며칠 동안만 나가 있으시면 됩니다. 믿을 만한 궁녀를 시켜 병을 핑계로 방문을 거절하면 며칠 정돈 속일 수 있겠지요.”
“하다못해 작전의 개요라도 알려 주면 안 될까요?”
이번 작전에선 붙잡아 두었던 바리엘을 이용할 것이다. 작전을 설명하면 바리엘에 대해 말해야 하고, 바리엘의 이야기를 하면 자신이 다섯 귀족을 역모죄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라는 것까지 설명해야 한다.
협력 관계라 해서 이쪽의 밑천까지 전부 드러내야 할 의무는 없다.
때문에 루크는 방금 얻은 지휘권을 유감없이 활용했다.
“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협동 작전을 펼칠 땐 제게 지휘권을 일임한다고 약속하셨을 텐데요?”
“음, 정말로 렌디가 쉐도우 나이트인 걸 증명할 수 있나요?”
“제 지시대로 움직여 주신다면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반대로 말하면, 지시를 따르지 않을 시 실패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청문회에서 볼트 후작을 가차 없이 짓밟은 것으로 판을 짜는 능력을 입증했고, 아까 스테이크를 먹을 때 보여 주었던 비유가 지금껏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엘리나 왕녀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왕녀씩이나 되는 사람이 외간 남자의 마차를 타고, 몰래 왕궁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이 크다. 자칫 잘못하여 일이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온갖 이상한 소문과 함께 지금까지 쌓아 온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엘리나는 이내 곧 결단을 내렸다.
“알겠어요. 루크 남작의 작전에 걸어 보도록 하죠. 지금 바로 준비에 들어가 주세요.”
* * *
아레나 공국의 왕궁에 복귀한 볼트 후작은 로메우 앞에 서자마자 양 무릎을 꿇으며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쿵!
어찌나 세게 찧었는지, 망치로 바닥을 때린 양 묵직한 타격음이 대강당 가득 메아리쳤다. 바닥을 찧는 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볼트 후작이 사죄의 말을 올렸다.
“죽여 주십시오, 전하!”
로메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노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성공한다. 분명 떠나기 전에 내게 그리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건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벌을 내리기 전에 이것만큼은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다섯 귀족은 처음부터 반란 의도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았기에 당장 내치려 한 로메우였다. 그러나 볼트 후작의 발언은 단순히 변명이라 칭하기에는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
이번 청문회 사건은 다섯 귀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한데 방금 볼트 후작의 발언은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근간을 뒤흔드는 말이었다.
“그리 말하는 근거부터 들어 보지.”
“청문회에서 상대측인 루크 남작이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다섯 귀족에게 물자를 싼 가격에 제공한 건 홍보 차원에서 벌인 일이며, 다섯 귀족은 매입한 물자를 다른 곳에 팔려고 했답니다. 그 증거로 유통을 맡길 상인과의 계약까지 끝마친 상태였습니다.”
“뭐? 그럼 바리엘이 전한 보고서는 무엇이더냐? 루크가 다섯 귀족의 반란을 지원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 바리엘이 실종되었습니다. 렌디 경의 말에 의하면, 사표를 내고 합류하겠다는 서신만 보내왔을 뿐, 실제로 바리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바리엘이 배신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바리엘의 정보는 거짓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다. 거짓 정보와 애매한 물증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모두가 속아 버렸다. 애당초 반란 모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로메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다섯 귀족을 제 손으로 죽인 꼴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서막에 불과했다.
며칠 후, 아레나 공국의 왕궁에 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의뢰인은 불명이며, 마부는 그저 의뢰를 받은 대로 사람 한 명을 태우고 왔다는 말을 남기며 돌아갔다.
마차에 타고 있던 자는 놀랍게도 실종된 바리엘이었다. 바리엘의 몰골은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두 발의 신경이 모두 끊어져 다시는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었으며, 오랫동안 굶어서 빈민가의 부랑자처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로메우가 직접 바리엘을 취조했더니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전부 함정이었습니다. 개인 보좌관을 모집한 것도, 절 뽑은 것도, 일부러 제게 들리도록 반란을 지원한다고 말한 것도. 전부 함정이었단 말입니다. 전하, 믿어 주십시오. 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제 꼴을 보십시오. 증인으로 참석하려고 사표를 내자마자 절 이 모양으로 만들더니 옥에 가뒀습니다. 진짜입니다.”
눈물을 짜는 바리엘을 두고 로메우는 노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뭣들 하느냐, 이 쓸모없는 것을 당장 치우지 않고!”
“저, 전하? 전하! 배신한 게 아닙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래, 넌 배신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네놈의 무능함 때문에 벌어진 일은 네놈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느냐? 당장 목을 치고, 저놈의 가문 족보를 아레나 역사에서 완전히 말소시켜라!”
“전하! 억울합니다! 전하! 전하!”
바리엘을 처형시키고도 로메우의 분노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일부러 바리엘을 돌려보낸 것이 틀림없다.
로메우로 하여금 속았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여태까지의 모든 행동이 농락이었음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바리엘을 돌려보낸 것이다.
농락을 당한 것도 열 받는데, 대놓고 조롱을 해?
로메우가 가장 열 받은 게 무엇인 줄 아는가?
충신들을 내 손으로 베어야 했던 것? 거짓 유언장을 들켜 위신이 추락한 것?
아니, 그보다 더 열 받은 것은 이 모든 짓을 획책한 놈한테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놈 좋으라고 30억 루소가 넘는 물자를 넘기고, 사과문까지 작성해서 보내야 한다.
놈에게 사과를? 나를 속이고 내 나라의 위신을 깎아 먹은 놈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분노가 극에 달한 나머지 로메우의 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얼마나 어금니를 꽉 깨물었는지 턱뼈가 욱신거리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호흡곤란이 올 지경에 이르렀다.
“후욱, 후욱, 변두리의 남작 주제에 감히! 감히 내게 이따위 짓을 해? 가만두지 않겠다. 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것을 알게 해 주마!”
분노는 살의로 치환되었고, 살의는 그대로 명령으로 이어졌다.
그날 밤, 아레나 공국의 왕궁 안에서 종이를 품은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렌디에게로 향하는 이 전서에는 루크를 반드시 죽이라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